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춤[常寂常照]
微細無明을 進破하고 妙覺位에 得入하면 大涅槃이라 이름하나니 常寂光土에 居住하느니라.
미세무명을 나아가 부수고 묘각의 지위에 들면 대열반이라 이름하니, 이 지위에 든 사람은 상적광토에 거주한다.
견성이 대열반임은 『대열반경』과 『종경록』 등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
확철히 깨쳐 자기 본성을 단박에 보게 되면 안팎이 환히 밝고 항상 고요하며 항상 비추는 구경무념의 대열반을 원만성취한다. 미세한 아뢰야식을 벗어나 마지막의 견고한 관문을 깨뜨려 버리면 구경무심인 위없는 열반이 눈앞에 나타난다. 크게 죽었다가 크게 살아나고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어서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고 선정과 지혜가 균등하니 이것이 견성이며 성불이다.
無上한 大涅槃이여 圓融明徹하여 恒常寂照하는도다.
위없는 대열반이여, 원융하고 환히 밝아 항상 비춘다.
여기서 ‘상적광’이라 함은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춤을 말한다. 『기신론』에서는 “미세망상을 멀리 여의면 심성을 보게 되니 그것을 구경각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견성 즉 구경각이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는 대열반이며 묘각이다.
障盖가 寂滅하지 않음이 없고 事理를 洞照하지 않음이 없어서 寂과 照가 雙流하면 心性을 徹見하느니라.
장애가 고요하지 않음이 없고 이치를 환히 비추지 않음이 없어서, 고요함과 비춤이 함께 흐르면 심성을 완전히 본다. 항상 적정하고 항상 관조하며 고요함과 비춤이 함께 흐르면 견성인 대열반이다.
禪寂은 智照가 아니면 그 寂定을 窮極할 수 없으며, 智照는 禪寂이 아니면 그 慧照를 深達할 수 없으니, 禪寂과 智照가 雙流하면 佛果를 成就하느니라. 經에 말하되 佛陀는 大乘에 自住하나니 그 所得한 大法은 定慧의 功力으로 莊嚴하여 이로써 衆生을 濟度하느니라.
선적(禪寂)은 지조(智照)가 아니면 그 적정(寂定)이 완전할 수 없고 지조(智照)는 선적(禪寂)이 아니면 그 혜조(慧照)가 완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선적과 지조가 함께 흘러야 불과를 성취한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은 원래 대승에 머무르니, 그가 얻은 큰 법이란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장엄하여 그것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적지(寂智)란 적조(寂照)를 말한다. 적조는 즉 선정과 지혜이며 지(止)와 관(觀)이다. 적정과 관조가 함께 흐르고, 선정과 지혜가 균등하며 지와 관이 함께 움직이면 마음을 깨쳐 견성하는 것이며 구경불과를 얻는 것이다.
生心하면 즉 妄이요 生心치 않으면 즉 佛인지라, 生心이라 함은 雜心만 나는 것이 아니요 비록 菩提涅槃과 觀心見性의 妙心이 나도 또한 生心이니 전부 妄想이 되느니라. 雜念妄想이 永永寂滅하여야 바야흐로 不生이라 이름하여 寂照가 現前하나니, 어찌 佛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達磨碑에서 말하였다. 心念이 있으면 永劫토록 凡夫에 滯留하고 心念이 없으면 찰나에 正覺을 성취하는도다.
마음이 나면 허망이요, 마음이 나지 않으면 부처다. 마음이 난다 함은 잡념만 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보리열반과 마음을 관찰하여 성품을 보는 현묘한 마음이 나는 것도 마음이 나는 것으로서 모두 망상이 된다. 잡념과 망상이 영영 적멸해야 비로소 나지 않음[不生]이라 이름한다. 여기서 적멸과 관조가 눈앞에 그대로 나타나니 어찌 부처라고 이름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달마비』에서 말하였다. 마음이 있으면 영겁토록 범부에 머물러 있고 마음이 없으면 찰나에 정각을 성취한다고.
마음이 있으면 중생, 마음이 없으면 부처다. 무생무념의 대적삼매(大寂三昧)에서 무한한 지혜광명이 항상 뻗어나니 이것이 적조(寂照)인 부처 지위이다.
空과 有를 雙照하여 內와 外에 住留하지 않으니, 空谷이 聲音을 對答함과 같아서 心慮가 永絶하고 明鏡이 色像을 觀照하는 것과 같아서 妙湛하고 圓明하여 寂寂하며 항상 照耀하는도다.
공(空)과 유(有)를 함께 비추며 안에도 밖에도 머무르지 않으니, 빈 골짜기가 소리에 응답하듯 생각이 끊어졌고 거울이 물상을 비추듯 무심하여 묘하고 맑고 원만하고 밝아서 적적하면서도 항상 비춘다.
생각이 끊어지고 마음이 없어 원명적조하니 이것이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한다’고 하는 것이다.
寂과 照가 둘이 아님이 菩提의 實相이 되나니, 明鏡과 같아서 無心이 體가 되며 鑑照가 用이 되어 합하여 그 實相이 되는지라, 또한 禪宗에서 體에 卽한 用이 自知하며 用에 卽한 體가 恒寂하여 智와 寂이 둘이 아님이 眞如의 實相이 됨과 같느니라.
