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 天台止觀 체계와 四種三昧의 종합적 성격 -

白道 박만주 2017. 4. 28. 09:01

 

 

 

 

 

                                                   

                  

 

 

  - 天台止觀 체계와 四種三昧의 종합적 성격 -


       李 丙 旭/ 고려대 철학과 강사



Ⅰ. 서론


논쟁이 많을수록 학문은 그만큼 발전한다. 학문은 논쟁이라는 거름 위에 피는 한 떨기의 화려하지만 연약한 꽃망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 80년대 후반에 일었던 불교학계의 논쟁은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이었고, 90년 후반에 들어와서 일본의 비판불교에서 주장하는 여래장은 불교사상이 아니라는 견해에 대해 비판적 검토가 있었다. 지난여름 백양사에서 무차선대회가 있었고, 이는 선풍진작과 관련이 깊은 것이라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현재는 간화선수행{{천태학의 실천행 }}과 위빠사나 수행의 우열을 가리는 문제가 학계를 포함한 불교계 전체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간화선을 주장 하는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한국불교의 전통으로서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고, 그 수행법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위빠사나 수행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친히 수행하던 방법임을 강조한다. 불교에서 가장 큰 권위는 부처님 아닌가? 따라서 부처님이 수행한 것이라면,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표준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간화선의 전통을 고수하느냐, 아니면 부처님의 수행법을 새롭게 도입하느냐 하는 문제가 서서히 우리 관심의 영역에, 막 결혼한 신부와 같이, 그 수줍은 자태를 나타내 보인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천태지관은 바로 간화선과 위빠사나 논쟁의 맥락에서 바라보면 보다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수행법이다. 천태지관 수행법은 천태지의(天台智 , 538∼597)가 그 방법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 천태지관은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법의 장점을 다 아우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간화선 수행은 원래의 목적과 달리 현재에는 일부 선수행자만이 닦을 수 있는 편협한 수행체계로 점차 바뀌어 가고 있고, 위빠사나 수행법은 인도의 수행법이자, 동남아시아 수행법이지, 중국문화권의 수행법은 아니므로, 아직 그 효용성은 검증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진리는 어디에도 통하는 것이므로 문화권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본질에서 벗어난 지적같이 보이지만, 적어도 대중화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그 문화권과 결부된 것이 더 절실히 요청되고, 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파급력도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문화권에 속해 있는 수행법이면서도, 우리 한국 불교계에서는 주위를 배회하는 아웃사이더에 불과했던 천태지관을 살펴보는 것은, 간화선 수행이 가지는 장점을 살리면서 그 단점을 최소화하고, 위빠사나 수행법을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는 것인지 검토할 수 있는 완충지대 역할도 할 수 있는 좋은 수행체계라고 판단된다. 현재의 시점에서 종파의 입장을 벗어나서 판단한다면, 천태지관에 대해 우리가 요청하는 것은 이 정도가 아닌가한다.


그런데 문제는 천태지관을 전부 다루기에는 필자의 역량도 모자라고, 원고의 매수도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에 여기서는 2장에서 천태지관의 대체적 윤곽을 더듬어 보고{{ ) 천태지관의 전체적인 윤곽을 서술한 글은 다음과 같다. 오지연『천태지관이란 무엇인가』 (연기사, 1999년) 지창규 「천태불교의 수행체계 -천태사교의를 중심으로」(『청호불교논집』1집, 1996년, 청호불교문화원) pp.251∼295.


이 중에서 지창규의 주장 중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천태사상은 교문(敎門)과 관문(觀門)으로 구분되는데, 교문인 5시 8교를 종합·형식·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으므로, 관문도 그렇게 나눌 수 있다는 주장에는 찬성하기 어렵다. 그는 종합에 4종삼매를 두고, 형식에 3종 지관을, 내용에 4교지관을 위치시키고 있는데, 이 주장에는 무리한 점이 있다. 우선 4종삼매는 3종지관 중, 원돈지관에 속하는 것이지, 점차지관이나 부정지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합에 4종삼매를 둘 수는 없는 것이다.


}}, 3장에서 천태지관의 4종삼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천태의 4종삼매에 대한 국내의 논문은 다음과 같다. 박혜훈 「천태지의의 사종삼매에 관한 연구」(원광대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학위논문, 1996년 10월) 김종두 「천태지의의 사종삼매에 관한 연구」(동국대 대학원 선학과 석사학위논문, 1996년 12월) 이영자 「천태실천론의 사종삼매 -그 다양성과 회통성」(『천태학연구』1집) pp.115∼144.


위 글에서 이영자교수는 상좌삼매는 조동종의 좌선과 같고, 상행삼매에는 정토종의 성격이 있고, 반행반좌삼매에서 방등삼매에는 밀교적 색채가 들어가 있고, 비행비좌삼매는 선종의 남돈선(南頓禪)의 선풍(禪風)과 유사한 점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부끄럽지만 이 글을 준비할 때, 이영자 교수의 논문을 보지 못한 채, 논문을 쓰게 되었다. 논문을 발표하고 나서, 이영자 교수의 논문과 이번에 싣게 될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점이 거의 같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이영자 교수의 논문의 문제의식과 거의 비슷하며, 차이점은 비행비좌삼매를 간화선과 연결시켜서, 그 점을 위빠사나수행과 간화선수행의 차이점의 완충지대로 보고 있는 대목이고, 그리고 비행비좌삼매 부분에서 '모든 나쁜 일을 4운으로 관찰하는 대목'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을 시도한 대목이고, 그리고 결론부분에서 상좌삼매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 점이다. }}. 이 글에서는 천태의 4종삼매의 종합적 성격을 밝혀내어 오늘날같이 여러 부류의 사람을 거두어들이기에는 적합한 수행체계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아이디어를 줄 수 있는 수행법임을 말하고자 한다.



Ⅱ. 천태지관의 체계


천태지관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① 점차지관(漸次止觀), ② 부정지관(不定止觀), ③ 원돈지관(圓頓止觀)이다. 이 중, '점차지관'은 단계 별로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체계이고, '부정지관'은 일정정도는 단계적 수행을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단계를 초월해서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 수행체계이다. 그에 비해, '원돈지관'은 처음부터 단계 없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수행체계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수행법은 바로 원돈지관이고, 이 원돈지관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지관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으로 25방편이 있고, 둘째, 지관에 들어가는 형식인 4종삼매가 있고, 셋째, 깨달음을 얻는 구체적 방법인 10경10승관법이 있다. 여기서는 우선 첫째와 셋째에 대해 간단히 윤곽을 그리고, 둘째 내용에 대해서는 장을 바꾸어서 자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1. 25방편


25방편은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이 25방편은 다시 5가지로 구분된다. 이 중, 다섯 가지 연(緣)을 갖추는 대목은 25방편의 총론에 해당하는 것이고, 다섯 가지 욕심을 경계하고 오개(五蓋)를 버리는 대목은 부정적인 마음씀을 버리는 것이고, 다섯 가지 일을 조복하는 대목은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고, 다섯 가지 법을 행하는 대목은 수행에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일을 하라는 것이다. 이 내용을 살펴본다.


1) 다섯 가지 연을 갖춘다[具五緣] ① 계율을 청정히 지킨다[持戒淸淨].삼귀의, 5계, 250계는 부수적인 계율[客戒]이고, 여기서는 근본 10종계를 지키는 것이다{{)『마하지관』4권 상, (『대정장』46권, p.36 상)}}.


② 의복과 음식을 갖춘다[衣食具足]. 옷은 몸의 부끄러운 부분만 가리면 되고, 음식은 목숨을 유지시켜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정도면 된다. 몸이 편안해야 도(道)도 닦을 수 있다{{)『마하지관』4권 하, (『대정장』46권, p.41 하)}}.


③ 고요한 곳에 한가롭게 거처한다[閑居靜處]. 이것은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깊은 산 속에 사는 것이고, 둘째, 산 속은 아니지만, 세속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서 세간의 여러 풍광으로 인해서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곳이다. 셋째, 한가하고 조용한 절에 거처하여 문을 닫고서 고요히 앉아서 바르게 사유한다{{)『마하지관』4권 하, (『대정장』46권, pp.42 중∼하)}}.


④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모든 헛된 노력을 그친다[息諸緣務]. 이것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생활연무(生活緣務)는 집안을 다스림과 살아가는 방도에 골몰하는 것이고, 둘째, 인사연무(人事緣務)는 경사스러운 일과 불행한 일 등, 사람과 왕래하는 일에 빠져드는 것을 말한다. 셋째, 기능연무(技能緣務)는 의방(醫方), 복서(卜筮), 주술(呪術)하는 것을 의미하며, 넷째, 학문연무(學問緣務)는 경론(經論)을 독송하지만 문답하여 승부를 가리는 것이다{{)『마하지관』4권 하, (『대정장』46권, pp.42하∼43상)}}.이상의 네 가지 무의미한 노력을 그치는 것이 '식제연무'이다.


