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의 구성내용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천태지의대사는 {법화경}의 구성에 대해서 전반부는 적문(迹門, 자취를 남긴 것)이라 하였고, 후반부는 본문(本門, 시공을 초월한 본래의 부처)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중심사상에 대해 적문에서는 개삼현일(開三顯一)이라는 일승의 교리를 갖가지 방면에서 명확하게 증명하여 중생자신이 불자임을 깨달을 때에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하였고, 본문에서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본불(本佛)이라는 무량한 부처님의 수명을 밝히어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본래의 부처임을 설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부처님은 열반에 들지 않으시고 항상 영취산에 계시면서 중생을 구제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하고 있는지 적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적문의 구성은 총14품으로 서분과 정종분 그리고 유통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서분 제1 서품에서는 부처님께서 무량의처삼매에 들어 계신 것을 서술하면서 갖가지 기적과 불가사의한 신통을 보이면서 {법화경}을 설하는 서막을 서술하여 대중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매우 의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이 경을 설하신 때와 장소와 법문을 듣는 대중을 성문대중과 더불어 보살대중을 같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야말로 {법화경}이 일체중생을 위한 대표적인 경전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적문의 대표적인 구성원은 성문대중인데 여기서 보살대중을 언급한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경전의 완결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나중에 첨가된 품이라는 것이다. 즉 원시 8품이 먼저 성립되고, 이어서 제15 종지용출품에서부터 제22 촉루품까지가 합본되면서 제1 서품이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제23 약왕보살본사품부터 제28 보현보살권발품까지 유통분으로 첨가 된 것이다. 이에 덧붙여 제12 제바달다품은 맨 나중에 부가된 것이라고 한다. 다음에 여섯 가지 상서를 나투시고, 미륵이 부처님의 신통변화에 대하여 의문을 일으키어 경전 독송자로 하여금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문수보살을 통하여 그 의문을 풀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설명된 부분은 본문의 내용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다음에 제2 방편품은 먼저 부처님께서 삼매로부터 나오셔서 주위를 환기시키는 말씀을 하신다. 즉 부처님께서 무량의처삼매로부터 나오셔서 부처님만이 아신다는 법(방편과 진실)을 찬탄하신다. 그래서 이미 아라한도에 이른 성문들이 의문을 일으키어 성문들 중에 대표인 사리불로 하여금 묻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진실법을 설하려 하시지 않자. 거듭 사리불의 간곡한 세 번의 요청으로 증상만을 가진 아만과 교만에 차 있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들이 물러가자 묘법(妙法)을 설하신다. 즉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단 한 가지 유일한 일은 일대사인연으로 일체중생들로 하여금 불지견(佛知見)을 개시오입(開示悟入)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선언이다.
이 제2 방편품은 바로 적문의 정종분 가운데 정종분으로 일승을 천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석가부처님께서 그때가지 설하신 삼승(성문, 연각, 보살)은 중생을 성불(成佛) 즉 완전한 부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유인하는 방편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는 일체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일승(一乘) 또는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부처님의 본래의 의도라는 것이다. 마침내 그러한 시절인연이 무르익어서 이것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일승의 가르침에 의해서 성문승이나 연각승의 이승도 성불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제불에 의지해서 수많은 중생이 불탑에 공양을 올리고 예배하고 공경하며 찬탄한 등의 행법으로 불도를 성취한 사람이 되었던 실례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미래의 제불과 현재의 제불에 의지해서 신행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불탑신앙에 의해서 불도를 성취한 사람이 되었던 실례를 수없이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이 성불한다는 보증을 한다하여도 실제로 이를 믿고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과거에 성불한 '성불의 행법'을 보여서 일승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법화경}의 가르침을 신행하는 자는 자기가 불자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정신(淨信)하고 확신하면서 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묘법연화경} 제2권 가운데 제3 비유품은 10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먼저 방편품의 설법을 듣고 난 사리불이 자기도 부처님의 자식임을 깨닫는 내용을 피력하고, 두 번째로 근기가 수승한 사리불에게 부처님께서 성불할 수기를 주신다. 세 번째는 사리불에게 수기를 주심에 천인들이 기뻐하며 찬탄하면서 꽃을 뿌려 축복한다. 네 번째로 비유로 방편을 설했음을 밝히고, 다섯 번째는 그 유명한 화택의 비유인 삼거(三車)와 대백우거를 말씀하신다. 여섯 번째로 앞의 비유에 대해서 부처님의 대자대비의 법을 설하신다. 그리고 일곱 번째로 법과 합할 것을 설하시고, 여덟 번째로 그러한 뜻을 더 명확하게 밝히시고, 아홉 번째는 근기대로 설법하기를 당부하시고, 열 번째로 특히 상근기에게 법을 설하라고 당부하신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을 살펴보면 양거(羊車), 녹거(鹿車), 우거(牛車)의 삼거(三車)를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또는 불승에 대비하고 있다. 삼승을 구분해서 설하는 것은 화택인 삼계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의 가르침이며, 사실은 모든 중생을 성불시키는 일승의 가르침이라고 표명한다. 이것을 삼거의 비유로 나타내기 때문에 비유품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삼승을 통합한 일승을 대백우거에 비유하였다. 그러나 비유품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품의 처음에 설해진 사리불의 수기이다. 사리불은 그때까지 대승의 가르침을 듣더라도 그것은 거룩하고 훌륭한 마음을 가진 자 즉 위대한 용맹심을 발한 보살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이고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방편품의 가르침을 듣고 부처님의 대자비를 입어 이제까지 자신이 이해해 왔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저는 오늘 비로소 알았습니다. 저는 참다운 부처님의 자식임을 알았습니다. 부처님의 금구(金口)를 통해서 비로소 불자로 태어났으며, 법화로 태어났으며, 불법의 대요를 깨달았습니다."라고 부처님께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의 자식이란 자각을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장래작불의 수기를 주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자식이므로 성장하면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불자(佛子)라는 자각이 중대한 의미가 있다.
