圓敎의 四諦.
1. 生滅四諦(생멸사제)
苦·集·道의 三諦는 因緣에 依해서 實로 生滅이 있고 滅諦는 生法에 對하여 實다운 滅法이라는 實生實滅 위에 세운 四諦로서 根本佛敎 卽 三藏敎의 所說임.
고·집·도의 삼제는 인연에 의해서 실로 생멸이 있고 멸제는 생법에 대하여 실다운 멸법이라는 실생실멸 위에 세운 사제로서 근본불교 즉 삼장교의 소설임.
2. 無生四諦(무생사제)
苦·集·道의 三諦는 如幻卽空하여 實다운 生이 없고 滅함이 없다. 滅諦는 本來 自空하여 不生不滅이다. 이와 같이 苦集道의 因果當體卽空임을 깨달고 生滅을 不見하므로 無生四諦라 함. 通敎所說.
고·집·도의 삼제는 여환즉공하여 실다운 생이 없고 멸함이 없다. 멸제는 본래 자공하여 불생불멸이다. 이와 같이 고집도의 인과당제즉공임을 깨달고 생멸을 불견하므로 무생사제라 함. 통교소설
3. 無量四諦(무량사제)
苦諦에 있어서 界의 內外를 通하여 無量의 相이 있고 또한 道諦에도 無盡한 差別이 있는데 이는 大菩薩이 修學하는 바 이다. 別敎의 四諦.
고제에 있어서 계의 내외를 통하여 무량의 상이 있고 또한 도제에도 무진한 차별이 있는데 이는 대보살이 수학하는 바 이다. 별교의 사제.
4. 無作四諦(무작사제)
煩惱卽菩薩이므로 集을 斷하고 道를 修하는 造作이 없고 生死卽涅槃이므로 苦를 滅하고 滅을 證하는 造作이 不要하다.
이와 같이 斷證의 造作을 여읜 四諦이므로 이를 無作四諦라 함. 圓敎의 四諦.
번뇌즉보살이므로 집을 단하고 도를 수하는 조작이 없고 생사즉열반이므로 고를 멸하고 멸을 증하는 조작이 불요하다.
이와 같이 단증의 조작을 여읜 사제이므로 이를 무작사제라 함. 원교의 사제.
우리는 고·집·멸·도 사제(四諦)라 하면 보통 근본불교에 있는 가장 쉬운 법문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장교·통교·별교·원교를 각 가르침의 심천 따라서 차이 있게 해석하듯이 4제도 정도에 맞추어 네 가지로 구분해서 천태지의(天台智의 538-597) 선사가 열반경 성행품에 있는 것을 참고로 안립(安立)한 것입니다. 안립이란 불교의 독특한 술어인데 규정이나 결정이나 시설의 뜻이 됩니다.
저는 누구에게나 말씀합니다마는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또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은 어느 때나 우리 행동의 지침이 되고 불교의 기본인지라 정확히 알고 기억해야 합니다. 십이인연법도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세롭고 우리 행동을 그때그때 법성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첫째 생멸사제(生滅四諦)란 고제·집제·도제의 삼제(三諦)는 인연에 의하여 진실로 생멸이 있고 또 멸제는 생법(生法)에 대하여 실다운 멸법(滅法)이라는 실생실멸(實生實滅)의 4제 곧, 정말로 우리가 낳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일체법이 생기기도 하고 멸하기도 한다는 4제로써 근본불교 즉 삼장교의 가르침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초기 불교에서 짐작이 되는 바와 같이 무식하고 진리에 대해 어두운 사람들에게 말할 때, 살아있는 그 사람에게 '그대가 본래 공이다. 그대가 본래 없다' 거나 또 지극히 좋아하는 물질 세계에 대해서 '그런 것도 모두가 다 허망하다' 고 할 때는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초기에는 정말로 멸하는 것도 있고 정말로 생하는 것도 있다는 실생실멸(實生實滅)의 차원에서 말씀한 법문인 것입니다.
지금도 사제법문이라하면 보통은 생멸사제 수준에서 알고 있습니다.
