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해석내용
순일선생님이 해석하신 반야심경 요의에 대한 일부내용입니다.
많은 도움되시길 바랍니다.
전문을 보시고 싶으신 분은 http://www.soonil.org 의 자료실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관자재라고 쓰여 있다.
즉 “관이 스스로 있다”라는 이야기다. “스스로 있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 말은 “실체, 실상”이라는 이야기며, 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즉 “자재”라는 말은 “스스로 절대 유일”이라는 이야기다. 종교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스스로 유일자라는 이야기가 된다.
관은 앞서서 “봄”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즉 “보는 자 와 보여 지는 대상”이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관”이며 “봄”인 것이다.
인도나 네팔의 사원에 스투파라고 “눈과 눈썹”만 그려진 그림들이 있다. 세상을 보는 깨어있는 “눈”이다. 허나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하나 된 “봄”만 있는 상태의 온전한 깨어있음을 표시한 것이 바로 그 “눈”이다.
관자재보살은 본디 또 다른 이름이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헌데 반야심경에서는 왜 “관자재”라고 하였을까? 여기서부터 이미 풀어나갈 경의 의미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경”이란 유일자가 말씀하신 내용이다.
그러므로 “관자재” 즉 “관 유일자”가 이제부터 “유일자” “전체”가 되는 방법을 설한다는 것이다.
또는 그러한 경을 설하는 이가 “유일자”라는 이야기도 되겠다.
또한 “관자재” 뜻 그대로 “관”이 “유일자”이며 “전체”라는 이야기다.
즉 “봄, 깨어있음”이 전체(자)요 유일(자)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
반야로 건너가는 마음을 깊이 행할 때
반야로 건너가는 마음을 깊이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 무슨 마음일까?
반야로 건너가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일까?
이것은 “무심삼매”로 보면 된다. 계정혜 삼학에서 보듯이 붓다는 계율과 참회로써 일단 “바른생각, 선”이 되라고 하셨으며, 그 다음에는 팔선정이라고 부르는 팔삼매를 “정”으로써 하라고 하셨으며 그리하면 “혜”가 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혜”로 건너가는 마음을 깊이 행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팔삼매 중에서 무심삼매(無心三昧)를 깊이 행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요약해보면 “반야가 되기 위하여 깊이 무심삼매를 행할 시에”가 되겠다.
그러므로 온전히 삼매에 들어서 혜가 다 드러난 상태는 아니며, 진행 중인 상태라고 보면 될 듯하다.
조견오온개공
조견(照見)이라는 말은 견(見)이랑은 또 다르다.
견은 위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나”가 무엇을 “본다”이다.
허나 조견 즉 “비추어 보여 졌다”라는 뜻은
“나”가 무엇을 “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무엇이 본성에 비추어서 보여 졌다는 것이다.
즉 “주체”가 “개아”인가 “본성”인가의 차이가 견과 조견의 차이다.
개아=견(見)
본성이 많이 드러난 상태=조견(照見)
“나”가 보는 것은 모두 겉모습에 빠져버린 “거짓”이기가 십상이다.
허나 개아의 “나”가 본 것이 아니고, 본성이라는 바탕에 비추어져서 보여 진 것은 사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로서 “아하 오온은 전부 공한 것이 로구나” 하고 알았다는 것이 아니다.
본래마음인 혜에 비추어지기를 “오온은 전부 공이로구나”가 된 것이다.
여기서 “오온”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하는 것이다.
“색”은 “몸”을 말하며
“수”는 “느낌, 감각”을 말하며
“상”은 “인식작용”을 말하며
“행”은 “생각구성, 의도, 경험”등을 말하며
“식”은 마음, 생각을 말한다.
그러므로 요약해본다면은 “몸과 마음이 전부 공하구나. 또는 몸과 마음의 바탕이 공이로구나“하고 본래마음에 비추어져서 보여 졌다는 뜻이 된다.
흔히 우리는 몸과 마음이 모두 공하다고 하면은 무엇인가 부정적으로 듣기도 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공”이라면, 물론 부정적으로 들릴 것이다.
