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 무엇인가?( 문없는 길에 들어 길없는길을 간다)
육조가 법달에게 답하길 : 법달아 경가운데 다른승이 없고 오직 일불승뿐이니라.
무엇이 일불승인가, 안밖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을 떠난다(中道)밖으로 미혹하면 색(모양)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에 집착한다.
색(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공 에서 공을 벗어나는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다.(中道)
법달아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 지견을 여는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이고 네문으로 나누니
1. (開)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것과, .................(견성)
2. (示)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것과, .................(계합) 이때를 점수로 착각하면 오해가 생김
3. (悟 ) 깨달음의 지견으로 깨치고, . ................(成佛, 깨침)
4. (入 )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것이다.................(佛行)
무엇이 일불승인가?. 성문, 연각, 보살, 이 모두 이 문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 방법이 세존이래 조사들 말씀이 많이 있지만, 모두 부처님 말씀을 기초로 할뿐 어긋나지 않은듯 합니다.
불세존 이래 역대 조사님들 말씀에 한치 오차가 없는듯 하니 무엇으로 들어가도 한문같습니다.
다만 해석의 차이로 이설이 난무 하지만 이것은 전체를 모르는 일부분의 견해인듯 합니다.
우연히 지관 삼매를 보고 어쩌면 모두 같은 말씀을 하셨나 생각되어 내친김에 일체 수행에
대하여 아주 간단히 본바대로 敎學(止觀등)에 의거하여 설명해 봅니다.
*************************************************
지관(止觀)
天台 智儀 는 禪(dhy na)을 마하지관에서 지관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산스크리트어로 지는 amatha(pal. samatha), 관은 vipa yan (pal. vipassn )에 해당하는
것으로 止 는 평온함, 조용함, 감정의 제어라는 뜻이고, 관은 명료한 인식, 통찰,
내적 통찰이라는 뜻을 가진다. 선정의 불완전한 단계에서도 지관이라는 말을 쓸 수가 있으며,
깨달음을 성취한 단계에서는 궁극적으로 불성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관(止觀)이라는 한역의 원어를 보면, 반드시 止와 觀을 구별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팔리어의 사마타(samatha)만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지는 사마타(samatha)이고,
관은 비파싸나(vipassan )인데, 모두 불교의 독자적인 낱말로서 인도 일반의 문헌에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이 지관이라는 말이 술어로서 애용되기 시작한 것은 부파불교에
이르러서부터이다. 사마타는 가장 오래된 불전 부분에서는 '평정'을 의미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처럼 '가라앉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였고, 비파싸나와는 관계없이 독립해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병행하여 설하여진 용례도 이었지만 숙어화되었던 것은 아니다.
비파싸나는 '세간의 진실된 모습을 본다'라는 동사형 비파싸티(vipassati)로 쓰여졌고,
관법(觀法)으로 번역되었다. 비파싸나는 사마타와 함께 설해지는 경우가 많다. 관이라고
한역했다고 해서 원어를 비파싸나라고 한정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는 요가가 그 원어인
경우조차 보이고 따라서 하나의 원어로 이 한역어를 나타내기는 곤란하다. 지와 관은
후세에 이르면 함께 설해지게 된다. 지와 관중에서 관은 오히려 지혜를 본질로 하는 것이고, 止 쪽이 禪에서는 본질적인 것이다. ..(제말이 아니고 인용한 글입니다.)..
********************************************************************************
見性
그길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가?
방거사에게 묻기를
"어렵습 니까?"
"네 어렵습니다"
마누라에게 다시 물으니
"그놈의 늙은이 헛소리 했군요, 쉽습니다."
딸(영조)에게 다시 물으니
"어렵지도 쉽지도 않습니다" 헉~!!...????????????
**************
삼계가 허전하고 쓸쓸하여 적어봅니다.
제가 알고 본곳에 착오는 없으나, 표현의 미숙함을 탓하면 달게 받겠습니다.
