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상월원각대조사님과의 첫 만남 [ 3 ]

白道 박만주 2016. 10. 30. 10:42

 

 

 

 

 

 

 

 

                        상월원각대조사님과의 첫 만남 [ 3 ]

 

 

                                        

 

 

 

 

 대조사님과의 첫 만남

 

대조사님과의 첫 만남은 지난 1969년 음 6월에 처음으로 구인사를 방문하여 친견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나는 집에서 하던 장사에 실패하여 무일푼이었으며, 앞일이 막막하여 어쩔 수 없어 자살해야 겠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서 겁을 내고 뽕밭에 숨는 꿈을 꾸었는데 그 말을 들은 동네에 사시는 한 부인이 한번 구인사를 가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내가 살고있던 경산 대구 지역에서 7명이 함께 구인사를 찾게 되었습니다. 첫날 구인사를 가는데 비가왔기 때문에 영춘 강가에서 차는 놔두고 사람들만 태워서 건네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구인사까지 걸어갈 수 밖에 없었는데 온달동굴 앞에 이르니 차가 내려왔습니다.

 

차를 돌리면서 운전기사가 말하기를 “대조사님이 나가서 7명을 모셔오라”고 해서 내려왔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지만 구인사에 도착하니 저녁시간이었는데 밥이 7그릇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못하였습니다.

 

저녁을 마친후 바로 대조사님을 친견하였는데 대조사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3일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게는 5일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아하였지만 대조사님의 말씀대로 5일 기도를 하고 나오면서 다시 대조사님을 친견하였습니다.

 

대조사님께서는 “다음달에 오너라”라고 말씀하시기에 왜 그러냐고 물으니 공부주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오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돌아왔다가 한달후 구인사의 7월 주간에 참석을 했습니다. 이것이 내게는 처음의 안거였고, 이후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76세에 이르도록 한번도 구인사 안거를 거르지 않고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때 주간에는 70여명의 신도들이 참석했는데 나는 제일 뒤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조사님께서 “경산에서 온사람 어디있느냐”고 찾더니 뒤에 서 있는 나를 지목하며 “경산, 니 말이다. 이리 오너라.” 하시며 나를 불러 대조사님의 앞에 앉도록 하시고 소구소망을 물으셨습니다.

 

이에 “나는 장사꾼인데 실패했으며, 앞으로 돈을 벌었으면 합니다.”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대조사님께서는 “너는 공부를 해야한다. 내일부터 여기서 공부를 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옆에 서 계시던 김기성 스님과 도명스님에게 “이사람 설선당에 앉혀놓고 주간 끝날 때까지 감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김기성스님은 나를 설선당 4호실로 방을 정해주셨는데 내 자리 옆에 계시는 풍기 부석사에서 오신 김일수라는 노인에게 나를 인계하고는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룻동안 정진을 해 보니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자고 일어나서는 살며시 설선당을 빠져나왔습니다.

 

설선당만 나오면 힘든 기도를 안 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에 멀리 도망가지는 않고 사무실 뒤 기도실에 숨어있었습니다. 오후 4시쯤 되어 위에는 한복을 입고 바지는 양복을 입은 남대충스님께서 기도실로 찾아와 “경산에서 온 사람 있어요.”하고 물으며 나를 찾아다녔습니다. 내가 나가자 “당신 때문에 구인사 경내가 뒤집어 졌다. 대조사님께서 찾아오라고 해서 야단이 났다.”고 하시며 왜 내뺐느냐고 하셨습니다.

 

나를 데리고 가시며 자신을 대충스님이라고 소개하시고는 큰스님의 대명을 받아 당신을 찾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조사님께서 “집으로 데려가서 불법을 잘 설명해서 설득시키라.”고 하셨다며 나를 대충스님의 여의생 저택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게 구인사의 창건에서부터 대조사님의 가르침과 불법의 근본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설법하시며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꼭 불법을 공부해야할 사람이다. 앞으로 내말을 듣고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무사히 한달주간의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농장에 사과나무를 심다

 

이렇게 시작된 구인사와의 인연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후 이듬해에 구인사에 가니 대조사님께서 “오늘 나랑 농장에 가자.”고 하셨습니다.

 

농장 가던 중에 바위 위에 앉으셔서 당시의 시국에 대한 얘기를 하시며 “어려운 때일수록 불사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만 공부가 될 수 있다. 언덕을 오를 때 오르막 뒤에서 조금이라도 밀어주는 것이 있으면 훨씬 수월하게 언덕을 오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사를 많이 하면 모든 운이 네가 어려울 때 도와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돈도 없는데 불사를 할 수 있습니까.”하니 대조사님께서 할 수 있다고 하시며 농장 책임자로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농장에 무엇을 심으면 좋겠냐고 물으시기에 나는 “사과 나무를 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농장에 사과나무 700그루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농장에 사과나무를 심고 관리를 하며 2년 반동안 농장의 책임자로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구인사 농장에서 일하면서 저는 집안을 전혀 돌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저의 마음을 알았는지 대조사님께서는 농장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게 말하기를 “절에 들어와서도 나가서도 불사를 해야한다. 집안은 걱정할 것이 없다. 불사에 마음을 쓰면 누군가가 먹고 살게 해줄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불사에 임하고, 남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러한 대조사님의 말씀 때문인지 4남 1녀의 아들들은 내가 절 일을 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도 아무 탈 없이 성장하였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지회를 맡아 포교 일선에 나섰습니다. 저의 집이 있는 경산을 비롯하여 청도와 영천 등 3개지회를 맡아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렇게 근 10년 동안 만사를 제켜놓고 포교에만 전념하며 살았습니다. 포교를 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대조사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역경을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양지회를 창립하고는 이제 지회일에서 손을 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대조사님께 말씀을 드리니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회일을 그만둘 것 같으면 또 좋은 일이 있다며 남에게 베푸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팡이를 만들어 중생에게 나눠주다