허나 “공”이 만약 전체라면 상황이 틀릴 것이다. 그러할 때 몸과 마음이 “공”이로구나 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이 몸과 마음이 “공”이로다 에는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처음에는 약간의 부정적인 견해로 받아 들여서 모든 것을 버리는 길로 가도 될 듯 하다. 허나 종래에는 “공”하다는 것이 나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축복의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일단 밝혀본다.
이유가 지금 개아가 오온이 “공”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성에 비추어져서 알고 보게 된 사실이 “오온이 공”이라는 것이다.
즉 “본성”이 없는 것이 아니며, 있다는 것이다.
만약 비추어질 바탕이 없다면 어디에 비추어 질수 있다는 이야긴가?
그러므로 오온이 공한 것이 비추어지는 “그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다.
조견과 관에 대하여서 잠시 이야기 해본다.
조견은 본성에 비추어져서 보여 진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것은 본래마음이 많이 드러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더러 어떤 선생들이 “맑은 하늘에 구름(생각들)이 점점이 떠다닌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할 때 맑은 하늘이 본래마음이며 구름이 바로 아직 개아의 번뇌마음이다. 이것은 생각으로 떠다니는 구름생각들을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맑은 하늘 즉 본래마음에 구름들이 비추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은 개아가 주체이냐 본래마음이 주체이냐의 차이다.
즉 본래마음이 많이 드러나면 “조견”이 되며, 개아가 주체일 때는 “견”이 된다.
깊은 잠에서 깨어있을 때에도 이러한 “조견”상태이다. 깨어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본래마음일터인데 어찌 조견이라고 묻는다면, 여전히 간혹 조견되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하게 자면서 깨어있음이 깊어지면 너무도 고요하여 깨어있는지도 모를 때에 간혹 쓰윽 하고 지렁이처럼 작은 번뇌가 스칠 때에 그것이 조견이 된다. 그것에 의하여 오히려 무엇인가가 깨어있구나 하고 알정도로 고요하기도 하다.
그러한 지렁이같이 작은 번뇌는 아주 작아서 생각으로 발전되기 전 단계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면은 본래마음에서 생각으로 나올 때의 애초의 한 씨앗이 조견되기도 한다. 그러한 씨앗은 조견이 된 이유로 생각으로 발전되지 아니 한다.
잠이나 생시에서 마음의 번뇌가 몸의 번뇌로 쓰윽 지나가는 것들이 조견되는 것은 “의식”으로는 알아차리지 못 할 정도의 작은 것들이다. 그러한 것들은 아뢰야식에 남은 미세한 번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자면서도(생시에도) 늘 긴장하고 있다. 그러한 것들이 잠 속에서도 깨어있으며 조견 되어지면 서서히 사라져 가기 시작한다.
잠에서 휴식이 되기 시작할 때에, 즉 되었다가 아니 되었다가 할 때에는 “관”과 “조견”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조견”은 일심으로부터 무심까지 벌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일심에 들면 늘 일심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심 네 가지 중 어떤 것이든지 들면 늘 그러한 상태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늘 그러하다면 이미 전체이다.
늘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등차의 삼매가 있는 것이며, 또한 비상비비상처에서 마저도 오락가락 하기 때문에 “비상”과 “비비상”이 있는 것이다.
그나마 비상비비상처에서도 늘 비상비비상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개아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할 때 개아로 돌아오면 완전히 개아상태로 돌아오지는 아니하며, 조견상태가 벌어진다.
조견이란 말이 의미하듯이 아무리 본성이 거의 드러났다고 하여도 개아가 남았기 때문에 그러한 점점의 생각들이 본래마음에 비추이는 것이다. 즉 아직도 빼어내야 할 “개아 또는 의도 작위”가 있다는 것이다.
“관”은 말 그대로 “봄”이다. 또한 “각성자체”이다. 또한 오로지 “하나”이다. 거기에는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이라는 두개의 “분리 상태”가 없다.
비추어지는 바탕의 본래마음과 비추어지는 점점의 구름도 없다.
그냥 청정뿐이다.
관상태가 되면 자나 깨나 마음은 올올이 각성(관상태)되어 온전한 지복과 청정심이다.
동시에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미세 두려움이 소멸하며 세포 하나하나가 올올이 개화(開花)하고 각성하여 지복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관자재”와 “조견오온개공”으로서 “관 과 조견”을 다른 말로 쓴 것이다.
