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을 사는 우리의 운명은 모두 전생에 지은 업(業)이 발현되어 나타나는 발현업(發顯業)이고, 이 발현되는 업(業)은 설사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의 지위에 오른자라 할지라도 피 할 수 없다고 한다. 이처럼 업(業)의 발현은 피 할수 없는 것이기에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운명론적인 명제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업(業)이라 하는게 도데체 무엇이고, 어떻게 지어지는 것이며, 그 속성은 어떠한 것일까? 또 지은 업(業)을 소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과연 과거에 지은 업(業)을 소멸시킬 수는 있는 것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상(相)은 마음이 짓는 것이며, 업(業) 또한 상(相)이기 때문에 업은 마음의 영역인 것이다. 마음이란 본래 어느 하나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아니 머물래야 머물수 없는것이 마음이다. 머물러 있는 게 아닌, 또 머물수도 없는 그 마음을 억지로 어떤 하나에다가 머무르게 하려고 하니까 망상이 생기는 것이다. 마음공부 중에 그런 식으로 마음을 어떤 대상에다가 붙잡아 매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억지로 대상에다가 마음을 붙잡아 놓으면 병이 된다. 마음은 결코 어느 한점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모양(色)이나 소리(聲), 냄새(香), 맛(味), 느낌(觸), 생각(意)에 고정되거나 머물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변하고 생멸을 반복하는 것이 마음이다. 어떤 하나의 대상을 보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 변화하면서 지나가고 있는 것이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게 아니다. 움직이고 있는 거지 결코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한곳에 머무를래야 머무를 수 없는 것이 마음인 것이다. 머무를 수 있는 게 아닌데 머무르려고 하니 이것이 망상이요 번뇌요 괴로움이요 힘듬이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를 하나의 상(相), 즉 이미지로써, 모양으로써 기억 속에 담아두고 있다. 그래서 그런 상(相)과 관련된 소리를 듣거나 거기에 관련된 사물을 보면 그게 불쑥불쑥 올라와 반응한다. 이러한 과거의 기억의 상(相)이 우리가 취할 행동양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불쑥 불쑥 올라와 우리의 의사결정에 영항을 끼치는 작용을 불교에서는 습(習)이라 한다. 그리고 마음이란 놈은 머물수 없는 것이어서 어디에도 머물지 말아야 하는데도 우리는 어느 하나에 집착하여 마음을 머물게 한다. 그 집착하여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 그놈이 바로 업(業)이라는 것이다. 어느 하나에 머무를래야 머무를 수 없는 것이 마음의 속성이기에 어떻한 일이 되었건 간에 거기에 마음을 붙잡아 두거나 매일 필요가 없음에도 우리는 어리석게도 지나가버린 과거의 일, 현재 일어나는 일, 심지어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들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다. 이 마음에 담아둔 이것이 업(業)인데, 이놈들이 대상을 만나면 시도때도 없이 불쑥불쑥 올라와 우리의 행동양태에 반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결정해 버린다. 그게 '업보(業報)를 받는다'라는 것이다. 그러니 알고 살아라. 누가 내 운명을 결정하는가? 인간의 운명은 신(神)이 결정하는 것도, 사주팔자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에 담아둔 집착된 기억의 상(相), 즉 업(業)이 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전생의 업이 이생의 삶을 결정한다' 거나 ' 지금 이순간의 먹는 마음이 미래를 결정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분명해 진다. 사람이 죽으면 49제를 지낸다. 이 기간동안 죽은자의 영혼을 중음신(中陰神)이라고 하는데 이 49일의 기간동안 영혼은 마치 영화를 보듯 자신이 살아 생전에 행하였던 모든 일들을 파노라마처럼 보게 된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사후에 보게되는 영화의 재생원리는 간단하고도 단순하다. 살아 생전 행하고 생각했던 것들에 마음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영사기에 찍어 놓았기 때문에 죽은후 육신이 없어지고 순수한 마음영역(영혼)만 남게 되니 그 상(相)이 저절로 재생되는 것이다. 염라대왕이 있어서, 옥황상제가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있어서 살아생전의 선행과 악행을 영화처럼 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는 마음에 찍힌 영상이 육신이 죽고 마음만 남게되자 저절로 투영되는 것이다. 살아 생전에 시-비, 선-악, 호-오, 등등 일어나고 겪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 마음이 어떻게 머물렀느냐에 따라 육도의 어느곳에서 어떤 몸을 받느냐 하는 새 몸 받기의 윤회 드라마가 쓰여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바로 업(業)이라고 부른다. 