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1. 관세음이라 이름하신 내력

白道 박만주 2017. 8. 17. 10:09


 



 

  1. 관세음이라 이름하신 내력


【爾時無盡意菩薩 卽從座起 偏袒右肩 合掌向佛 而作是言 世尊 觀世音菩薩以何因緣名觀世音】

그때에 무진의無盡意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하나이까.”

 

「보문품」의 전문全文은 장행長行과 게송偈頌의 큰 단락으로 나눌 수 있으며, 장행은 산문체이고 게송은 운문체로써 경의 뜻을 베풀어 설한다. 장행과 게송의 내용은 별 다를 것이 없고 다만 문체의 운용이 다를 뿐이며, 먼저 장행으로 설하고 나중에 게송으로 정리하는 형식을 취한다.


【爾時】라는 뜻을 살펴본다면,「보문품」은 『법화경』중 제25품으로 바로 전의 제24품은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이다. 여기서 이시爾時라고 이르는 것은 「묘음보살품」의 설법이 막 끝나고 다음 「보문품」을 설하여 베풀려고 하는 때를 말한다.

여기서 「묘음보살품」의 제일 마지막 몇 구절을 살펴보면【說是妙音菩薩來往品時 四萬二千天子得無生忍 華德菩薩得法華三昧】라고 설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부처님께서 「묘음보살품」을 설할 때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법의 이익을 얻게 하셨고, 대중들은 부처님께 다시 자리에 오르셔서 묘법을 베풀어 설하여 주시기를 바라는【이때】를 가리킨다.


묘음보살妙音菩薩은 『법화경』에서 설명하기를 동방일체정광장엄국東方一切淨廣莊嚴國의 대보살이며, 관세음보살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서방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의 대보살이다.

그리고 동방묘음보살은 일체색신삼매一切色身三昧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중생들을 교화할 때 자유자재로 변화의 몸을 보일 수 있다. 즉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그 모습을 바로 나투어 중생을 제도한다.

또한 관세음보살님도 본 품의 뒷부분에서 소개하는 것과 같이 “應以何身得度者 卽現何身而爲說法” 일체색신삼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두품을 [자매품]이라 이르고, 그 의의와 가치가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대중이 동방묘음보살의 수승한 공덕을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서방관세음보살도 또한 대단한 대보살임을 알 수 있지만 스스로 증득한 그의 공덕이 도대체 어떠한가를 법회대중들이 아직 알지 못하기에 부처님께서 직접 관세음보살님의 덕을 베풀어 설하셨다. 바로 부처님께서 대중을 위해 설하시는 그때를 일러 【爾時】라고 한다.

 

【無盡意菩薩】은 동방불현東方不眴세계의 대보살이며, 불현세계의 교주는 보현여래普賢如來이다.「관세음보살품」에서 법을 묻는 대표자로 부처님께서 「묘음보살품」을 설하여 마친 그때에 무진의보살이 나와서 법을 청하였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은 서방극락세계에 성불하여 장래에 아미타불을 계승할 분이며, 무진의보살도 역시 동방불현세계에서 성불하여 보현여래를 계승할 분이다.

무진의보살은 이미 동방 불현세계의 대보살인데 어떻게 사바세계에 와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것인가? 이는 보현여래의 명을 받들어 왔다.

『법화경』을 설함은 부처님의 근본적인 마음에 품은 이야기를 바로 펼쳐 보이신 것이기에 시방제불이 모두 그들의 상수上首보살을 보내어 부처님이 설하시는 묘법을 듣게 하였다.


무진의보살이 부처님께서 『법화경』의 설법을 시작할 때 고요히 앉아 법을 들었으며, 부처님이 「묘음보살품」의 설법을 마칠 때 법을 구하기 위해서 【卽從座起】 즉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처님과 보살의 성호聖號는 그들의 모든 공덕으로부터 연유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무진의 라는 이름은 어떤 공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인가? 이것은 세계世界, 중생衆生, 비원悲願의 세 가지 방면에서 설명을 더할 수 있다.

 

세계방면世界方面으로 설명하면, 사바세계와 같은 큰 세계가 무궁무진하고 무량무변하게 많다고 한다. 경에서 이를 무진세계無盡世界라고 이른다.

