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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선사 〈하〉 “깨달음과 닦음은 둘이 아니다”
白道 박만주
2016. 5. 12. 08:37
혜능선사 〈하〉
| | “깨달음과 닦음은 둘이 아니다”
| | 혜능이 〈단경〉에서 주창하고 있는 돈오선의 핵심은 돈오자성청정(頓悟自性淸淨)에 의한 일념해탈(一念解脫)을 내용으로 하는 돈오성불(頓悟成佛) 사상과 정혜불이(定慧不二) 생활상의 전개인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의 실천에 있다.
이른바 “돈오자성청정”은 중생 스스로 성품이 청정함을 단박 깨닫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청정하다는 것은 실체가 없어 공(空)하다는 말이다. 이것을 또한 식심견성(識心見性)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마음이 본래 실체가 없고 성품이 본래 공(空)함을 요달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마음은 인식 주체인 안이비설신의와 객관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의 결합에 의한 인식 활동의 세계(十八界)를 지칭하는 것이다. 인식 주체가 공하고 객관대상 또한 공하므로 그의 결과인 인식활동은 당연히 실체가 없는 공의 세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실체가 없는 마음을 부여잡고 희로애락(喜怒哀樂)하는 것이 중생의 집착상인 것이다. 마음이 본래 실체가 없음(空)을 단박에 깨달으면(頓悟) 바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게 된다.
‘돈오성불’과 ‘정혜불이’ 주창
무념.무상.무주 수행법 전개
중생은 바깥 경계인 세간상(世間相)에 미혹되어 상(相)이 상아님(非相: 空)을 보지 못한다. 즉 상(相)에 끄달려 상(相)이 공(空)한 성품(性)을 보지 못하여 경계에 집착하여 스스로 고통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하면 상을 보아(見相) 상에 미혹되면 중생이요, 성을 보아(見性) 성이 공함(性空)을 깨달으면 부처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상(相)을 보되 성(性)을 보며, 성(性)을 보되 상(相)을 보아 언제나 중도정관(中道正觀)을 행하게 된다. 생각 생각에 중도정관을 요달하면 이것이 일념해탈(一念解脫)이며, 돈오성불(頓悟成佛)이다.
초기선의 가르침에 의하면 먼저 선정을 닦아 그 선정으로부터 지혜를 발현한다고 하지만 혜능은 선정과 지혜가 둘이 아닌 정혜불이(定慧不二)의 관점에서 닦되 닦음이 없는 무수지수(無修之修)를 강조하고 있다. 〈단경〉에서 혜능은 선정(禪定)을 등불에 비유하고, 지혜는 그 등불에서 발하는 빛에 비유하여 등불이 곧 빛임을 들어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고 있다.
정혜불이의 입장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수증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정을 닦음이 바로 지혜의 발현이요, 지혜의 발현이 그대로 선정의 닦음이 되므로 선정과 지혜를 둘로 보아 정으로부터 혜를 발현한다(由定發慧)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혜불이 사상은 일상 생활상에서 무념, 무상, 무주의 수행으로 전개되어진다. 〈단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돈오선은 “무념으로 종지를 삼고(無念爲宗), 무상으로 본체를 삼으며(無相爲體), 무주로 근본을 삼는다(無住爲本)”라고 했다.
무념(無念)이란 아무 생각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각하되 생각하지 않음(念而不念)”이라고 정의하고, 일체 경계에서 오염(집착)되지 않음이 곧 무념인 것이다. 무상(無相)이란 “상에 있되 상을 여읨(於相而離相)”을 말하는데, 일체 모든 형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요, 만법은 모두 심성(마음)으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인데, 심성은 허공과 같아 실체가 없으므로 무상(無相)이다.
또한 성품의 본체는 청정(空)하여 무상실상(無相實相)이다. 밖으로 일체 상을 떠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상으로 본체를 삼는 것이다. 무주(無住)란 사람의 본성으로 생각 생각이 일체법에 머물지 않음을 가리킨다. 만약 한 생각이 머물면 생각 생각이 머물러 속박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而生其心)”고 말한다.
월암스님 선원수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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