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많이 들음과 알음알이[多聞知解]

白道 박만주 2018. 4. 8. 10:15

 

 

                                                                                                                        

      

     

     많이 들음과 알음알이[多聞知解]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만반 진수를 山積하여 주거늘 먹지 않고 그 스스로 굶어 죽음과 같이 博學多聞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어떤 사람이 만반진수를 산처럼 쌓아 주어도 먹지 않고 굶어 죽는 것과 같이 박학다문도 그러하다.


    아무리 음식 이야기를 해도 끝내 배부르지 않듯이, 설사 팔만대장경을 읽고 익히며 강설하여도 불성을 실제 깨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뿐 아니라 널리 배워 알음알이가 늘수록 정신이 어두워진다는 말이 있듯,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청정무구한 마음 거울에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말씀도 오히려 먼지가 된다.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음이 도를 깨닫는 데는 제일 큰 장애가 되므로 극력 배척하는 것이다. 그러니 산같이 쌓인 진수성찬을 눈앞에 두고 굶어 죽는 가련한 신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실제로 참구하고 실제로 깨쳐서 진여본성을 환히 보아 크게 해탈한 대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비유컨대 貧窮한 사람이 晝夜로 他人의 珍寶를 헤아리되 자기에게는 반푼 어치도 없는 것과 같이, 廣學多聞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비유하면 아주 가난한 사람이 밤낮으로 남의 보배를 헤아리지만 자기에게는 반푼도 없는 것처럼, 박학다문도 그러하다.

     

    자기 마음속의 무진장한 보배창고는 개발하지 않고 부처와 조사의 언설만 익히면 남의 보배만 헤아리는 꼴을 면치 못한다. 도를 닦는 데 있어서 경론을 익히고 외우는 것만큼 장애가 되는 것은 없다. 이것을 단연 버리고 용맹정진하여 자기의 보배창고를 활짝 열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써도 무궁무진하니, 부처님의 법은 불가사의한 중에도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다.


    佛法의 深奧한 玄旨는 思量分別로 능히 이해 못 하느니라.
    불법의 심오한 깊은 뜻은 사량분별로는 알 수 없다.


    동산 양개(洞山良介)선사도 “마음과 생각으로 깊은 종지를 배우려 한다면 서쪽으로 가려 하면서 도리어 동쪽으로 가는 격이다”라고 하였으니, 사량분별하는 심의식으로 현묘한 불법을 성취하려 한다면, 서쪽으로 가려는 사람이 동쪽으로 가는 것과 같아서 도리어 역효과만 낸다.


    無學인 聲聞의 경계는 身心과 語言이 전부 斷滅하여 現行의 思量分別이 永盡하여도, 如來가 親證한 無餘涅槃에는 도달 못 한다. 그러하거늘 하물며 思惟分別로써 大圓覺의 深玄境界를 어찌 알 수 있으리오. 이는 微虫인 螢火로써 須彌巨山을 소각하려는 것과 같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무학 성문의 경계는 심신과 언어가 모두 끊어져서 사량분별이 완전히 끊어졌지만 끝내 여래가 몸소 깨친 무여열반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하물며 사유분별로 대원각의 깊은 경계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이는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배울 것 없는 성문과 연각의 경계는 삼계의 번뇌를 영원히 끊어 버린 멸진정이다. 그러나 마음도 지혜도 꺼진 재처럼 식어 버리기만 하고 살아나지 못한 유여열반에 머물러 있으므로, 위없는 정각인 무여열반은 전혀 알지 못한다.


    世尊께서 말씀하시되 佛法을 修學코자 하는 者는 오직 證悟하여야만 了知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법을 배우는 이는 반드시 깨쳐야만 안다”고 하셨다.


    실제 깨침이 아니면 불법을 모르는 문외한이라 함은 선문만의 특징이 아니요 일체 불법에 통용된다. 불법은 원래부터 여래께서 깨친 매우 깊은 현묘한 경계에 입각해 있으므로, 단박 깨치는 날카로운 지혜가 아니면 장님이 해를 보는 것과 같다.