*止 (사마타) : 三昧, 無心, 고요한 상태, 즉 육근의 작용이 정지된.
*觀(비빠싸나) : 통찰, 명료한 인식, 육근의 작용을 명료히 관찰(단지 바라본다. 단지 듣는다)
이 상반된 두가지가 어떻게 한몸이 될까요? 언어도단이요, 이치로 설명이 불가 합니다.
그래도 글자를 세워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관(止觀)
지관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멈추고 본다' 이겁니다.
멈추고 뭘 어떻게 보는가?
멈추는것은 육식의 작용을 멈추는것 이고, 본다는것은 통찰(명료한 의식)입니다.
이말이 이해가 됩니까?. 육식을 쉬고 통찰 한다는것이 이해는 커녕 언어도단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이뜻을 모르기에 참으로 캄캄 한것이지요.
천태 지의대사 는 정말로 확실하게 일러 줬는데 이해가 안되다보니 학설이 길어지고
결국 교학만 발달하게 되지요. 짧은 식견이지만 본만큼 아는만큼 풀어보겠습니다. 인연자는 살펴보십시요.
************
지(止) : 사마타
육근(안이비설신의) 의 작용을 멈춰라. 육식의 작용을 머추면 자연히 삼매속에 머물게 되지요. 헌데 무조건 육근의 작용을 멈추라 하니 어떻게 멈춤니까?
방법을 찾다보니 가장 수승한 방법이 화두가 된듯 합니다.
즉 안이비설신의 六識중에서 意識에 화두를 집중해서 나머지 五識을 제어하라 이겁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有心으로 집중하게 되겠지만, 계속 집중해서 의정이 들면 의식에서도
벗어나는 無心(空觀)에 들게 될것같습니다.. 이때가 사마타(삼매)에 든것입니다.
즉 六識의 作用이 끊어진곳. 만일 이상태 만으로 있다면 흔히 말하는 空에 빠진다 하고,
귀신과 짝 한다하며, 나아가 구하는것이 있었다면 환이 일어나게되는 경지가 되지 않을지.??.
금강경에 의하면 若以色見我(보살, 부처가 나타나거나) 以音聲求我(허공에서 소리가 나고)
不能見如來..
그래서 올바른 이해가 안되면 십만팔천리로 빠지게 되지요. 그래서 觀(통찰, 명료한 정신의식)이 함께 있어야 됩니다.
**************
관(觀) : 비파싸나
사물의 현상을 명료한 의식으로 통찰하는것 을 말합니다. 止 와 반대현상 이니 육식작용없이 명료한 통찰이 될까요? 언어도단 이지요?. 그러나 어짜피 설명이 필요하니, 잘 보시면 이해는될것입니다.
止觀 이 합쳐질때.
止(사마타)가 觀(통찰)과 맞 부디치는 순간에 팍~!! 눈이 열립니다.
즉 사마타(無心三昧)에서 믄득 眼光 또는 耳聲 에 의하여 탁 터지는 순간이 見性입니다.
부처님께서 6일간 사마타(선정)에 계시다가 새벽별을 보시고(眼光) 앗!! 하셨겠지요.
흔히 스님들께서 의정에 있던중 대나무 소리, 개왓장 소리 등등에 확 깨쳤다는것이 이것입니다. 이것은 耳根에 소리가 부디치는 찰라에 열린것입니다.
왜 眼光, 耳根 에 소리라 했는가 하면 내가 듣고 보는게 아니고 자성이 스스로 보고 듣는것을 본것이기에 눈, 귀 라는 표현을 안하는것이지요. 즉 지 와 관이 한몸으로 돌아간것 입니다.
요약하면 止는 空이요 觀은 色이라 이거지요.
부디치는 찰라에 空과 色을 여읜 중도 실상을 본것이 見性 입니다.
**********************************************************************
이렇게 누구나 이해가 가능할듯 하기에 제가 아는대로 본대로 적었습니다.
