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법달스님이 ‘법화경’의 眞意를 묻다 / 안국선원장

白道 박만주 2019. 6. 9. 11:33
 

 

 

  법달스님이 ‘법화경’의 眞意를 묻다  / 안국선원장


 “중생들도 佛知見 구족하고 있어”


“법달아, 법인즉 본래 심히 달하였으나 네 마음이 달하지 못하였으며, 경은 본래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구나! 네가 이 경을 왼다니 이 경은 무엇으로 종(宗)을 삼는다고 생각하느냐?” “학인은 근성이 어둡고 둔하여 이제까지 다만 겉으로 글자만 따라 외었을 뿐이오니 어찌 종취를 아오리까?” “그렇다면 나는 글자를 모르니 네가 경을 한번 외어 보아라. 내 마땅히 너를 위하여 해설하리라.”


법달스님의 겸손한 모습을 확인한 후, 너의 법명이 뜻하는 바는 좋은데 법을 보는 안목이 부족하여 스스로 경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구나 하시면서 ‘〈법화경〉이 무엇으로 종(宗)을 삼는가’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더욱 마음속 깊이까지 자세를 낮추며 어찌 뜻을 알 수 있겠느냐고 말씀드리니, 그렇다면 경을 직접 소리 내어 읽어 보라고 하십니다.


늘 ‘무심의 지혜’로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면 스스로 열게 될 것


이에 법달이 고성으로 경을 외어 ‘비유품’까지 이르니 조사 말씀하셨다. “그만 그쳐라, 이 경은 원래 인연출세(因緣出世)로 종을 삼는 것이니, 비록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나 다시 이를 넘지 않는다. 인연이라 함은 무엇일까? 경에 이르기를 ‘제불 세존이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신다’ 하였으니 일대사라 함은 부처님의 지견(知見)이다. 세상 사람들이 밖으로 미혹하여 상(相)에 착하고, 안으로 미혹하여 공(空)에 착하니, 만약 능히 상에서 상을 여의고 공에서 공을 여의면 즉시 내외로 미혹하지 않을 것이니, 만약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 마음이 열리면 이것을 불지견(佛知見)을 열었다 하느니라.


〈법화경〉의 대의가 ‘제불세존은 오직 일대사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셨다(諸佛世尊 惟以一大事因緣 出現於世)’는 대목에 있다고 육조스님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불세존은 중생이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청정함을 얻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신 것이고,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이고자 세상에 출현하신 것이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신 것이고, 중생으로 하여금 지견과 도에 들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법화경〉 ‘방편품’ 가운데 ‘인연출세(因緣出世)’가 경의 종취가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품’까지 들어보신 육조스님께서는 밖으로 상(相)에 집착하지 않고 상에서 상을 여의고, 안으로 미혹하여 공(空)에 집착하지 않고 공에서 공을 여의면, 바로 내외가 미혹하지 않게 되어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불지견을 여는 것이며, 곧 일대사를 해결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佛)이란 깨달음(覺)이라는 뜻이니 나누면 네 가지가 되느니라. 깨달음의 지견을 열며,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며, 깨달음의 지견을 깨닫게 하여,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게 함이니, 만약 깨달음의 지견을 열어 보임을 듣고 문득 능히 깨달아 들어가면 곧 깨달음의 지견이 본래의 참 성품의 나타남이게 되나니, 너는 경의 뜻을 그릇 알지 않도록 삼가라. 경에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 간다’ 이르심을 보고 ‘이것은 부처님의 지견일 뿐, 우리들 분수에는 맞지 않는다’ 하는 이런 견해를 짓는다면, 이는 바로 경전을 비방하고 부처님을 허(毁)는 것이니라.