    비록 卽心卽佛이라 한 것도 오직 證悟한 者라야만 비로소 了知하느니라.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고는 하나, 오직 깨친 자라야 비로소 안다.


    불교에서 가장 상식적이고 쉬운 표현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다’라는 말이다.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 함은 어린애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언어문자나 사량분별로는 모르는 것이요, 구경정각인 원만한 깨침[圓證]으로만 아는 것이다.


    청량 징관(淸涼澄觀)은 화엄종의 최고봉이다. 많이 듣고 잘 기억함을 위주로 하는 교가에서도 실지에 있어서는 깨쳐 아는 것을 표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말과 생각을 떠나 실제 깨침을 근본 생명으로 하는 교외별전인 선종에서 알음알이[解]로써 주장한다면 이것은 더없는 자살이다.


    一切萬法의 근원인 眞如自性은 圓融無碍하여 有無善惡等의 二相을 초월하였다. 이 절대적인 諸法이 凝然不動하여 본래로 空空寂寂하다. 이 法性은 名言과 形相이 全無하여 一切 頓絶하였으니, 究竟無心의 證知로써 도달할 것이요 기타의 어떤 境界로서도 측량하지 못한다.


    일체 만법의 근원인 진여자성은 원융무애하여 유무선악 등의 상대를 초월하였다. 이 절대적인 모든 법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본래 공적하다. 이 법의 성품은 이름과 모양이 전혀 없이 일체가 완전히 끊어졌으니, 구경무심의 증지(證知)로만 도달할 뿐 다른 어떤 경계로서도 헤아리지 못한다.


    법성, 즉 불성은 원만히 깨쳐서 견성한 증지 이외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통설이다. 그러므로 원증(圓證)이 아닌 분증(分證)이나 해오(解悟)를 견성이라고 함은 불법이 아니라 전도망견이다. 증지는 오직 부처님만이 아는 것이라고 의상(義湘)은 그의 『법계도』에서 말하였다.


    佛陀가 阿難에게 苦口呵責하였다. 네가 아무리 억만겁토록 如來의 秘密妙嚴인 金言玉音을 독송하여도, 잠시인 一日間에 無漏業인 禪定을 修習함만 못하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입이 아프도록 꾸짖었다. “네 비록 억만겁토록 여래의 비밀묘엄한 금옥 같은 말씀을 읽고 외워도 하루 동안 무루업인 선정을 닦아 익히느니만 못하다”고.

     

    아난은 항상 입이 아프도록 간절한 부처님의 경책을 받았으나, 숙세의 업장인 많이 듣고[多聞] 잘 기억하는[憶持] 고질병은 치료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는 가섭에게 ‘옴 앓는 여우’라 꾸중듣고 쫓겨났던 것이다. 이 다문의 고질병은 세존께서도 속수무책이었으니 얼마나 무서운 병통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부디 노력하여 다문의 중병에서 벗어나야만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 불법을 바로 본다.


    벌써 善惡의 二邊에 住著하지 않아서, 또한 依住하지 않는다는 知解까지도 作持하지 않음을 菩薩覺이라 한다. 벌써 依住하지 않고, 또한 依住함이 없다는 知解도 作持하지 않아야 비로소 佛覺이라 한다.


    이미 선악 양극단에 의지해 머무르지 않고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는다는 알음알이[知解]까지도 내지 않음을 보살의 깨달음이라 부른다. 이미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으며 의지하고 머무를 것 없다는 알음알이까지도 내지 않아야 비로소 부처의 깨달음이라 한다.


    보살들은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는다는 알음알이’는 없으나 ‘의지하고 머무를 것이 없다는 알음알이’에 얽매여 정각을 성취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정도차는 있으나 3현은 고사하고 십지보살(十地菩薩)도 알음알이[知解]를 벗어나지 못하여 견성성불을 못 하는 것이니, 크게 각성하여 ‘의지하고 머무를 것 없다는 알음알이’를 부수어 버리면 단박 구경지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규봉과 보조가 주장한 해오는 알음알이를 주장하는 큰집[宗家]임은 물론이요, 천태(天台)와 방산(方山)이 주장하는 분증도 알음알이[知解]의 한 부류다.