⑤ 도를 닦는데 도와주는 사람을 구한다: 선지식(善知識)선지식(善知識)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외호선지식(外護善知識)은 공부하는 데 필요한 것을 보급하여 주는 분이고, 둘째, 동행선지식(同行善知識)은 함께 공부하는 분이며, 셋째, 교수선지식(敎授善知識)은 진리를 가르쳐 주는 분이다{{)『마하지관』4권 하, (『대정장』46권, pp.43 상∼중)}}.


2) 다섯 가지 욕심을 경계한다[呵五欲]오욕(五欲)은 색욕(色欲), 성욕(聲欲), 향욕(香欲), 미욕(味欲), 촉욕(觸欲)이다. 이 다섯 가지 욕심은 인식기관이 애착을 일으키는 인식대상에 대해 욕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다섯 가지 욕심을 경계하는 것이다{{)『마하지관』4권 하, (『대정장』46권, pp.43 하∼44 상)}}.


3) 오개를 버린다[棄五蓋]'오개'에서 '개(蓋)'는 마음을 덮고 얽어매어 마음이 혼미해져 선정과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오개를 버려야 한다. 오개는 첫째 탐욕(貪欲)이고, 둘째 진에(瞋 )이며, 셋째 수면(睡眠)인데, 이는 마음을 어둡게 하여 적극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게 하고, 잠자게 하는 것이다. 넷째 도회(掉悔)인데, 이는 마음을 어지럽게 들뜨거나 근심걱정을 하며 후회하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 의(疑)이다. 의심은 세 가지로 더 구분된다.


① 자신을 의심하는 것[疑自]인데, 이는 나의 몸은 도를 이룰 수 있는 재목이 아니라고 낮추는 것이다. ② 스승을 의심하는 것[疑師]인데, 이는 이 사람의 몸과 입은 나의 마음에 맞지 않으니 어찌 깊은 선정과 좋은 지혜를 가질 수 있겠는가 라고 스승을 의심하는 것이다. ③ 셋째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疑法]인데, 이는 받은 법(法)이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이다{{)『마하지관』4권 하, (『대정장』46권, p.45 상) }}.


4) 다섯 가지 일을 조복한다[調五事]다섯 가지 일을 조복하는 것은 조식(調食), 조면(調眠),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순서대로 살펴보자.


첫째, 조식(調食)은 병(病)과 수면과 번뇌를 증진시키는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하고, 몸을 편안히 하고 질병을 고쳐주는 음식은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조면(調眠)은 수면은 눈의 식(食)이니 고통스럽게 절제할 수 없고 번뇌를 증진시켜 공부를 손실(損失)시키므로 다시 방종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조신(調身)과 조식(調息)과 조심(調心), 이 세 가지는 『마하지관』에서는 하나로 묶어서 취급한다.


조신(調身)은 느슨하게도 하지 않고 팽팽하게도 하지 않는 것이고, 조식(調息)은 숨이 막히지도 않고 미끄럽지도 않게 하는 것이며, 조심(調心)은 그 마음이 가라앉지도 않고 뜨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거친 것을 조절하여 미세한 것으로 들어가 선정(禪定)가운데 머무는 것이니, 조절하지 못한 곳을 깨달아서 잘 살펴서 조절하고 안온하게 해야 한다{{)『마하지관』4권 하, (『대정장』46권, pp.47 상∼중)}}.


5) 다섯 가지 법을 행한다[行五法]다섯 가지 법을 행하는 것은 욕(欲), 정진(精進), 염(念), 교혜(巧慧), 일심(一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마하지관』에서는 다섯 가지로 분류해서 각기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첫 번째인 초선(初禪)에 관한 것만 소개하겠다. 첫째, 욕(欲)은 욕계(欲界)에서 초선(初禪)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정진은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욕계는 지나가기 어려우니 정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염(念)은 항상 초선을 염(念)하고, 다른 나머지 일은 염(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혜(慧)는 초선을 존중하여 귀히 여길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욕계는 중생을 속이므로 증오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섯째, 일심은 이 법(法)을 닦을 때, 일심으로 뜻을 오로지 하고 다시 다른 인연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마하지관』4권 하, (『대정장』46권, p.48 중)}}.



2. 십경십승관법 : 깨달음을 이루는 방법


10경10승관법에서 10경은 지관의 대상인 열 가지 경계이고, 10승은 지관을 닦는 사람이 행하는 열 가지 방법이다. 10승이라 한 것은, 이것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마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0경의 하나 하나에 대해서 십승관법을 행하는 것이 10경10승관법이다{{) 2장 2절의 내용은 이병욱 「중국불교양대산맥의 인간이해」(『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 예문서원, 1998년, pp.145∼175)의 내용 중, 천태사상에 관한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


1) 십경(十境) : 관찰할 대상 우선 10경부터 살펴보자{{)『마하지관』5권 상 (『대정장』46권, pp. 49중∼하 정리) }}.


① 음계입경(陰界入境)이다. 음은 오음(五陰)이고, 계(界)는 십팔계(十八界)이며, 입(入)은 십이입(十二入)이다. 그런데 이 음계입경이 처음에 제시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현전(現前)의 의미인데, 늘 눈앞에 펼쳐 있다는 뜻이다. 즉, 음계입경은 늘 눈앞에 펼쳐져 있으므로, 항상 관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수행인의 몸은 음계입경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맨 처음 이것을 관찰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경(經)에 의지한다는 것인데, 이는 음계입경이 앞에 오는 이유를 경전에 근거해서 설명한 것이다. ② 번뇌경(煩惱境)이다. 이는 오음의 과(果)를 관찰하면, 비로소 번뇌가 발동하는 것이다. 보통 때에도 우리 마음속에 번뇌가 움직이고 있지만,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다가 오음을 관찰할 때, 그 속에서 번뇌가 활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음계입경 다음에 번뇌경이 일어나는 것이다.


③ 병환경(病患境)이다. 병을 이루는 요소를 살펴보면,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四大)는 몸의 병을 이루는 것이고, 탐(貪)·진(嗔)·치(癡)의 삼독(三毒)은 마음의 병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평소에는 섞여 있어서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번뇌경으로 인해서 사대가 어지럽게 날뛰고, 그것이 맥과 장기에 충격을 주어 병환이 생긴다. 이것이 병환경이다. ④ 업상경(業相境)이다. 이는 병환이 제거된 다음에, 몸이 튼튼해져 업을 짓는 것이다. 즉, 선을 행하기도 하고, 악을 행하기도 해서, 업을 짓는다. 그래서 병환경 다음에 업상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업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업이 있다.


⑤ 마사경(魔事境)이다. 이는 도를 장애하는 경계이다. 앞의 업상경에서 수행자는 악이 생기면 없애려고 하고, 선이 생기려고 하면, 그것을 더욱 확장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마(魔)는 수행자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서, 도를 장애하는 경계를 나타낸다. 그래서 업상경 다음에 마사경을 말하는 것이다. ⑥ 선정경(禪定境)이다. 이는 정신이 통일되어 삼매에 들어간 상태에서 생기는 것이다. 즉, 마사경을 넘어서면 공덕이 생기는데, 마의 유혹을 이겼으므로, 이번에는 모든 선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정은 과거에 닦은 인(因)에 의해서 생긴다. 그리고 선정에 들어간 모습도 매우 다양하다. ⑦ 제견경(諸見境)이다. 이는 선정경에서 삿된 지혜가 생김을 말하는 것이다. 즉, 법을 잘못 관찰해서 뒤집어진 생각인 전도(顚倒)를 일으킨다.


그러면 삿된 생각이 넘치는데, 이것이 제견경이다. ⑧ 증상만경(增上慢境)이다. 이는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즉, 앞의 제견경에서 생긴 치우친 견해가 잘못된 줄 알아서 집착을 그치면 욕심인 탐(貪)과 성냄인 진(瞋)이 일어나지 않지만, 소질을 뜻하는 근기가 둔한 사람은 이 탐과 진이 없는 상태를 불교의 최고 경지인 열반으로 착각한다.


그 결과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했다고 잘못 생각한다. 이것이 증상만경(增上慢境)에 빠진 것이고, 이런 사람이 증상만인이다. ⑨ 이승경(二乘境)이다. 이는 이승의 견해에 떨어지는 것이다. 즉, 제견경과 증상만경을 넘어 서서 마음이 고요한 경지에 들어갔더라도,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은 과거세에 익힌 소승의 기질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대승의 마음을 일으키지만, 결국 이승에 떨어지고 만다. 이것이 이승경이다.