이 일승의 교리는 "누구나 불자(佛子)라는 자각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각은 부처님의 자비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만약 부처님의 자비가 없다면 불자라도 자기가 불자임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자비가 갖가지 형태로 설해지거나 강조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고, 부처님의 구제가 성립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타력적인 부처님의 자비가 아무리 내려진다 하더라도 본인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결국 타력과 자력이 하나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다음은 제4 신해품의 내용이다. 그 구성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네 명의 위대한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내고, 다음에 그들의 뜻을 펴서 믿게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장자궁자의 비유를 들어 자신들이 불자(佛子)였다는 것을 피력하고, 네 번째로 앞에서 비유한 내용을 통합해서 부처님께 사뢴다. 그리고서 다섯 번째로 이러한 기쁜 마음을 게송으로 말씀드리고, 여섯 번째로 부처님의 은혜를 어찌 갚을 것인가를 게송에 덧붙인다.
여기서는 수보리, 마하가섭, 마하가전련, 마하목건련 등의 사대 성문들이 자기들도 성불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즉 일승의 가르침을 듣고 이들도 "우리들은 참으로 불자(佛子)인 줄 몰랐으나 이제야 진정으로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품의 초두에서는 그들이 불자란 자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장자궁자의 비유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그들이 자각한 내용에 믿음을 스스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품의 게송에서 그들이 불자의 자각을 얻었기 때문에 진정한 성문이며, 그 의미는 불도(佛道)의 소리로 일체중생에게 들려주는 것이라 한다. 즉 성불(成佛)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성문(聲聞)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4대 성문에게 수기하는 내용이 없다. 하지만 다음의 약초유품에서 마하가섭을 내 세워 일체중생에게 평등하게 내려지는 일색일미(一色一味)의 법우(法雨)를 내리지만 각자의 근기와 능력에 따라서 이해하고 깨닫는 다는 내용을 피력한다.
다시 말해서 제5 약초유품은 신해품에 대한 부처님의 응답내용이다. 즉 사대성문제자의 신해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자비는 일체중생에게 평등하다는 것'을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여기서 비는 평등하게 대지에 내리지만 큰 나무는 많은 빗물을 수용하고 작은 초목은 적은 빗물을 수용하는데 그것으로 만족하고 각각 자기의 능력에 맞게 비를 흡수하여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제자들도 삼승의 각각으로부터 이로움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문은 성문의 입장에서 보살행을 닦으라는 것이다. 이 성문제자도 "너희들이 행하는 수행도 보살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점에서 삼승(三乘)을 개방하여 일승(一乘)을 드러낸다는 개삼현일(開三顯一)의 의미가 드러난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하면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께 진정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열반을 증득했다는 아집과 교만에 빠져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고, 또 자기자신만의 해탈을 위해 살아왔던 조그만 마음을 돌이켜서 성불(成佛)에로의 마음을 회향한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의도이고 대자대비임을 자각한 것이다. 즉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발하여 부처가 됨이 바로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온 참다운 목적이고 자비의 실현인 것이다. {법화경}을 설한 전체적인 의도가 제2 방편품과 제3 비유품에 담겨 있다. 이를 지혜제일인 수보리존자를 먼저 내세워 성불할 수기를 주고, 다음에 신해품을 통해 4대 제자들이 믿음을 나타낸다. 그리고서 약초유품을 통해 일체중생에게도 모두 성불할 있다는 수기를 준다. 