즉 “관유일전체”가 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 즉 깊이 삼매행을 하여서 완전히 전체가 드러나려고 할 때에(즉 아직 완전히 전체가 드러난 상태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많이 드러난 본래마음에 “몸과 마음의 바탕이 모두 공이로구나”하는 사실이 비추어졌다는 것이다.
즉 본래마음이 있고 그러한 비추어진 대상이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삼매에 들어갈 때에, 이러하게 몸과 마음이 “공”이로구나 하고서 들어야 한다.
전체상태가 되려고 하는데 개아(몸과 마음)가 “나”라고 여긴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모순이 된다.
도일체고액
일체의 고통과 액을 넘어섰다는 이야기다.
또는 모든 고통과 액을 끊고서 넘어섰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
즉 무심삼매에 깊이 들어갈 제에 몸과 마음 일체가 바탕이 “공”이로구나 하는 것이 본래마음에 비추어져서 즉 혜에 비추어져서, 일체의 고통과 액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의 “공”은 그러므로 부정적인 “공”이 아니다.
일체의 고액을 넘어선 “공”이 어찌 아무것도 없는 “공”이겠는가?
즉 몸과 마음이 모두 “공”하다고 본래마음에 비추어졌으므로, 늘 우리는 본래마음인 것을 여실히 알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고액을 넘어서서 드디어 무심삼매에 들었다는 것이다.
즉 혜에 들었다는 말이며, 말로는 “들었다”고 표현을 하였지만은 사실은 이제 “전체”가 드러났다. 즉 몸과 마음이 “나”가 아니었으며, “진정한 나” 즉 “전체의 나”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사리자여
듣기로 사리자가 궁금하던 것을 붓다에게 질문하고자 하였으나, 붓다는 “삼매”에 드셨으므로, 관자재보살에게 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관자재보살이 대답한 것이 바로 이 “마하반야바라밀다경”이 된다.
이유는 관자재보살은 붓다 제자 중에서도 큰 제자였다고 한다.
부처님이 되실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생을 모두 성불시킬 때 까지 성불을 미룬 분들이 보살마하살이라고 들었다. 그러한 분들 중 한 이가 바로 관자재보살이다.
관자재보살이 사리자에게 이 모든 것을 설하고 난 뒤, 붓다가 “삼매”에서 일어 나셨다고 한다. 그러고는 “옳고도 옳도다.” 하시면서 관자재보살이 설한 것을 인정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 관자재보살이 “사리자여” 하고 부르시는 것이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다.
색은 공과 다르지 아니하며
공은 색과 다르지 아니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색은 바로 공이며
공은 바로 다름 아닌 색이다.
위의 말을 이야기상으로만 본다면 점점 강조한 것으로 보여 진다.
허나 비슷한 말들을 이러하게 중복적으로 이야기 한 것에는 또 다른 뜻도 있을 것이다.
색불이공과 색즉시공은 해석하여 본다면 같은 말 같다. 다른 점이 없는 듯 하다.
허나 무엇인가 뉘앙스가 다르다.
즉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는 것이다. 큰 뜻은 같으나, 작게는 뉘앙스가 다르다.
단순히 강조법이라면 그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면 족할 듯 하다.
“색은 공과 다르지 아니하다”와
“색은 바로 공이다”의 차이가 무엇일까?
“색은 바로 공이다”라는 말은 직설적이어서, 의심의 여지가 없이 색=공이구나 하고 느껴진다.
허나 “색은 공과 다르지 아니하다”는 무언가 “다른 것”도 있는 듯한 뉘앙스가 풍기지 아니하는지?
아마도 색이 공이긴 한데 우리 중생들이 열심히 닦지 아니 하면은 결국 중생은 중생일 수밖에 없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듯 하다.
이러한 차이와 함께, 우리가 너무 색에 젖어 있으니 일단은 가벼웁게 이야기 하고나서, 그 다음에 직설법으로 이야기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도 또한 위와 같다.
색=공이라고 밝혔으면 그것으로 끝날 일이다. 헌데 다시 강조법으로 공즉시색을 순서만 바꾸어서 한 번 더 이야기 했을까?
이러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것을 위에서 이야기 하였다.