이렇다면 무엇이문제인가?
*견성이 어렵다 말하지마라, 의단이 안드는걸 한탄할뿐!!*
*死句 탓하지 마라, 활구 던지는 선지식 못만난것을 한탄할뿐*
[若能自悟者 須覓大善知識示道 見性] ..!!! 기가막힌 혜능조사 말씀!
육조 '혜능스님' 을 부정할 것인가?
이 한마디에 천하에 입 선지식은 모두 혀가 얼어 붇을텐데 그래도 입을 연다면
스스로 갈길을 재촉할뿐이겠지요.
의단이 독로해지면 전강선사는 7일 이면 된다 하셨지만, 제생각은 아닌듯 합니다.
화두선이 수승하고 으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늦어도 이틀이면 된다고 봅니다. 이는 조사님들 경우 7일 걸린분 없습니다. 중요한것은 선지식에 의해서 가능하지요. 은산철벽으로 몰아서 줄탁 시켜줄 선지식!!
마조스님 하루 한나절, 임제스님 이틀... 혜가, 혜능스님 등은 언하에.........
활구 말은 하지만 활구는 선지식 없이 스스로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홀로 깨치기가 얼마나 어려우면 독각(나반존자)을 따로 모시겠습니까?.
사구 잡는것 걱정 안해도 되는것 같습니다. 누구나 사구를 잡을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것은 사구라도 집중하면 나머지 五識은 조용해 지겠지요. 조사가 이때 활구를 던지는데, 言, 行으로 보입니다.
왜 저말을 하실까?. 왜 때렸을까.?? 왜? 개와를 가실까.?? 왜.. 왜... 왜... 이것이 활구가 되지요.
그동안 死句잡고 집중했던 실력이 그때 바로 몰입(止=사마타)으로 들어갑니다.
임제스님은 대우선사가 쳐주고, 마조스님은 스승이 직접 쳐주시는데 이것이 관(통찰)
止와 觀이 부디치는 순간 이지요.
선지식을 믿는가. 선지식 언하에 의심이 드는가 (말길이 끊어지는 곳으로 몰아서 은산철벽을 만나게 해주는) 선지식 채근에 화가 나는가. (당장 답을하라! 머믓대면, 이거 고기덩이 똥덩이 아니가?)
이것이 대신심, 대의심, 대분심, 인듯 합니다. 관념을 버리고 실체로,,,
******************************************************
내친김에 관세음보살 염불로 가는것을 적어봅니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님께 견처를 말씀하시고 후세 중생들을 위하여 서원을 하시지요.
念 하면 止(사마타 )이되고 관세음 하면 觀(비파사나) 라는것 윗글 보셔서 바로 이해 되실겁니다.
글자그대로 관세음보살의 수행방법이지요. 소리 지르는것이 아니고, 소리를 마음으로 念(집중) 하는것 이지요.
처음에는 소리를 귀로 듣겠지요. 들리는 소리와 듣는 귀가 따로 따로 이겠지요.
마치 화두를 처음에 사구라도 잡아야하듯이..
즉 육근(眼耳鼻舌身意)중에서 耳識에 집중하면, 나머지 五識(안,비,설,신,의)이 점차 조용해 지겠지요.
점점 몰입하면 듣는 귀와 들리는 소리가 하나가 되겠지요. 더 깊어져 소리속으로 들어가면
소리도 사라지겠지요.
이때도 화두에서 일어난 의단 과 같은 止(사마타)의 상태가 되겠지요.
이제는 설명 안해도 모두 아실겁니다.
부언하자면 그 상태에서 觀(통찰)이 비춰지거나 소리가 들려 질때 앗!! 내가 듣는게 아니구나.. 이때가 되어야 보는놈을 보는것을 알고, 듣는놈을 듣는것이 무엇인지 아는겁니다.
왜 관세음 보살님이 꼭 바닷가에 계실까요.?? 중국도 역시..
