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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대고찰. 수나라때 세워진 유서깊은 사찰임을 조벽에 새겨진 네 글자가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다. |
‘풍간교’라는 이름의 다리를 건너가면 절 입구에 국청강사(國淸講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중국 사찰은 선종(禪宗) 사찰이면 선사(禪寺), 율종(律宗)이면 율사(國淸律寺), 교종(敎宗)이면 강사(國淸講寺)라는 명칭을 붙였다. 국청사는 법화경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부처님을 가르침을 선양하는 교종의 사찰이라는 의미에서 강사(講寺)라고 이름 했다.
수나라 시대의 고찰답게 포대화상을 모신 전각위에는 편액에 시환희상(示歡喜相), 개대환희(皆大歡喜)라 적었다. 시환희상은 항상 웃고 계시는 포대화상이고 개대환희는 우리도 모두 포대화상처럼 웃고 살자는 뜻이겠다.
포대화상이 있는 금강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이 나오는데 우화전(雨花殿)이라는 현액이 달려 있다. 그 옛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하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웅보전에는 중심에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전각에 ‘보전(寶殿)’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여러 불보살들의 상들이 나열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웅전 앞에는 400년 수령의 향당나무가 서 있고, 서태후가 60번째 선물로 받은 것을 옮겼다는 향로가 대웅전 앞에 서 있다.
국청사 대웅전은 중층(重層) 구조로 돼 있다. 건축의 특색은 엄정하면서도 융통성이 있다는 평을 받는다.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면 불단은 석조(石造)로 돼 있고, 중앙에 석가불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의 삼존상을 모셨다. 본존불 뒤 벽면에는 해도관음(海島觀音)이, 또 뒤의 양쪽 구석에는 보현보살상과 문수보살상이 각각 모셔져 있다.
6.8m로 동으로 조성된 법당주불의 용안은 0.8cm두께로 개금되어 모셔져 있다. 양옆 18나한은 나무로 조성되었고 제공화상의 어머니가 이곳에서 기도하는 중 나한상 하나가 넘어지는 태몽을 꾸고 화상을 나았다고 전한다. 중국에서 제공화상은 나한의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제공화상 이야기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대웅전의 뒤쪽은 관음의 공간이다. 대웅전 내 뒷면에는 해도 관음이 조성돼 있고, 대웅전 뒤 축대위에는 따로 관음전이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해도관음상에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실감나게 형상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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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옆 매정 앞에 서 있는 수령 1400년의 매화나무. |
대웅전 옆으로 이동하면 아담한 매정(梅亭)이 서 있는데, 이곳은 최고의 명당으로 문화혁명 당시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보인 매화나무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다. 1400여년전 심었다는 이 매화나무는 불교가 탄압받던 지난 1966년부터 10여년간의 문화혁명기간에는 꽃과 열매를 피우지 않다가 1976년 문화혁명이 끝나자 다시 열매를 맺었다고 전한다.
매화나무에 얽힌 이야기도 무수하지만, 이 나무에서 나는 매실이 귀하디귀해 최근 중국 공산당의 최고위급 간부가 방문했을 때도 오직 매실 한 개만 주지스님이 맛보게 했다고 한다.
매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계단을 통해 위로 오르면 일본 천태종기념비가 있다. 일본불교계의 중국내 뿌리 찾기의 열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이 웅장한 기념비를 보면 절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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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천태종전에 모셔진 상월, 지자, 의천 스님의 상. 한국천태종의 뿌리찾기 노력이 이룬 결실이다. |
천수관음전을 지나면 한국 천태종에서 불사한 한중천태종전이 있다. 이 전각에는 3상의 조각이 모셔져 있는데, 가운데에는 천태대사가, 왼쪽엔 의천대사가, 오른쪽에는 오늘날 한국 천태종을 일으킨 상월원각조사다.