이러한 의도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법화경}을 성립시킨 분들의 의도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법화경}은 초기대승불교운동의 최상의 기치를 담고 있다 하겠다. 부파불교의 현학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탈사회적인 자리(自利)적 타성을 극복하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반야경}이 진제(眞諦)의 입장에서 속제(俗諦)를 부정하여 진제를 드러내는 입장이라면, {법화경}은 속제(俗諦)인 그대로에서 진제(眞諦)가 성립되어 있다는 대긍정의 회통사상인 것이다. 즉 번뇌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번뇌를 벗어날 수 없듯이 세속적인 삶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초세속적인 삶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 반야사상가들의 입장이라면, 번뇌란 그 자체가 곧 지혜로 선회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즉 세속적인 삶 그 자체가 바로 초세속적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법화사상가들의 입장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의 초전설법에서 오비구(五比丘)들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시면서 설하신 설법내용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부처님의 최초설법이 "나는 여래(如來)이니라"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를 간과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은 "나는 여여(如如) 즉 진리 그대로에서 온 사람이다. 또는 나는 진리화 된 존재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 초기불교에서 이미 설해진 여래십호를 보면 {법화경}의 내용을 피력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법화경}에서 구체화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진리 속에 살면서 진리를 모른다. 연기(緣起) 속에 살면서 연기를 자각하지 못한다. 공(空) 속에 살면서 텅 빔을 모른다. 진여(眞如) 속에 살면서 진여(眞如)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원각(圓覺) 속에 살면서 원각(圓覺)을 모르고 살아간다. 우리는 이미 불자(佛子)임에도 불구하고 불자임을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해탈하여 있는데 일념(一念)에 사로잡혀 육근(六根)을 자기로 삼고 육근(六根)이 육경(六境)과 활동한 결과를 마음으로 삼아 무명(無明)의 장야(長夜)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답답한 40년을 보낸 다음에 마침내 이 내용을 피력하시어 진정한 불자(佛子)로 깨어나게 하신 것이다. 이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감격하지 않을 없다. 이 얼마나 거룩한 말씀인가. 이 얼마나 환희로운 말씀인가. "너도 나와 똑같은 진리의 아들딸"이라는 말씀이다.
우리 인생은 행복하고자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행복의 조건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나 행복이란 누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사랑도 그렇고, 진리도 그렇다. 사랑을 전하려는 순간 변색되고, 진리를 말하려는 순간 진리와는 멀어진다. 그냥 느껴질 뿐이다. {법화경}을 공부하고 이해하며 전하는 이 순간 우리는 진리의 자손이고, 행복한 존재이고, 사랑이 넘치는 진리가 충만한 존재로 태어난다. 이를 제6 수기품에서 구체화하고 있다.
제6 수기품은 먼저 마하가섭존자에게 수기가 내려지고, 다음에 수보리존자, 마하가전연존자, 대목건련존자 등에게 차례로 당래작불의 수기를 전하신다. 여기서 마하가섭존자와 수보리존자에 대해 당래에 수많은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고 공양하고 공경하며 범행을 닦아 보살도를 갖추어 성불한다고 하는데 반해서, 대가전연존자와 대목건련존자의 경우는 수많은 부처님을 공양하고, 그 분들이 열반한 이후에는 탑묘를 세워 칠보나 각종의 꽃이나 영락으로 불탑에 공양한 공덕으로 성불한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불탑에 공양을 올리는 것이 바로 성불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즉 사찰 순례를 하면서 불탑에 공양하고 공경하면서 예불을 올리는 것이 성불행인 것이다. 당시 초기대승불교에서 성불하는 행위로 삼아승지겁에 걸쳐 6바라밀을 수행한다는 불전문학에서 발전한 설과 반야경전에서 설하는 반야바라밀의 실천, 혹은 정토경전에서 아미타불의 원력과 신력을 믿고 공경하고 찬탄하며 염불하여 왕생을 원하는 것과 더불어 불탑공양도 성불하는 공덕행으로 유행하였던 것이다. 