⑩ 보살경(菩薩境)이다. 이는 보살이 떨어지지 쉬운 경계이다. 즉, 보살이라면 본래부터 서원한 본원을 중시해서 이승과 같이 공(空)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방편도를 중시하는 보살의 경계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 보살에도 차별이 있다. 즉, 6바라밀을 조금 수행한 보살은, 깊은 가르침을 들으면 오히려 비방을 하고, 통교(通敎)보살은 진정한 도에 들어가지 못했으면, 깊은 가르침을 들을 때 오히려 비방을 한다.


그러나 별교(別敎)보살은 처음부터 깊은 법이 있는 줄 알고, 비방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별교보살이 비방을 하지 않더라도, 아직 방편의 가르침인 권교(權敎)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이 모든 보살이 권교의 선근(善根)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보살경을 말하는 것이다. 이 10경 중, 음계입경은 항상 현전한다. 즉, 음계입경은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간에, 관찰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나머지 9경은 일어나야 관찰할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 10경 하나 하나에 10승관법이 행해진다. 그래서 10승10경관법이라 한다.


2) 십승관법(十乘觀法): 관찰하는 방법 앞에서 10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면 10승관법에 대해 살펴보자. ① 관부사의경(觀不思議境)의 내용은 일념삼천설과 삼제원융이다. 우선 일념삼천설부터 살펴본다. 일념삼천에서 일념은 일순간의 마음·일찰나의 마음이다.


그리고 일념삼천은 일념 가운데 삼천의 세계가 갖추어 진다는 천태종의 근본적인 세계이론이다. 삼천의 숫자는 십법계(十法界)가 십법계를 갖추고, 일법계가 십여시(十如是)를 갖추니, 백법계(百法界)·천여시(千如是)가 되고, 여기에다 세 종류의 국토(國土)를 곱하면 삼천이 되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일심(一心)이 십법계를 갖춘다. 그리고 일법계는 또한 십법계를 갖춘다. 그러면 백법계가 된다. 또한 일법계가 30종류의 세간을 갖추니, 그러면 백법계는 삼천 종류의 세간을 갖춘다. 그런데 이 삼천의 세간이 일념심에 있다. 마음이 없다면 그만이겠으나,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삼천의 세간을 갖춘다{{)『마하지관』5권 상 (『대정장』46권, p. 54 상) }}.


그러면 위 인용문에 나온 내용을 다시 검토해보자. 십법계는 지옥(地獄), 아귀(餓鬼:전생에 악업을 짓고 탐욕을 부린 자가 아귀로 태어나 배고픔과 목마름에 괴로워한다), 축생(畜生;짐승), 아수라(阿修羅:인도 고대에서는 싸움을 일삼는 악신으로 생각했다) 인간, 하늘, 성문(聲聞:소승의 하나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제자들), 연각(緣覺: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12연기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보살(菩薩:대승의 사람으로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불(佛)이다.


앞의 여섯 가지는 6도(六道)라고 하는데, 이는 윤회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성문, 연각, 보살은 대승불교의 삼승이다. 천태지의는 여기다 불계를 더 보태서 십계를 만들었다. 이는 불교사상에 근거해서 가치를 매긴 것이다. 그런데 이 십계가 다시 십계를 머금는다. 인간계도 십계가 존재하고, 지옥계도 십계가 존재하고, 불계도 십계가 존재한다. 이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착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존재하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착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는 가능성으로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 일계가 십여시를 갖추고 있다. 십여시는 여시상(如是相), 여시성(如是性), 여시체(如是體), 여시력(如是力), 여시작(如是作), 여시인(如是因), 여시연(如是緣), 여시과(如是果), 여시보(如是報), 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이다.


상(相)은 외면의 형상을 말하고, 성(性)은 내면의 본성, 체(體)는 사물의 주체, 역(力)은 잠재적인 힘과 작용, 작(作)은 구조, 인(因)은 직접적인 원인, 연(緣)은 간접적인 원인, 과(果)는 직접적인 원인의 결과, 보(報)는 간접적인 원인의 결과, 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은 형상에서 결과까지를 포괄하는 평등의 원리이다.


그리고 삼세간(三世間)은 오음세간(五陰世間), 중생세간(衆生世間), 국토세간(國土世間)이다. 오음세간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인 물질을 말하는 것이고, 중생세간은 거기에 안주하는 인간과 생물을 가리키는 것이며, 국토세간은 그 인간과 생물이 살고 있는 환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 삼제원융은 일심삼관(一心三觀)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공(空)·가(假)·중(中)을 말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공이라고 관찰하는 것이 공제(空諦)이다. 가제(假諦)는 공제에 의해 일단 부정된 것을 가(假)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제는 현실을 전면적으로 긍정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가제도 다시 부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제의 긍정과 가제의 부정 가운데 중제(中諦)가 있다. 다시 말하면, 공제 가운데 가제·중제를 포함하고, 가제 가운데 공제·중제를 포함하며, 중제 가운데 공제·가제를 포함하는 삼제원융의 경지가 전개된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일법(一法)이 일체법(一切法)이면,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과 시위가명(是爲假名)에 해당하니 가관(假觀)이다. 일체법이 일법이면,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에 해당하니 공관(空觀)이다. 비일비일체(非一非一切)는 중도관(中道觀)이다. 하나가 공(空)이면 전체가 공이어서 가(假)·중(中)도 모두 공이다. 이는 총공관(總空觀)이다. 하나가 가(假)이면 전체가 가이니, 공·중이 모두 가(假)이다. 이는 총가관(總假觀)이다. 하나가 중(中)이면 전체가 중이어서, 공·가(假)가 모두 중이다. 이는 총중관(總中觀)이다. 이것이『중론』에서 말한 생각할 수 없고 의론할 수 없는 일심삼관이다{{)『마하지관』5권 상 (『대정장』46권, p.55 중) }}.


② 발진정보리심(發眞正菩提心)이다. 진정보리심(眞正菩提心)을 일으키는 상황은, 부사의경(不思議境)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도리어 거기에 빠져 집착할 때이다. 바르게 부사의경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보리심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진정보리심의 내용은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 정리된다. 그 내용은 모든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것, 모든 번뇌를 끊겠다는 것, 모든 가르침을 배우겠다는 것,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보리심에서 '진(眞)'과 '정(正)'이 의미하는 것은 일심삼관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이다{{)『마하지관』5권 상 (『대정장』46권, pp. 55하∼56중 정리) }}.


③ 선교안심(善巧安心)이다. 선교안심은 지관(止觀)으로 진리의 본성인 법성(法性)에 안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원(願)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은 지관이다{{)『마하지관』5권 상 (『대정장』46권, p. 56 중) }}.


④ 파법편(破法遍)이다. 파법편은 중생이 전도(顚倒)됨이 많고, 전도되지 않음은 적으니, 중생이 전도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앞에서 지관으로 마음을 편안히 하였다면, 선정과 지혜가 열리어 다시 깨뜨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법성과 상응하지 못했으면, 선정을 함축한 지혜를 사용해서, 모두 다 정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전도를 깨뜨림을 말하는 것이다{{)『마하지관』5권 하 (『대정장』46권, p. 59 중) }}.


⑤ 식통색(識通塞)이다. 파법편이 철저하다면, 생겨남이 없는 본래의 경지인 무생(無生)에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무생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왜 그런지 이유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옳고 그름에 막혀서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하지관』7권 상 (『대정장』46권, p. 86 상) }}. 따라서 식통색에서는 자기가 어디서 막히고, 어디는 통했는지를 돌이켜 본다.


⑥ 도품조적(道品調適)이다. 도품조적은 37도품(道品)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37도품은 지혜를 얻기 위한 37종류의 수행체계이다. 이 관법이 필요한 이유는, 파법편과 식통색을 잘 사용하였다 해도, 도품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진실한 법과 빨리 상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마하지관』5권 상 (『대정장』46권, p. 87 하) }}.


⑦ 조도대치(助道對治)이다. 근기가 둔하고 번뇌가 두터운 사람의 경우, 근기가 둔하므로, 3해탈문(三解脫門)을 곧 열지 못하고, 번뇌가 두터우므로, 마음을 관조하는 것인 관심(觀心)을 억지로 깨뜨린다. 그러므로 번뇌를 끊는 대치(對治)의 도로써 번뇌의 장벽을 깨뜨려야 한다. 그러면 3해탈문에 편안히 들어갈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3해탈문은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해탈문이다{{)『마하지관』7권 상 (『대정장』46권, p. 91 상) }}.


