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락아정(常樂我淨)
지금까지 불교에서 강조해 온 무아설은 방편이다.
이제부터는 항상하고, 즐겁고, 참 나이고, 깨끗하다는 생각을 닦아라.
“때는 사월 초파일이었다. 태자가 세상에 태어나서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손을 들어 말하기를 ‘하늘 위나 하늘 아래 나 홀로 높도다. 이 세상은 다 괴로운 것, 내가 장차 편안케 하리라’라고 선언하였다(수행본기경).”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이 선언은 유명한 글귀로서 불교를 모르는 일반인이라도 다 알고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불타 석가모니는 평생을 통해 ‘나 홀로 존귀하다’라는 말과는 정반대로 무아설(無我說)을 강조하시고, 무아(無我)로써 수행의 근본을 삼았는데, 이제 열반에 즈음하여 다시 항상된 ‘나’가 참된 진리라고 하시니, 그러한 모순되고 상반되는 듯한 말씀의 본 뜻이 어디 있는가.
이제 열반경이나 기타 대승 경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으나, 주인공이 와서야 이러한 비밀은 상세히 밝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석가세존께서는 이제까지의 무아설은 가짜 보배이니 버려버리고 지혜있는 사람이 물 속에서 건져 올리는 것과 같은 진리가 진짜 보배라고 강조하신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것이 감춰졌던 보배인가?
◇ 대발연반경 2권 수명품 1-2 26쪽“이때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네 가지 뒤바뀜을 벗어난 이는 항상하고, 즐겁고, 참 나이고, 깨끗함을 알 수 있다 하셨는데 여래께서 이제 영원히 이 네 가지 뒤바뀜이 없어져서 이미 항상하고, 즐겁고, 참 나이고, 깨끗함을 이루셨으면서도 어찌해서 한 겁(劫)이나 반 겁을 머무르시면서 저희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네 가지 뒤바뀜을 여의게 하지 아니하시고 저희를 버리고 열반에 들려 하시나이까.
여래께서 만일 생각을 돌이키어 다시 가르쳐 주신다면 우리들도 지극한 마음으로 받들어 익힐 것이오나,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다면 저희들이 어떻게 이 삼독(三毒)의 몸과 함께 있으면서 성불의 법을 닦겠습니까? 저희들도 마땅히 부처님을 따라서 열반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모든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그런 말을 하지 말지어다. 내가 가진 위없는 바른 법을 이제 모두 마하가섭에게 부촉하였으니, 이 가섭은 너희들의 큰 의지처가 되리가. 마치 여래가 모든 중생의 의지할 데가 되듯이 마하가섭도 너희들의 의지할 데가 되리라. 마치 대왕이 외출할 때에 국가의 온갖 일을 대신에게 부촉하듯이 여래도 그러하여 바른 법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였느니라.
너희들이 먼저 익히던 무상하고 괴롭다는 생각은 진실하지 아니하다. 마치 봄철에 여러 사람이 큰 연못에서 목욕하기도 하고 배를 타고 놀기도 하다가 유리 보배를 깊은 물속에 빠뜨려 잃어버리고 여러 사람이 물에 들어가서 그 보배를 찾을 적에 제각기 돌이나 기왓장이나 나무나 자갈을 집어들고 유리보배를 찾은 줄 여기면서 기쁜 마음으로 가지고 나와서 보고야 참 보배가 아닌 줄을 아나니, 보배는 아직도 물속에 있어서 보배의 힘으로 물이 맑아지므로 여러 사람들이 물속에 있는 유리 보배 보기를 공중에 밝은 달을 우러러 보는 듯하는데 이때 대중 가운데 어떤 지혜 있는 사람이 있다가 방편으로써 천천히 물에 들어가 보배를 찾아냄과 같으니라.
너희들 비구도 그렇게 무상하고, 괴롭고, 내가 없고, 부정하다는 생각을 닦아 익힌 것은 참된 이치가 되지 못한다. 마치 여러 사람이 돌이나 기왓장이나 나무나 자살을 가지고 진짜 보배라고 생각하듯 하지 말고, 마땅히 좋은 방편을 배우되, 가는 곳마다 항상하고, 즐겁고, 참 나이고, 깨끗하다는 생각을 닦을 것이며 또 먼저 익히던 네 가지 법은 뒤바뀐 것임을 알아야 하니, 진실한 생각을 닦으려 하거든 저 지혜있는 사람이 보배를 집어내듯이 참 나이고, 항상하고, 즐겁고, 깨끗하다는 생각을 닦을 것이니라.”