즉 색이여 공이 되어보라, 그리고 공이여 다시 색이 되어보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색즉시공 공즉시색부터 이하 쭉 나오는 이야기들이 실상의 이치를 말한 듯하지만, 이치뿐이 아니고, 실제로 삼매의 상태, 절차를 모두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즉 공삼매라는 것은 지관(止觀)중에서 “그칠 지”를 말한다. 모든 생각이 끊어져서 그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즉시색의 “색”삼매는 “관”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무심을 크게 보면 이두가지로 볼 수가 있다.
처음에는 “공삼매(텅빈삼매)”가 되고, 그것이 깊어지면 “색삼매(외연삼매)”가 되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지”가 되고, 다음에는 “관”이 되는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중생)
산은 공이요, 물도 공이요 (공삼매, 지, 색즉시공, 색----->공)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색삼매, 관, 공즉시색, 공----->색)
중생이 보는 산과 물은 자동생각으로 보는 것이다. 즉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허나 공삼매를 지나서 색삼매에 들었을 때 다시 세상이 드러나서 텅비어진 마음에, 텅비어진 “눈”에 비추어지는 산과 물은 무심상태에서 비추어지는 것이다. 결코 개아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무심한 눈이라는 창에 대지산하가 청정하게 “비추어질 뿐”인 것이다. 그리고는 더 깊어지면 “봄”상태가 된다. 이러한 “봄”만이 있는 상태, 올올이 전체의 각성만 있는 상태가 바로 “관”이다.
또한 색이 공으로 되라는 것은
“움직이는 마음”들이여 “고요한마음”이 되어 보라는 이야기가 된다.
헌데 처음에 움직이는 마음들이 고요하여지려면 몸도 꼼짝 말아야 하며, 눈동자 역시 꼼짝 말아야 만이 고요한마음이 된다. 그러하여서 일심이 되고, 나아가 더 깊어지면 온전한 “공”인 공삼매(텅빈삼매)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삼매에 들면 나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진다.
헌데 이러한 공삼매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즉시색으로 다시 세상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는 몸을 움직여도 무심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공즉시색”은 움직임에도 늘 고요한마음이 되어있는, 즉 색에서도 “본래마음” 상태가 되는 것이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느낌, 인식작용, 생각구성(경험, 의도), 생각도 또한 이와 같다.
즉 위에서 색즉시공에서 색이란 중의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현상의 모든 것, 즉 만물이 “색”이다. 또한 “개아의 몸” 또한 “색”이다.
그러므로 둘 다 즉 전체가 모두 바탕의 근본이 “공”이라고 이야기 했던 것이다.
아까 위에서 오온(색수상행식)이 모두 “공”이라고 통론(通論)으로 밝힌 것을 다시 각론으로 “색”으로 통칭하여서 밝힌 것이 “색즉시공”이다.
또한 “색”을 이야기 하였으므로 마찬가지로 “수상행식”도 또한 이와 같다고 각론(各論)으로 밝히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왜 통론으로 “조견오온개공”을 밝히고도 다시 각론으로 또 다시 밝히고 있을까?
흔히 “오온이 개공”하다고 하면은 우리는 아마도 허무로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 몸도 마음도 인식도 감각도 생각구성도 모두 공하다니..........이것이 무슨 말일까?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길까?” 하면서 허무로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다시 밝힌 이유가 “공”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런 것이 아니며, “색의 근본이 바로 공이고, 공의 표현이 바로 색이다”라고 각론으로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색”을 이야기 하였으므로 색“수상행식”중에서 “수상행식” 또한 근본이 “공”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요약한다면 모든 색(나+세상)=공이다.
지금 분명 “나”도 있고 “세상”도 있다. 그런데 왜 “공”이라고 하느냐면, 지금 있는 “세상과 나”의 바탕은 “공”이라는 것이다.
사리자여
다시 사리자를 부른다.
그 이유를 잘 보자. 관자재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 조견오온개공하고서는 도일체고액을 넘어섰다. 그리고는 “사리자여”하고 불렀다. 그리고는 “오온이 개공”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밝혔다. 관자재보살이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의 한단원이 끝난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사리자여”하고 부른다. 이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제 앞선 한 단원을 좀더 자세히 펼쳐서 이야기 하려는 준비 작업이다. 또한 앞에서 사리자여 하고 부른 다음에 이야기한 것이 좀더 “이치적”인 것이라면, 이제 사리자여 하고 부른 다음에는 삼매상태에서 혜가 드러나는 것을 더 자세히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다.