다른 게 업(業)이 아니라 마음에 찍어놓은 이미지, 그게 업(業)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것에 집착하여 그것을 놓지 못하고 마음이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그게 바로 업(業)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업(業)을 더이상 쌓지 않고 이미 쌓은 업장(業障)을 소멸시켜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맛볼 수 있을까? 앞에서 우리는 업을 짓는 것이 마음의 머무름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았다. 그러므로 업을 소멸시키는 것 또한 마음의 영역에서 그 답을 내야 한다. 분별없는 눈으로 보면, 이름 지어진 모든 만상들이 다 이름만 있지 실체가 없음을 알수 있다. 반야심경에 나온 부처님 말씀 그대로 일체개공(一切皆空)인 것이다. 일체가 공(空)이어서 실체가 없다. 마음도 그 일체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어서 잡을 수도, 머물수도 없고, 고정되어 있지도 않아 실체가 없다. 이름하여 '마음'일 뿐 그 어디에서도 고정된 실체를 찿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실체가 없는데, 그 것이 지은 업(業)인들 실체가 있을 손가. 진리의 눈으로 보면 이 업(業) 또한 헛깨비이고 망상일 뿐,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진실한 마음만 알면, 마음이라는 것이 머무는 것이 아님을 알아 어느 '하나'에도 머물지 않고 어떤 것도 마음에 담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탁! 아는 순간, 업은 어떤 업이든지 간에 다 소멸되어 버린다. 업이란 게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신심명 강좌를 읽거나 들은 사람들은 부처님 재세 당시 있었던 살인마 앙굴리마라 이야기를 기억 할 것이다. 앙굴리라마는 사람을 999명이나 죽인 살인마 였지만 마지막에 부처님을 만나가지고 깨달음을 얻고 그 많던 살인의 극악한 업이 싹 없어져 버렸다! 법(法)도 없는데 하물며 업(業)이 어디 있겠는가? 법이란 것도, 마음이란 것도 다 실체가 없다. 바로 '지금 이순간'에 '이 마음'이 있을뿐이다. 이 순간이 사라지면 이 마음도 사라지고, 다음의 새로운 순간이 오면 그 순간 존재하는 '그 마음'이 있을뿐이다. 이것 하나만 알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녹아버린다. 이것 하나만 알면! 우리 삶이 힘든 것은, 우리 삶이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에 사로잡히고, 헛된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 걱정 같은 것에 마음이 붙잡혀 있기때문이다. 다른 문제는 없다. 업이 발현되는 것이 운명이고, 발현업은 피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업의 문제만 해결하면 아무 문제가 없게 된다. 생각해 보라.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게되니,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이 순간 순간을 즐기는 것 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 섬진재 식구들의 삶이기도 하다.) 그 어디에도 마음이 붙잡히지 말라. 이것만 깨달으면 모든 업장은 해소되고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배 고프면 밥 먹고, 똥 마려우면 똥 싸고, 인연이 다가오는대로 남자가 오면 남자 접대 여자가 오면 여자 접대, 강아지가 오면 강아지 접대, 다람쥐가 오면 다람쥐 접대, 그렇게 인연을 대하면서 나이를 먹는건지 안먹는 건지, 그저 몸이 다해서 갈때가 되면 가면 그만이고 내 삶의 매 순간 순간이 한결같게 된다. 도도히 흐르는 섬진강 물을 보라. 물결은 매 순간 순간 흐르고 흘러 항상 새로운 물결로 변하고 있지만 물은 언제나 그대로여서 여여한 흐름을 수천년 세월에도 변함없이 지켜오고 있다. 마음이란 것도 이와 같아서 매번 새로운 순간들이, 인연들이, 매번 새롭게 지나가지만 마음은 그냥 항상 그대로이다. 왔다갔다 하는 그 와중에서도 마음은 항상 그대로인 것이다. 특별한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고, 외적 조건에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변하지 않고 지금 여기 이자리에 있다. 그러니 오고 가는 모든 인연에 마음을 붙잡히지 말라. 어떠한 것이든 마음에 담지 말라. 어떤 것에 집착하여 마음에 담지만 않고 살면 수억겁동안 쌓아온 모든 업장이 소멸되고 다시는 업을 쌓지 않는 무업행(無業行)이 일시에 이루어진다. 업이 없는데 생사 윤회가 어디에 자리하겠는가? 마음이란 흐르고 변하며 찰라 찰라에 생멸을 거듭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지금 여기 이순간 '이 마음'이 있을뿐이다. 이 순간 여기에 머물라. 이것이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설하신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 아니고 무엇이랴! 섬진재에서 기축 5월 중순 중도 합장 _()_ 글쓴이: 중도 http://cafe.daum.net/to-be/S5Wv/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