'번뇌의 집(集)이 있어서 탐심, 진심을 내고 삼독심(三毒心)으로 업(業)을 지으니까 과보로 고(苦)를 받는다. 따라서 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마땅히 팔정도, 도(道)를 닦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해탈의 멸(滅)을 얻는다' 보통은 이런 수준이 아닙니까? 이것이 생멸사제의 차원에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그다음 무생사제(無生四諦)란 고·집·도의 삼제(三諦)는 여환즉공(如幻卽空)하여, 원래 허깨비같아 실다운 것이 아니라 바로 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고(苦)도 공이요, 집(集)도 공이요, 또는 도(道)도 공인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무명(無明)이란 것도 무무명(無無明)이라 하듯이, 현상적인 차원에서 무명인 것이지 실상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무명이 본래 없는 것입니다. 무명의 실상이 바로 법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분명히 고생을 받고 있지만 중생 차원에서 고생인 것이지, 고생도 바로 볼 때는 고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야공 사상에서 모두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가 있고 집이 있다고 하면 응당 집제(集諦)가 있으니까 고제(苦諦)가 있게 되겠지요. 그러나 집제 역시 반야공에서 볼 때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가 있을 턱이 없고, 고도 없고 집도 없으니 닦아서 나가는 도(道)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고·집·도의 삼제(三諦)는 허깨비같이 공하여 실다운 생이 없고 멸이 없다' 또는 해탈의 인(因)은 도(道)고 해탈의 과(果)가 멸(滅)인데, '멸제는 본래 스스로 공해 버려서, 본래 자공(本來自空)하여 볼생불멸이다' 이와 같이 고·집·도의 인과 당체(因果當體)가 즉공(卽空)임을 곧 고의 인은 집이고 멸의 인은 도라는 이런 것이 당체가 바로 공임을 깨닫고, 생하고 멸하는 것을 보지 않으므로 무생사제(無生四諦)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야 사상 즉 통교(通敎)의 말씀입니다.
다음에는 무량사제(無量四諦)입니다. 우리 중생의 과보가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받는 고제에 있어서 삼계의 내외(內外)를 통해서 무량의 상(相)이 있습니다. 우리가 반야의 공으로 볼 때에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가제(假諦)의 차원에서는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가제가 없으면 허무가 되어 버리겠지요. 삼계 내에도 많이 있고 삼계 외에도 무량의 가상(假相)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도제(道諦)에도 무진(無盡)한 차별이 있습니다. 팔정도(八正道)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호흡법도 있고 육바라밀도 있고하여 해탈의 길로 가는 도제도 무진한 차별이 있는데, 이는 대보살이 수학하는 것입니다. 소승들은 복잡한 것을 보통은 싫어해서 얼마만치 가다가 마음이 개운하면 더 못가는 것이 소승입니다마는, 대승들은 성불할 때까지 쉼없이 가는 기질이기 때문에 무량법문을 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무량사제는 별교(別敎)의 사제입니다.
다음 무작사제(無作四諦)란 임운등등(任運騰騰)하는 곧, 조작이 없는 4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우리 분상(分相)에서 얻기는 어려우나 이것이 본래적인 모습입니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므로 번뇌라고 하더라도 중생이 괴로운 단계에서 번뇌인 것이지 깨달아 버리면 번뇌가 곧 보리고, 또는 설사 깨닫지 안 했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괴롭다는 그 괴로움 또는 아프다는 그런 아픔도 근본 바탕에서 볼 때는 괴로움이 아니고 아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상만 보는 것이니까 번뇌가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마는 본체에서 볼 때는 없는 것입니다.
번뇌 즉 보리이므로 무명과 무명으로 이루어진 탐심, 진심, 치심과 여기에서 우러나는 여러 가지 업인 집(集)을 끊고 팔정도같은 수행법을 닦는 조작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번뇌가 있고 보리가 따로 있다면 닦는 것도 있는 것이지마는 번뇌의 본바탕이 바로 보리라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오직 보리 뿐이요, 오직 참 진리 뿐입니다. 천지우주가 진리 뿐일 때는 새삼스럽게 우리가 집이라고 할 것도 없고, 또 집을 끊고서 도를 닦는다는 조작(造作)스러운,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므로, 생하고 멸하고 고를 받는 우리 중생계 이대로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이런 것은 범부지에서는 넘겨다 볼 것이 못됩니다. 닦아서 증명해야 하는 것인데 증명도 않고서 그렇다고 하면 그냥 함부로 그렁저렁 해져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사에 있는 것이고, 견성한 뒤에 비로소 생사 즉 열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지혜와 믿음만은 분명히 '생사 이대로 열반이구나' 이렇게 믿고 나가야 합니다. 다만 업장에 가려서 증명만 못할 뿐 사실이기 때문에, 증명하기 위해서 마땅히 믿음과 혜(慧)는 이와 같이 막힘이 없는 원융한 혜를 내야 합니다.