중생들 모두가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과 지견을 구족하고 있다는 것이 〈법화경〉의 가르침 입니다. 그렇기에 ‘부처님에게만 지견이 있을 뿐, 우리 같은 중생들에게는 지견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경의 참뜻을 훼손하는 것이 됩니다. 육조스님께서 이 점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의 참 성품을 보면 누구나 불지견을 열게 되고, 불지견을 여는 즉시 부처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불지견이 열리며, 불지견이 곧 깨달음이며, 네 가지 불지견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합니다. 곧 개시오입(開示悟入)이 이것이며, 불지견이 본래진성(本來眞性)이라고 하십니다. 육조스님께서 경 뜻을 바로 알아야 되지 잘못 알면 안 된다고 하시고, 불지견을 열고 깨달아 들어가야 된다는 뜻은 부처님의 지견이지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고 한다면, 부처님의 뜻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경을 비방하게 되는 것이라고 거듭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가 이미 불이며 이미 지견을 갖추었으니 어찌 다시 열(開) 것이 있으랴. 마땅히 너는 불지견이라는 것은 다만 너 자신의 마음일 뿐 다시 다른 불이 없는 것임을 믿어라. 대개 일체중생이 스스로 자기광명을 가리고, 육진(六塵) 경계를 탐애하여, 밖으로 반연하고 안으로 흔들리면서 온 생애를 쫓고 쫓기며 시달려도 도리어 달게 여기니, 이에 세존께서 삼매(三昧)에서 일어나시어 여러 가지 간곡한 말씀으로 저들에게 권하여 편안히 쉬도록 짐짓 수고하시는 것이다.


육조스님께서는 이미 분명하게 깨달았으면 다시 깨달을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반문 하시면서, 마음이 부처일 뿐 또 다른 부처님은 어느 곳에도 없다고 하십니다. 중생이란 경계에 끄달려 밖으로 반연하고 안으로 근심하면서도 달게 끄달림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밝은 빛을 막고 있으므로, 부처님께서 삼매에서 일어나 모습을 나투어 간곡한 말로서 편히 쉬도록 권선을 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디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마라. 불(佛)과 더불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니 이 까닭에 ‘불지견을 열라’하신 것이며, 나도 또한 모든 사람에게 권하기를 ‘자기 마음속에서 항상 불지견을 열라’하는 것이다.


세간 사람이 마음이 삿되고 어리석으며 미혹하여 죄를 짓되, 입은 선하고 마음은 악하며 탐심(貪心).진심(嗔心).질투심과 아첨과 아만으로 남을 침해하고 일을 해쳐서 스스로 중생지견을 여나니, 만약 능히 마음을 바르게 하고 항상 지혜를 내어 자기 마음을 비추어 보아 악한 짓을 그치고 착한 일을 행하면 이것이 스스로 불지견(佛知見)을 여는 것이니라.


너는 모름지기 생각마다 불지견을 열고 중생지견(衆生知見)을 열지 않도록 하라. 불지견을 열면 이것은 즉시 세간에서 뛰어남이요, 중생지견을 열면 이것은 곧 세간이니라. 네가 만약 다만 힘들여 경이나 외고 그것으로 공과를 삼는다면 이우가 제 꼬리를 사랑하는 거와 무엇이 다르랴! 


언제나 너희들 마음이 부처와 더불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밖으로 구하지 말고 자기 마음속의 불지견을 열라고 하십니다. 세속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어리석어 미혹한 마음으로 삿된 일을 예사로 하며 죄를 짓는다고 말씀하시고, 입으로는 착한 척 하면서 마음속으로 남을 해코지 하면, 악한 마음과 삼독심으로 중생지견을 열 수 밖에 없는 입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정심(正心) 즉, 무심(無心)으로 늘 지혜를 내어 자심(自心)을 비춰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면 스스로 불지견을 열게 될 것이라 다시 한번 더 강조하십니다. 생각 생각에 불지견을 열어 중생지견을 끊으면 세간을 벗어남이요, 중생지견을 열면 세간에 머물게 되니, 네가 수고로이 생각에 착하여 공과(功課)를 억지로 쌓으려고 하면 자기 꼬리만 좋아하는 이우와 무엇이 다르겠느냐며, 좋은 약이 될 수 있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경전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행하라”


