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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의 수행 - 사마타와 위빳사나

白道 박만주 2018. 12. 5. 09:01

 

 
 



 

 초기불교의 수행 - 사마타와 위빳사나     


 무명 ()

 

 

초기불교의 수행 - 사마타와 위빳사나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사마타(samatha)’와 ‘위빳사나(vipassanā)’는 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술어이며 특히 상좌부 불교의 수행 체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핵심 술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두 술어는 일찍이 중국에서 각각 지(止)와 관(觀)으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지와 관을 고르게 닦을 것을 강조하여 지관겸수(止觀兼修)로 정착되었고, 이것은 다시 선종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로 계승되었다.

 

불교 2,600년사에서 내로라하는 논사들이나 수행자들이 이렇듯 지와 관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 것을 본 때문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관심은 ‘후대 논사들이나 수행자들의 견해가 아닌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직접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설명하신 것이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어떻게 정의하셨는가?’

하는 것으로 기울게 되었다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적지 않은 초기경전에서 세존께서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분명하게 정의하고 계신다.

 

먼저 언급해야할 경이 앙굿따라 니까야 영지(靈知)의 일부 경(A2:3:10)이다.

이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사마타를 마음(citta)과 마음의 해탈(심해탈, ceto-vimutti) 즉 삼매[定, samādhi]와 연결 지으시고, 위빳사나를 통찰지(paññā, 반야)와 통찰지를 통한 해탈(혜해탈, paññā-vimutti) 즉 통찰지[慧, paññā]와 연결 지으신다.


그리고 삼매는 욕망을 극복하는 수행이고, 통찰지는 무명을 극복하는 수행이라고 밝히고 계신다.

 

그리고「삼매 경」1(A4:92) 등 세 개의 경들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한 답변을 명확하게 제공하고 있다. 이 세 개의 경들에 나타나는 "마음의 사마타"와 "통찰지라 [불리는] 법들에 대한 위빳사나"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사마타는 마음의 개발을 뜻하는 삼매와 동의어이고, 위빳사나는 통찰지와 동의어이다.

 

그래서「삼매 경」3(A4:94)에서는 사마타를 얻기 위해서는 사마타를 체득한 분을 찾아가서 '도반이여, 어떻게 마음을 고정시켜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마음이 삼매에 들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위빳사나를 얻기 위해서는 위빳사나에 통달한 분을 찾아가서 '도반이여, 형성된 것들[行]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명상해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깊이 관찰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사마타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키고 고요하게 하는 삼매를 개발하는 수행(삼매, 定, samādhi)이며, 위빳사나는 유위제법[行]을 명상하고 관찰하여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수행(통찰지, 慧, paññā)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마타를 먼저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위빳사나를 먼저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둘 다를 동시에 닦아야 하는가이다.

이것도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토론거리가 되고 있다.

 

쌍 경(A4:170)은 여기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마타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위빳사나를 먼저 닦을 수도 있고,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함께 닦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 개인의 문제이지 어느 것을 먼저 닦아야 하는가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앙굿따라 니까야』를 위시한 초기경전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한 중요한 언급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몇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서 살펴보자.

 

 

[대상 - 개념과 법]

 

첫째, 사마타든 위빠사나든 중요한 것은 대상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사마타의 대상은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pannatti)이고 위빠사나의 대상은 법(dhamma)이다. 이것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잣대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집중과 통찰]

 

둘째, 사마타는 대상(표상)에 대한 집중이고 위빠사나는 대상(법)에 대한 통찰이다.

사마타(samatha)는 마음이 표상에 집중되어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그치고(止)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지(止)로 옮겼다.

 

위빠사나(vipassan)는 ‘분리해서(vi) 보는 것(passana)’이라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대상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인 특성을 여실지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관(觀)으로 옮겼다.

 

이처럼 사마타는 대상(표상)에 집중하는 삼매(定)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대상(법)을 무상.고.무아로 통찰하는 반야(통찰지. 慧) 수행이다.

 

[닮은 표상과 삼특상]

 

셋째, 사마타의 키워드는 닮은 표상이고 위빠사나의 키워드는 무상.고.무아이다.

〈청정도론〉은 사마타의 대상을 40가지 명상주제로 정리하고 있다.

이런 대상 가운데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 대상에서 익힌 표상을 만들고, 이것이 마침내 닮은 표상(相似影像. patibhaga-nimitta)으로 승화되어 흩어지지 않고 오롯하게 되어, 매순간의 마음들이 이 닮은 표상에 고도로 집중된 상태를 사마타라 한다.


위빠사나는 마음(心).마음부수(心所).물질(色)로 구분되는 71가지 구경법들 가운데 하나를 통찰하는 수행인데 이처럼 법을 통찰해 들어가면 제법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徹見)하게 된다.

 

[일시적인 해탈과 해탈]

 

넷째, 사마타의 고요함만으로는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마타는 마음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 탐.진.치가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마타에서 나올 때는(出定) 다시 탐.진.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태를 경에서는 일시적인 해탈(samaya-vimutta, 앙굿따라 니까야 일시적 해탈 경1(A5:149) 등)이라 한다.

그러므로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의 힘으로 이들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래야 해탈.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그래서 무상.고.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한다.

 

 

[지관겸수(止觀兼修)]

 

다섯째, 이처럼 위빠사나의 지혜(통찰지)가 없이는 해탈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고요함과 고도의 집중이라는 사마타의 힘이 아니면 위빠사나의 지혜가 생기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라는 술어는 거의 대부분 함께 나타나며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지관겸수(止觀兼修)를 강조하였다.

 

 

[무엇을 먼저 닦을 것인가]

 

여섯째, 사마타를 먼저 닦을 것인가 위빠사나를 먼저 닦을 것인가는 결국 인연 닿는 스승의 지도방법과 수행자 자신의 관심과 성향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마타를 반드시 먼저 닦아야한다거나 위빠사나만을 닦아야한다거나 하는 것은 독단적인 견해일 뿐이고, 이런 견해를 고집하면 진정한 수행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수행은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로 귀결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위빠사나는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 그 자체이지 결코 특정한 수행기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참조 : http://cafe.daum.net/mahavipassana/5W6m/24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http://blog.daum.net/mjpark39/16404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