따라서, 무작사제(無作四諦)의 혜를 가지고 공부를 해야 바로 선(禪)이 되고 참다운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생사 즉 열반이므로 고를 멸하고 멸을 증(證)하는 조작이 필요치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끊고 증하는 조작을 여읜 4제이므로 이를 무작사제라 하는 것입니다.
높다 낮다 또는 내가 지금 어떻다 하는 분별시비를 내는 것은 아직 조작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사 무진 애를 쓰며 공부해 나간다 하더라도 마음에는 걸림이 없이 해야 무념수(無念修)라, 무심히 닦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고, 본래 부처니까 무루지성 본자구족(無漏智性本自具足)이라, 조금도 허물이 없는 지성이 원래 갖추어 있는 그 자리를 믿고서 무념으로 철저히 계행지키고 나가면 저절로, 본래 불성인지라, 계합이 되겠지요. 이는 원교(圓敎)의 4제입니다.
5) 칠각지(七覺支) 七覺支(七覺分·七菩提分法)
칠각지(칠각분·칠보리분법)
성도(聖道)가 부생(不生)함은 정혜부조(定慧不調)하기 때문에 정혜(定慧)를 균등(均等)시키는 법(法)이다. 견도위(見道位)에서 견혹(見惑을 단(斷)하고 수도위(修道位)에 있어서 사혹(思惑)을 단(斷)함은 이 칠각지(七覺支)의 힘에 의(依)한다.
1. 擇法覺支(택법각지)
반야지혜(般若智慧)로서 법(法)의 진위(眞僞)를 간택(簡擇)함.
2. 精進覺支( 진각지)
용맹심(勇猛心)으로써 사행(邪行)을 떠나고 진법(眞法)을 동행(動行)함.
3. 喜 覺 支(희각지)
심(心)에 선법(善法)을 득(得)하여 환희(歡喜)를 생(生)함.
4. 輕安覺支(경안각지)
제각분(除覺分)이라고도 하며 신심(身心)의 추중(추重)을 끊고 신심(身心)을 경리안화(輕利安和)케 함.
5. 念 覺 支(염각지)
항상 정혜(定慧)를 명기불망(明記不忘)하고 이를 균등(均等)케 함.
6. 定 覺 支(정각지)
심(心)을 일경(一境)에 주(住)하여 산란(散亂)치 않게 함.
7. 行捨覺支(행사각지)
모든 망념(妄念)을 버리고 일체법(一切法)을사리(捨離)하여 심(心)을 평심탄회(平心坦懷)케 하고 다시 추억(追憶)하지 않음.
이 칠법(七法)에 있어서 행자(行者)의 심(心)이 부동(浮動)할 때는 경안(輕安)·행사(行捨)·정(定)의 삼각지(三覺支)를 용(用)하여 다스리고, 심(心)이 침울할 때는 택법(擇法)·정진(精進)·희(喜)의 삼각지(三覺支)를 용(用)하여 심(心)을 일으키며 염각지(念覺支)는 항시 정혜(定慧)를 염(念)하여 끊임이 없어야 한다.