다만 {법화경}은 처음에는 불탑공양을 설하면서 중간에 경전수지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법화경}의 중점이 방편품에서 여래수량품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불탑에 공양하여 그 공덕으로 성불하겠다는 불자들이 보다 의식적으로 인식의 척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냥 공양을 올리면 성불한다는 소박한 의식에서 왜 성불할 수 있는 것인가를 반문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 갖추어진 수명은 영원불멸(永遠不滅)하다는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즉 현재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불교에 대한 신행(信行)에 대한 형태가 기복(祈福)만하던 불교에서 작복(作福)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전화되고 있다는 점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제7 화성유품은 삼승교가 방편이고 참된 가르침은 일승임을 보인 것이다. 이는 머나먼 성불의 길을 가는데 지쳐버린 사람들을 위해 잠시 삼승(三乘)의 방편을 설해서 휴식을 취하도록 변화시킨 화성의 비유로 설명하기 때문에 화성유품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는 삼승(三乘)은 방편이고 일승(一乘)이 진실이라는 전체구성을 아주 세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즉,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 파악된 진리가 광대한 국토와 무량한 세월을 초월하여 과거로부터 삼승방편으로 중생들을 인도하여 일승을 천명하였다는 것을 대통지승불의 무량무변한 과거인연을 통해서 설하고, 그리고 나서 지금의 인연을 말하여 비유로써 실상과 방편을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근본을 들어 무량무변한 국토와 세월을 여래의 지혜로 파악됨을 밝힌다. 다음에 옛 인연을 구체적으로 들어 대통지승불의 출가하기 이전의 가계의 사연들을 실감나게 설하면서 16왕자인 보살사미와 전륜성왕과 범천들·팔부신장들을 등장시켜 불법을 찬양하고 법륜을 굴리어 주시길 간청한다. 그리하여 4제법과 12인연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묘법연화경}을 설한다. 세 번째로 현재의 인연을 설하는데 16왕자인 어린 사미들이 성불(成佛)하여 사방과 사유에 배치되어 설법하고 계시는데 그 중에 사바세계의 석가부처님은 바로 자신이라고 설한다.
그리고서 사미승으로 있을 때에 수많은 중생들을 교화시킨 것을 말씀하시고, 일승을 설할 것을 권장하신다. 네 번째로 비유로써 실상과 방편을 밝히는데, 즉 한 사람의 스승이 5백 유순이나 되는 거리에 있는 진보처(珍寶處)로 무리를 인도하는데 도중에 험난한 길이 많아 처음부터 목적지가 5백 유순이나 떨어져 있다고 하면 근기가 겁약(怯弱)한 무리들이 공포심으로 여행을 포기할까봐 방편으로 우선 3백 유순 거리에 화성을 만들고 그곳이 목적지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한 다음에 본래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고 5백 유순 떨어진 곳에 진보처(珍寶處)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그들을 목적지로 다시 인도한다.
다섯 번째로 이와 같은 비유에 대해서 삼승교로 먼저 인도한 다음에 중생들이 근기가 성숙하면 일불승을 밝혀 모든 사람을 성불로 한다는 방편과 실상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섯 번째로 다시 옛 인연을 게송으로 밝히고, 일곱 번째는 다시 방편과 실상을 게송으로 거듭 설하고, 끝으로 결국에 방편과 실상이 같다는 것을 게송으로 설명한다.
이상의 화성유품은 앞에서 살펴보았던 삼승(三乘)은 방편이요 일승(一乘)이 진실이라는 것을 거듭 천명한 것이다. 그러면서 방대한 우주법계와 수많은 부처님의 교화가 3천진점겁 이전부터 현재까지 줄 곳 실현되고 있음을 밝힌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부처님의 교화가 바로 일반불자로부터 사미승, 재가보살, 승가보살, 그리고 불(佛)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다음 제4권 제8 오백제자수기품은 전술한 16왕자의 옛날 인연담을 듣고 부루나와 교진여 등 천이백의 아라한들과 3가섭과 설법에 참가한 모든 오백의 아라한들이 깊고 깊은 믿음을 내어 본래의 원을 발하여 부처님으로부터 성불의 수기를 받는 것을 피력한다. 먼저 부루나의 재능을 칭찬하시면서 하근기도 깨달아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를 주시고 거듭 게송으로 설하신다. 그러자 오백 아라한들이 기뻐서 의리계보(衣裏繫寶)의 비유로써 자기들의 허물을 고백한다. 이어서 제9 수학무학인기품은 아난과 라후라, 유학과 무학 등 2천명의 모든 성문들에게 당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주신 것을 설한다.