⑧ 명차위(明次位)이다. 명차위는 자기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수행이 어느 정도 익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수행계위가 필요한 이유는 자기가 증득한 것과 증득하지 못한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마하지관』7권 하 (『대정장』46권, p. 97 중) }}.


⑨ 능안인(能安忍)이다. 처음 관불가사의경부터 명차위까지 수행해서 장애를 지혜로 바꾸었으나, 어떤 사람은 수행계위의 하나인 초품제자위(初品弟子位)에 들어가지 못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초품제자위에 들어가서 지혜가 밝고 분명하기도 하다. 초품제자위는 범부가 닦는 다섯 단계의 수행단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가 밝고 분명하다면, 이러한 사람은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마치 큰 코끼리가 무리를 단속함과 같다. 그러나 지혜가 분명하지 않다면, 안인(安忍)해서 깊이 삼매를 닦아야만 한다. 행이 이루어지고 힘이 드러날 때, 교화를 행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안인(安忍)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외부의 유혹에 대해서 안인(安忍)하는 경우, 사양하고 은둔하고 떠나는 것이고, 내부의 번뇌에 대해서는 즉공(卽空)·즉가(卽假)·즉중(卽中)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다{{)『마하지관』7권 하 (『대정장』46권, pp. 99중∼하 정리) }}.


⑩ 무법애(無法愛)이다. 무법애는 법에 대한 애착(愛着)이 없는 것이다. 위의 아홉 가지 관법을 닦으면, 모든 장애를 넘어서서 참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法)에 애착해서 거기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면 법애를 깨뜨려야 할 것이다. 법애를 깨뜨리면, 3해탈에 들어가 진정한 중도를 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모든 지혜에 들어가서, 불교 최고의 경지인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머물게 된다{{)『마하지관』7권 하 (『대정장』46권, p.99 하 정리) }}.



3. 4종삼매의 의미


천태의 4종삼매는 단순히 수행의 형식만을 기술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모든 수행을 종합하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다. 첫째, 상좌삼매는 좌선수행을 강조하고 보조적으로 염불수행을 결합한 것이고, 둘째, 상행삼매는 염불수행에 역점을 둔 것이며, 셋째, 반행반좌삼매는 밀교적 수행법을 받아들인 것이고, 넷째, 비행비좌삼매는 일상생활에 나타난 선·악·무기의 마음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4종삼매에는 좌선법, 염불수행, 밀교적 수행,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일상생활의 수행이라는 4가지 수행법이 망라되어 있다. 순서대로 살펴보자.


1) 상좌삼매(常坐三昧) 상좌삼매는 좌선을 강조하고, 부수적으로 염불수행을 겸하고 있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우선, 이 수행법은『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과『문수문반야경(文殊問般若經)』에 소개되어 있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1상) "一常坐者, 出文殊說·文殊問兩般若, 名爲一行三昧."}}. 이 상좌삼매를 실천하는 방법은 몸은 항상 앉아서, 가고[行]·머물고[住]·눕는 동작[臥]을 하지 않는 것이고, 이 수행법은 여러 수행자가 모인 곳에서 수행해도 좋지만, 홀로 수행하면 더욱 좋은 법이다.


조용한 방이나 한적한 빈터에 거처하여 모든 시끄러운 것을 피하고 승상(繩床)은 하나만 쓰고 다른 승상은 두지 않는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1 중) "身開常坐, 遮行住臥. 或可處衆, 獨則彌善. 居一靜室, 或空閑地, 離諸喧鬧, 安一繩床, 傍無餘座."}}. 수행하는 기한은 90일을 단위로 하고, 결가부좌(結跏趺坐)로 바르게 앉아서 목덜미와 허리가 단정하게 바르게 한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1 중) "九十日爲一期, 結跏正坐, 項脊端直." }}.


그리고 오래 앉아서 피로하거나 질병으로 몸이 아프거나 심히 졸리거나 하여, 그 때문에 안팎의 장애가 정념심(正念心)을 빼앗아서 이 장애를 제거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오로지 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른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1 중) "若坐疲極, 或疾病所困, 或睡蓋所覆, 內外障侵奪正念心, 不能遣却, 當專稱一佛名字."}}.


이상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상좌삼매가 좌선수행과 염불수행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좌선이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좌선수행이 어려우면 염불수행도 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수행법은 송대 이후에 좌선과 염불을 통합하는 중국불교의 경향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천태지의는 지관을 설명하는 대목에 '의지관(意止觀)'이란 항목을 두어서 그 지관법의 실제 의미를 서술하고 있다. 상좌삼매에서 '지'는 진리의 세계에 오로지 마음을 두는 것이고, '관'은 진리의 세계를 한결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 경지는 있고 없음의 두 극단을 넘어서고 지식 있고 없음의 두 극단도 초월해 있다. 이 때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고요한 진리의 세계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다만 진리의 세계인 법계에 오로지 마음을 두어서[繫緣] 법계를 한결같이 생각한다. 오로지 마음을 두는 것[繫緣]이 지(止)이고, 한결같이 생각하는 것[一念]이 관(觀)이다. 모든 존재가 모두 불법(佛法)임을 믿으면,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끝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만약 지(知)도 없고, 언어도 없다면, 이 경지는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니고, 지식 있는 자[知者]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식 없는 자[不知者]도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있고 없음과 지식이 있고 없음의] 두 극단[二邊]을 떠나서,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머물지 않음[無所住]에 머물고, 모든 부처가 머무는 것과 같이 [고요한 진리의 세계인] 적멸법계(寂滅法界)에 편히 머문다. 그리고 이러한 깊은 법을 듣고 놀라움과 두려움을 내지 않는다. 이러한 법계를 또한 보리라고 이름하고 또한 불가사의경계(不可思議境界)라고 이름한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1 중) "但專繫緣法界, 一念法界. 繫緣是止, 一念是觀. 信一切法皆是佛法, 無前無後, 無復際畔, 無知者, 無說者. 若無知無說, 則非有非無, 非知者 非不知者. 離此二邊, 住無所住, 如諸佛住, 安處寂滅法界. 聞此深法, 勿生驚怖. 此法界亦名菩提, 亦名不可思議境界."}}.


따라서 상좌삼매는 좌선을 주로 닦는 수행형식을 강조하고 있고, 형편이 여의치 못할 때 염불도 보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있음과 없음의 두 극단을 넘어서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세계에 머무는 것이다.


2) 상행삼매(常行三昧)상행삼매는 염불수행법을 내용으로 하는데, 소리내어 염불하거나 마음속으로 염불을 해서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마음이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이 수행법은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 소개되어 있다. 그 방법은 90일 동안 몸은 항상 움직여[常行] 휴식하지 않고, 90일 동안 입으로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항상 부르고 휴식하지 않으며, 90일 동안 마음으로는 아미타불을 항상 염(念)하여 휴식하지 않는 것이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2 중) "九十日, 身常行, 無休息; 九十日, 口常唱, 阿彌陀佛名, 無休息; 九十日, 心常念阿彌陀佛, 無休息."}}.


구체적 염불하는 방법은 소리내어 염불하는 것[唱]과 마음 속으로 염불하는 것[念]을 번갈아 사용한다. 즉, "혹은 소리를 내어 염불하는 것[唱]과 마음속으로 염불하는 것[念]을 함께 운용하고, 혹은 먼저 마음속으로 염불하고[念] 나중에 소리내어 염불하며[唱], 혹은 먼저 소리내어 염불하고[唱] 나중에 마음속으로 염불한다[念]. 이와 같이, 소리내어 염불하는 것[唱]과 마음속으로 염불하는 것[念]이 서로 이어져 휴식의 때가 없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2 중) "或唱念俱運, 或先念後唱, 或先唱後念, 唱念相繼, 無休息時."}}. 결국, 상행삼매의 요점은 몸으로 걸음 옮기고, 입으로 소리를 내고, 마음속에서 생각할 때마다 오직 아미타불을 잊지 않고 자신 안에 있게 하는 것이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2 중) "擧要言之, 步步·聲聲·念念, 唯在阿彌陀佛."}}.


그리고 상행삼매의 철학적 의미가 간직되어 있는 '의지관(意止觀)'을 살펴보면, 거기서는 염불을 통해서 공(空)을 자각하려는 것으로 이어진다. 공을 자각하는 것을 통해서 아미타불의 나라에 태어난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정토신앙을 반야(般若)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모든 소유하고 있는 존재가 모두 꿈과 같다고 염(念)할지니, 마땅히 이와 같이 염불하여 자주 자주 염(念)하여 휴식하지 말라. 이 같은 염(念)을 사용해서 아미타불의 나라에 태어나는 것이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2 하) "自念一切所有法如夢, 當如是念佛, 數數念, 莫得休息! 用是念, 當生阿彌陀佛國."}}.