- 止觀 -
우리 불자는 복잡하다 하더라도 적어도 37보리분법(菩提分法)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근본불교의 수행법이 주로 37보리분법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팔정도(八正道)를 무시 못하고 사념주(四念住)를 무시 못하듯 이런 법은 다 필요하니까 제정이 된 것이므로 번쇄하지마는 알아두면 공부 정진할 때 크게 참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7보리분법 안에 있는 칠각지(七覺支) 법문도 굉장히 소중한 법문인데, 공부하는 분들이 팔정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팔정도 다음에 칠각지법문이 나와 있는데도 별로 관심을 안 둡니다. 마땅히 소홀히 할 수 있는 귀중한 법문이요, 특히 참선 공부 할 때, 이른바 정혜쌍수(定慧雙修)할 때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칠각지를 칠각분(七覺分) 또는 칠보리분법(七菩提分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인 성도(聖道)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정혜부조(定慧不調)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혜균등(定慧均等)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정(定)이 앞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혜(慧)가 앞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인데 분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후를 가릴려고 애쓰기도 합니다마는,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원래 법성 가운데는 정과 혜가 원만무결하게 원융무애로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성 가운데 정과 혜가 원망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정만 닦으려고 애쓰거나 혜만 닦으려고 할 때는 정혜부조라, 조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심리도 지(知)적인 요소, 정(情)적인 요소, 또는 의지[意]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너무 지성으로 치우치면 정이 소외를 받으니까 어쩐지 불안스럽고, 의지가 부족하면 결연하고 강직한 행동을 못 취하게 되듯이 마땅히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심리적으로는 지와 정과 의라 하지마는 불교적인 사상으로 볼 때는 정과 혜 가운데 다 들어갑니다. 지관(止觀)이라하면 지는 정에 해당하고 관은 혜에 해당하며, 앞서 말씀드린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도 역시 일상삼매는 혜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에 해당 합니다. 모두를 이와 같이 정과 혜에 대비시킬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공부가 빠르게 될려면 꼭 정혜균등이라, 정혜쌍수가 되어야 합니다. 보조국사 어록을 한 말로 말한다면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로 포괄 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마음이 잘 열리지 않는 것은 정혜부조하기 때문입니다. 정과 혜를 조화시키는 법, 정혜를 균등시키는 법이 칠각지법입니다. 따라서 주의해서 보시고 그때그때 공부 할 때 참고로 하셔야 합니다.
정헤조화법을 마치 공중에 날아가는 새에 날개에 둘이 있어야 잘 날아 갈 수가 있고, 또 굴러가는 달구지에 바퀴가 둘이 있어야 바로 갈 수가 있는 것과 같다는 비유 말씀도 있습니다.
도를 깨닫는 자리인 견도위(見道位)에서 도리에 막힌 번뇌인 견혹(見惑)을 다 끊어버리고 수도위(修道位)에서 습기(習氣)가 되어 있는 번뇌인 사혹(思惑)을 끊는 것은 칠각지의 힘에 의합니다. 이것이 견도에도 필요하지만 특히 수도할 때 곧 보임(保任) 수행할 때 미세번뇌, 습기번뇌를 녹일 때 칠각지의 힘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첫째는 택법각지(擇法覺支)라, 택법이란 법을 간택(簡擇)한다는 말입니다. 불교 술어로는 선택이란 말은 안 쓰고 간택이라 합니다. 반야 지혜로써 법의 진위(眞僞)를 간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은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판정을 잘 못합니다. 그러나 반야도리, 제법공(諸法空)도리에 비추어 봐서 맞는가 안 맞는가 택하는 것입니다.
공부해 갈 때도 부질없이 상대 유한적인 문제로 의심하면 그것은 참다운 반야 지혜가 못되겠지요. 반야 지혜에 비추어서 항시 제일의제(第一義諦), 본체를 여의지 않는 행법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을 가리는 것입니다.
또는 어떤 법이 자기한테 맞는가 간택하는 것입니다. 가사,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너무나 지성적인 것에 치우친 법으로 갈 때는,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안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힘을 많이 낭비합니다. 또 지성적인 것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자기 성질, 원래 품성을 잘 헤아려서 택법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정진각지(精進覺支)라, 용맹심으로써 삿된 행을 떠나고 진법(眞法)을 근행(勤行)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닦는다는 말입니다. 내 평생 이 일로 목숨을 바치겠다고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정진이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자기 품성이라든가 또는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가장 선행적(先行的)으로 택법을 한 다음에는 용맹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희각지(喜覺支)라, 마음에 좋은 법을 득(得)하여 환희를 생(生)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택법을 바르게 하고 용맹정진을 할 때는 부작용이 별로 없고 필연적으로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른바 법의선열(法喜禪悅)이라는 기쁨이 옵니다. 우리가 택법을 잘 못하고 또는 계율이나 선정이나 다 여법한 정진을 안 할 때는 진척이 안됩니다. 법의 진도가 없으면 거기에 따라 오는 환희심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당히 할 때는 필연적으로 희각지라, 마음에 선법을 득하여 환희심을 내는 것입니다.