이상이 적문(迹門)의 서분(序分)과 정종분(正宗分)이다. 다시 말해서 서품은 서분이고, 방편품과 비유품의 초두 부분은 일승을 설하기 때문에 이것을 설법주(說法周)라 하고, 다음에 비유품의 나머지 부분에서 화성유품까지를 비유주(比喩周)라고 하며, 화성유품의 대통지승불의 과거 인연담에서 수학무학인기품까지를 인연주(因緣周)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천태대사는 삼주설법(三周說法)이라고 하고 방편품에서 수학무학인기품까지의 8품을 적문의 정종분이라고 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천태지의대사는 {법화경}의 구성에 대해서 전반부는 적문(迹門, 자취를 남긴 것)이라 하였고, 후반부는 본문(本門, 시공을 초월한 본래의 부처)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중심사상에 대해 적문에서는 개삼현일(開三顯一)이라는 일승의 교리를 갖가지 방면에서 명확하게 증명하여 중생자신이 불자임을 깨달을 때에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하였고, 본문에서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본불(本佛)이라는 무량한 부처님의 수명을 밝히어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본래의 부처임을 설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부처님은 열반에 들지 않으시고 항상 영취산에 계시면서 중생을 구제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하고 있는지 적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적문의 구성은 총14품으로 서분과 정종분 그리고 유통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서분 제1 서품에서는 부처님께서 무량의처삼매에 들어 계신 것을 서술하면서 갖가지 기적과 불가사의한 신통을 보이면서 {법화경}을 설하는 서막을 서술하여 대중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매우 의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이 경을 설하신 때와 장소와 법문을 듣는 대중을 성문대중과 더불어 보살대중을 같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야말로 {법화경}이 일체중생을 위한 대표적인 경전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적문의 대표적인 구성원은 성문대중인데 여기서 보살대중을 언급한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경전의 완결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나중에 첨가된 품이라는 것이다. 즉 원시 8품이 먼저 성립되고, 이어서 제15 종지용출품에서부터 제22 촉루품까지가 합본되면서 제1 서품이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제23 약왕보살본사품부터 제28 보현보살권발품까지 유통분으로 첨가 된 것이다. 이에 덧붙여 제12 제바달다품은 맨 나중에 부가된 것이라고 한다. 다음에 여섯 가지 상서를 나투시고, 미륵이 부처님의 신통변화에 대하여 의문을 일으키어 경전 독송자로 하여금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문수보살을 통하여 그 의문을 풀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설명된 부분은 본문의 내용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다음에 제2 방편품은 먼저 부처님께서 삼매로부터 나오셔서 주위를 환기시키는 말씀을 하신다. 즉 부처님께서 무량의처삼매로부터 나오셔서 부처님만이 아신다는 법(방편과 진실)을 찬탄하신다. 그래서 이미 아라한도에 이른 성문들이 의문을 일으키어 성문들 중에 대표인 사리불로 하여금 묻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진실법을 설하려 하시지 않자. 거듭 사리불의 간곡한 세 번의 요청으로 증상만을 가진 아만과 교만에 차 있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들이 물러가자 묘법(妙法)을 설하신다. 즉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단 한 가지 유일한 일은 일대사인연으로 일체중생들로 하여금 불지견(佛知見)을 개시오입(開示悟入)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선언이다.
이 제2 방편품은 바로 적문의 정종분 가운데 정종분으로 일승을 천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석가부처님께서 그때가지 설하신 삼승(성문, 연각, 보살)은 중생을 성불(成佛) 즉 완전한 부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유인하는 방편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는 일체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일승(一乘) 또는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부처님의 본래의 의도라는 것이다. 마침내 그러한 시절인연이 무르익어서 이것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일승의 가르침에 의해서 성문승이나 연각승의 이승도 성불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제불에 의지해서 수많은 중생이 불탑에 공양을 올리고 예배하고 공경하며 찬탄한 등의 행법으로 불도를 성취한 사람이 되었던 실례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미래의 제불과 현재의 제불에 의지해서 신행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불탑신앙에 의해서 불도를 성취한 사람이 되었던 실례를 수없이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이 성불한다는 보증을 한다하여도 실제로 이를 믿고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과거에 성불한 '성불의 행법'을 보여서 일승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법화경}의 가르침을 신행하는 자는 자기가 불자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정신(淨信)하고 확신하면서 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묘법연화경} 제2권 가운데 제3 비유품은 10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먼저 방편품의 설법을 듣고 난 사리불이 자기도 부처님의 자식임을 깨닫는 내용을 피력하고, 두 번째로 근기가 수승한 사리불에게 부처님께서 성불할 수기를 주신다. 세 번째는 사리불에게 수기를 주심에 천인들이 기뻐하며 찬탄하면서 꽃을 뿌려 축복한다. 네 번째로 비유로 방편을 설했음을 밝히고, 다섯 번째는 그 유명한 화택의 비유인 삼거(三車)와 대백우거를 말씀하신다. 여섯 번째로 앞의 비유에 대해서 부처님의 대자대비의 법을 설하신다. 그리고 일곱 번째로 법과 합할 것을 설하시고, 여덟 번째로 그러한 뜻을 더 명확하게 밝히시고, 아홉 번째는 근기대로 설법하기를 당부하시고, 열 번째로 특히 상근기에게 법을 설하라고 당부하신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을 살펴보면 양거(羊車), 녹거(鹿車), 우거(牛車)의 삼거(三車)를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또는 불승에 대비하고 있다. 삼승을 구분해서 설하는 것은 화택인 삼계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의 가르침이며, 사실은 모든 중생을 성불시키는 일승의 가르침이라고 표명한다. 이것을 삼거의 비유로 나타내기 때문에 비유품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삼승을 통합한 일승을 대백우거에 비유하였다. 그러나 비유품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품의 처음에 설해진 사리불의 수기이다. 사리불은 그때까지 대승의 가르침을 듣더라도 그것은 거룩하고 훌륭한 마음을 가진 자 즉 위대한 용맹심을 발한 보살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이고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방편품의 가르침을 듣고 부처님의 대자비를 입어 이제까지 자신이 이해해 왔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저는 오늘 비로소 알았습니다. 저는 참다운 부처님의 자식임을 알았습니다. 부처님의 금구(金口)를 통해서 비로소 불자로 태어났으며, 법화로 태어났으며, 불법의 대요를 깨달았습니다."라고 부처님께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의 자식이란 자각을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장래작불의 수기를 주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자식이므로 성장하면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불자(佛子)라는 자각이 중대한 의미가 있다.