이렇게 많은 세계 중에 사바세계의 예를 들면 남섬부주南贍部洲의 사람들이 있다. 만약에 사대부주四大部州의 사람들을 모두 더한다고 하면 당연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여기에 인류人類를 제외하더라도 기타의 중생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다만 한 세계의 중생들이 이럴 진데, 매 세계의 중생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말하기를 중생들이 무진無盡하다는 것이다.

대보살의 지혜로써 이 세계를 관찰할 때 한없는 세계가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한없는 무진의 세계 속에는 한없는 무진의 중생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중생들은 번뇌의 부추김으로 업의 바다에 떨어져 윤회輪廻속을 헤매며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곳을 벗어날 기약이 없다.


무진의보살이 다함없는無盡 이 중생들의 온갖 고통과 번뇌 속에 허덕이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내심 깊은 곳으로부터 무진비원無盡悲願을 일으켰다.

무진세계 중에 무진중생을 구하고자하는 큰 원을 세우고, 한없는無盡 이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게 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성불할 것을 원으로 삼았으므로 이름하여 무진의無盡意라 하였다.


옛 대덕스님들이 무진의의 이름을 해석하기를, 세계가 무진한 것은 괜찮으나 무진한 세계 속에는 어떤 곳은 청정세계淸淨世界이고, 어떤 곳은 예악세계穢惡世界이다.

그러나 예악세계가 청정세계보다 더 많으며, 무궁무진의 세계 대부분은 속진으로 복잡하고 어지러우며 불결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이러한 세계의 중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상관없이 그들은 대부분 업의 바다에서 한없는 업력業力의 이끌림을 받고 있다. 마치 업력이 그들을 극락으로 인도하면 극락에 도달할 것이고, 업력이 땅 속의 지옥으로 이끈다면 바로 지옥으로 가는 것처럼, 자기 스스로 털끝만치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이다.


중생이 업의 바다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근본적인 원인은 끝없는 애욕이 그치지 않기 때문이며, 마치 끊임없이 파도가 일어 큰 물결이 출렁거리는 것과 같이 고해苦海가 끝없다. 중생은 이같이 쉼 없이 혹ㆍ업ㆍ고를 순환하고 있기에 보살이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만약에 고통을 받고 있는 이 중생들을 내가 발심을 내어 제도하여 구하지 않으면 누가 이러한 일을 하겠는가.’


그래서 바로 한없는無盡 자비심을 내어 무진의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무진의라고 하였다고 설명한다.

무진의보살과 모든 법회대중들이 관세음보살님의 공덕을 알기를 원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일어나 묻기를 청하지 않는 것을 보고, 대중들을 대표하여 무진의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卽從座起】이 구절은 글자로 본다면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천태天台스님이 해석한 것을 살펴보면 아주 깊은 뜻을 담고 있다.


라고 함은 보통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공法空의 좌이다. 또한 『법화경』에서 말하는 [제법공위좌諸法空爲座]이다.

여기서 법공을 자리로 한다는 것은 제법諸法뿐만 아니라 법공法空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만약 공에 집착을 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공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무진의가 즉종좌기한 것은 그가 공에 집착하지 않음을 보인 것이며, 그리하여 말하기를 법공의 자리라고 하는 것이다. 물들지 않는 공이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며, 보살이 법공의 자리로부터 일어나 법을 물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에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일어나서 법을 물을 것이 없을 것이며, 경을 설하여 법을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즉종좌기】의 이 구절은 실로 공유空有를 집착하지 않고 공유에서 초탈超脫한 실상묘법實相妙法의 깊은 뜻이 존재함을 확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偏袒右肩】은 출가한 제자들이 일어나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물을 때 하는 일정한 의식이다.

부처님이 계실 당시에 비구가 가사를 수할 때 지금의 남방스님들이 입는 방법과 같다. 율장에 비구가 부처님께 예를 올릴 때가 아니거나 부처님이 법을 설할 때가 아니면, 평소에는 좌우左右의 어깨를 모두 감싸서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부처님께 예를 올릴 때 공경을 표시하는 의미로 특별히 오른쪽 어깨를 밖으로 드러내었다.