3)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반행반좌삼매는 밀교적 수행법을 받아들여 천태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우선, 반행반좌삼매의 이론적 근거는『방등경(方等經)』과『법화경(法華經)』이다.『방등경』에 근거한 것을 방등삼매(方等三昧)라고 하고,『법화경』에 근거한 것을 법화삼매(法華三昧)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방등삼매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천태지의는 이 방등삼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방등삼매는 지극히 존귀해서 구차하게는 할 수 없다. 만약 이 수행법을 닦고자 한다면 신명(神明)을 증명으로 삼아야 한다. 먼저 몽왕(夢王)을 구하고, 만약 한번이라도 [몽왕을] 보았으면, 이것은 [몽왕이] 참회를 허락한 것이다. 그 다음 한가하고 조용한 곳에서 도량(道場)을 장엄한다. 즉, 향기로운 진흙으로 땅과 집의 안팎을 칠하고, 원단(圓壇)을 설치하여 채색하고 그림을 그리며[彩畵], 5색(五色)의 깃발[幡]을 걸고, 해안향(海岸香)을 태우며, 초를 불붙이고 높은 좌석[高坐]을 펴서 24존상(尊像)을 청한다.


[그 숫자는] 많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효찬을 설치하고 심력(心力)을 다한다. 옷과 신과 짚신은 새 것으로 깨끗하게 하고, 새 것이 없으면 헌 것을 씻는다. 그리고 출입하고 벗고 신을 때 섞이지 않게 한다. 또 7일 간 삼가고[長齊], 하루에 세 번 목욕한다. 첫째 날[初日]에 스님을 공양하고 그 양은 스님의 뜻에 따라 많거나 적게 한다. 그 다음 별도로 한번 내외(內外)의 율(律)에 밝은 분을 스승으로 삼아서 24계(戒)와 다라니주(呪)를 받고 스승에 대해서 죄를 고백한다.


{{)『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p.13 상∼중) "方等至尊, 不可聊爾. 若浴修習, 神明爲證. 先求夢王, 若得見一, 是許懺悔. 於閑靜處, 莊嚴道場, 香泥塗地及室內外, 作圓壇彩畵, 縣五色幡, 燒海岸香, 然燈敷高坐, 請二十四尊像, 多亦無妨. 設 饌盡心力, 須新淨衣鞋 , 無新浣故, 出入着脫, 無令參雜. 七日長齊, 日三時洗浴. 初日供養僧, 隨意多少. 別請一明了內外律者爲師, 受二十四戒及陀羅尼呪, 對師說罪."}}.


위 인용문에서 원단을 설치하고 단에 채색하고 그림을 그리며, 다라니주를 받는다는 표현으로 보아서 반행반좌의 수행방법으로 밀교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천태지의는 이러한 밀교방법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철학적으로 승화시켜 수용한다. 다음의 예문을 살펴보자.


몽왕(夢王)을 구하게 한다는 것은 [空과 假의] 두 가지 관[二觀]에 도달하기 이전의 방편[前方便]이고, 도량은 청정한 경계이니, 5주의 겨[五住糠]를 다스려 실상(實相)의 쌀[米]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도 선정과 지혜의 용(用)으로 법신(法身)을 장엄하는 것이다. 향(香)으로 바른다는 것은 위없는 계율바라밀이다. 오색(五色)의 덮개는 오음(五陰)을 관찰하여 번뇌의 속박[子縛]을 면하고, 큰 자비를 일으켜 법계를 덮는 것을 의미한다.


원단(圓壇)은 실상의 부동지(不動地)이다. 채색한 깃발[繪 ]은 법계의 미혹함을 돌려서 나부끼는 지혜를 낳는다. 깃발이 걸린 원단[ 壇]은 서로 벗어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즉 움직이는 것[動出]과 움직이지 않는 것[不動出]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향을 피우고 등에 불붙이는 것[香燈]은 계율과 지혜이다. 높은 자리[高座]는 모든 존재가 공(空)한 것이니, 모든 부처가 이 공(空)에 머물고 있다. 24상(像)은 역순(逆順)으로 12인연을 관찰하여 깨달은 지혜이다. 효찬은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쓴맛이라고 관찰하는 조도관(助道觀)이다.


깨끗한 새 옷[新淨依]은 [모든 미혹을 끊어서 고요함에 안주하는] 적멸인(寂滅忍)이다. 여기서 진에의 미혹(瞋惑)이 거듭 싸이는 것을 옛 것[故]이라 하고, 진에를 승화시켜 인(忍)을 일으키는 것을 새 것[新]이라 한다. 7일(七日)은 7각(七覺)이고, 1일(一日)은 일실제(一實諦)이다. 세 번 씻는다는 것[三洗]은 일실제를 관찰하여 3관(三觀)을 닦고 3가지 장애[三障]를 없애어 세 가지 지혜[三智]를 깨끗이 하는 것을 말한다. 한 명의 스승은 일실제이다. 24계(戒)는 역순(逆順)으로 12인연을 관찰하여 [성인들만이 얻는] 도공계(道共戒:무루정에 들어가서 무루의 마음을 일으켰을 때 얻는 계의 근본)를 일으키는 것이다.


주(呪)는 상대방에게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囑對]이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3 하) "令求夢王, 卽二觀前方便也; 道場卽淸淨境界也; 治五住糠, 顯實相米, 亦是定慧用, 莊嚴法身也; 香塗者 卽無上尸羅也; 五色蓋者, 觀五陰, 免子縛, 起大慈悲, 覆法界也; 圓壇者, 卽實相不動地也; 繪 , 卽飜法界上迷, 生動出之解;  壇不相離, 卽動出不動出, 不相離也; 香燈卽戒慧也; 高座者, 諸法空也, 一切佛皆栖此空; 二十四像者, 卽是逆順觀十二因緣, 覺了智也;  饌者 卽是無常苦酢助道觀也; 新淨衣者, 卽寂滅忍也; 瞋惑重積, 稱故, 飜瞋起忍, 名爲新; 七日卽七覺也, 一日卽一實諦也; 三洗卽觀一實, 修三觀, 蕩三障, 淨三智也; 一師者, 卽一實諦也; 二十四戒者, 逆順十二因緣, 發道共戒也; 呪者囑對也."}}.


위 인용문에서 천태지의가 밀교의 상징적인 부분을 철학적·합리적으로 재해석해서 받아들이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세 번 씻는다는 것(三洗)은 일실제를 관찰하여 3관을 닦고 세 가지 장애를 없애서 세 가지 지혜를 깨끗이 한다는 것으로 풀이하는 말은 일심삼관을 의미하는 것이다.


4)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비행비좌삼매는 일상적인 행동에 따르는 선·악·무기의 마음을 분석해서 그것이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수행하는 것이다. 우선, 이 삼매법은 움직이고[行] 앉는 동작[坐]과 그 밖의 모든 행위에 적용되는 것인데, 천태지의 의 스승인 남악(南岳)은 이것을 수자의삼매(隨自意三昧)라고 부르는데, 마음을 일으키는 그 현장에서 삼매를 닦는다는 의미이고,『대품반야경』에서는 각의삼매(覺意三昧)라고 하기도 한다{{36)『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4 중) "實通行坐及一切事, 而南岳師呼爲隨自意, 意起卽修三昧, 大品稱覺意三昧.


}}. 이 삼매의 필요성을 살펴보자. 삼매법을 밝히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가 우리의 마음씀[意]이기 때문에 이 삼매법이 필요하고, 마음씀을 잘 제어하면 무지와 번뇌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4 하) "若觀意者, 則攝心識, 一切法亦爾. 若破意, 無明則壞, 餘便皆去. 故諸法雖多, 但擧意以明三昧." 만약 의(意)를 관찰할 것 같으면, 곧 심식(心識)을 포섭하는 것이고, 모든 존재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즉 의(意)를 관찰하면 모든 것이 포섭된다.] 그리고 의(意)를 부수면 무명(無明)도 곧 무너져서 나머지 번뇌도 제거된다. 그러므로 제법(諸法)이 비록 많으나, 다만 의(意)를 들어 삼매를 밝힌다.