    佛地는 二種의 愚知를 斷하였으니, 一은 微細한 所知愚見이요 二는 極微細한 所知愚見이니라.
    부처 지위에서는 두 가지 어리석음을 끊었으니, 첫째는 미세한 소지우견(所知愚見)이고, 둘째는 극히 미세한 소지우견(所知愚見)이다.


    미세우지와 극미세우지의 허망한 견해는 미세망념인 제8 아뢰야에 의존한다. 아뢰야의 극히 미세한 망식을 깨뜨려 버리고 부처 자리를 몸소 깨치면 두 가지의 우지망견은 자연히 해소되니, 이것이 종문의 원증이며 견성이다.


    다만 일체 有無의 諸法에 依住하지 않고 또한 無依住에도 依住하지 않아서 또한 不依住하는 知解도 짓지 않으면 이를 大善知識이라 이름하며 또한 오직 佛陀 一人이 大善知識이라 이름하나니, 兩人이 없기 때문이요, 그 나머지의 者는 전부 外道며 또한 魔說이라 이름하느니라.


    다만 일체 있고 없음의 모든 법에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고, 의지하여 머무를 것 없음에도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고, 또한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는다는 알음알이도 내지 않으면 큰 선지식이라 이름한다. 오직 부처님 한 분만을 큰 선지식이라 부르니 이런 사람이 둘도 없기 때문이요, 그 나머지는 모두 외도나 마구니의 말이라 부른다.


    머무르지 않음[不住]과 머무를 것 없음[無住], 또 미세와 극미세의 우지망해를 호젓이 벗어나면 원증견성이며 위없는 정각이다. 이 알음알이에 매이게 되면 10지와 등각도 외도나 마구니의 말이니 해오점수는 거론할 가치도 없다.


    古人의 授記는 전혀 錯誤가 없으니 지금 知解를 廣立하여 宗旨로 삼는 者는 곧 荷澤神會이다.
    옛 사람의 수기는 전혀 틀림이 없으니, 지금 알음알이를 종자라고 표방하는 자는 곧 하택 신회(荷澤神會)이다.


    하택은 해오점수를 제창한 근본 원류다. 그를 알음알이를 주장하는 무리[知解宗徒]라고 꾸짖어 책망한 육조의 예언은 확실히 적중하였다. 대법안(大法眼)뿐만 아니라 달마를 직접 잇는 정안종사들은 한결같이 하택을 지해종도라고 배제하였으며, 규봉은 하택의 법통이니 이 알음알이의 종지에 속아서는 안 된다.

     

    神妙한 光明이 항상 비춰서 만고에 輝煌하니, 이 玄門에 들어와서는 邪知惡解를 두지 말아라.
    신묘한 광명이 항상 비춰서 만고에 빛나니, 이 현묘한 문에 들어와서는 사악한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진여자성의 무한한 광명은 영원불멸하여 우주에 충만하고도 남는다. 이 절대적 대광명을 가리는 것은 망상과 정념의 삿되고 나쁜 알음알이이니, 이 알음알이의 먹구름만 없애면 본래 지니고 있는 광명은 자연히 나타난다.


    8만 법보인 부처님 말씀도, 십지등각의 현묘한 이해도 모두 정법을 매몰하는 티끌더미다. 무쇠로 만든 바보같이 일체 만사를 아주 잊고 오직 부처와 조사의 공안을 밤낮으로 참구하여 게을리하지 않으면 오매일여의 깊은 경지에서 활짝 깨쳐 진여본성을 분명히 보리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요. 이것이 원만한 깨침인 증오(證悟)이며 견성이며 성불이다.