적(寂)과 조(照)가 둘이 아님, 그것이 보리의 실상이다. 그것은 마치 밝은 거울과 같아서 무심은 바탕[體:寂]이 되고 비춤은 작용[用:照]이 되어 둘이 합하여 그 실상이 된다. 그것은 본체 그대로인 작용이 스스로 알며, 작용 그대로인 본체는 항상 적멸하여, 지혜와 적멸이 둘 아님이 진여심의 실상인 것이다.
고요하고 무심한 거울의 자체와 걸림 없이 비추는 거울의 빛이 어찌 둘이겠는가. 거울의 본체가 즉 거울의 빛이니, 적(寂) 그대로가 조(照)이며 조(照) 그대로가 본체인 것이니, 진여자성도 이와 같다.
寂에 卽한 照가 般若요 照에 卽한 寂이 解脫이며 寂照의 體가 法身인지라, 一箇의 明淨한 圓珠와 같아서 明은 즉 般若며 淨은 즉 解脫이요 圓體는 法身이니 用은 不同하나 體는 相離하지 않느니라. 이 三法이 縱도 아니요 橫도 아니며 並도 아니요 別도 아니니 秘密藏이라 이름하여 大涅槃이 되느니라.
고요하면서 비춤은 반야요, 비추면서 고요함은 해탈이며 고요함과 비춤의 본체는 법신이다. 마치 한 개의 밝고 깨끗한 둥근 구슬과 같아서 밝음은 반야요, 깨끗함은 해탈이며, 둥근 본체는 법신이니 작용은 다르지만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 세 법은 가로도 아니고 세로도 아니며 함께하지도 따로 하지도 않으니 비밀 창고라 부르는 대열반이다.
이 대열반의 세 가지 덕[三德]인 반야와 해탈과 법신은 자성 가운데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이를 실제로 깨치면 견성성불한다.
一은 見性하면 成佛이니 眞如法身을 自開하면 眞性이 現前하고, 次는 無得하면 成佛이니 眞性般若를 自開하면 佛法은 所覺이며, 菩提는 能覺인지라 能과 所가 相因한 故로 能所를 俱不得이다. 所得이 絶無한 者는 無上菩提를 則得하며, 後는 離妄하면 成佛이니 本性解脫을 自開하면 如如不動하며 蕩蕩無住하여 妄想顚倒가 斷寂하므로 진정한 解脫이라 이름하느니라.
첫째는 견성하면 성불인 것이다. 진여인 ‘법신’을 스스로 열면 참 성품이 눈앞에 그대로 나타난다. 두 번째는 얻을 바 없으면 성불인 것이다. 참 성품인 ‘반야’를 스스로 열면 깨쳐야 할 대상으로서의 불법과 깨치는 주체로서의 보리, 이 두 가지가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대상과 주체 양쪽을 다 얻을 수 없다. 얻을 바가 전혀 없는 자는 무상보리를 얻는다. 마지막은 허망함을 여의면 성불인 것이다. 본래 성품인 ‘해탈’을 스스로 열면 한결같이 움직이지도 않고 머무름 없이 자유로워서 전도망상이 단연코 적멸하므로 진정한 해탈이라고 한다.
법신과 반야와 해탈은 과위(果位)에서의 세 가지 덕[三德]이니 바탕은 같으나 작용은 다르다. 견성하면 얻음이 없고 망상을 떠나면 견성이니 세 가지가 표현은 각각 다르나 불과를 성취한다는 내용은 같다. 그러므로 견성하면 성불해서 여래의 세 가지 덕이 완전하게 갖추어진다. 전도망상을 영원히 떠나 구경무소득의 큰 깨달음의 바다에 단박 들어간다. 그리하여 적멸하되 항상 관조하고 관조하되 항상 적멸하여 상적상조하는 적광정토(寂光淨土)에 상주하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이 머무름 없이 머무르는 곳이다.
奢摩他인 故로 비록 寂滅하나 항상 觀照하고, 毘婆舍那인 故로 비록 觀照하나 항상 寂滅하며, 優畢叉인 故로 照도 아니요 寂도 아니니라. 照하되 항상 寂한 故로 俗을 說하나 곧 眞이요, 寂하되 항상 照하는 故로 眞을 說하나 곧 俗이며, 寂도 아니요 照도 아닌 故로 毘耶에서 杜口하였느니라.
사마타[止定]인 까닭에 적멸하면서도 관조하고 비파사나[觀慧]인 까닭에 관조하면서도 항상 적멸하고 우필차[捨平等]인 까닭에 관조도 아니고 적멸도 아니다. 관조하면서도 항상 적멸하므로 세속제를 말하면 그대로 진제가 되고, 적멸하면서도 항상 관조하므로 진제를 말하면 그대로 세속제가 되며, 적멸도 관조도 아니므로 비야리성에서 입을 다물었다.
적멸과 관조가 동시이기도 하고 적멸과 관조가 성립되지 않기도 하니 대원경지 속의 열반이다. 항상 죽고 항상 살며 또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으니 소림 문하의 눈 푸른 납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