법달이 여쭈었다. “만약 그러하오면 다만 뜻만 알도록 하고 수고롭게 경을 외울 것은 없겠사옵니까?”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경에 무슨 허물이 있건대 너의 경(經)외는 것을 못하게 하랴. 대개 미(迷)와 오(悟)가 사람에게 있고 손해되고 이익 되는 것이 모두 자기에 달렸으니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행하면 곧 이것이 경을 굴리는 것이요, 입으로는 외어도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이것은 경이 너를 굴리는 것이니 다시 내 게송을 들어라.


마음이 미혹하매 〈법화경〉에 굴리우고/ 마음을 깨달으니 〈법화경〉을 굴리누나./ 아무리 경을 외워도 자성을 못 밝히면/ 뜻과는 오히려 원수같이 등졌네./ 무념(無念)으로 경 외우니 바른 길이 두렷하고/ 유념(有念)으로 경 외우니 그릇된 길 헤매누나/ 유념 무념 모두 다 계교(計較) 않으니/ 길이길이 백우거(白牛車)를 타고 노니네.”


경을 외우더라도 뜻을 알고 외워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뜻도 모르고 경에만 의존해 외우기만 해왔으니, 아직까지도 육조스님의 가르침을 소화하지 못해 거듭 가르침을 청하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입으로 읽고 외워도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소용없음을 여러 차례 설명했는데도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모습이 안타깝기조차 합니다. 하나를 알려주면 그것에 매달려 다른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요?


육조스님께서는 사람에 따라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의 차이가 있으며 그 이해관계는 모두 스스로에게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게송으로 이르기를, ‘미혹한 마음은 〈법화경〉에 굴림을 당하고, 깨달은 마음은 법화경을 굴리는 구나. 경을 아무리 오래 외웠어도 지혜가 없다면 뜻과는 원수 같아짐이로다. 무념(無念)이 바른 생각이요, 유념(有念)은 삿된 생각을 이룬다’라고 하시면서, ‘유무를 모두 계교하지 않으면 길이 대승의 백우거(白牛車)를 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법달이 이 게송을 듣고 곧 크게 깨치고 저도 모르게 슬피 울면서 조사께 여쭈었다. “법달은 이제까지 실로 한번도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고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하고 다시 여쭈길, “경에 이르기를 ‘모든 대성문(大聲聞)들과 보살들이 다 함께 생각을 다하여 헤아리더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측량하지 못한다’ 하였사온데 이제 범부가 다만 자기 마음만 깨달으면 곧 불지견을 이루는 것이라 하시니 스스로 상근기(上根機)가 아닌 자는 의심하거나 비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경에 삼거(三車)를 말씀하셨사온데 양녹거(羊鹿車)와 백우거(白牛車)를 어떻게 구별하올지 바라옵 건데 화상께서는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법달스님이 게송을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서럽게 울다가 크게 깨닫고, 〈법화경〉에 굴림을 당했었다고 이실직고하면서 의문 나는 점을 다시 묻습니다. 범부도 깨치기만 하면 불지견을 여는데, 하물며 대성문과 보살들이 함께 뜻을 같이해도 부처님의 지혜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하시는 지에 대한 경우와 대, 소승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묻고 있습니다.


〈법화경〉 ‘비유품’의 ‘불타는 집’의 말씀을 참고해 양거. 녹거. 백우거에 비춰 보십시오. 달마대사의 〈이입사행론〉에 있는 “깨달으면 마음이 사물을 포섭하고, 미혹하면 사물이 마음을 포섭한다”는 가르침이, 법화경을 굴리고 굴림을 당한다는 말과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깨달으면 마음이 사물을 포섭


미혹하면 사물이 마음을 포섭”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경에는 뜻이 분명한데 네가 스스로 미혹하여 모르는 구나. 모든 삼승인(三乘人)이 부처님의 지혜를 측량하지 못하는 것은 그 허물이 헤아리고 짐작하는 데 있나니, 비록 저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생각하고 함께 추구하더라도 더욱더 멀어지느니라.