이곳은 매정에 이어 이 사찰에서 2번째 명당지리라 전한다. 따라서 이 자리를 놓고 한일 양국 불교계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결국 한국의 차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천태종에서 중흥조로 불리는 상월원각 스님이 국청사 맨 꼭대기 명당지에 당당히 모셔진 것을 보면서, 참으로 공덕이 큰 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국청사 제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여러 전각들의 침니기와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은 일품이다. 여러 전각 사이를 미로를 걷듯 내려오다 보면 한산, 습득, 풍간의 상을 해학적으로 모셔놓은 곳, 삼현전(三賢殿)이 나타난다. 여기가 저 유명한 한산·습득과 풍간의 전설이 얽혀 있는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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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당. 천태종의 중심사찰답게 법화경을 공부하는 방이다. |
한산은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천태산에서 주석하였으므로 천태한산이라고도 부른다. 한산에 대한 자료는 ‘경덕전등록’, ‘조당집’, ‘송고승전’ 등에 보인다. 이 기록에 따르면, 한산은 위산영우를 천태산에서 만났고, ‘고존숙어록’14와 ‘천태산국청선사삼은집기’에는 조주종심과 만나 문답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또 당나라 말기 두광정의 ‘불전습유’에는 한산이 천태산에 은거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한산스님을 언급하자면 습득과 풍간 스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습득과 한산은 당(唐)나라 태종의 정관(貞觀, 627~649)연간에 국청사에 살았던 인물들이다. 당시 국청사에 풍간(豊干)이라는 도인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풍간과 한산, 습득 세 사람을 국청사에 숨어 산 세 성자라는 의미로 국청삼은(國淸三隱)이라고 불렀다. 이 세 사람이 성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풍간선사는 아미타불의 후신이요, 한산은 문수,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현이라고 하는데서 기인한다. 이러한 주장은『전등록』등에서 언급되어 있다.
이들은 불보살의 화현이지만 이분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들의 기이한 언행을 이해하지 못하여 도리어 멸시하고 천대하였다. 한산은 국청사에서 좀 떨어진 한암(寒巖)이라는 동굴 속에서 살았기에 사람들이 한산이라고 불렀다.
그는 항상 떨어진 옷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식사 때가되면 국청사에 와서 대중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을 먹곤 하였다. 가끔 회랑(回廊)을 거닐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리를 지르거나 하늘을 향해 욕을 하기도 해서 국청사 스님들이 막대기를 들고 쫓으면 손뼉을 치고 큰소리로 웃으며 가버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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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청삼은, 풍간, 한산, 습득의 상이 모셔진 삼현전. 이곳이 저 유명한 한산습득이 활동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
습득(拾得)은 풍간스님이 산 속을 거닐다가 길옆에서 보자기에 싸여 울고 있는 것을 주어와 길렀으므로 습득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부엌에서 불을 지피거나 그릇을 씻는 일을 하였는데 설거지를 한 뒤에 남은 밥이나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한산이 오면 먹도록 내어 주곤 하였다.
하루는 습득이 마당을 쓸고 있었는데, 주지스님이 다가와 “너를 습득이라고 부르는 것은 풍간 스님이 너를 주워와 길렀기 때문이다. 그럼 너의 본래 성(姓)은 무엇이며 어디서 살았느냐? 라고 묻자, 습득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놓고는 두 손을 맞잡고 우뚝 섰다. 이를 바라본 주지스님은 넋을 잃고 바라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붙이고 못했다. 이로 인해 선문(禪門)에서는 ‘차수이립(叉手而立)’이라는 화두가 생겨나게 되었다.
습득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는 또 있다.
국청사에는 절의 외진 곳에 가람신(伽藍神)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별로 돌보는 사람이 없어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지저분했다. 습득이 청소를 하고 사시공양(巳時供養)을 올려놓으면 지켜보던 까마귀가 내려와서 마구 쪼아 먹는 것이었다. 하루는 이를 지켜보던 습득이 가람신에게 달려가 지팡이로 마구 때리며 “네 밥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가람을 지켜! 이 못난 놈아!”하며 꾸짖는 것이었다.
