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몰록 벗어나 무심경지 이르면 業 소멸된다-혜국스님 화두란 내 마음을 바로 보는 ‘암호’ 번뇌망상은 내가 과거에 걸어온 길 참선수행 통해 ‘파도’ 잠재우면 곧 부처
허공을 한 번 보자. 허공은 천 년 전 허공이나 지금 허공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조금도 다르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허공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 허공은 그저 원융한 상태이지 이 허공, 저 허공이 없기 때문에 이 쪽이니 저 쪽이니 하는 공간이 없다. 즉 시간과 공간이 없는 자리를 ‘죽음이 없는 자리’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허공성을 체득하지 못하는 까닭은 내 마음이 마음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무엇이고 집착하는 것은 무엇이며 육신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살펴보자. 우리 몸뚱이를 한 번 보자. 몸뚱이는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흙 기운, 물 기운, 열 기운, 바람 기운 즉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우주 자원에 있는 원소를 빌려다가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이 몸뚱이는 빌려온 기간이 있어서 그 기간이 끝나면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사람이 죽으면 죽었다는 말을 쓰지 않고 ‘돌아갔다’고 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지수화풍이라는 재료로 몸뚱이라는 그릇을 만들 때 그 속에는 무엇이 차 있는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우리 몸통이라는 그릇 속에 번뇌 망상이 꽉 차 있기 때문에 그 번뇌 망상의 기운이 보일뿐 무심(無心)의 세계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원효선사는 “만약에 몰록 벗어나서 무심경지에 오르기만 한다면 모든 망념과 더럽혀진 습기가 다 없어져 버린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무심경지란 무엇인가. 찻잔에 차가 가득 차 있다고 하자. 이 차를 몇 번 마시면 그릇은 빈다. 빈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 공간에 아무것도 없는 세계를 허공성이라고 한다. 우리 몸뚱이의 번뇌 망상을 찻잔을 비우듯이 비워버려 텅 빈 그릇을 무심경지라고 한다.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보자. 다른 종교에서는 ‘원죄’라고 하는 것이 있다. 내가 아무리 정진하고 부처님께 절을 해도 원래부터 있는 죄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참선법에서는 무심경지에만 오르기만 한다면 모든 망념과 백천만 년 지어놓은 업이 한 순간에 없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정말 엄청난 것이다. 어찌해서 그러한가. 우리가 화가 나고 몹시 불안할 때 비닐봉투에 입김을 불어 그것의 색깔을 보면 검은 색이 나온다. 화두참선을 하거나 또는 기도 사경 절을 해서 일념에 들었을 때의 입김을 보면 흰색이다.
똑같은 몸뚱이에서 화가 났을 때는 검은 공기가 나오고 마음이 안정됐을 때 공기는 흰색이 된다. 이 흰색의 광명이 100% 몰려있는 세계를 부처의 세계라 한다. 검은 색이 모여 있는 곳을 지옥세계라고 한다. 그런데 검은 색도 내가 만들고 흰 색깔도 내가 만들었으니 극락도 지옥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검은 색과 흰색을 절반씩 갖고 있으니 어느 쪽으로 내 몸뚱이를 몰고 가느냐에 어느 세계로 가느냐가 달려 있다. 내 업이 만약 검은 색인데 오늘 ‘몰록 무심에 들어갔다’면 내 안은 텅 빈 허공이므로 검은 색이 없어진다. 고로 내가 억겁동안 지어온 업도 내가 한 순간에 멸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화두 참선법이다.
번뇌 망상이라는 존재를 규명해보자. 여러분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번뇌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의 허물을 보느라 자신의 번뇌 망상은 보지 못한다. 참선은 자신의 허물을 감추는 것이다. 감추는 것을 떠나 아예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이 내가 지어놓은 번뇌 망상이 무심으로 돌아가고 허공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나도 참선을 하면서 여러 번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애를 먹었다. 하지만 먼 훗날 돌이켜 보건데 번뇌 망상이 바깥에 있다가 나를 애먹이려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내게 떠맡기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불자들이 자신의 종교에서 보람을 갖지 못하는 것은 과거와 내생을 믿지 않는데서 비롯된다. 내생이란 죽고 난 다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미래를 의미한다. 우리가 죽고 나서도 미래는 영원하다. 내 모자란 것을 다음생과 다음생을 거쳐 닦고 닦고 또 닦아 언젠가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불교 교리에 무수히 등장한다. 내 미래는 영원하기 때문에 모자란 것을 다음생에 또 하고 또 하면 불가능은 없다는 완전한 희망을 화두라고 한다.