무진의보살도 법을 묻으려 할 때, 부처님에게 존중의 의미로 먼저 몸의 가사를 내려서 옷을 걷어 올려 자기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 보였다.


여기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는 감춘다는 본 뜻 또한 깊은 의미가 있다.

불법을 수행하는 이가 대단한 경지에 오르게 되면 두 종류의 지혜를 갖추게 되는데, 그 하나는 제법공성諸法空性의 진리眞理를 증득하게 되어, 깨달은 바의 진실한 지혜眞實智는 언어로서는 표현해 낼 수 없다. 그래서 왼쪽 어깨를 덮어 감추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진실지眞實智를 증득하면 세속의 일체를 관찰하여 모든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할 수 있다. 수행에서 나타내는 방편의 지혜方便智를 가리키며, 혹은 권교지權巧智라고도 한다. 그래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사람들로 하여금 제대로 가르침을 줄 수 있게 함이다.

방편지는 오른쪽 어깨와 진실지는 왼쪽 어깨를 상징하며, 하나는 드러나고 하나는 감추어지어 바로 권실權實의 두 지혜를 대표한 것이다.


무진의보살은 대보살이므로 왼쪽 어깨를 덮은 그 뜻은 바로 그가 묘법실상의 진실된 지혜를 증득하여 갖추고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뜻은 그가 능히 권교 방편의 지혜를 자유로이 쓸 수 있음을 표시한 것이다.

방편지는 세속을 교화하는 것을 뜻하고, 진실지는 진여불성眞如佛性과의 계합함을 뜻한다. 이 두 지혜를 운용한다 함은 진이 곧 속이며, 속이 곧 진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진과 속을 능히 융합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함을 말한다.


【合掌向佛】은 양손을 합하여 부처님을 향한다는 말로, 인도에서 사람들이 서로 만났을 때 나누는 일종의 예절이다.

이것의 의미를 해석한다면, 양손에 열 개의 손가락에서 나누어 진 것은 각기 독립됨을 뜻하고 앞서 설명하였던 십법계를 대표한다. 그리고 열 개의 손가락을 서로 합쳐서 합장하고 가슴에 붙이는 것은 십법계가 우리들의 한 생각 마음 가운데 있음을 표한 것이다. 결코 한 생각 마음을 떠나서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而作是言】은 무진의보살이 응당 예를 갖춘 후에 부처님에게 관세음보살의 공덕에 대해서 법문을 청한다는 뜻이다.

위의 몇 구절에서 신ㆍ구ㆍ의삼업三業의 활동을 드러냄을 알 수 있다. 즉 즉종좌기는 신업身業이고, 이작시언은 구업口業이며, 합장향불은 의업意業이다.

여기서 한 마음을 모으는 것은 표면상으로는 신업身業이나 실재로는 의업意業에 속한다.


모든 사람들이 삼업의 활동을 선의 방면으로 행한다면 정당하고 합리적인 활동일 것인데, 문제는 중생의 삼업은 대체로 악의 방면으로 향해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설사 선을 행하더라도 이 역시 유루有漏에 속한다.

그러나 무진의의 삼업 활동은 시방세계의 부처님을 만나 법을 들을 때나 중생을 위하여 교화 설법할 때를 막론하고, 모두 청정하고 물듦이 없는 순수한 선이며 무루無漏이다.


【世尊】은 부처님의 명호 가운데 하나이고, 세간과 출세간에 모두 존귀하므로 그래서 세존이라 이름하며, 큰 가르침을 청할 때 먼저 세존이라 칭하였다.


【世尊! 觀世音菩薩以何因緣名觀世音?】

여기서 무진의보살이 부처님께 관세음보살님이 어떤 인연으로 관세음이라고 이름 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문제는 보통의 초심자가 물음직한 것이다. 예를 들어 초심자가 열심히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염할 것을 발심하고 생각하기를, ‘내가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염하는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인데, 그럼 왜 관세음보살님이라고 이름을 부르는가?’라며 묻는 것과 같다.

무진의보살은 멀지 않아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이해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가 이 물음을 하는 것은 관세음보살님의 공덕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생을 대표로 한 것이다. 특히 말법시대의 중생을 위해 대신 묻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관세음보살님의 위대하고 광대한 자비심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무진의보살이 당시에 부처님에게 청하여 물은 것에 연유한다.