이 날 저녁 국청사 주지스님의 꿈에 가람신이 나타나 말하기를 “보현보살께서 내 밥도 못 지킨다고 저를 마구 때리니 죽을 지경이요. 내 집의 문을 달아 주든지 아니면 공양 올리는 일을 보현보살에게 맡기지 말아 주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 이상한 꿈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하니, 대중들도 모두 똑 같은 꿈을 꾸었다고 소란들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습득인 줄 알고 더욱 신기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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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현전 맞은 편 우물 뒤 쪽에 자리한 한 스님의 숙소. 더운 기후에서 수행하는 스님의 일상을 엿볼 수 있을 것같아 카메라에 담았다. |
풍간과 한산, 습득이 각각 아미타불과 문수, 보현보살의 화현임을 알리는 일화가 또 있다.
일찍이 여구윤(呂丘胤)이라는 사람이 이 고을의 자사(刺史)로 부임해 왔는데 병에 걸려 앓게 되었다. 유명한 의사들을 불러 온갖 약을 다 써보았으나 무슨 병인지 알지도 못하고 차도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풍간스님이 자사를 만나기를 청하자 자사는 자신의 병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풍간스님은 그의 말을 듣고 깨끗한 그릇에 물을 받아 주문을 외우면서 그에게 뿌리자 언제 앓았더냐 싶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자사가 크게 사례하고 설법하기를 간청하자 풍간 스님은 사양하며 “나 보다 문수 보현께 물어보시오.”라는 것이었다. 자사는 다시 “그 두 보살은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묻자 풍간 스님은 “국청사에서 불때주고 그릇 씻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라고 답하고는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자사는 곧 예물을 갖추고 국청사의 한산 습득을 찾아갔다.
마침 한산과 습득은 화로를 끼고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자사가 가까이 다가가서 절을 올리자 무턱대고 마구 꾸짖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스님들은 깜짝 놀라며 “대관(大官)께서 어찌하여 이 미치광이들에게 절을 하십니까?”라고 말하자 한산이 다시 자사의 손을 잡고 웃으며, “풍간이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풍간이 아미타불인줄 모르고 우릴 찾으면 무슨 소용인가!”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선 뒤로는 다시 절에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자사 여구윤은 못내 아쉬워하며 약과 옷 등의 예물을 갖추고 한암굴로 다시 찾아가 예배올리고 말씀을 기다리는데 “도적놈아! 도적놈아!” 라는 말만 남기고 한산 습득은 굴속으로 들어가 버리니 돌문이 저절로 닫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각기 노력하라!”라는 말이 울리고는 돌문이 완전히 닫혀 버렸다.
자사 여구윤은 성자를 친견하고도 좋은 법문을 더 듣지 못한 것을 섭섭하게 여기며 숲 속의 나뭇잎이나 석벽(石壁) 혹은 촌락의 벽 등지에 써 놓은 세 사람의 시(詩) 3백수를 모아 책으로 편집하니,『三隱集』이라고 하며,『寒山詩』라는 제목으로 유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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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 습득에게 묻다는 내용의 시가 적힌 그림. 삼현전 벽에 붙여져 있다. |
한산이 습득에게 물었다 :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고, 나를 속이고, 나를 욕하고, 나를 비웃고, 나를 가볍게 여기고(경멸하고), 나를 천대하고, 나를 속이곤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습득이 대답하였다 :
그저 그를 참고, 그에게 양보하고, 그를 피하고, 그를 따르고, 그를 견디고, 그를 존경하면 되지. 그를 지배하지는 말지니, 몇 년 지나고 나면 너는 또 그를 봐야 할꺼야.
寒山問拾得
世間有人 謗我, 欺我, 辱我, 笑我, 輕我, 賤我, 騙我 如何處治乎?
拾得曰.. 只要忍他 讓他避他 由他 耐他 敬他 不要理他 再遇 幾年 你且着他
삼현전(三賢殿) 벽에 써붙여져 있는 글귀다. 삼현은 한산, 습득, 그리고 풍간(豊干)스님을 일컫는다. 습득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한산. 그러나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어쩌면 한산과 습득은 이 문답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고민을 대신 묻고 대신 대답해주는 것이리라. 마치 금강경의 부처님과 수보리 존자처럼.