이 일승의 교리는 "누구나 불자(佛子)라는 자각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각은 부처님의 자비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만약 부처님의 자비가 없다면 불자라도 자기가 불자임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자비가 갖가지 형태로 설해지거나 강조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고, 부처님의 구제가 성립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타력적인 부처님의 자비가 아무리 내려진다 하더라도 본인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결국 타력과 자력이 하나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다음은 제4 신해품의 내용이다. 그 구성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네 명의 위대한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내고, 다음에 그들의 뜻을 펴서 믿게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장자궁자의 비유를 들어 자신들이 불자(佛子)였다는 것을 피력하고, 네 번째로 앞에서 비유한 내용을 통합해서 부처님께 사뢴다. 그리고서 다섯 번째로 이러한 기쁜 마음을 게송으로 말씀드리고, 여섯 번째로 부처님의 은혜를 어찌 갚을 것인가를 게송에 덧붙인다.
여기서는 수보리, 마하가섭, 마하가전련, 마하목건련 등의 사대 성문들이 자기들도 성불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즉 일승의 가르침을 듣고 이들도 "우리들은 참으로 불자(佛子)인 줄 몰랐으나 이제야 진정으로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품의 초두에서는 그들이 불자란 자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장자궁자의 비유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그들이 자각한 내용에 믿음을 스스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품의 게송에서 그들이 불자의 자각을 얻었기 때문에 진정한 성문이며, 그 의미는 불도(佛道)의 소리로 일체중생에게 들려주는 것이라 한다. 즉 성불(成佛)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성문(聲聞)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4대 성문에게 수기하는 내용이 없다. 하지만 다음의 약초유품에서 마하가섭을 내 세워 일체중생에게 평등하게 내려지는 일색일미(一色一味)의 법우(法雨)를 내리지만 각자의 근기와 능력에 따라서 이해하고 깨닫는 다는 내용을 피력한다.
다시 말해서 제5 약초유품은 신해품에 대한 부처님의 응답내용이다. 즉 사대성문제자의 신해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자비는 일체중생에게 평등하다는 것'을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여기서 비는 평등하게 대지에 내리지만 큰 나무는 많은 빗물을 수용하고 작은 초목은 적은 빗물을 수용하는데 그것으로 만족하고 각각 자기의 능력에 맞게 비를 흡수하여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제자들도 삼승의 각각으로부터 이로움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문은 성문의 입장에서 보살행을 닦으라는 것이다. 이 성문제자도 "너희들이 행하는 수행도 보살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점에서 삼승(三乘)을 개방하여 일승(一乘)을 드러낸다는 개삼현일(開三顯一)의 의미가 드러난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하면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께 진정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열반을 증득했다는 아집과 교만에 빠져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고, 또 자기자신만의 해탈을 위해 살아왔던 조그만 마음을 돌이켜서 성불(成佛)에로의 마음을 회향한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의도이고 대자대비임을 자각한 것이다. 즉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발하여 부처가 됨이 바로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온 참다운 목적이고 자비의 실현인 것이다. {법화경}을 설한 전체적인 의도가 제2 방편품과 제3 비유품에 담겨 있다. 이를 지혜제일인 수보리존자를 먼저 내세워 성불할 수기를 주고, 다음에 신해품을 통해 4대 제자들이 믿음을 나타낸다. 그리고서 약초유품을 통해 일체중생에게도 모두 성불할 있다는 수기를 준다. 이러한 의도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법화경}을 성립시킨 분들의 의도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법화경}은 초기대승불교운동의 최상의 기치를 담고 있다 하겠다. 