    牧牛子가 말하였다. 荷澤은 이 知解宗師인지라 비록 曹溪의 嫡子는 되지 못하였으나, 悟解가 高明하고 決擇이 了然하니 圭峯이 그 宗旨를 繼承하였으므로 이제 敎를 因하여 心을 悟한 者를 위하여 繁詞를 除去하고 綱要를 鈔出하여 觀行의 龜鑑을 삼게 하노라.


    목우자(牧牛子)는 말하노라. 하택은 알음알이를 주장하는 스님이므로 비록 조계의 정통 법제자는 되지 못하나, 깨달은 바가 고명하고 결택함이 분명하니, 규봉이 그 종지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제 경전을 통해 마음을 깨치고자 하는 이를 위하여, 번거로운 설명은 깎아내고 요점만 간추려서 관행(觀行)에 귀감이 되게 하고자 한다.


    하택과 규봉의 돈오점수사상을 줄거리로 하여 『결사문』과 『수심결』을 짓고, 그것으로 달마선이 바로 돈오점수라고 주장하던 보조는, 돈오점수를 자세히 논한 그의 『절요』 첫머리에서는 하택을 지해종사라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돈오점수를 서술함은 경전을 통해 마음을 깨치고자 하는 이를 위해서지 그것이 선종은 아니라고 전제하였다.


    只今 圓頓信解者를 위하여 말함이요 敎外別傳은 此限에 있지 않느니라.
    이것은 원돈교의 10신°10주에서 믿고 이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말이요, 교외별전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것은 『절요』 가운데서 돈오점수를 해석한 결론이다. 즉 돈오점수는 교가인 원돈교에서의 10신°10주(十信十住) 가운데서 믿고 이해함[信解]을 표현한 것이지, 선종의 교외별전사상이 아니라고 하였다.


    上來 所擧의 法門은 전혀 依言生解하여 悟入한 者를 위하여, 法에 隨緣과 不變의 二義가 있고 人에 頓悟와 漸修의 兩門이 있음을 委辨하니라. 그러나 만약에 依言生解하여 轉身하는 活路를 不知하면 비록 終日 觀察하나 轉轉히 知解에 얽히어 休歇時가 없으므로 다시 衲僧門下의 離言得入하여 知解를 頓亡한 者를 위하여 비록 圭峯이 崇尙하는 바는 아니나 간략히 祖師와 善知識이 徑截方便으로 學者를 提接한 所有言句를 引證하여 此後에 係列하여 參禪峻流로 하여금 出身하는 一條 活路가 있음을 알게 하노라.


    위에서 들어 보인 법문들은 모두가 말을 통해 이해를 하고 그것으로 깨달아 들고자 하는 이를 위하여, 법에는 인연을 따름[隨緣]과 변함이 없음[不變]의 두 이치가 있고 사람에게는 단박 깨침[頓悟]과 점점 닦음[漸修]의 두 문이 있음을 자세히 가려 준 것이다.


    그러나 만약 말 따라 알음알이를 내면서 몸을 뒤집는 살길을 알지 못하면, 온종일 관(觀)하고 살피나 점점 더 알음알이에 얽혀 들어가 쉴 때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납승 문하에서 말을 떠나 깨달아 들어가서 알음알이를 단박 없애고자 하는 자를 위하여, 비록 규봉이 숭상한 것은 아니지만, 경절문 방편으로 학인들을 지도한 조사와 선지식들의 말씀을 뒤이어 증거로 인용하여, 뛰어난 납승들에게 몸을 벗어나는 한 가닥 살길이 있음을 알게 하노라.


    이는 「절요」의 마지막 부분이다. 전편을 통하여 돈오점수를 자세히 설명하였으나, 이것은 말을 따라서 알음알이를 내는 지해(知解)를 조장할 뿐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말을 떠나서 깨달아 들어가 단박 알음알이를 없애려는 뛰어난 납승들을 위해 알음알이의 큰 병을 없애고 몸을 뒤집는 살길로서 경절문(徑截門)을 소개한다 하였다.