규칙적 지속적인 '해조음' 을 듣고 소리삼매로 들어가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대관음' 도량 에서 그렇게 안하지요..ㅎㅎ
그래서 현실적으로 관세음보살 수행법이 어려울듯 합니다.
**************************************************************
結
흔히 참선이 어려워 요즘 '비파싸나'에 현혹되는 경우가 많은듯 합니다.
명료한 정신으로 집중하니까 의식이 맑아지는 것을 피부로 느낄수 있기에 쉽게 매료되겠지만반쪽의 수행이니 경계해야할듯 합니다.
이는 초심자에게 정신력 키워주기위한 방편이라 생각됩니다.
***
고전 수행법 에서 가장수승한 방법을 원각경에서 제시 하셨지요.
위에 간단히 적은 방법을 원각경에 의거해도 역부여시 같습니다..
삼마발제관(통찰) 사마타관(지) 선나관 이 삼관수행으로 견성할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가?
원수 삼관이라 해서 [삼마발제관] 으로 집중력 을키우고 키워진 집중력으로 [사마타] 육근의 작용을 멈추고 이것이 수순해 지면 이 둘이 둥굴게 합쳐져(圓修)선나관으로 들어갑니다.즉 圓修三觀 이 됩니다.
經에도 선나관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지요. 이것은 견성이후 반야삼매 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모든 수행방법의 근본은 모두 똑같다 볼수 있습니다.
원본을 개량한것 뿐이지요.
天人師 불세존이시여~~!!
부처님의 위대하심을 다시한번 느끼고 눈물 겹도록 고개숙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
**********************************************************************************
自說
기연, 우연히(必緣) 길에서 만난 선지식 에 의하여
눈을 뜨고도 아무것도 알수 없는 답답한 달달봉사,
화두도 모르고, 게송은 더 더욱 모르니 그렇지요
그런데 웃기는것은 보면 안다는것 뿐입니다.
말 이던 글자이던 피해가지 못하고 드러납니다.
답답함을 부처님(금강경)께서 확인을 시켜 주셨습니다.(약시경전소재지처 즉위유불 약존중제자)
수다원이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아나함이,,, 이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흐름에 들어 진행된다는것을...
언제 알게될까?
'무쟁삼매인중 최고제일은 아시이욕 아라한'
탐진치 삼독은 아라한에 와서야 완전히 벗어나 '아란나' 행을 한다 하셨습니다.
육조스님께서 그렇게 찬탄 하신 금강경은 수행의 지표가 될듯하고 왜 조계종
소의경전인가를 다시한번 느끼게 합니다.
스스로 본바를 자신의 입으로 자기말을 해야지 묵은 종이나뒤적여서 미사어구로
포장해도 생사와는 전혀 무관하니, 業중에서 가장 큰업이 구업이라는 세존의 말씀이
헛 된말이 아닐듯 합니다.
서울, 많이 말씀들 하지만, 서울가는 방법과 가는길에 자기말이 없으면 의심이
되는것이 당연한것 아닌가요.
화엄경81책을 달달 왼들 봉사가 서울구경 하는소리겠지요. 저 역시 아직 迷 하기 때문에 화엄 세계(삼매)는 모릅니다. 그러나 入般若三昧 로 그렇게 그렇게...
자비로 뭉치고, 인자함으로 포장하지 말고, 진실되어 허망하지 않은곳으로
나아가면 天地無仁 이라, 걸림이 없는 세계같습니다.
올때 그리오고 갈때, 그리가듯 다시와도 그리오니.
마하반야바라밀 草觀合掌. ()
이하는 천태지관의 해설입니다. 교학을 하시려면 보시고 실참하 실분들은 덮어도 좋을듯합니다. 단 마지막 삼지삼관은 견성이후 의 수행(반야삼매) 같습니다.