}}. 이 삼매법은 4가지로 구분되지만, 여기서는 3가지만을 소개한다{{) 모든 경전의 소개된 수행법을 비행비좌수행법에 포함시키고 있다. 『마하지관』에서는 관음보살을 청하는 대목을 가지고 수행법을 소개하고 있다. 관음보살을 청하는 실제의 의식을 소개하고, 그 관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물질[色]을 이루고 있는 지, 수, 화, 풍의 4대가 공(空)함을 4구로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을 미루어 나머지 수, 상, 행, 식의 네 가지 온(蘊)도 공하다고 주장한다. (『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p.14 하∼15 중 참조) }}. 이는 선·악·무기의 마음을 '4운'이라는 논리구조로 분석해서 그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1) 모든 선(善)을 4운(四運)으로 관찰한다. 모든 선(善)에 대해서 『마하지관』에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한다. 첫째, 관찰하는 논리구조를 먼저 설명하고[分別四運], 둘째, 착한 일에 이 4운을 적용하는 것[歷善事]이다.


먼저 관찰의 기준점이 되는 '4운'부터 살펴보자. 이는 마음은 시간의 네 가지 측면에서 조명한 것이다. 네 가지 측면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에다 현재를 두 가지로 구분한 것이다. 이는 과거, 현재, 현재진행, 미래로 구분한 것이다. 이렇게 네 가지 측면에서 마음을 살펴보면, 마음에 실체 없지만, 작용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한 예문은 다음과 같다.


심식(心識)은 형상이 없어서 볼 수 없으나, 4상(四相)으로 분별하면 미념(未念), 욕념(欲念), 염(念), 염이(念已)이다. 미념은 마음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욕념은 마음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염(念)은 바로 경계를 인연하여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염이(念已)는 경계를 인연하여 지나간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 네 가지를 요달하면 한 모습[一相]이면서 모습 없는 것[無相]에 들어간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5 중) "夫心識無形不可見, 若四相分別, 謂未念·欲念·念·念已·未念名心未起. 欲念名心欲起; 念名正緣境住; 念已名緣境謝. 若能了達此四, 卽入一相無相." }}.


둘째, 이 4운(四運)을 모든 착한 일에 두루 적용해 보는 것이 착한 일에 두루함{歷善事]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6바라밀 가운데 6작(六作)과 6수(六受)이다. 먼저 6수(六受)에 대해 사운(四運)을 적용한 것을 살펴본다. 『마하지관』에서는 6수의 4운에 대해 십법계(十法界)로 나누어서 설명하는데, 그 중에 불법사운(佛法四運)을 살펴본다.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한 4운은 4운을 통해 대상세계가 공함을 깨닫는 것은 항상한 이치에 속한 것이고, 4운을 통해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이는 진정한 즐거움이며, 4운을 실천해서 마음속에 어떠한 업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으면, 이것이 진정한 자아실현이고, 4운을 통해 마음이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진정한 청정함이다. 다시 말해서, 4운을 통해 『열반경』에서 말하는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의 이치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4운을 허공과 같다고 관찰하면 곧 상(常)이고, 4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낙(樂)이며, 4운을 행하여 업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아(我)이고, 4운이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곧 정(淨)이다. 이것이 불법사운이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6 상) "又觀四運與虛空等卽常; 不受四運卽樂; 不爲四運起業卽我; 四運不能染卽淨, 是佛法四運."}}.


계속되는 설명에서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이치가 분명히 나타난다. 4운을 통해서 대상세계가 공임을 깨닫지만, 그렇다고 모든 불법의 공덕이 다 무의미한 것이 아니므로 유(有)를 거두어들인다. 이것이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가명사운(假名四運)이다. 여기서 공과 가(假)의 의미가 나타났다. 이제 중(中)의 의미를 살펴보자. 대상세계는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므로 독립된 실체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공이다. 공이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불법의 공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유(有)이다. 이렇게 공도 부정하고 유도 부정하면서, 공과 유를 둘 다 비추어 보는 것이 중도이다. 이렇게 해서 공·가·중의 3제가 완성된다. 이 때 4운을 통해서 마음에 명료함을 얻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4운은 비록 공(空)이지만, 공(空) 가운데 여러 가지의 4운을 갖추어 보고, 항하의 모래수의 불법(佛法)을 두루 보아서 마하연(摩訶衍)을 이룬다. 이것이 가명사운(假名四運)이다. 만약 공(空)하다면 십법계를 갖추지 않아야 할 것이고, 따라서 법계가 인연을 좇아서 생긴 것일 것이니, 그 근본은 비유(非有)일 것이다. 이와 같이 유(有)가 아닌 까닭에 공(空)이고, 앞에서 살펴본 대로 공(空)이 아닌 까닭에 유(有)이다.


이렇게 공(空)과 유(有)를 얻지 못하고, 공(空)과 유(有)를 둘 다 비추어 보니, 삼제(三諦)가 완연하여 불지견(佛知見)을 갖추었고, 사운심(四運心)에서 명요(明了)함을 잘 갖추었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6 상) "如是四運雖空, 空中具見種種四運·乃至遍見恒沙佛法, 成摩訶衍, 是爲假名四運.若空不應具十法界, 法界從因緣生, 體復非有, 非有故空, 非空故有, 不得空有, 雙照空有, 備佛知見, 於四運心, 具足明了."}}.


이는 4운(四運)으로 착한 일을 분별함이 결국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이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2) 모든 나쁜 일을 4운으로 관찰한다[隨自意 歷諸惡事].


여기서는 먼저 선(善)과 악(惡)의 정의가 상대적인 것임을 말한다. 악을 행해도 악이 악이 아님을 통달하면, 그대로 모든 것이 진리의 모습인 실상(實相)으로 나타난다. 선과 불도를 행한다 해도 집착심을 일으키면, 오히려 도를 이루는데 장애가 된다. 이렇게 보면, 선과 악은 그 구분이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악이라고 해서 거부하고 멸시할 것이 아니다.

{{)『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p.17 중∼하) "若達諸惡非惡, 皆是實相, 卽行於非道, 通達佛道. 若於佛道生着, 不消甘露, 道成非道. 如此論善惡, 其義則通." 만약 모든 악(惡)이 악이 아님을 통달하면 모두 실상(實相)이다. 즉, 비도(非道)를 행해도 불도(佛道)에 통달한다. 만약 불도에 대해 집착심을 내면 감로(甘露)를 쓰지 못하고 도(道)가 비도(非道)를 이룬다. 이와 같이 선과 악을 논하면 그 뜻이 통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별(別)의 입장에서 선(善)과 악(惡)의 정의를 내리고, 악(惡)에 대해 관(觀)을 설명한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7 하) "今就別, 明善惡. 事度是善, 諸蔽爲惡. 善法用觀, 已如上說. 就惡明觀. 今當說." 지금 여기서는 별에 나아가서 선과 악의 의미를 밝히겠다. 도를 닦는데 돕는 일과 6바라밀은 선이고, 그런 것을 가리는 것은 악이다. 선법에 대한 관법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여기서는 악에 나아가서 관법을 밝히겠다. 지금 설하리라. }}.


그 관(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4운을 탐욕에 적용하면, 아직 탐욕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탐욕이 막 일어나려고 할 때, 탐욕이 발동할 때, 탐욕이 이미 사라졌을 때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범위를 줄여서 탐욕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未貪欲]에서 탐욕이 막 일어나려고 할 때[欲貪欲]로 한정해서 검토해 보자. 여기서 미탐욕이 없어지고 욕탐욕이 생기거나, 미탐욕이 존재한 상태로 욕탐욕이 생기거나, 미탐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인데, 욕탐욕이 생기거나, 미탐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인데, 욕탐욕이 생기는 4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천태지의는 이 4가지 경우를 모두 따져보아도 미탐욕에서 욕탐욕으로 넘어갈 수 없음을 말하고, 따라서 탐욕을 본래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미탐욕이 사라졌는데, 욕탐욕이 생겨났다고 한다면, 여기에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욕탐욕이 미탐욕에 상응해서 생기거나[卽], 욕탐욕이 미탐욕과 관계없이 생기는 경우[離]이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미탐욕이 없어지는 것에 상응해서 욕탐욕이 생긴다면, 미탐욕은 없어지는 것에 속하고, 욕탐욕은 생기는 것에 속하게 되어, 없어지는 것과 생기는 것은 그 속성상 서로 어긋나서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인데, 함께 존재한다고 말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따라서 이 견해는 옳지 못하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미탐욕과 상관없이 욕탐욕이 생긴다면, 이렇다면 욕탐욕은 아무 원인 없이도 생겨날 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 실제로 이 세상에 아무 원인 없이 제멋대로 생겨나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이 견해는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 두 견해를 종합하면, 미탐욕에서 욕탐욕이 생기는 것은 성립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미탐욕에 상응해서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

이 때, 미탐욕은 없어지는 것이고 욕탐욕은 생기는 것이므로, 없어지는 것과 생겨나는 것은 속성이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이 둘은 함께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욕탐욕이 생겨날 수 없다.