時諸比丘白佛言 世尊 如佛所說離四倒者 則得了知常樂我淨 如來今者永無四倒 則已了知常樂我淨 若已了知常樂我淨 何故不住一劫半劫敎導我等令離四倒而見放捨欲入涅槃 如來若見顧念敎勅 我當至心頂受修習 如來若入於涅槃者 我等云何與是毒身同共止住修於梵行 我等亦當隨佛世尊入於涅槃 爾時佛告諸比丘 汝等不應作如是語 我今所有無上正法悉以付囑摩訶迦葉 是迦葉者 當爲汝等作大依止 猶如如來爲諸衆生作依止處 摩訶迦葉亦復如是 當爲汝等作依止處 譬如大王多所統領 若遊巡時悉以國事付囑大臣 如來亦爾 所有正法亦以付囑摩訶迦葉 汝等當知 先所修習無常苦想非是眞實 譬如春時有諸人等在大池浴乘船遊戱失琉璃寶沒深水中 是時諸人悉共入水求覓是寶 競捉瓦石草木沙礫 各各自謂得琉璃珠歡喜持出乃知非眞 是時寶珠猶在水中 以珠力故水皆澄淸 於是大衆乃見寶珠 故在水下 猶如仰觀虛空月形 是時衆中有一智人 以方便力安徐入水卽便得珠 汝等比丘 不應如是修習無常苦無我想不淨想等以爲實義 如彼諸人各以瓦石草木沙礫而爲寶珠 汝等應當善學方便在在處處常修我想常樂淨想 復應當知先所修習四法相貌悉是顚倒 欲得眞實修諸想者 如彼智人巧出寶珠 所謂我想常樂淨想
◇ 해설 이 장에서는 석가세존이 당신의 깊은 뜻은 상수 제자인 마하가섭존자에게 다 위임했다는 언급이 있으며, 이제껏 닦아온 무아설은 임시방편이요 참된 보배가 아니니, 항상되고, 즐겁고, 참 나이고, 깨끗한 네 가지 진리가 참되고 의지할 곳이니 그 진리를 따르라고 분부하시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무아(無我)설과 상락아정(常樂我淨)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불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가장 큰 특징을 갖는 점이 무아설에 있으니 그것은 즉 이 세상이 고통이며 무상하며 변화인 것이며, 그것은 사람의 망상 번뇌와 신체의 생멸 때문인 것이다. 이 망상 번뇌를 소멸하여 ‘나’라는 의식이 없을 때 해탈하여 청정한 진리 세계에 들어간다는 가르침이니 바로 이것이 석가세존의 핵심적 가르침이며, 이제껏 불교 체계의 큰 틀을 형성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무아설은 거짓이요 바른 진리가 아니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참다운 도(道)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무아설은 아직도 완전히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불교계에서 상락아정(常樂我淨)에 대한 이해는 여래의 진리적인 속성인, 관념적으로만 이해되었으나 이제 주인공 보살마하살이 출현한 이후, 그 뜻은 새로운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며, 현재 이러한 깊은 비밀을 밝혀주는 것이니 사람이 현재 몸으로 죽지 않는 것이 ‘참 나’의 속성이요,
‘나’라는 일상적인 생각이 바로 사망의 근원이기 때문에 거짓 ‘나’를 극복하고, 거짓된 ‘나’라는 의식을 철저히 없애버릴 때 비로소 생로병사와 윤회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주창하시니 기존 불교의 무아설보다 더욱 철저하고 완성된 궁극의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석가세존도 이 열반경에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미래세에 다시 설할 자가 있다”고 말씀한 것이다. 현재 보살마하살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 보살마하살의 말씀
◇항상항(常)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므로 인간의 마음에 의해서 이 세상 만물이 파멸되기도 하고 생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인간이 아름다운 마음으로 영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될 때 영원의 몸으로 변하여 세상 만물도 영원토록 썩지 않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화(化)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즐거움(樂)
“‘하나’의 마음은 즐겁고 기쁘고 항상 만족하고 희열이 차고 넘치는 고로 굴곡이 없으므로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마음인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의 마음을 모시는 자 천 년이 하루 같고 억만 년이 하루 같은 것이다.”
◇참 나(我)
“사람 속에 있는 생명의 물질이 쏟아져 나와 모든 만물에 다 스며들어가 만물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을 지배하고 있는 만물의 영장인 것이며, 사람은 원래 하나님이었으며 사람 마음이 본래 부처님 마음인 것이다.”
◇깨끗함(淨)
“‘하나’의 마음은 오욕칠정을 벗어난, 털끝만치도 물들려야 물들지 않는 그런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인 것이다.” 이 말씀을 들어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석가세존이 말씀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핵심도 사람 마음이 우주적이고 절대적인 아(我)가 되어 우주 만물의 주인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석가세존이 태어나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말한 ‘나’도 인간 개개인이나 개체적인 석가모니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우주의 절대적인 주인공 또는 진리 자체를 뜻한 것이니, 삼천 년 후까지도 내다본 선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