지금의 천태종과는 수행방법도 전혀 다르지요. 죽자고 부르면 현신(현몽하셔서) 병고자 쾌차는 될 수도 있지만 태백산 무당도 가끔은 신통하지요.
================================================================================
天台止觀(천태지관)
중국선을 이해하는 데는 반드시 천태의 지관을 이해해야 한다. 천태는 스승
혜사(慧思)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용수의 공(空)·가(假)·중(中)의 삼제
(三諦)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천태는 대승경전을 두루 섭렵했지만 소의경전은
《영락본업경》 《법화경》 《화엄경》이 중심이다. 수행의 방법은 삼지·
삼관을 원리로 사종삼매(四種三昧)로 정리할 수 있다.
(1) 삼지(三止)
① 계연수경지(繫緣守境止):마음을 코와 배꼽 사이의 중간쯤 되는 곳에 집중하여
마음을 산란하지 않게 하는 집중법이다.
② 제심지(制心止):마음이 일어나는 바에 따라서 이것을 제어하여 달아나지 않게
하는 집중법이다.
③ 체진지(體眞止):마음이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모든 제법(諸法)이 있고, 모두가
다 인연으로 공(空)한 것이며 주체자가 없는 것을 알아 허망한 생각을 그친다.
(2) 삼관(三觀)
① 공관(空觀):모든 현상 이전의 비어 있는 본체를 관하는 것이다.
② 가관(假觀):모든 현상은 일시적 인연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그 실상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③ 중관(中觀):공관과 가관이 하나로 작용하여 본체와 현상이 걸림이 없는, 즉 공관과 가관이
융합된 관이다. 이 삼관은 간화선의 대가인 임제(臨濟)의 본체관인 체중현(體中玄),
현상관인 구중현(句中玄), 현상과 본체가 하나인 현중현(玄中玄)과 통한다.
(3) 사종삼매(四種三昧)
천태의 말년 저술인 《마하지관》에 있는 삼매수행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체계적인 수행법이다.
① 상좌삼매(常坐三昧):《문수설반야경》에 의거하여 90일 간 앉은 채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직 하나의 부처님 이름만 부르는 일행삼매다.
② 상행삼매(常行三昧):《반주삼매경》에 의거하여 90일 간 불상 주위를 돌면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念)하는 것이다.
②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대방등경(大方等經)》 《법화경》 등에 의한 삼매로 방등삼매는 7일 간, 법화삼매는 21일 간 불상 주위를 돌고 동시에 좌선도 한다.
④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수자의(隨自意)삼매라고도 하며 행주좌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항상 닦는 삼매다. 대승경전에 의거하여 용수의 삼제(三諦)를 바탕으로 하는 삼매로 중국에서는 가장 체계적인 교선일치(敎禪一致)라 할 수 있다.
마하지관(摩訶止觀)』의 삼지삼관(三止三觀)
1. 삼관(三觀)의 내용
삼관(三觀) 가운데 종가입공이제관(從假入空二諦觀)은 보통 공관(空觀)이라고 약칭하며 일체 유위법(有爲法)이 공(空)임을 체득하는 관(觀)이다. 종공입가평등관(從空入假平等觀)이란 가관(假觀)의 약칭이며 중생의 구제를 위해 세간의 가법(假法)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관하는 것이다. 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 즉 중관(中觀)이란 공(空)도 한 측면뿐인 진리로서 공(空)이요 가(假)도 한 측면의 진리로서 공(空)임을 알아 두 가지 관을 방편으로 삼아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議諦)를 관하는 것이다.
2. 삼지(三止)의 내용
체진지(體眞止)란 ‘진(眞)을 체득한다’는 의미로서 진(眞)이란 진여(眞如)이다. 진여(眞如)란 만물의 본 모습이요 성질이니 바로 공성(空性)을 말한다.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란 ‘방편으로써 연(緣)에 따라 (마음을) 머무는 것’을 말한다. 모든 법(法)은 본 모습이 공(空)이지만 그때그때의 인(因)과 연(緣)이 만나서 가법(假法)으로 현존한다.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란 공(空)과 유(有)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분별을 그치고 중도(中道)에 안주하는 것이다.