미탐욕에 상관없이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

이 때, 욕탐욕은 미탐욕에 상관없이 생겨나므로 아무 원인 없이도 생겨나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욕탐욕이 생겨날 수 없다.


둘째, 미탐욕이 존재한 채로 욕탐욕이 생긴다면, 여기에도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미탐욕이 존재하는 것에 순응해서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이고, 미탐욕이 존재하는 것과 아무 관련 없이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와 같이, 미탐욕이 존재하는 것과 상응해서 욕탐욕이 생긴다면, 미탐욕과 욕탐욕이 서로 영향을 줄 것이므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과 같이 그 시원을 끝없이 추구해야 하는 논리적 모순을 범하게 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와 같이, 미탐욕이 존재하는 것과 상관없이 욕탐욕이 존재한다면, 욕탐욕은 아무 원인이나 조건의 제약 없이 자기 뜻대로 날 수 있다는 주장이 되는데, 이 세상에는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견해를 종합하면, 미탐욕이 존재하는데, 욕탐욕이 생기는 것은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미탐욕이 존재하는 것에 순응해서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

미탐욕과 욕탐욕이 둘 다 존재하므로, 이 때에는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논쟁과 같이 그 시원을 끝없이 추구하는 논리적 모순을 범하게 된다.


미탐욕과 상관없이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

이 때, 욕탐욕은 아무 원인 제멋대로 생겨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런 존재는 없다. 따라서 욕탐욕이 생겨날 수 없다.


셋째, 미탐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에서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씩 나누어서 네 가지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다. 우선 미탐욕이 있는 측면에 근거해서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와 미탐욕이 없는 측면에 기초해서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미탐욕이 있는 측면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미탐욕이 없다는 측면은 의미가 없어지므로 애초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전제가 의미 없어지게 된다. 후자의 경우, 미탐욕이 없는 점에 착안하였기 때문에 미탐욕이 있다는 점은 의미가 없어지므로, 처음에 미탐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전제 자체가 무의미해 진다.


따라서 두 경우 다 옳지 못하다. 그리고 미탐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면, 이는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정해지지 않은 원인에서 어떻게 정해진 결과인 욕탐욕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런 이치는 없는 것이다. 또 미탐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했는데, 미탐욕이 그 근본이 하나라면, 그 성품은 있는 것이면서 없는 것이 되어, 성품이 다르게 된다.


그런데 근본이 하나이면서 그 성품이 다를 수는 없다. 그리고 미탐욕이 근본이 다른 것이라면, 이미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므로, 미탐욕은 이러한 있고 없는 점이 각기 따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경우에도 미탐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에서 욕탐욕이 생겨날 수 없다. 이 네 가지 경우를 종합해도 결론은 마찬가지이다. 이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미탐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측면에서 있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는 경우

미탐욕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므로, 정해진 욕탐욕이 생겨날 수 없다. 그리고 미탐욕이 있다는 점에 강조점을 두면, 애초의 전제인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측면은 무시되고 만다.


미탐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측면에서 없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는 경우

미탐욕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므로, 정해진 욕탐욕이 생겨날 수 없다. 그리고 미탐욕이 없다는 점에 의미를 두면, 처음의 전제인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저은 무시되고 만다.


미탐욕이 근본에서는 하나인 경우

미탐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므로 그 성품은 두 가지이다. 그런데 근본은 한 가지라고 한다면, 이 말은 성립할 수 없다.


미탐욕이 근본이 서로 다른 경우

미탐욕이 근본인 서로 다르다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점이 서로 따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의 전제인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점은 성립하지 않는다.


넷째, 미탐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도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미탐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다. 있다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 것도 아닌 것이 있음의 상태라면, 이것은 이미 있다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그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있다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면, 없음에서 어떤 것이 생겨나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욕탐욕이 생겨날 수 없다. 이 두 가지 경우를 종합해 보면, 미탐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욕탐욕이 생기는 것은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미탐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것이 있음을 의미하는 경우

미탐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인데, 이것을 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처음의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미탐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것이 없음을 의미하는 경우

미탐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인데, 이것을 없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처음의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을 욕탐욕이 생기거나 없어지거나,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거나,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 것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탐욕이 본래부터 공적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행비좌삼매의 악에 대한 관법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길지만 중요하므로 소개한다.


만약 탐욕이 일어나면, 탐욕에 4가지 모습이 있음을 살펴본다. 즉 미탐욕(未貪欲), 욕탐욕(欲貪欲), 정탐욕(正貪欲), 탐욕이(貪欲已)이다. 미탐욕이 없어지고 욕탐욕이 생기거나, 미탐욕이 없어지지 않고 욕탐욕이 생기거나, 미탐욕이 역멸역불멸(亦滅亦不滅)인데 욕탐욕이 생기거나, 미탐욕이 비멸비불멸(非滅非不滅)인데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미탐욕이 없어져서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를 살펴보면, 즉(卽)이거나 이(離)이다. 없어짐(滅)에 즉(卽)해서 욕탐욕이 생긴다면 생(生)과 멸(滅)이 서로 어긋나는 모순에 빠진다. 만약 이(離)하여 욕탐욕이 생긴다면, 생하는 것이 원인 없음[無因]이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둘째, 미탐욕이 없어지지 않고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즉(卽)이거나 이(離)가 된다. 만약 즉(卽)이라면, 곧 이생(二生)이 서로 어울려 태어나므로 무궁(無窮)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만약 이(離)라면 생(生)도 무인(無因)이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셋째, 미탐욕이 역멸역불멸(亦滅亦不滅)인데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멸(滅)을 좇아서 생긴다면 불멸(不滅)은 필요 없게 될 것이요, 불멸(不滅)을 좇아서 생긴다면 멸(滅)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정해지지 않은[不定]의 원인[因]이 어떻게 결정된 과보[定果]를 낳겠는가? 그 근본[體]이 하나라면, 그 성품[性]은 서로 다르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되고, 그 근본[體]이 다르다면, 본래 서로 상관하지 않게 되는 모순에 빠진다. 넷째, 미탐욕이 비멸비불멸(非滅非不滅)인데 욕탐욕이 생기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둘을 다 부정하는 것[雙非]자체는 유(有)이거나 무(無)이다. 만약 쌍비(雙非)가 유(有)라면 어떻게 쌍비(雙非)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쌍비가 본성으로서 둘 다 부정하기 때문에] 쌍비(雙非)가 무(無)라면 무(無)가 어떻게 생기게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4구(四句)로 욕탐욕이 생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이 4구를 돌려서 미탐욕이 없어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욕탐욕이 생(生), 불생(不生), 역생역불생(亦生亦不生), 비생비불생(非生非不生)의 경우에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탐욕의 가림[貪欲蔽]을 관찰하면, 마침내 공적(空寂)하여 쌍조(雙照)가 분명해 진다


{{)『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p.17 하∼18 상) "云何爲觀? 若貪欲起, 諦觀貪欲. 有四種相, 未貪欲·欲貪欲·正貪欲·貪欲已. 爲當未貪欲滅, 欲貪欲生? 爲當未貪欲不滅, 欲貪欲生? 亦滅亦不滅, 欲貪欲生? 非滅非不滅, 欲貪欲生? 若未滅欲生, 爲卽爲離. 卽滅而生, 生滅相違; 若離而生, 生則無因. 未貪不滅而欲生者, 爲卽爲離. 若卽卽二生, 相竝生則無窮; 若離, 生亦無因. 若亦滅亦不滅而欲生者, 若從滅生, 不須亦不滅; 若從不滅生, 不須亦滅, 不定之因, 那生定果. 若其體一, 其性相違; 若其體異, 本不相關. 若非滅非不滅, 而欲貪生, 雙非之處, 爲有爲無. 若雙非是有, 何謂雙非? 若雙非是無, 無那能生? 如是四句, 不見欲貪欲生. 還轉四句, 不見未貪欲滅, 欲貪欲生· 不生·亦生亦不生·非生非不生, 亦如上說. 觀貪欲蔽, 畢竟空寂, 雙照分明."}}.



(3) 비선비악(非善非惡)을 4운으로 관찰한다.