삼현전에 들러 세 은자의 경계를 나타내는 선시 한 편씩을 감상하는 것이 삼현에 대한 후학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이 한산이 길을 묻네
그러나 한산에는 길이 없나니
여름에도 얼음은 녹지 않고
해는 떠올라도 안개만 자욱하네
나 같으면 어떻게고 갈 수 있지만
그대 마음 내 마음 같지 않은걸
만일 그대 마음 내 마음과 같다면
어느덧 그 산속에 이르리라.
人間寒山道 寒山路不通
夏天氷未釋 日出霧朦朧
似我他由屆 與君心不同
君心若似我 還得到其中
한산의 시다. 늘 운무로 가득한 절강성 천태산의 날씨가 정말로 한산의 시에서처럼 해는 떴으나 안개만 가득한 것을 이번 순례를 통해 확인한 후 읽는 한산의 시는 더욱 정겹고 가슴에 맺힌다.
우물 밑 붉은 티끌이 일고
높은 산 이마에 파도가 치네
돌계집이 돌아기 낳고
거북털이 날로 자라네.
井低訌塵生 高山起波浪
石女生石我 龜毛數寸長
이와 같은 선시는 내용과 형식은 우리나라 선사들의 선시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선사들 가운데 습득(拾得)의 이 시에 영향을 받은 분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돌계집이 돌아기를 낳고, 거북털이 날로 자라는 이치를 깨닫은 이에게 걸릴 것이 어디 있으랴. 가히 습득이 이룬 경계가 불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는 선시다.
한산과 습득, 두 사람을 돌본 풍간(豊干)의 경계는 또 어떠한가.
본래 한 물건도 없음이여
티끌 묻을 것 또한 없나니
만일 이 이치를 깨달았다면
두 눈을 부라리며 앉아 있을 필요 없네.
本來無一物 亦無塵可拂
若能了達此 不用坐兀兀
풍간의 벽상시(壁上詩)다. 혜능의 선시를 차용한 듯해 자칫 진부해질 수도 있었으나, 마지막 구절의 반전으로 인해 진부함을 면한 것에서 넘어 호탕한 도인의 경지를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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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개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는 곳의 관리소임을 맡은 듯한 스님이 출입구에 앉아 좌선삼매에 들어 있다. 구슬처럼 흐르는 땀도 스님의 정진을 방해하지 못한다. |
아흔아홉 보물을 전시해놓았다는 박물관에서 전시된 보물들보다 더 값진 보물을 만났다. 아마도 박물관 관리소임을 맡은 스님인 듯한데 사람들로 붐비며 다소 소란한 환경에서도 깊은 삼매에 들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가까이 다가가 촬영을 해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절대삼매의 경지가 이런 것일 터이다. 이 스님을 보고 ‘시 쓰는 불교학자’ 김호성 교수가 멋들어진 시 한 편을 썼으니, 이렇다.
아흔 아홉 보물 보며
박물관은 분주한데
出入口 곁 의자 위에
坐禪하는 노스님
보물에 빼앗긴 마음
부끄럽게 하시네
(2010. 7. 7. 서울, 김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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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님들의 숙소 안양각. 스님들의 노후문제가 골칫거리인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참고해볼만한 시설로 여겨져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
국청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절에서 살아가는 스님들의 일상을 얼핏얼핏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습한 날씨라 문을 활짝 열어놓았거나 2층에 방을 마련한 것 등인데, 아열대성 기후에서 수행하다보니 절로 나타난 모습들이다. 윗몸을 드러낸 채 더위를 이겨내는 2층 다락방의 스님, 그리고 극락전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노스님들의 거처를 마련해 놓은 것 등으로 사원배치에 각별한 신경을 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청사를 나오며, 사찰 매점을 둘러봤다. 중국을 대표하는 사찰답게 매점에는 귀중한 내용을 담은 책을 만날 수 있다. 동행한 석지현 스님, 윤창화 사장, 김호성 교수는 다투어 책을 산다. 너무 귀중한 책을 만났다며 표정이 어린아이들처럼 밝기만 하다. 평생을 책과 함께 살아온 분들이 저리도 책을 산 후 즐거워하는 모습이라니!
<협찬; 터널공사 전문업체 표준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