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六祖壇經) 무상참회 >
이제 너희에게 무상참회(無相懺悔)를 주어 삼세의 죄과를 없애고 몸과 말과 생각의 세 가지 업을 청정하게 할 것이니 나를 따라 이와 같이 부르라.
"제가 순간 순간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데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 온 나쁜 짓과 미련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순간 순간마다 교만하고 진실치 못한 데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온 나쁜 짓과 교만하고 진실치 못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순간 순간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온 나쁜 짓과 질투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
이것이 무상 참회다.
참회란 무엇인가.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한 죄를 다 뉘우쳐 다시는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이 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범부들은 어리석어 지나간 허물을 뉘우칠 줄 알면서도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 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허물이 잇따라 생기게 되니, 이것을 어찌 참회라 할 것인가.
- 육조혜능조사(六祖慧能祖師) -
<원효대사 대승육정 참회문>
만약 법계에 의지하여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자는 행주좌와(行住坐臥)간에 항상 자신을 觀하는 것에 있어서 한 순간도 헛되이 떠돌지 않아야 하니라.
모든 부처님의 부사의한 공덕을 생각하고, 항상 실상(實相)을 사유하여 업장을 소멸하고 막으며, 육도의 끝없는 중생들을 두루 위하여 시방의 무량한 모든 부처님께 귀의해야 할 것이라.
모든 부처님은 다르지 않지만 하나도 아니라.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니라.
비록 머무는 곳이 없으나 하지 않음도 없도다.
하나 하나의 상호(相好)와 하나 하나의 털 구멍이 가 없는 세계에 두루하고 미래세에 다하니라. 그리하여 장애도 없고 걸림도 없으며 차별상도 없이 중생을 교화하심에 쉬지 않으시니라.
왜 이러한가.
시방삼세의 한 티끌 한 생각,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고 다름이 없으며 대비반야(大悲般若)를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아서 불공법(不共法)에 상응함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라.
지금 이곳 연화장세계에 비로자나 부처님이 연화대에 앉아 계시면서 가없는 광명을 비추시어 무량한 중생들을 모아 놓고 굴리는 바 없는 대승의 법륜을 굴리시니 보살대중이 허공에 두루히 가득하여 받는 바 없는 대승의 법락(法樂)을 받느니라.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모두 함께 여기 한결같은 진실과 삼보의 허물 없는 곳에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귀머거리 같고 장님 같으니 불성이 없어서 인가.
불성이 없음인가! 어째서 이러한가!
무명(無明)으로 생각이 뒤바뀌어 허망하게 바깥의 대상을 만들어내고.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하여 갖가지 업(業)을 짓고, 스스로 그 업을 덮어 쓰고 가리워서 실상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니라.
마치 굶주린 아귀가 강물에 다가서서 불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이제 부처님 앞에서 깊이 부끄러운 마음을 내고, 보리심을 일으켜 지성스런 마음으로 참회해야 할 것이라.
나와 중생이 시작없는 때로부터 무명에 홀리게 되어 지은 죄가 한량 없으니 오역죄(五逆罪)와 십악(十惡)을 짓지 않은 것이 없도다.
스스로 짓고, 남에게 짓게 했으며, 남이 짓는 것을 보고 기뻐하기도 하였도다.
이와 같은 많은 죄는 가히 수를 헤아릴 수 없으니 모든 부처님과 현성이 증거하고 아시는 바이다.
이미 지은 죄는 깊이 부끄러운 마음을 내고, 아직 짓지 않은 것은 다시 감히 짓지 말아야 할 것이라.
모든 죄업은 실다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연(緣)이 화합한 것을 가명(假名)으로 업(業)이라 하였노라. 연에는 업이 없으며 연을 떠나서도 업은 없도다. 연의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노라.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은 것이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 머무름이 없는 까닭에 또한 생겨남도 없도다. 처음부터 있었다면 새롭게 생겨난다고 할 수 없고, 처음부터 없었다면 무엇으로 생겨나겠는가!
만약 본래 없음(本無)과 더불어 지금 있음(今有) 그 두 뜻이 합해져서 “생겨남”이라 이름한다면 본래 없음을 주장하는 때에는 지금 있다고 할 수 없고 지금 있음을 주장하는 때에는 본래 없다고 할 수 없다.
앞뒤가 맞지 않으니 유(有)와 무(無)는 합해지지 않노라. 유와 무가 합해질 수 없으니 어느 곳에 새롭게 생겨남이 있겠는가!
합한다는 뜻이 이미 어긋났으므로 흩어진다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노라.
합해진 것도 아니고 흩어진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없는 때에는 유(有)가 없는데 무엇을 상대하여 무(無)라고 하며, 있는 때에는 무(無)가 없는데 무엇을 의지하여 유(有) 라 하겠는가.
앞뒤의 유무가 모두 성립되지 못하노라.
업성(業性)은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지라.
