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道 박만주 2018. 5. 2. 08:33

 

 

                                                                                                                        

      


     

      선가귀감 강의 22-1


    깨달음의 거울, 서산대사의 선가귀감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공부 시간입니다.

    다 같이 합장하시고, 마하반야바라밀 세 번 염하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네, 깨달음의 거울, 선가귀감. 오늘은 그 스물두 번째 게송 전반부, 앞부분을 먼저 보겠습니다. 


    참선하는 이는 항상 이렇게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높은 것을 알 고 있는가? 네 요소로 구성된 더러운 이 육신이 순간순간 썩어 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숨 한 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이 부처님이나 조사 같은 이를 만나고도 그대로 지나쳐 버리지 않았는가? 높고 거룩한 법을 듣고도 기쁘고 다행한 생각을 잠시라도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공부하는 곳을 떠나지 않고 수도인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 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면서 지내지는 않는가? 분주히 시비를 일삼

    고 있지나 않는가?  


    네, 참선하는 이가 스스로 자기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될지 그 설명이죠. 참선하는 이 는 스스로 이렇게 돌이켜 보아야 한다.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높은 것을 알고 있는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죠. 부모님 은혜, 또 국가의 은혜, 또 스승의 은혜, 그리고 시주자의 은혜. 이것이 바로 네 가지 은혜입니다.



    남에게 은덕을 베풀 때는 그 사람이 효자냐 아니냐를 보고서 베풀라고 했습니다. 효성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은덕을 베풀며는 십중팔구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이거죠. 이 세상에 은혜 중에서 최고의 은혜는 부모님 은혜죠.


    이 세상에 내가 오게 된 것도 사실 부모님의 몸을 빌어서, 부모님 덕분에 왔고, 또 부모님으로 인해서 내가 컸고, 이런데. 부모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은혜를 알리가 없죠. 예. 부모님 은혜도 모르는데 뭐 누가 좀 도와주고, 어려운 때 도와주고 그랬다고 그 사람 은혜를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남한테 도움을 줄 때는 그 도움을 줄 대상이 자기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그거를 먼저 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는 사람이며는 아낌없이 도와주고, 왜냐? 그 사람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 배은망덕하지는 않는다 이거죠. 그리고 부모님에게 불효하는 사람 같으며는 도와주지 말라 그랬어요. 왜냐? 배은망덕이기 때문에 나중에 배신당하고 나서 그럴 줄은 몰랐다는 둥, 그래도 그럴 수가 있냐는 둥,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거예요. 세상을 못 믿겠다는 둥, 그게 다 뭐냐? 어리석어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혜롭게 살아야 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뭔가를 베풀 때, 저 사람이 부모님한테 잘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먼저 살펴보고, 부모님한테 잘 하는 사람 같으면 아낌 없이 베풀어 주고, 부모님한테 배은망덕한 사람 같으며는 베풀어줄 필요가 없다. 왜냐? 최상의 은혜인 부모의 은혜도 배은망덕 하는데, 다른 사람의 은혜는 당연히 그건 배은망덕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 다음에 또 국가의 은혜. 우리가 이런 국가에 지금 태어났으니까 그나마 이렇게 살고 있 는 거죠. 국가가 없이 남의 밑에서 이렇게 있다면은 참 살기 퍽퍽하죠. 힘들죠. 그래서 국가의 은혜를 알아야 되고.


    또 스승의 은혜. 스승의 은혜야말로, 불가에서는 특히 스승이야말로 나를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분, 이게 바로 참다운 스승이죠. 그래서 이 육도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스승님의 은혜를 잊는다며는 그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죠. 과거에는 스승에게 정말 한 마디, 한 가지 가르침, 한 가지 경전을 배우기 위해서 몇 년씩을 시봉했다고 그래요.


    삼 년 을 시봉하고, 팔 년을 시봉하고, 십 년을 시봉하고, 그래 가지고, 겨~우 몇 마디 딱 듣고 너무 기뻐서 환희심에 차고 이랬다는데, 요새는 인터넷도 발달하고, 통신 수단이 발달하고 이러다 보니까는 인제 뭐 아주 굉장히 그 중요한 질문 같은 것도 그냥 인터넷이나 통신 수단을 통해서 가볍게 던지고 그런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은 아무리 사회가 바뀌어도 또 바뀌지 않아야할 그런 부분이 있는 겁니다.


    또 시주자의 은혜. 시주자가 공양을 올렸기 때문에 내가 이 몸뚱이를 보존할 수가 있고, 또 이 몸뚱이를 보존했기 때문에 공부를 꾸준히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부모님 은혜, 국가의 은혜, 스승의 은혜, 시주의 은혜. 이 은혜가 깊고 높은 것을 알고 있는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죠. 그저 지 공부할 생각만 앞에 서 가지고, 뭐 어떻게 하며는 내가 공부 좀 해 가지고 뻥~ 한 소식 터뜨릴까 그 생각만 가지고 있지. 부모님 은혜, 국가의 은혜, 스승의 은혜, 시주의 은혜를 이거 알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 공부에만 급급해서 자기 욕심에만 채울라고 이렇게 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한텐 절대 뻥~ 터지지가 않습니다. 그 마음가짐을 고쳐먹어야 돼요. 마음가짐을.