3. 문제점
여기서 말하는 삼지(三止)는 주로 ‘머물다’의 의미로 행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체진지란 진여, 즉 공제(空諦)에 머무는 것이고 방편수연지란 가제(假諦)에 머무는 것이며 식이변분별지란 중제(中諦)에 안주하는 것이다. 또 관은 주로 ‘통달하다’는 의미로 행해지는 것으로 역시 각각 공·가·중의 세 측면의 진리에 통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번뇌를 그치는 지와 꿰뚫는 관은 의미상으로만 있고 실제 행법은 없는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다.
두 번째로 여기서 보는 삼지와 삼관으로는 모든 선정법을 다 포괄할 수 없다. 선정 가운데는 공(空)의 진리는 보지 못하고 특정 병폐를 치유하기 위한 대치관(對治觀)도 있기 때문이다.
『차제선문(次第禪門)』의 삼지삼관
1. 삼지(三止)의 내용과 그 행법
지(止)란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기 위한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고도로 집중되어 적정(寂靜)해지면 이를 삼매(三昧) 혹은 정(定)에 들었다고 한다. 잡념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제지하여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지의(智剡)는 제심지(制心止)하고 불렀다.
‘마음을 제어하는 지’라는 의미이다. 마음에 일어나는 거친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쓰기보다 차라리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는 것이 쉽다. 한 가지 대상을 정해놓고 그곳에 생각을 묶어두는 것은 계연지(繫緣止)라고 부른다. 그 대상으로 직접 거명되고 있는 것은 정수리, 머리카락과 이마의 경계, 콧마루, 단전, 발바닥 등 다섯 곳이다. 그러나 의미적으로 볼 때 집중 대상은 이러한 신체부위
뿐아니라 염불(念佛)을 행할 때의 부처님 명호나 특정한 단어, 생각 등도 될 수 있다고 본다.
『마하지관』에 “오로지 (마음의) 연(緣)을 법계에 매어두고〔繫緣〕 일심으로 법계만 생각하라. 계연이란 지(止)이고 일념이란 관(觀)이다…”라는 용례도 있는 것에서 추론할 수 있다. 세번 째는 체진지(體眞止)로서 진제(眞諦), 혹은 진여(眞如)를 체득한 지라는 의미이다.
2. 삼관(三觀)의 내용과 그 행법
『차제선문』에 나타나는 관도 역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실관(實觀)인데 이는 있는 모습을 사실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흡을 열번씩 세면서 마음을 점차로 안정시키는 수식관(數息觀)의 경우 처음에는 호흡을 세는데 집중하지만 일정한 정도로 집중이 되면 숫자를 세지 않고 숨의 모습을 그대로 관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두 번째로 사실을 과장해서 상상을 통해 관찰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부정관의 일종인 구상(九想)을 행할 때 시체가 썩어 검푸르게 변하고 벌레가 뜯어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닌 가상관(假想觀)이므로 실관과는 다른데 지의는 득해관(得解觀)이라고 부르고 있다.
세 번째로 혜행관(慧行觀)이란 ‘지혜가 작용하는 관’이라는 의미로서, 앞의 ‘해’가 경론이나 가상관을 통해 얻어지는 불완전한 앎이라고 한다면 ‘혜’는 마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참되고 완전한 앎이라고 할 수 있다.
3. 문제점
『차제선문』에서 설하고 있는 삼지 가운데 체진지(體眞止)는 『마하지관』과 같지만 삼관은 『마하지관』과 완전히 다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삼지삼관에서는 공제(空諦)를 보는 체진지와 혜행관이 가장 고차원의 기관일 뿐, 가제와 중제를 볼 수 있는 지관이 없다.