부파불교의 현학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탈사회적인 자리(自利)적 타성을 극복하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반야경}이 진제(眞諦)의 입장에서 속제(俗諦)를 부정하여 진제를 드러내는 입장이라면, {법화경}은 속제(俗諦)인 그대로에서 진제(眞諦)가 성립되어 있다는 대긍정의 회통사상인 것이다. 즉 번뇌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번뇌를 벗어날 수 없듯이 세속적인 삶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초세속적인 삶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 반야사상가들의 입장이라면, 번뇌란 그 자체가 곧 지혜로 선회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즉 세속적인 삶 그 자체가 바로 초세속적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법화사상가들의 입장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의 초전설법에서 오비구(五比丘)들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시면서 설하신 설법내용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부처님의 최초설법이 "나는 여래(如來)이니라"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를 간과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은 "나는 여여(如如) 즉 진리 그대로에서 온 사람이다. 또는 나는 진리화 된 존재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 초기불교에서 이미 설해진 여래십호를 보면 {법화경}의 내용을 피력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법화경}에서 구체화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진리 속에 살면서 진리를 모른다. 연기(緣起) 속에 살면서 연기를 자각하지 못한다. 공(空) 속에 살면서 텅 빔을 모른다. 진여(眞如) 속에 살면서 진여(眞如)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원각(圓覺) 속에 살면서 원각(圓覺)을 모르고 살아간다. 우리는 이미 불자(佛子)임에도 불구하고 불자임을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해탈하여 있는데 일념(一念)에 사로잡혀 육근(六根)을 자기로 삼고 육근(六根)이 육경(六境)과 활동한 결과를 마음으로 삼아 무명(無明)의 장야(長夜)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답답한 40년을 보낸 다음에 마침내 이 내용을 피력하시어 진정한 불자(佛子)로 깨어나게 하신 것이다. 이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감격하지 않을 없다. 이 얼마나 거룩한 말씀인가. 이 얼마나 환희로운 말씀인가. "너도 나와 똑같은 진리의 아들딸"이라는 말씀이다.
우리 인생은 행복하고자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행복의 조건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나 행복이란 누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사랑도 그렇고, 진리도 그렇다. 사랑을 전하려는 순간 변색되고, 진리를 말하려는 순간 진리와는 멀어진다. 그냥 느껴질 뿐이다. {법화경}을 공부하고 이해하며 전하는 이 순간 우리는 진리의 자손이고, 행복한 존재이고, 사랑이 넘치는 진리가 충만한 존재로 태어난다. 이를 제6 수기품에서 구체화하고 있다.
제6 수기품은 먼저 마하가섭존자에게 수기가 내려지고, 다음에 수보리존자, 마하가전연존자, 대목건련존자 등에게 차례로 당래작불의 수기를 전하신다. 여기서 마하가섭존자와 수보리존자에 대해 당래에 수많은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고 공양하고 공경하며 범행을 닦아 보살도를 갖추어 성불한다고 하는데 반해서, 대가전연존자와 대목건련존자의 경우는 수많은 부처님을 공양하고, 그 분들이 열반한 이후에는 탑묘를 세워 칠보나 각종의 꽃이나 영락으로 불탑에 공양한 공덕으로 성불한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불탑에 공양을 올리는 것이 바로 성불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즉 사찰 순례를 하면서 불탑에 공양하고 공경하면서 예불을 올리는 것이 성불행인 것이다. 당시 초기대승불교에서 성불하는 행위로 삼아승지겁에 걸쳐 6바라밀을 수행한다는 불전문학에서 발전한 설과 반야경전에서 설하는 반야바라밀의 실천, 혹은 정토경전에서 아미타불의 원력과 신력을 믿고 공경하고 찬탄하며 염불하여 왕생을 원하는 것과 더불어 불탑공양도 성불하는 공덕행으로 유행하였던 것이다. 