시제법공상이니
이와 같이 현상의 모든 것(제법)의 근본 바탕은 “공”이니.
또는 “제법(현상)은 공의 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즉 실상 바탕근본은 바로 “공”이며, 그것의 표현 즉 상(相)이 바로 현상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둘 다 뉘앙스는 조금 다르지만은
실상은 “공”이며, 그것의 표현인 현상은 바로 상(相) 즉 “색”이라는 것이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다.
즉 현상의 근본 바탕은 “공”이며, 그러한 “온전한 혜”는 생겨나지도 아니하였으며 그러므로 멸하지도 아니한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생겨나지 아니하였으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위에서 이미 에너지는 생겨나지도 소멸하지 아니하는데, 그 이야기가 우주에 에너지가 없다는,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이미 말하였다.
그러므로 근본바탕인 본래마음 즉 “공”은 죽은 공이 아니며, 완전히 깨어있는 본래마음인 것이다. 이것이 생겨난 적이 없으므로 멸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유가 그 본래마음이 관자재에서 보았듯이 “스스로 있는 깨어있음”이기 때문이다.
불구부정은 말 그대로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아니하다는 표현이다.
방편이기도 하다. 반야가 되려면 현상의 모든 것에 좋아함과 싫어함을 짓는 것을 중도로써 떠나야만 한다. 깨끗한 것에는 집착을 하게 될 것이요, 더러운 것에는 저항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할 때 완전한 중도인 “공”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청정심淸淨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청정심” 되려고 공부를 하기도 한다.
허나 “반야인 공”에는 그러한 “청정심”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헌데 이 말을 잘 새겨야 할듯하다.
진실로 청정하지 아니 하단 말인가?
직설로 말하자면은, 진실로 청정하다. 더러움과 청정함을 떠났기에 진실로 청정하다.
허나 그 상태에서는 “청정”하다는 생각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한 생각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이야기 되어지는 것이다.
누군가 “청정자체”가 되었다면 “청정”이라는 생각이나 “청정”이라는 단어도 떠오르지 아니 할 것이다.
청정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은 여전히 “청정”하여지지 아니한 “무엇”이 남아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평화자체”인 사람은 “평화”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아니할 것이다.
평화를 떠올리는 사람은 “평화 아닌 것”과의 비교가 알든 모르든 내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할 때 “평화로운 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증불감은 늘지도 줄지도 아니 한다는 이야기다.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아니한다는 말은 불변이라는 이야기가 되며, 전체라는 것이 성립된다.
“공”의 작용인 에너지마저도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아니하며 불변이다.
그러므로 공(空)은 부증불감이다.
시고 공중무색
이와 같이, 공한가운데는 색이 없다(사라진다).
또는 “고故”라는 단어 자체의 뜻이 (옛날에, 본래, 원래)라는 뜻이 있다.
“시是”는 옳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시고(是故)를 한자에서 어찌 해석하는 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뜻만으로 본다면 “본래 옳다”로 볼 수 있겠다.
“즉 원래 옳듯이, 공한 가운데 들면 색은 사라진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유가 색즉시공에서 색=공이라고 하였다. 색에 상태에 빠지면 그것자체가 “공”인데도 “색”인줄만 알 것이다. 반대로 “공”의 상태에 들면 색=공이기 때문에 “색”은 사라지고 “공”만이 있는 상태로 여겨질 것이다.
그럼으로 요약하면 “공한 가운데 들면 색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가 되겠다.
또는 앞서의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 공상(空相)이며 그것이 원래 옳으므로 공한 가운데 들면 각각으로는 생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며 깨끗하기도 하며 더러웁기도 하고 또한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 그러한 “색”은 모두 사라진다고 보아도 되겠다.
돌아와서 이러하게 공한 가운데 색이 사라진 것이 바로 공삼매(텅빈삼매)에 들은 상태이다.
공한 가운데 현상이 사라진다. 즉 공한상태에 드니까 현상(색)이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지관(止觀) 중에서 처음에 “지”에 들면, 즉 생각이 모두 끊어지면, 공만 가이 없이 벌어진다.