    이로써 지해종도인 하택과 규봉이 주장하는 돈오점수는 말 따라서 알음알이를 내는 교가의 원돈사상이지 말을 떠나 알음알이를 끊는 선문의 경절활로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원래 알음알이는 선문에서 가장 금기하는 것이니, 원돈의 알음알이가 교외별전이 될 수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보조가 「결사문」과 「수심결」에서는, 하택과 규봉이 주장하는 돈오점수를 달마의 바른 전통이라고 역설하다가, 「절요」에 와서는 하택과 규봉은 지해종도로서 조계의 적통이 아님과 동시에 그의 사상인 돈오점수는 말을 따라 알음알이를 내는 교가이지, 말을 떠나서 알음알이를 없애는 선문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는 사상의 대전환이다.


    보조의 저술 순서를 보면 「결사문」은 33세에, 「절요」는 입적하기 전 해인 52세에 지었다. 수도 과정은 비문에 의하면, 41세에 상무주암에 있으면서 ‘사물에 매이지 않고 원수와 함께하지 않으니 그 자리가 안락하여 지혜가 더욱 높아졌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수도의 진전에 따른 사상의 향상을 볼 수 있다. 「수심결」은 찬술 연대가 없으나 그 내용이 「결사문」과 같으므로 초년에 지은 것임이 분명하다.


    「결사문」과 「수심결」을 지은 때에는 선과 교를 혼동하여 교가의 돈오점수를 달마의 선종이라고 주장하다가 지혜가 더욱 높아지면서 만년에는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아 선종을 경절문(徑截門)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다행히도 보조가 만년에 와서는 돈오점수사상을 “말을 따라 알음알이를 내는 지해”임을 분명히 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보조 당시에도 돈오점수가 선종이 아님을 명백히 하였거늘, 8백 년 후인 오늘에 와서 보조를 빙자하여 돈오점수를 선종이라고 주장함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돈오점수를 이어받은 보조 자신이 그 원조인 하택과 규봉을 지해종사라고 단언하였으니, 그 누구를 막론하고 돈오점수사상을 신봉하는 사람은 전부 지해종도이다.


    圓頓信解門인즉 語路義路와 聞解思想이 있는 緣故요, 徑截門인즉 語路義路가 없으며 聞解思想을 용납하지 않는 연고니라.


    원돈신해문은 언어와 이치로써 따지는 길이 있으니 듣고 이해하고 사유함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경절문은 언어와 이치로써 따지는 길이 끊어졌으니 듣고 이해하고 사유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此圓頓成佛論中에 所論한 悟는 이에 解悟니라.


    여기 「원돈성불론」에서의 깨침이란 해오를 말한다.


    話頭에 疑心을 打破하여 噴地一發한 者는 이에 無障碍法界를 親證하느니라.


    화두의 의심을 쳐부수어서 한바탕 큰소리를 친 사람은 아무 걸림 없는 법계를 몸소 증득한 것이다.


    원돈문의 돈오는 10신 초에서의 해오이므로, 듣고 이해하고 사유를 없애는 점수가 필요하다.


    그와 같이 義理가 비록 가장 圓妙하나 摠히 識情인 聞解와 思想邊의 量인 故로, 禪門의 徑截門에서는 一一이 온전히 揀擇하여 佛法知解의 병이 되느니라.


    이 도리가 비록 가장 원만하고 오묘하지만 모두 식정으로 듣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쪽의 헤아림이므로, 선문의 경절문에서는 낱낱이 다 불법에 대한 알음알이의 병이라고 하여 가려낸다.


    지극히 원만하고 현묘한 원돈문도 선종의 경절문에 있어서는 지해의 커다란 병통이 되므로, 보조도 증오를 중심으로 한 「간화결의」에서는 이를 배제하고, 다시 교가를 위하여 해오사상인 「원돈성불론을 따로 찬술하였으니, 말을 떠나서 알음알이를 없애는 증오에 있어서는 말 따라 알음알이를 내는 해오는 전체가 병이 아닐 수 없다.