다음은 경안각지(輕安覺支)라, 경안은 앞에서 여러 차례 말씀했습니다마는 제각분(除覺分)이라고도 합니다. 추중번뇌(추重煩惱)라, 이른바 거칠고 무거운 번뇌를 없애므로 해서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편안스럽게 하는 곧 경리안화(輕利安和)케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염각지(念覺支)라, 항상 정(定)과 혜(慧)를 명기(明記)하여 불망(不忘)하고, 마음에다 명심해서 잊지 않고 균등케하는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가만히 바보같이 그냥 묵조(默照)하고 앉아 있다하면 정(定)을 주로 하고 혜를 무시한 것이 되고 또 진여불성자리, 진여불성은 우리가 더위잡을 수 없는 광대무변한 자리 아닙니까마는, 그 자리만 생각하며 정을 무시하고 갔다 왔다 망동한다든가 오로지 지속적으로 하지 않고서 그때그때 혜만 발동을 시켜서 법성자리만 관조할 때도 역시 공부가 더딘 것입니다. 마땅히 지혜로 해서 상이 없고 자타 시비 선악이 다 끊어진, 청정무비하고 무량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자리를 훤히 행각해야 합니다.
훤히 트인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는 것은 혜라 할 수 있고 그 자리를 안 떠나고 염념상속 하는 것은 정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정혜균등이 되어서 선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정혜균등이 안되면 선정에는 못들어 갑니다. 법성에다 우리 마음을 안주시키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앉으나 서나 남하고 얘기할 때라도 마음의 저변에는 영원적인, 생멸이 없는 그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정각지(定覺支)란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게 해서 산란치 않게 하는 것입니다. 역시 정혜균등이 되려고 노력하다보면 차근차근 공부가 익어지면서 마음이 착 가라앉고 산란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이 되겠지요.
다음 생사각지(行捨覺支)란 모든 망념을 여의고 일체법을 사리(捨離)하여 마음을 평심탄회(平心坦懷)케 하고 다시 추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 과거에 미워했던 생각이 한 번 일어나면 더욱 더 미워질 수가 있습니다. 남을 좋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사(行捨)도 중요한 공부입니다. 무엇이 좀 안되면 그것 생각하느라고 공부가 안되고 또 잘되면 잘됐다고 그러는 것 이므로 잘되나 못되나 다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가 죽으나 누가 죽으나, 과거에 창피스런 일을 당했거나, 법성(法性)에서 볼 때는 그런 것이 사실은 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부할 때는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7법에 있어서 수행자의 마음이 부동(浮動)할 때, 즉 마음이 들뜰 때는 경안(輕安)과, 다 버리는 행사(行捨)와 또 마음을 오로지 한군데만 집중하는 정(定)의 3각지를 써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마음이 들뜰 때와 너무나 침울해서 혼침이 올 때 가장 공부의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혼침과 도거(掉擧)는 마음이 가라 앉거나 들떠서 곤란스러운 것으로서 공부할 때 두 가지의 큰 마장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들뜰 때는 몸이나 마음이나 번뇌가 다 허망한 것이니까 훨훨히 마치 사자분신(獅子奮迅)같이, 사자가 갈기를 떨치고 위용을 부리듯이 다 떨쳐버리는 경안(輕安)이나, 추억하지 않고 다 버리는 행사(行捨)나 또는 마음을 집중하는 정(定)의 3각지로 해서 들뜬 마음을 다스리고, 그 반대로 마음이 침울할 때는 택법(擇法)으로써 보다 더 알맞은 수행법을 철저히 간택하고 정진(精進)도 용맹심으로 더욱 분발하여 정진을 지속해 나가면 법희선열의 경계를 얻게 되는데 이러한 3각지로써 침울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염각지(念覺支)로 항시 정·혜(定·慧)를 염하여 끊임없어야 합니다. 한량없이 밝은 불성자리를 떠나지 않는 이른바 일상삼매(一相三昧)의 지혜와 그 법성자리를 비추어 보는 일상삼매를 지속적으로 닦아나가는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정(定)을 균등하게 닦으면서 마음을 다스려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튼 공부해 나가면서 이 택법, 정진, 희 또는 경안, 념, 정, 행사 등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조절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7각지법은 지관법(止觀法)의 구체적 방법입니다. 지관의 지(止)는 이른바 정(定)에 해당하고 관(觀)은 혜(慧)에 해당합니다. 지관이나 정혜나 또는 일상삼매, 일행삼매나 다 같은 뜻입니다.
출처 - 청화스님의 "원통불법의 요체" 中에서
출처 :세계태권도포교연맹 원문보기▶ 글쓴이 : 곰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