나도 세상도 다 사라지고 공만 가이 없이 벌어진다.
이러한 “공”은 “공”의 모양이 아니다. 다 사라져서 마음이 텅 비었기에, 텅빈마음 즉 무심을 “공”이라고 이름 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심(空心) 즉 무심이 되면 무색(현상은 모두 사라진다)이 된다.
이러한 “공중무색”이 모든 것을 밝힌 통론이다.
이러하게 삼매에 드니 바로 “반야”만 벌어지는 상태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후부터는 “공중무색”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울까봐 각론을 펼치는 것이다.
또한 공무변처에서 세상이 모두 사라져서 인식이 끊어진 것뿐이 아니고, 나중에 비상비비상처를 지나서 해탈한 경지 즉 완성된 단계에서의 공중무색 까지 아우러서 중의(重意)적으로 이야기 된 것이다.
앞의 공무변처(공삼매, 텅빈삼매)에서의 공중무색은 말 그대로 세상이 사라진 것이다.
허나 뒤의 관(觀)은 마음은 온전히 멸하였고 그러므로 눈은 창이 되었고, 세상은 모두 다시 극락으로 청정하게 드러나서 “보는자도 보여지는 대상”도 없이 “봄”만이 있는 상태를 말한 것이기도 하다.
이 상태에서는 드디어 “공 과 색”이 하나 된 상태이다.
즉 공중무색 이거나 색중무공(色中無空, 색은 당연히 공이다. 색중무공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색에 빠져 있으면 공심을 모른다는 의미로 쓴 것이다)이 아니며 공색이 하나 된 상태를 말 하는 것이다.
허나 관자재보살이 말하는 공중무색에는 이미 중의적으로 “공색하나”를 말하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 하련다.
이하 모든 경지 역시 텅빈삼매(공삼매, 공무변처)와 외연삼매의 궁극 또는 해탈한 완전한 경지의 관자체 즉 관자재(觀自在)를 나타낸 것이다. 즉 금강경에 있어서의 “혜안”과 “불안”을 동시에 중의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허나 일단은 텅빈삼매(공삼매, 공무변처)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할 것이며, 또한 그러하게 이해하여 주기를 바란다.
무수상행식
마찬가지로 공중무“색”에서 “색”을 모든 현상으로 간주하여서 이야기가 끝이 난 것이다.
헌데 더 친절하게 어떻게 하여서 현상이 모두 사라졌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색”을 두 가지로 보면 된다고 하였다. 현상전체와 나(몸과 마음)로 보면 된다.
즉 몸도 사라졌고, 느낌도, 인식도, 생각의 구성(의도, 경험)도, 생각도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즉 무수상행식을 한마디로 한다면 바로 무식(無識)이 된다.
생각이 완전히 끊어져서 주관과 객관이 다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무식은 바로 “무심”이라는 이야기다.
마음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몸도, 느낌도, 인식작용도, 생각의구성도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무심은 바로 “무아”라는 이야기와도 같다.
즉 “무아”는 개아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공중무색에서 “색”을 현상만 모두 사라진 것으로 받아들일까 봐, 여기서는 몸에 관련한 “수상행식”도 모두 사라졌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 사라져서 색수상행식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아의 색수상행식이 다 사라졌기 때문에 세상이 사라진 것이다. 즉 마음이 다 끊어져서 사라지고 그러하기 때문에 인식작용도 끊어졌고, 인식작용이 사라졌기 때문에 세상이 사라진 것이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게끔, 각론을 펼치는 것이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수상행식에서 이미 다 이야기 된 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까봐, 다시 한번 각론을 펼치는 것이다.
즉 인식작용이 모두 끊어져서, 작용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눈,귀,코,혀,몸의 인식작용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한 느낌도 생각의구성도 생각도 몸도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생각이 끊어지면 어떠한 상태가 되는지 자세히 밝힌 것이다.
우리가 생각이 끊어진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할까봐서 이러하게 자세히 설명되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러하게 색수상행식이 다 끊어져서 사라졌을 때만이 본래마음이 드러난다는 방법이기도 하다. 즉 색이 사라져야만 본래의 “공심”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색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구름 2005-05-15 3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