【佛告無盡意菩薩 善男子! 若有無量百千萬億衆生 受諸苦惱 聞是觀世音菩薩 一心稱名 觀世音菩薩 卽時觀其音聲 皆得解脫!】

부처님이 무진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일 한량없는 백 천 만억 중생이 모든 괴로움을 받을 적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곧 그 음성을 관찰하고 모두 해탈케 하느니라.


무진의보살의 질문에 대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답이시다. 이것은 부처님의 총체적인 답이며, 「보문품」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이 문장은 전품全品의 강요綱要로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의 깊은 자비慈悲와 광대한 원과 관계가 있으며, 이 경문에서 완전하게 표현하여 담고 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 그 명호에 대한 유래가 그 경문의 단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중생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염하는 방법과 그 이익에 대해서도 모두 이 구절 안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그래서 이것은 전품의 총강總綱 혹은 중심이 된다.


【부처님이 무진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善男子여】 

이는 부처님이 무진의를 부르는 호칭이다. 선남자는 보통의 남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깊고 두터운 선근을 가진 남자를 선남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선근善根은 길러지는 것이지 천성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다. 경전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보시하며 계를 지키는 것, 이러한 모두가 선근을 기르는 제일 큰 방편이다. 여러분들이 불법을 공부하고 있는 것 또한 선근이 있으므로 더욱 더 길러 나아가야 할 것이다.


【若有無量百千萬億衆生 受諸苦惱】

여기서는 관세음보살님이 구제하는 대상을 나타낸 것이다. 무량백천억의 중생이라 함은 한없이 많고 많은 중생을 형용한 것이다. 이 세간에는 많고 많은 중생들이 살아가지만

그들은 결코 행복만을 누린다고 볼 수는 없고 대부분 고통과 번뇌로부터 핍박받고 있다.


여기서의 고통과 번뇌를 상세히 설명하자면 끝이 없다. 게다가 인간은 온갖 고통과 번뇌들로 가득하며, 이것을 간단히 팔고八苦라고 말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근본 네 가지 고통과 더불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愛別離苦, 싫어하고 증오하는 이와 만나야하는 고통怨憎會苦, 바라지만 구하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온성고五蘊盛苦이다.


여기서 오온은 유정有情 중생의 본신本身을 말하고, 오온이 불과 같이 치성하여 고통의 바다는 끝없다는 말이다.

만일 우리의 몸과 마음에 번뇌와 괴로움이 엄습해 올 때, 큰 소리로 고함이라도 친다면 좀 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지금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이 고통을 받을 때 의미 없는 신음소리 내지 말고, 마음을 집중하여 일심으로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칭하라고 권한다.


그래서 설하기를

【聞是觀世音菩薩 一心稱名 觀世音菩薩 卽時觀其音聲 皆得解脫】이라고 하셨다.

세상의 소리를 관하므로 그래서 관세음觀世音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중생들이 관세음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찾아 고통에서 구해준다. 이러한 연유에서 대자대비大慈大悲 관세음觀世音이라는 이름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중생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만약에 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염한다면 관세음보살님은 그 칭명하는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반드시 그의 고통을 없애 줄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얽매어 묶었던 그 고통에서 해탈을 얻도록 한다.


【聞】이라는 글자는 여기서 제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음성으로 들으며, 관세음도 또한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음성을 듣고 구제한다.


이와 같이 서로 들음으로써, 비로소 능히 서로 응하고 서로 느낀다. 즉 중생은 그 성호를 듣고 찬양하며, 보살은 그 칭명의 소리를 듣고 구제한다. 그래서 이르기를 중생은 관세음을 듣고 관세음은 중생을 듣는다고 한다.


중생이 관세음을 듣는다는 것은 바라는 바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관세음이 중생을 듣는다는 것은 감응하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감응하는 바에 따라서 중생이 해탈을 얻는다.