부처님은 본래 범부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요 결코 부처님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닌데 이 도리를 믿지 않는 자가 자리에서 물러가는 대로 맡겨 두거니와 이들은 또한 스스로 백우거(白牛車)에 앉아 있으면서 다시 문밖으로 삼거(三車)를 찾아 헤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구나.


하물며 경문에 분명히 너희에게 이르기를 ‘오직 일불승(一佛乘)이 있을 뿐 다른 승(乘)인 이승(二乘).삼승(三乘)이 없다’하였고 ‘내지 무수한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의 말씀이 모두가 일불승인 이 법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더냐? 너는 어찌하여 삼거는 거짓이며 예전을 위함이요, 일승(一乘)은 실(實)지며 이것이 지금을 위한 것임을 살피지 못하느냐?


이는 다만 너로 하여금 거짓을 버리고 실지에 돌아오게 하려함이니 실지에 돌아와서는 실지하는 이름조차 또한 없는 것이니라. 


경의 뜻은 분명한데 스스로 헤아리고 짐작하는 어리석음을 아직도 범하고 있기 때문에 삼승인이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더욱 멀어져 가고 있다고 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위한 방편으로 삼승을 말씀하셨지만, 실로 일불승만을 위함이었다고 설하신 점을 지적하시면서 스스로 백우거에 앉아 있으면서 허망 되게 밖으로 탈 것을 구한다고 걱정하십니다. 한편 삼승을 빌려 일승을 말했지만, 이것 또한 방편으로 실상에 돌아가게 하려 했을 뿐이며, 실상에 계합해서는 그것 역시 실상이라고 이름하였을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알아라. 있는 바 모든 보물과 재물이 모두 네게 속하고 네 마음대로 쓰일 것이요 다시는 아버지니 아들이니 하는 생각도 할 것이 없으며 또한 쓴다는 생각도 하지 말라. 이렇게 알면 이것이 〈법화경〉을 수지하는 것이니 겁(劫)과 겁이 다하도록 손에서 경을 놓지 않는 것이니 낮이나 밤이나 외우지 않는 때가 없는 것이 되느니라.”


이에 법달이 가르침을 받고 환희용약하며 게송을 지어 찬양하였다. “〈법화경〉 3천 번 읽는 것이/ 조계(曹溪) 한 마디에 자취조차 없어졌네./ 부처님 오신 뜻을 알지 못하거니/ 다생동안 미친(狂)짓 어찌 쉬오리./ 양거. 녹거. 백우거로 방편을 삼아/ 초(初).중(中).후(後)로 잘도 설했네./ 누가 있어 알았던가 이 화택(火宅) 속의/ 이 몸이 원래부터 법왕(法王)인 것을.”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바야흐로 경을 외는 중이라 할 수 있으리라.” 법달은 이 때부터 깊은 뜻을 알고 송경(誦經)하기를 쉬지 않았다. 


법달스님은 앙금을 털어내고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야하는 뜻을 듣고는 환희 용약하여 게송으로 찬탄합니다. “그동안 경에 끄달려 읽고 외우기만을 하였는데, 조사스님 친견하고 한 말씀에 앞뒤가 끊어졌네.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했다면 어찌 억겁의 허망함을 벗어 던졌겠는가. 교묘한 선교방편으로 참 잘도 설하셨구나. 깨닫지 못했다면 삼계화택 속에 윤회하고 있던 이 몸이 법왕인 줄 전혀 몰랐을 것”이라고 하자, 육조스님은 네가 지금부터는 경을 외워도 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법달스님은 더욱 깊은 뜻을 알고 송경(誦經)을 그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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