본래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실체가 있지 아니한데 어느 곳에 당하여 실체 없음을 얻겠는가! 실체가 있다는 것도, 실체가 없다는 것도 모두 얻을 수 없다.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옳지 못하노라
업성이 이러하듯 모든 부처님 또한 그러하노라.
경에 말씀하시기를 “마치 중생이 여러 가지 업(業)을 지으면서 때로는 선하고 때로는 악하지만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은 업성은 있는 것(有)도 아니요, 없는 것(無)도 아니다.”라고 하셨노라
이처럼 업성(業性)이 본래 없다가 지금 있다면 원인이 없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
지은 자도 없고 받을 자도 없지만 시절이 화합하기 때문에 과보를 받는 것이라.
수행자가 만약 능히 이와 같은 업의 실상(實相)을 수없이 사유하여 참회 한다면
사중죄(四重罪)와 오역죄(五逆罪)도 미치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마치 허공이 불에 탈 수 없음과 같노라.
그러나 방일(放逸)하여 부끄러워함이 없고 업의 실상을 사유하지 않는다면 비록 죄성(罪性)이 없다하여도 장차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마치 허깨비 호랑이가 도리어 허깨비를 만든 사람을 삼켜버리는 것과 같게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시방의 모든 부처님 앞에서 깊이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 참회하여야 할 것이라.
이러한 참회를 할 때는 참회를 한다는 생각을 말아야 한다.
곧 응당히 실상을 사유하고 참회하여 뉘우칠 죄가 이미 없어졌다면 어떻게 능히 참회할 자가 있겠는가!
참회할 자와 참회할 것을 모두 얻을 수 없는데 어느 곳에 참회법이 있겠는가!
모든 업장에 대하여 참회하기를 마치면 또한 응당히 육정(六情)의 방일을 참회해야 할 것이다. 나와 중생들은 시작없는 때로부터 오면서 모든 법이 본래 실체 없음을 알지 못하고 망상으로 뒤바뀌어 나와 나의 것을 헤아려 안으로는 육정(六情)을 세워 그것에 의지하여 분별하는 마음 즉, 육식(六識)을 일으키고 밖으로는 육진(六塵)을 만들어 실체가 있는 것으로 집착하게 된다.
모든 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어서 허깨비같고 꿈같으므로 영원히 실체가 없음을 알지 못하노라. 그 가운데서 제멋대로 남녀 등의 분별상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번뇌를 일으키고 스스로 묶여 오랫동안 고통의 바다에 빠져 벗어날 요로를 구하지 못하니 가만히 생각할 때면 정말로 괴이한 일이로다.
마치 잠을 잘 때 잠이 마음을 덮어서, 제 몸이 큰 물에 빠져 떠내려 가는 허상을 보면
단지 이것이 꿈 속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인 줄 알지 못하고 실제로 떠내려 가는 것으로 생각하여 매우 두려워 하다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때에 다시 다른 꿈을 꾸면서
“내가 본 것은 꿈이지 실제가 아니구나”하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마음의 성품이 총명하기 때문에 꿈 속에서도 꿈인 줄 알면 물에 빠진 것에 대하여 두려움은 내지 않지만 아직 몸이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
머리를 흔들고 손을 내저으면서 완전히 깨어나려고 애를 쓰고, 완전히 깨었을 때에 그 꿈을 돌이켜 생각하면 물도 물에 떠다니던 몸도 다 실재가 아니며 단지 본래 침상에 고요히 누워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될 뿐이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잠을 자면서 꿈을 꾸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무명(無明)이 마음을 덮어 허망되게 육도(六道)를 만들고 여덟 가지 고통의 물결에서 흘러 돌다가
안으로는 모든 부처님의 부사의한 공덕에 훈습(熏習)되고 밖으로는 모든 부처님의 대비원력에 의지하여 겨우 믿고 이해하게 된다.
나와 중생들이 오직 잠들어 긴 꿈을 꾸면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망령되게 실제로 착각하여
육진(六塵:육경)과 남녀 등 상대적 개념(二相)을 만들어 좋다하고 싫다하게 된다.
이것은 나의 꿈일 뿐 영원히 실제의 사실이 아닌데 무엇을 근심하고 기뻐하며, 무엇을 탐내고 성낼 것인가!
수없이 사유하고 꿈과 같이 관(觀)하면서 점점 닦아 여몽삼매(如夢三昧)를 얻으면 이 삼매로 말미암아 무생인(無生忍)을 성취하게 될 것이라.
그리하여 긴 꿈으로부터 활짝 깨어나면 곧 본래 영원히 유전(流轉)함이 없고 단지 이 한마음(一心)이 일여상(一如床)에 앉아 있음을 알게 되노라.
만약 긴 꿈에서 벗어나고자 능히 이와 같이 수없이 사유한다면, 비록 육진에 얽혀있어도 그것을 실재로 착각치는 않을 것이며 , 번뇌가 일어남이 부끄러워 스스로 게으름을 피우지 못할지니 이를 일러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라 하니라.
혜공(慧空) 2010.01.21. 0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