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眞如門 - 離言眞如 (심진여문 - 이언진여)
以一切言說 假名無實 但隨妄念 不可得故 言眞如者 이일체언설 가명무실 단수망념 불가득고 언진여자
亦無有相 謂言說之極 因言遣言 此眞如體 無有可遣 역무유상 위언설지극 인언견언 차진여체 무유가견
以一切法 悉皆眞故 亦無可立 以一切法 皆同如故 이일체법 실개진고 역무가립 이일체법 개동여고
當知一切法 不可說 不可念故 名爲眞如 당지일체법 불가설 불가념고 명위진여
(고) 일체의 언설이 거짓 이름일 뿐이요, 실다움이 없는 것이니 다만 망념을 따랐을 뿐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진여라고 말하는 것도 또한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이르되 언설의 궁극으로 말을 인하여 말을 보낸 것이거니와 이 진여의 체는 가히 보낼 것이 없음이니, 일체의 법이 다 참다운 까닭이며 또한 가히 세울 것도 없음이니 일체의 법이 다 한 가지로 여여한 까닭이니라.
마땅히 알라 일체법은 가히 말할 수도 없고 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까닭에 그 이름을 진여라고 함이니라.
(감) 무엇 때문에 진여는 명자와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모습을 떠났는가? 일체 언어로써 설명하는 것은 임시적인 거짓 명자일 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심의식의 망상으로 반연하는 모습을 떠났는가? 망념을 따라서는 진여의 모습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자와 언설의 심의식이 반연을 일체 모두 떠났다면 어떤 것이 진여의 모습인가? 진여란 모습이 없다. 왜냐하면 진여의 자체는 차별적인 모습을 떠나 번뇌가 고요히 사라져 차별적인 모습으론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명칭을 여의고 모습이 단절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진여라는 차별적인 명칭이 있게 되었는가? 진여라고 명칭하긴 했으나 역시 명칭을 붙일 만한 실제의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니라. 진여라는 명칭은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극치이므로 진여라는 말을 의지해서 명자와 언설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였을 뿐이다.
명칭과 언설을 버렸다면 이 진여의 자체도 버려야만 하는 것인가? 이 진여의 자체는 진실하여 망상이 없다면 버릴 만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버릴만한 것은 망상일 뿐이며, 버리지 못할 것은 진실인데 일체법은 다 진여이기 때문에 버릴 만한 것은 없다.
모든 허망을 함께 버렸다면 진여 하나의 법만 성립이 될 뿐인가? 이 하나의 법도 성립할 만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진여밖에 따로 하나의 법이 있다면 성립이 가능하다 말하겠지만 일체법이 진여로 더불어 동일한 자체이기 때문에 진여와 법이 둘이 없고 따라서 구별도 없는데 어떻게 진여 자체가 독자적으로 성립이 가능하겠는가?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알아야 할 것은 일체법은 언어의 설명이 불가능하고 심의식으로는 사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진여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는 차별적인 모습을 떠난 구경의 경지인 것이다.
✿ 이 부분은 심진여의 결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심진여인 일체법이 말을 떠나 있고 명칭이나 개념을 떠나 있으며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을 떠나 있다는 것이며 이는 곧 일심이며 진여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심진여(心眞如)가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인하기 쉽습니다. 모든 존재는 일체 언어문자에 의해서 실체시 됩니다. 사물에 명칭을 붙여보면 사물이 독립되고 실체화됨을 알 수 있습니다.
진여라 말하는 것 또한 상이 없으니 말하자면 언설의 궁극은 말에 의하여 말을 버리는 것이다. 이 진여의 체는 버릴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다 참되기 때문이며, 또한 나타낼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동일한 까닭이다. 당연히 일체의 법은 말할 수 없고 생각[念]할 수도 없는 까닭에 진여라고 이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이미지 즉 상(相)을 가지고 있으므로 취하고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그 상에 따라 높고 낮음, 아름다음과 추함 등의 상대적 차별이 생긴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망념이 진여를 장애함으로써 야기되는 불평등한 가상(假相)의 일체 경계이다.
‘일체법이 모두 참답다’라고 한 것은 일체법이 곧 마음의 진여임을 일컫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일체와 일체법이다. ‘일체(一切)’란 낱낱이 분리되어 있는 세계를 말한다. 이는 망념이 만들어낸 세계이기에 가상이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체’를 지혜의 눈으로 꿰뚫으면 진여의 세계가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일체법’이며 본래 평등하고 동일한 세계인 진여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일체법이 곧 불법(佛法)”이라고 이르셨으며 “일체법(一切法)에 최정각(最正覺)을 이루었다”고 화엄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깨달음은 곧 일체가 법으로 나타날 때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법입니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중에 법이 매우 중요합니다. 법을 깨달으면 부처요. 법을 깨치기 위해 수행하면서 서로 익히고 체험한 법을 서로 교류하고 화합하는 단체를 승가라고 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법의 종교라고도 말할 수 있다. 법에 의지해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진여(心眞如)가 곧 일체법이라는 것은 ‘마음밖에 법이 없고 법밖에 마음이 없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유언에도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체가 법으로 현현하고 이것이 마음 진여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본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된다.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상태란 머리 속에 생각의 움직임이나 생각자체를 애초에 일어나지 않게함으로써 일체 모든 것이 법으로 나타나는 상태이다. 자설경(自說經) 제일품 보리품(菩提品) 에 보면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순간을 노래한 우다나송(頌)이 있다.
“⌈실로 열심히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바라문에게
진리가 현현(顯現;pātubhavanti하게 될 때 그의 모든 의심은 없어진다 라고 하는 것은 그가 연기(緣起)의 법(法)을 깨달았기(pajānāti) 때문에.”
이 게송은 깨달음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으니 깨달음이란 연기의 법이며 바로 마음의 고요함[禪定]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존재가 법으로써 나타나는 상태를 “깨달았기 때문에”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선정에서 깨달음이 일어남을 말하는 것이다. 선정을 깨달음의 바탕이라 하는 것이니, 곧 사마타[止] 관(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선정이다.
그렇다면 법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을 들 수 있겠다. 법인(法印)에서 인(印)이란 확실하다, 변경할 수 없다는 뜻이니 법인은 곧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따라서 삼법인은 타 종교나 사상과 뚜렷하게 다른 불교의 특성을 표명하는 기치(旗幟)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하고 사법인은 여기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덧붙인 것이다. 이 법인(法印)이 바로 법의 특성을 나타낸다. 즉 모든 것은 무상하게 변하는 것이며 모든 현상에는 실체가 없고 상(相)이 없는 적정, 이것이 바로 법의 실상이다. 동시에 법을 체득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이니, 변화와 무실체의 공성(空性)과 무상(無相)은 말과 생각을 떠날 때 나타나는 법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의 변화를 잘 관찰해서 변화 속에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을 보거나, 나아가서 마음마저 비어서 동요가 없는 한 마음(一心)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법을 보는 것이며 법이 나타난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 설명하는 심진여인 일체법은 곧 무상(無相)과 무차별 평등과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심성(心性)을 말한다. 삼법인에서 말하는 법과 동일하다. 이것이 법의 정체이다.
(✿)은 지운스님의 대승기신론에서 발췌
동채 2008.10.17 05:59 http://blog.daum.net/eastandsouth/78546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