 

남에게 베푸는 것이 중생들에게 이로움을 주리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보시를 실천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회일을 그만두겠다는 저에게 대조사님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지팡이를 만들고, 이 지팡이들을 몸이 불편한 분들에게 나누어 주라. 하다못해 산에가서 약초를 캐다가 약을 만들어 아픈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중생들에게 지팡이를 나누어주고, 아픈 사람에게 약을 만들어 주는 공덕은 매우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대조사님의 가르침에 따라 10년 넘게 지팡이를 만들고 약재를 만들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힘이 닿는대로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4000여개의 지팡이를 만들어 구인사를 찾는 어르신들에게 보시를 하였고, 경산의 경로당 어르신들에게도 지팡이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구인사와 경산에서는 저의 지팡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되었고, 이로 인해 경산시에서 표창도 많이 받았습니다.

 

대조사님께서는 언젠가 나를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정해라, 마음을 정해야만 도가 될 수 있는 길이 생긴다. 그리고 마음을 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를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다.”고 이르시며 남에게 베푸는 일을 해야만 법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증명해 주셨습니다.

 

당시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한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병으로 고통받는 많은 신도들을 손으로 만져서 고쳐주곤 하였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찾아왔습니다.

 

이것을 아셨는지 대조사님께서는 나를 불러 “신통을 부리지 말고 자신의 불성을 찾아 깨닫는데 힘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대조사님의 이 말씀 이후로는 한번도 병을 치료하는 일을 다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법을 구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삶은 대조사님의 말씀을 실천 구현 하는데 그 의미를 두고있습니다. 마음을 바꾸지 못하면 그 삶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처음 3년 동안 구인사 농장 관리인으로 있으며 살았는데 비록 법호를 받지는 못했지만 수행하는 자세만은 출가자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2시간 이상을 자본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저의 모습을 보시고 대조사님께서 “너를 자식같이 믿는다.”고 하셨던 말씀은 평생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100사람보다 그 놈 하나를 불러 포교하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전해듣고 대조사님의 사랑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대조사님께서 열반에 드셨지만 생전에 주셨던 가르침은 생생하게 남아 삶의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깨달으신 분으로써 천하를 마음대로 운용하셨던 대조사님의 모습을 생각할 때 문득 부처님의 법이 얼마나 지중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구인사 주차장에 폭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밖으로 바위가 삐져 나와 있고 그 위로 물이 흘러 떨어졌기 때문에 그 밑으로 방호가 하나 생겨난 것입니다.

 

그곳에는 10여명이 들어가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이곳에 시도 때도 없이 점쟁이들이 와서 촛불을 켜놓고 빌곤 했습니다. 이것을 구인사를 찾는 신도들이 보고 매우 언짢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70년도의 어느날 아침 대조사님께 이 얘기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대조사님께서 “신도들이 기분 나빠하면 없애버리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려가다 보니 그 거대한 바위가 쇠톱으로 자른 것처럼 반듯하게 잘려서 나뒹굴고 있었고, 방호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습니다. 대중들이 그것을 잘라낸 것도 아니고, 벼락을 맞아서 잘려나간 것도 아니니 사내 대중들은 모두가 대조사님께서 법력으로 바위를 자른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대조사님에 대한 대중들의 믿음은 이처럼 확고하고 굳건하기만 하였습니다.


 

한국에 성인이 나셨다

 

72년도 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서울의 동국대학교 교수인 김지견 박사께서 대조사님을 찾아와 말씀하신 것을 제가 옆에서 듣고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71년에 일본에서 동양철학박사 회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회의에 우리나라에서는 김수학, 조명기, 김지견 박사가 도쿄에 가서 회의에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강당에서 인도의 토인비 박사가 강의를 하시는 중에 “한국에서 오신 박사님 계십니까. 한국에 큰 대성인이 오신줄을 아십니까.”라고 물었는데 김지견 박사가 “그런 얘기 못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토인비 박사가 “한국에 가면 그 성인을 찾아보십시오. 그 성인은 종교를 통일하고 천하를 통일할 미륵 부처님인데, 그런 위대한 분이 한국에 떨어지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귀국한 박사님은 1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분을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수행이 되어야 성인을 찾을 수 있지, 내가 수행이 안되어 있는데 어찌 성인을 찾을 수 있겠는가.”하고 자조하였다고 합니다.

 

그후부터 1년동안 기간을 정해 수행에 들어가 마치는 날이었습니다. 때는 72년 동짓달 이었는데 학교의 급사가 5일의 휴가를 내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심코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구인사 소백산에 산 부처님이 중생제도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날이 동짓달 28일이라서 이를 축하드리기 위해 내일 구인사에 가려고 합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지견 박사가 “나도 가볼 수 있느냐.”고 해서 처음으로 구인사를 방문(27일 밤) 하였다고 대조사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구인사는 대조사님의 생신에 맞추어 광명당의 낙성식 행사를 성대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지견 박사는 자신이 구인사에 와서 대조사님을 뵙게된 인연을 대중들에게 강의함으로써 상월원각 대조사님이 이 땅에 나투신 대성인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제 대조사님의 육신은 가셨지만 그 법신은 구인사에 상주하고 계시며, 그 가르침은 감로수가 되어 오늘의 중생들을 제도해 주고 계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대조사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따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대조사님의 법을 받은 불자들의 의무라 할 것입니다. 생을 다하는 그날까지 대조사님의 은덕을 기리며 더욱 열심히 정진해 갈 것입니다.

 

<marquee>호랑이발바닥  | 03.01.18  http://cafe.daum.net/guinsa/6Wp/42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http://blog.daum.net/mjpark39/16404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