내가 젊은 시절에 큰스님들이 맛있는 것을 드시면 먹고 싶었다. 그래서 법당에 가서 ‘부처님 나도 빨리 큰스님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빌고 빌었다. 그런 길로 가고자 하는 것은 누가 원하는 것인가. 바로 내가 원한 것이다. 내가 원해서 만든 것이다. 살아가고 있는 눈앞의 모든 일들이 모두 여러분들이 선택한 것이다. 참선법은 이런 인과법을 확실히 믿어야만 잘 될 수 있다. 내 몸 안에 있는 모든 번뇌 망상은 과거 어느 생엔가 간절히 원한 것이 잠재의식에 녹음이 된 것이니, 과거의 내 발자취가 바로 번뇌 망상인 것이다. 이것을 믿는다면 번뇌 망상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어떻게 청소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길을 10년간 걸어왔으면 다시 10년을 되짚어가면 되지만 번뇌 망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법이니 검은 색을 나오게 하는 것도 내가 만든 것이요, 흰색이 나오도록 하는 것도 자신이다. 검은 색깔을 몽땅 흰 색깔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찰나 간에 업장 소멸하는 것이다. 찻잔에 든 물은 쏟아버리면 되지만 내 몸 안에 있는 번뇌 망상은 모양이 없어 버릴 수 없다. 백천만 년 가도 쏟아낼 수 없고 남이 꺼내줄 수 없는 것을 내가 스스로 백색 기운으로, 허공 기운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화두참선법이다. 고로 무심경지에 오르기만 한다면 모든 망념과 더럽혀진 습기가 다 없어진다.
화두를 받으러 온 불자에게 과연 그것을 믿느냐고 묻는다. 화두를 믿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화두란 내 마음을 바로 보도록 하는 암호다. 믿지 않고 의심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깨달으라고 준 것이다.
우리의 그릇은 무엇을 통해 채웠는가. 눈 귀 코 입 몸뚱이 생각이라는 육근(六根)으로 그릇을 채워왔다. 이 육근 문을 닫아두고 내 마음을 침잠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부처님을 믿고 화두참선하는 것이다. 시계로 비유해보자. 밝은 데서는 분명 보이지만 어두운 데서는 물체의 형태를 알 수 없다. 내 업이 깜깜한 곳을 보도록 익혔느냐 환한 곳을 보도록 익혔으냐 차이다. 내 업의 작용인 것이다.
화두를 하나 놓침으로 인해, 내 마음을 한 번 배신함으로 인해 나고 죽고 죽고 나기를 대체 몇 번이나 했던가. 내가 화두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내 자신의 인격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니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모든 불조가 생사해탈하는 데 이미 시험한 묘각(妙覺)일진데 내가 이 나라 이 국토에 태어난 불자로서 화두참선법을 해보는 것은 종교를 떠나 나를 찾아가는 길이다.
바다로 한 번 가보자. 바다를 우리의 마음 세계, 파도는 망상의 세계라고 하자. 파도라는 망상이 싫다고 다 걷어 내면 바닷물도 말라 버린다. 파도가 바닷물이요 바닷물이 파도다. 파도라는 망상을 멈추려면 바람을 쉬게 해야 한다. 바람이란 우리의 욕망이자 내가 바라는 바다. ‘어째서’ 하는 화두 일념이 될 때 바라는 바가 끊어진다. 오로지 모든 허물은 결국 내 마음이 깨닫지 못한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어째서’ 하는 화두로 바람을 멈추면 파도는 망상이 아닌 부처가 돼버린다. 없어지도록 죽여 버려야 하는 것이 번뇌 망상이 아니라 그 놈이 바로 보리 성품에서 나왔으므로 바람만 잠재우면 부처가 된다. 망상 없이는 공부하지 못한다. 한 생각 잠잠하면 온 몸이 드러나나 한 생각 일어나면 구름 속에 파묻힌다.
정리=김하영 기자 사진 신재호 기자 혜국스님은 1961년 해인사에서 출가해 일타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70년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이후 1994년까지 제방 선원을 돌며 참선 수행에 매진하며 수십 안거를 성만했다. 1994년 제주도에 남국선원을, 1997년에는 부산 홍제사를 개원하며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다. 2004년에는 충주 석종사를 창건했다. 현재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이자 전국선원수좌회 대표를 맡고 있다.
-불교신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