관세음보살은 모든 허공법계虛空法界에 두루 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리고 어느 곳을 막론하고, 다만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음성을 듣는다면, 보살은 대자대비로써 그들의 앞에 나타나, 그들로 하여금 고통에서 벗어나 대 해탈을 얻게 할 것이다. 그래서 듣는다는【聞】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왜 문세음보살聞世音菩薩이라 부르지 않는가?

중생은 육근六根을 서로 함께 이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 그러나 보살은 이미 능히 육근을 서로 함께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눈은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들을 수 있고, 귀는 들을 뿐만 아니라 능히 볼 수도 있다.

세상의 소리를 관하기 때문에 관세음觀世音이라고 부르며, 능히 그 고통의 음성을 관하여 해탈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觀】의 글자는 보살이 능히 지혜智慧로써 관함을 뜻하고,【世音】은 보살이 관하는 경계境界이다.

보살은 지혜로써 유정세간有情世間의 일체고통과 번뇌에서 구해 달라는 간절한 음성을 관찰한다. 그 후에 보살의 자비서원慈悲誓願에 입각해서 그들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재난을 소멸하여 주며, 상서로움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관세음觀世音이라고 부른다.


본경本經에서는 관세음을 이타利他로써 해석하여 설명하였고, 『능엄경楞嚴經』에서는 관세음을 자리自利로 설명한다. 자리自利는 지이며, 이타利他는 비이다. 그러므로 관세음의 명호名號는 자리이타自利利他로써 지와 비의 두 가지의 의미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과거에 중국 절강浙江에 관세음보살님의 성호聖號를 정성스럽게 받들어 염하고 기도하는 미곡상이 있었다. 그 미곡 상인은 마음이 매우 선량했으며, 항상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염했다. 꿈속에서 조차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에 잠을 자는데 관세음보살님이 꿈속에 나타나서 그에게 말하기를, 장래에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그 어려움에서 구해주겠다고 하였다.

“내가 너에게 네 구절의 말을 일러 줄 테니 너는 잊지 말아라.

[봉교막정주逢橋莫停舟 우유즉말두遇油卽抹頭

두곡삼승미斗穀三升米 창승봉필두蒼蠅捧筆頭].”


꿈속에서 들었던 이 네 구절의 꿈을 그 다음날에도 아주 자세히 기억하였고, 평상시의 꿈과는 달랐다. 그는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하였지만 관세음보살님을 지극하게 믿기 때문에 확실히 기억해 두었다.


다음날 배를 빌려 다른 지방으로 쌀을 팔러 갔다. 배를 타고 가다가 오래지 않아서 광풍과 폭우가 몰려왔다. 선원이 먼 곳에 있는 큰 다리를 발견하고 그 밑에 배를 정박해서 잠시 비를 피하고자 하였다.

배가 다리 밑에 다다르려고 할 때, 그가 갑자기 [배를 다리에 정박하지 말라逢橋莫停舟]라는 어제 밤의 꿈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선원에게 즉시 배를 몰고 지나가라고 지시했다.


배가 다리를 막 지났을 때, 놀랍게도 다리가 끊어져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 아닌가. 만약에 배가 다리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가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고 관세음보살님이 그를 구해주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지극한 마음으로 염하고 더욱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저녁 무렵, 그가 집에 모신 관세음보살님에게 절을 하고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법당에 걸어 두었던 유리 등잔이 갑자기 떨어져 바닥에 온통 기름이 뿌려졌다.

그가 또 생각하기를, 첫 구절이 너무나 영험하였기에 두 번째 구절 [遇油卽抹頭]도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기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들어가서 잠을 잤다.


자다가 문득 깨어나 보니, 방안에서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였다. 그래서 일어나 등에 불을 켜고 살펴보았는데, 자기의 부인이 칼에 찔려 살해당해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황당하였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장인어른을 찾아가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장인이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지만, 그는 모른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이에 장인이 의심하기를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딸이 사위에게 살해당했다고 단정하여 바로 관청에 신고하였다.


관청에서 미상米商을 소환해서 심문을 하였다.

부인이 살해되던 그 날 저녁, 집에 없어진 특별한 물건이 있는지를 그에게 물었지만 없다고 대답하였기에 도둑이나 강도에 의한 살인은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묻기를 이웃들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있었는지 물었으나 그가 또 답하기를 없다고 하였다.