이 관법(觀法)이 필요한 이유는 대개의 사람이 하는 일들이 선(善)도 악(惡)도 아니고 중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8 중) "所以須觀此者, 有人根性, 性不作善, 復不作惡, 則無隨自意出世因緣." 이 관법(觀法)을 하는 이유는 사람의 근성(根性)에 성(性)으로서 선(善)도 악(惡)도 짓지 않아서 수자의(隨自意)의 출세인연(出世因緣)이 없기 때문이다}}. 이 관법(觀法)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용어부터 정의해 두자. 무기(無記)는 선과 악이 정해지지 않는 중성적인 경우이고, 선악이 정해진 경우가 기(記)이다. 기(記)에서 무기가 생기는데, 4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기(記)가 없어져서 무기가 생기거나, 둘째, 기(記)가 존재해서 무기가 생기거나, 셋째, 기(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에서 무기가 생기거나, 넷째, 기(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무기가 생기는 경우이다. 이것을 분석하기 앞서 논의의 기초가 되는 기(記)도 4구로 분석하면 그 실체를 구할 수 없다. 따라서 기(記)와 무기가 같고 다름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기와 무기는 같지 않으므로 이 둘은 서로 관계 맺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사과나무와 호랑이가 서로 교섭을 가진다고 해도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아주 큰 범주에서 바라보면 기와 무기는 다른 것도 아니다. 그래서 기와 무기가 아주 관계없다고 할 수도 없다.


앞에 예를 들었던 사과나무와 호랑이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생물이라는 큰 범주에서는 서로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아주 엇나가는 것도 아니다. 기와 무기가 같은 것이 아니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지 못하므로 이는 불생(不生)이고, 그렇다고 해서 기와 무기가 완전히 범주를 달리하는 것도 아니므로 없어지는 것에 속하지 않으므로 이는 불멸(不滅)에 속한다. 그래서 무기의 본성을 바로 본다면, 불생불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기와 무기가 같고 다른 점에 대한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記)와 무기(無記)가 같다고 보는 경우

사과나무와 호랑이가 서로 교섭을 가진다고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듯이, 이 둘은 서로 다르다.


기(記)와 무기(無記)가 다르다고 보는 경우

사과나무와 호랑이가 다른 것이지만, 큰 범주에서 보면 서로 같은 분류에 속한다. 따라서 다르다고만 볼 수도 없다.


그리고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이 무기(無記)를 관(觀)하는 것이 선악(善惡)과 같은가 다른가? 같으면 무기가 아니요, 다르면 다음의 네 가지 경우가 될 것이다. 첫째, 기(記)가 멸(滅)하여 무기(無記)가 생기거나, 둘째, 기(記)가 멸(滅)하지 않고 무기(無記)가 생기거나, 셋째, 기(記)가 역멸역불멸(亦滅亦不滅)인데 무기(無記)가 생기거나, 넷째, 기(記)가 비멸비불멸(非滅非不滅)인데 무기가 생기거나 하는 경우이다.


그렇지만 기(記)도 구하여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무기(無記)와 기(記)의 같음과 다름이겠는가? 같지 않으므로 합(合)하지 않고, 다르지 않으므로 흩어지지 않고, 합(合)이 아닌 까닭에 불생(不生)이고, 흩어지지 않는 까닭에 불멸(不滅)이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p.18 중∼하) "觀此無記, 與善惡異耶同耶? 同則非無記, 異者爲記. (記)滅無記生, 記不滅無記生, 記亦滅亦不滅無記生, 記非滅非不滅無記生. 求記不可得, 何況無記與記同異耶? 非同故不合, 非異故不散, 非合故不生, 非散故不滅." (괄호안의 한문은 대정장에는 없는 것이지만, 의미의 연결을 위해서 필자가 추가한 것임)}}.


비행비좌삼매에서 4운을 사용하여 우리의 일상에 벌어지는 선·악·무기의 마음이 실체 없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후대의 선종의 간화선에 간접적 영향이라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선·악·무기의 생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4운으로 관찰하는 것은 간화선수행에서 일상생활의 행주좌와(行住坐臥)에서 화두를 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Ⅳ. 결론


앞에서 살펴본 대로 천태지관은 점차지관, 부정지관, 원돈지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원돈지관은 수행의 방편을 말하는 25방편, 수행의 형식을 말하는 4종삼매, 본격적인 바른 지관수행법인 10경10승관법, 이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이 글에서는 4종삼매의 종합적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우선, 인도와 중국에서 실천불교는 밀교, 선종, 정토종으로 들 수 있고, 그 중 선종에서 송대에 유행한 종파는 좌선 수행에 전념한 조동종과 간화선수행을 주장한 임제종이다.


이상의 밀교·선종[조동종·임제종]·정토정의 네 가지 수행법이 천태의 4종삼매와 직접적·간접적인 연결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좌삼매는 조동종의 좌선을 강조하는 것과 상응하고{{) 이영자 「천태실천론의 사종삼매 -그 다양성과 회통성」(『천태학연구』1집) p.142.


}}, 상행삼매는 정토종의 염불수행과 연결관계에 있으며{{) 이영자 「천태실천론의 사종삼매 -그 다양성과 회통성」(『천태학연구』1집) p.142.


}}, 반행반좌삼매는 밀교의 수행법과 연결점이 있고{{) 이영자 「천태실천론의 사종삼매 -그 다양성과 회통성」(『천태학연구』1집) p.142.


}}, 비행비좌삼매는 송대 이후에 크게 일어난 간화선 수행과 적어도 간접적 관련성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영자 「천태실천론의 사종삼매 -그 다양성과 회통성」(『천태학연구』1집) p.142. 비행비좌삼매는 선종의 남돈선적(南頓禪的) 선풍과 유사하다고 한다. 이영자 교수는 '남돈선'이라고 하였고, 이 논문에서는 '간화선'이라고 한 것이 서로 다르다. 아마도 남돈선이라고 하는 것이 간화선을 포함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간화선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영자 교수의 논문에 근거해서 일본학자의 견해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佐佐木憲德은 생활에 즉한 선이라는 점에서 남돈선의 선풍과 같은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佐佐木憲德『天台敎學』p.221),이 점을 山內舜雄도 다시 인용하고 있다(山內舜雄『禪と天台止觀』p.221). }}. 왜냐하면,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마음을 분석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인 비행비좌삼매와 일상생활의 어떤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화두를 의심하는 수행법인 간화선은 적어도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실질적 수행법을 개발하겠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비행비좌삼매가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간화선의 등장이 비행비좌삼매의 직접적 영향은 아니라 할지라도 간접적 영향은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천태의 4종삼매에는 밀교·선종·정토종이라는 실천불교의 모든 수행법을 종합하고 있다는 의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천태 4종삼매는 중국불교 수행법의 크나큰 진원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법도 비행비좌삼매와 연결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위빠사나 수행법 중, 4염처 수행은 우리의 일상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인데, 이점은 비행비좌삼매와 일치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비행비좌삼매를 축으로 해서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점에서 간화선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 서로 대립되는 것만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비행비좌삼매에 대한 투철한 이해는 아마도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서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접점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그러나 4종삼매에 이러한 장점이 있다고 해서 이것을 오늘날 무조건 다 수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될 점도 있다. 그 중, 상행삼매(常行三昧)의 방법에는 불합리한 표현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승에 대한 제자의 무조건적 복종을 의미하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 제자가 스승을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음의 예문에서 보듯이, 노복이 주인을 섬기듯이 하라는 표현은 그 의도가 아무리 순수하다고 해도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주저되는 감이 없지 않다. 그 인용문을 살펴보자.


밝은 스승이 안과 밖의 율(律)을 잘 정해서 수행에 방해되는 장애(妨障)를 제거했으니, 이 상행삼매(常行三昧)를 들은 곳에서 스승보기를 세존(世尊)보듯이 하여, 미워하거나 성내지 말고 장단점을 보지 말라. 마땅히 살점을 베어서라도 스승에게 공양을 하여야 할 것이니, 하물며 나머지 일에 있어서랴?


[어떠한 일에도 복종한다.] 스스로를 받들어 섬기는 것은 노복이 대가(大家)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스승에게 증오하는 마음을 일으켜 이 상행삼매를 얻으려 한다면 마침내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마하지관』2권 상 (『대정장』46권, p.12 중) "須明師 善內外律, 能開除妨障, 於所聞三昧處, 如視世尊, 不嫌不 , 不見短長. 當割肌肉, 供養師, 況復餘耶? 承事師, 如僕奉大家, 若於師生惡, 求是三昧, 終難得."}}.


위 인용문에서 말하는 것은 스승에 대한 제자의 무조건적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봉건적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4종삼매에서 말하고자 하는 종합적 의미는 계승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봉건시대 사회상을 털어 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전통이란 계승해야 될 것이겠지만, 계승의 뒷면에는 버릴 것을 버리는 선별작업도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계승과 비판을 통해서 부처님의 혜안이 현재에도 살아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불교학자의 사명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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