    圓頓信解인 如實言敎가 恒河沙數 같으나 死句라 하나니 學人으로 하여금 解碍를 내게 함이다. 아울러 이 初心學者가 徑截門活句에 能히 參詳치 못하게 되는 故로 自性에 稱合한 圓談으로 보여서 그로 하여금 信解하여 退轉치 못하게 한 緣故이다.

     

    원돈신해의 진실한 말씀이 갠지스 강의 모래같이 많으나 그것을 죽은 말[死句]이라 하니, 학인들에게 알음알이의 장애를 내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처음 발심한 학인은 경절문의 산 말[活句]을 참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성에 일치하는 원만한 말을 보여주어 그의 믿고 이해함이 물러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禪宗의 敎外別傳인 徑截門은 格量을 초월하므로, 다못 敎學者만 難信難入할 뿐 아니라 또한 禪宗의 下根淺識도 망연히 알지 못하느니라.


    선종의 교외별전인 경절문은 격식과 도량을 초월하므로, 교학하는 사람만 믿고 들어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근기와 식견이 낮은 선종인도 까마득히 모른다.

     

    故로 이르기를 敎外別傳은 敎乘을 逈出한다고 하니라.
    그러므로 교외별전은 교종을 멀리 벗어났다고 하였다.

     

    大抵 參學하는 者는 모름지기 活句를 參할 것이요 死句를 參하지 말지니, 活句下에 薦得하면 영겁토록 不忘이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참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산 말을 참구할 것이요 죽은 말을 참구하지 말 것이니, 산 말에서 깨치면 영겁토록 잃지 않으나 죽은 말에서 깨치면 자신마저도 구제하지 못한다.


    보조가 입적한 뒤에 발견된 그의 「간화결의론」에서는 돈오점수를 내용으로 하는 원돈신해는 전적으로 지해(知解)이므로 사구라고 규정하고 교외별전인 선종의 경절문은 활구라고 결론짓고서, 참선하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떠나고 알음알이를 없애 영겁토록 잃지 않는 활구를 참구해야지, 말 따라 알음알이를 내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하는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거듭 말하였다.


    선과 교를 혼동한 초년의 저술인 「결사문」과 「수심결」 때문에 돈오점수의 큰집으로 추앙되는 보조 자신도, 만년에는 교외별전은 교종을 멀리 벗어났다고 말하여 돈오점수를 알음알이인 사구로 규정하고, 선종의 경절문 활구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러므로 돈오점수를 선종이라고 다시 입에 올린다면 이는 선종정전의 반역일 뿐만 아니라 보조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견해이다. 그러므로 교외별전인 달마의 후손은 선문에서 가장 금기로 하는 하택, 규봉 같은 지해종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돈오점수를 내용으로 하는 해오인 원돈신해가 선문의 최대 금기인 알음알이임을 분명히 알았다면 완전히 버리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선문정전의 본분종사들은 아무리 작은 알음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부처나 조사들의 혜명을 끊어 버리는 삿되고 나쁜 알음알이라 하여 철저히 배격할 뿐이요, 일언반구도 알음알이를 권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조는 규봉의 해오사상을 알음알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절요」·「원돈성불론」 등에서 그에 연연하여 버리지 못하고 항상 이를 고취하였다.

     

    그는 만년에 원돈해오가 선문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으나, 시종 원돈사상을 고수하였다. 그러므로 보조는 선문에서 표방하는 직지단전(直旨單傳)의 본분종사가 아니며, 그의 사상의 주된 바탕은 화엄선(華嚴禪)이다. 보조는 또한 선문의 종지가 증지(證知)에 있다고 주장한 「결의론」에서도 끝부분에 가서는, 교종인 원돈신해의 참의문(參意門)을 선양하였다. 안으로는 교를 숭상하면서 겉으로는 선을 주장하는 보조의 내교외선사상이 여기에서도 역력하다.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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