    내가 이렇게 공부, 참선할 수 있다는 것, 화두 잡고 이렇게 틀어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 야~ 이것 자체만으로도 내가 엄청난 부모님 은혜다. 엄청난 이 국가의 은혜를 받고 있구나. 스승의 은혜를 내가 엄청 받고 있구나. 야~ 시주자들 너무 고맙구나. 이런 마음가짐으로 앉아 있으면요, 뻥~ 하지 말래도 뻥~합니다. 하하~ 근데 그런 마음은 없이 그냥 내 잘 난 맛에 ‘내가 깨달음을 얻어야지.’이런 욕심만 가지고 앉아있다. 그건 안 되죠. 왜냐?


    그건 우주의 법칙입니다, 그게. 예. 우주는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은덕을 베풀게 되어 있어요. 뻥~ 터지는 것도 이게 우주가, 부처님이 은덕을 베풀어야 터지는 것이죠, 은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은덕이 안 베풀어집니다. 그래서 이 감사함, 은덕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미 반은 터진 겁니다. 예. 왜냐? 인이 충실해졌기 때문에 연이 충실해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우주는 은덕을 아는 사람에게 은덕을 베푼다.”이거를 명심해야 됩니다. 



    그 마음에 네 가지로 이루어진 이 육신이 순간순간 썩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 목숨이 숨 한 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죠. 우리 몸은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어요. 단단한 땅 기운, 그 다음에 젖은 물 기운, 또 더운 불 기운 그리고 숨이 통하는 바람 기운 이렇게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가 흩어져 버리며는 과연 무엇이 남겠습니까? 이 몸뚱이는 무상한 것이다. 순간순간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어디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알아야

    되죠. 


    그래서 사람의 목숨이 숨 한 번에 달려 있다. 과거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은, “사람의 목숨이 얼마간에 달려 있느냐?”부처님이 물어보셨을 때, “한 나절에 달려 있습니다.”“너는 도를 모르는구나.”“밥 먹는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너도 도를 모르는구 나.”“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데 달려 있습니다.”“네가 도를 아는구나.”이렇게 얘기 하셨죠. 예. 그래서 우리의 이 목숨이라는 것은 무상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변화를 변화로써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 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죠.


    부처님과 아난존자의 재미있는 일화도 있죠.아난존자가 성 안으로 탁발을 갔다 와서,“부처님, 오늘 아주 기이한 일을 봤습니다. 기이한 것을 목격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기이한 일이냐?”

    “제가 성 안으로 탁발하러 들어갈 때, 풍악쟁이들이 성문 있는데서 신나게 노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잠깐 탁발을 하러 갔다 온 사이에 나올 때 보니까 다 그 풍악쟁이들이 죽 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죽었습니다. 기이합니다.”


    “그래? 여래는 어제 더욱 기이한 모습을 보았느니라.”

    “무슨 모습을 보셨습니까?”

    “응, 내가, 어제 여래가 성 안으로 탁발을 하러 들어갈 때 그 풍악쟁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느니라.”


    “그런데요?”

    “잠깐 동안 탁발을 하고 나오는데 역시 또 그 풍악쟁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더라.”

    허허허~ 예. 그게 더 기이한 일이라는 거죠. 예. 신나게 놀고 있던 사람들이 탁발을 하고 나오는 동안에도 역시 똑같이 신나게 놀고 있는 것, 이것이 진짜 기이한 모습입니다. 탁발 하러 들어갈 때 신나게 놀던 사람들이, 탁발하고 나올 때 다 죽어 버린 것, 이게 기이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뭡니까? 당연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기이한 것을 당연하다 그러고, 당연한 것을 기이하다 그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중생들의 소견이고, 여래의 입장에서 보자며는 제행무상, 변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예. 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기이한 것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수행자의 올바른 마음가짐이죠.



    그래서 이 몸뚱이가 숨 한 번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는 부처님이나 조사 같은 그 런 스승을 만나고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가 없겠죠. 왜냐? 스승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한 가지, 한 대목, 이것은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이 압니다. 마음공부를 하면서 정~말 고생을 하고, 정~말 궁금해 하고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 스승 귀한 줄을 알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스승 귀한 줄도 모릅니다. 높고 거룩한 법을 듣고도 기쁘고 다행한 생각을 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쓸데없이 잡담을 하거나 시비를 일삼죠.

    예, 잡담은 줄여야 하고 법담은 늘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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