 

심문하는 이가 여기까지 심문을 하였는데, 이 사건이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원한에 의한 살인도 아니고, 도둑이나 강도에 의한 살인도 아니며, 또 살인 사건이 깊은 밤에 그가 함께 자고 있었다면, 누가 살해했단 말인가?

 

그래서 그 사건을 판단하는 판관이 판결하기를 “미상사형米商死刑”이라고 쓸려고 붓을 드는데, 이 긴박하고 중요한 고비에 갑자기 한 무더기의 파리들이 날아와 붓 머리위에 앉았다.

판관이 놀라고 이상스럽다고 생각할 때, 미상이 갑자기 기뻐하며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잘 됐다, 참으로 잘 됐어! [창승봉필두蒼蠅捧筆頭]를 또 경험하게 되었구나!”


판관이 이 말을 듣고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겠다 싶어서 그에게 왜 그렇게 기뻐하는지를 물었다. 미상은 반드시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꿈속의 일들을 판관에게 자세히 고하였다.

판관은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이 네 구절을 생각하기를 중요한 관건은 제 삼구에 있기에 모두들 서로 연구한 결과, [두곡삼승미斗穀三升米]의 의미를 알아내었다. 한 말의 곡식에 쌀이 삼이면, 나머지는 자연히 쌀겨(糠:강)가 칠이다.

그래서 흉범은 강칠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비밀스럽게 조사하여보니 마을에 정말로 강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포박하여 심문을 하니 자기가 살인범이라고 자백을 하였다.

강칠이 왜 그녀를 살해 하였는가? 강칠과 미상의 부인은 오래전부터 정을 통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상을 죽이고자 하였다.

 

어두움 속에서 더듬어 머리에 기름을 바른 것이 만져지니, 그가 미상의 부인인줄 착각하고 옆에 누워있던 미상의 부인을 죽인 것이다. 이 사건의 진상이 모두 밝혀지고 판관은 강칠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미상은 무죄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미상은 이러한 변고를 겪으면서 관세음보살님의 자비가 너무도 넓고 크다는 것과  인생이 허망하고 진실되지 않음을 느꼈다.

그래서 출가할 발심을 내었고 그 이후에 열심히 수행하여 득도得道하였다. 판관 또한 보살의 광대한 영험에 감화되어, 이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말하듯이 관세음보살님을 칭념稱念하면 능히 구제받을 수 있으며, 해탈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관세음보살님은 이렇듯 대자대비하며, 관세음보살님을 칭념稱念하는 이 또한 많지만, 해탈을 얻은 이는 왜 적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관건은 염하는 방법이 어떠한가에 있다.

본문에서 말한 【一心稱念】이 제일 중요한 방법이다. 한마음 한뜻으로 관세음보살님을 염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이 칭념稱念한다고 해도 그 효과는 아주 미약하다.

고덕古德이 말씀하시길, “입으로는 아미타불을 외우나 마음이 산란하면, 목구멍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대도 쓸데없다” 고 하였다. 念彌陀心散亂, 喊破喉  也徒然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이 그러하듯이 관세음보살님을 염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우리는 하루 종일 관세음을 염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숫자도 염두에 둘 가치가 없다. 만약에 입으로는 염불하지만 마음이 산란해서 마음과 입이 상응하지 못한다면, 염하고도 해탈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르기를 일심칭념은 바로 한 생각 한 마음을 모아 관세음보살님의 성호에 집중해서, 어떤 잡념도 뒤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마디 한마디의 맑은 염이 지속되어서 외부의 모든 것들을 잊어버려야 비로소 염하는 나와 염해지는 관세음보살님이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그래야 비로소 일심칭념一心稱念이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일심으로 칭념하면 반드시 바라는 것들이 성취되고 자연히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중생이 생사윤회 속에 빠져서 허덕이며 온갖 갖은 고통과 괴로움의 핍박을 받으며, 자유자재하지 못하다. 만약 나의 몸과 마음이 자유롭고자 한다면, 이 말법시대에 제일 수승한 방편은 일심으로 관세음보살님의 성호를 칭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살은 대자대비로 우리의 염하는 지극한 음성을 듣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고, 이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들로 하여금 반드시 해탈을 얻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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