다만 {법화경}은 처음에는 불탑공양을 설하면서 중간에 경전수지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법화경}의 중점이 방편품에서 여래수량품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불탑에 공양하여 그 공덕으로 성불하겠다는 불자들이 보다 의식적으로 인식의 척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냥 공양을 올리면 성불한다는 소박한 의식에서 왜 성불할 수 있는 것인가를 반문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 갖추어진 수명은 영원불멸(永遠不滅)하다는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즉 현재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불교에 대한 신행(信行)에 대한 형태가 기복(祈福)만하던 불교에서 작복(作福)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전화되고 있다는 점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제7 화성유품은 삼승교가 방편이고 참된 가르침은 일승임을 보인 것이다. 이는 머나먼 성불의 길을 가는데 지쳐버린 사람들을 위해 잠시 삼승(三乘)의 방편을 설해서 휴식을 취하도록 변화시킨 화성의 비유로 설명하기 때문에 화성유품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는 삼승(三乘)은 방편이고 일승(一乘)이 진실이라는 전체구성을 아주 세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즉,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 파악된 진리가 광대한 국토와 무량한 세월을 초월하여 과거로부터 삼승방편으로 중생들을 인도하여 일승을 천명하였다는 것을 대통지승불의 무량무변한 과거인연을 통해서 설하고, 그리고 나서 지금의 인연을 말하여 비유로써 실상과 방편을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근본을 들어 무량무변한 국토와 세월을 여래의 지혜로 파악됨을 밝힌다. 다음에 옛 인연을 구체적으로 들어 대통지승불의 출가하기 이전의 가계의 사연들을 실감나게 설하면서 16왕자인 보살사미와 전륜성왕과 범천들·팔부신장들을 등장시켜 불법을 찬양하고 법륜을 굴리어 주시길 간청한다. 그리하여 4제법과 12인연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묘법연화경}을 설한다. 세 번째로 현재의 인연을 설하는데 16왕자인 어린 사미들이 성불(成佛)하여 사방과 사유에 배치되어 설법하고 계시는데 그 중에 사바세계의 석가부처님은 바로 자신이라고 설한다.
그리고서 사미승으로 있을 때에 수많은 중생들을 교화시킨 것을 말씀하시고, 일승을 설할 것을 권장하신다. 네 번째로 비유로써 실상과 방편을 밝히는데, 즉 한 사람의 스승이 5백 유순이나 되는 거리에 있는 진보처(珍寶處)로 무리를 인도하는데 도중에 험난한 길이 많아 처음부터 목적지가 5백 유순이나 떨어져 있다고 하면 근기가 겁약(怯弱)한 무리들이 공포심으로 여행을 포기할까봐 방편으로 우선 3백 유순 거리에 화성을 만들고 그곳이 목적지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한 다음에 본래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고 5백 유순 떨어진 곳에 진보처(珍寶處)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그들을 목적지로 다시 인도한다.
다섯 번째로 이와 같은 비유에 대해서 삼승교로 먼저 인도한 다음에 중생들이 근기가 성숙하면 일불승을 밝혀 모든 사람을 성불로 한다는 방편과 실상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섯 번째로 다시 옛 인연을 게송으로 밝히고, 일곱 번째는 다시 방편과 실상을 게송으로 거듭 설하고, 끝으로 결국에 방편과 실상이 같다는 것을 게송으로 설명한다.
이상의 화성유품은 앞에서 살펴보았던 삼승(三乘)은 방편이요 일승(一乘)이 진실이라는 것을 거듭 천명한 것이다. 그러면서 방대한 우주법계와 수많은 부처님의 교화가 3천진점겁 이전부터 현재까지 줄 곳 실현되고 있음을 밝힌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부처님의 교화가 바로 일반불자로부터 사미승, 재가보살, 승가보살, 그리고 불(佛)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다음 제4권 제8 오백제자수기품은 전술한 16왕자의 옛날 인연담을 듣고 부루나와 교진여 등 천이백의 아라한들과 3가섭과 설법에 참가한 모든 오백의 아라한들이 깊고 깊은 믿음을 내어 본래의 원을 발하여 부처님으로부터 성불의 수기를 받는 것을 피력한다. 먼저 부루나의 재능을 칭찬하시면서 하근기도 깨달아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를 주시고 거듭 게송으로 설하신다. 그러자 오백 아라한들이 기뻐서 의리계보(衣裏繫寶)의 비유로써 자기들의 허물을 고백한다. 이어서 제9 수학무학인기품은 아난과 라후라, 유학과 무학 등 2천명의 모든 성문들에게 당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주신 것을 설한다.
이상이 적문(迹門)의 서분(序分)과 정종분(正宗分)이다. 다시 말해서 서품은 서분이고, 방편품과 비유품의 초두 부분은 일승을 설하기 때문에 이것을 설법주(說法周)라 하고, 다음에 비유품의 나머지 부분에서 화성유품까지를 비유주(比喩周)라고 하며, 화성유품의 대통지승불의 과거 인연담에서 수학무학인기품까지를 인연주(因緣周)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천태대사는 삼주설법(三周說法)이라고 하고 방편품에서 수학무학인기품까지의 8품을 적문의 정종분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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