Ⅳ. 양종(兩種) 삼지삼관의 통합
1. 『소지관(小止觀)』과 지관설(止觀說)
지관(止觀)의 수행은 처음에 계연(繫緣)·제심(制心)·체진(體眞)의 삼지(三止)와, 설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대치관(對治觀)과 정관(正觀)을 사용하여 무루(無漏)를 증득하고 이어서 체진(體眞)·방편수연(方便隨緣)·식이변분별(息二邊分別)의 삼지(三止)와 공(空)·가(假)·중(中)의 삼관(三觀)을 사용하여 불과(佛果)를 얻는 것이 하나의 체계임을 추론할 수 있다.
2. 양종(兩種) 삼지삼관(三止三觀)의 관계
『차제선문(次第禪門)』에는 양종의 삼지삼관(三止三觀)을 하나의 체계로 묶어 사수(四修)로 분류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지(止)와 관(觀), 그리고 선정법을 사(事)와 이(理)의 두 가지 개념을 이용해 사구(四句)로 설명하는 것이다.
사(事)란 색법이나 각종 행위 등 겉으로 드러나는 차별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고, 이(理)란 현상 안에 내재된 보편적인 이치로서 공(空)·무상(無常)을 정리한 사제(四諦)나 공(空)·가(假)·중(中)의 삼제(三諦)를 가리킨다.
이렇게 사(事)와 이(理)로써 지(止)를 분별하면 계연지(繫緣止)와 제심지(制心止)는 사지(事止)이고 체진지(體眞止)는 이지(理止)에 속한다. 그리고 역구(亦句)로서 사이지(事理止)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속제(俗諦)에 반연하여 진리를 체득하는 연속체진지(緣俗體眞止)이고 비구(非句)로서 비사비리(非事非理止)는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가 있다고 한다. 사(事)·이(理)를 관(觀)에 적용하면 수식관과 부정관 등이 사관(事觀)이고 공관(空觀)과 무상관(無常觀) 등이 이관(理觀)이라고 한다.
『차제선문』의 삼관 가운데서 실관(實觀)은 수식관에서 쓰는 것이고, 득해관(得解觀)은 부정관에서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이 두 가지는 사관(事觀)에 해당한다. 혜행관(慧行觀)은 사제관(四諦觀)이나 십이인연관(十二因緣觀)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므로 공·무상을 관하는 이관(理觀)에 속함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사리관(事理觀)은 쌍관이제(雙觀二諦)이고 비사비리관(非事非理觀)은 중도정관(中道正觀)이 여기에 속한다고 한다.
3. 삼지삼관(三止三觀)의 수행 계위
『차제선문』에서 설하고 있는 계연지·제심지·체진지의 삼지(三止)와 실관·득해관·혜행관의 삼관(三觀)은 삼승공행(三乘共行)이다. 즉 성문, 연각, 보살이 모두 수행하는 것이다.
그 마지막 단계인 혜행관과 체진지로 끝을 내면 공제(空諦)만을 체득한 것으로서 번뇌와 윤회는 그칠 수 있으나 성불할 수 없다. 이어서 가관과 방편수연지, 중관과 식이변분별지룰 행해야 하는데 『천태사교의』에 따르면 별교(別敎)에서는 10주보살의 단계에서 공관을 행하고 10행에서 가관, 초지(初地) 이후에 중관을 행한다고 한다.
원교(圓敎)에서는 초신(初信)에서 견혹(見惑)을 끊고 2신~7신에서 사혹(思惑)을 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공관(空觀)에 해당하고 8신~10신에서 가관(假觀), 그리고 초주(初住)가 되면 중관이 현전하여 일체종지를 얻는다고 한다.
============================================================
원고 없이 쓰다보니 후에 설명이 미흡한점이 드러나더군요.
생각나면 첨삭을해서 정리 하다보니 처음에 쓴것과 조금 다른듯 하지만
본말에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출처 :해인사수련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 草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