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선정의 단계에 관한 약식 설명과 깨달음에 관하여

白道 박만주 2019. 9. 1. 10:30

 

 

 

  

 선정의 단계에 관한 약식 설명과 깨달음에 관하여

 

 선정(禪定)[삼매]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으나 쉽게 요약하여 씁니다.


 1. 전오식(前五識)이 일어나지 않아 끊어진 선정이 있습니다.

 

 참선을 하여 선정에 드는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간절함입니다. 생사를 넘어설만한 간절함이 없다면 수만 겁을 수행하여도 결코 깨치지 못할 일입니다. 이 깨달음은 생사(生死)를 해결함인데 그 간절함이 생사를 넘을 만큼이 못되면서 어찌 깨닫기를 바랄 것이겠습니까.

 

 죽은 자식을 찾는 어미처럼, 굶주린 고양이가 쥐를 쫒듯,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듯 간절하고 간절해야 비로소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니 수행인들은 스스로들 돌아보아 자신의 간절함이 이와 같은지 항시 되돌아볼 일입니다.

 

 이와 같이 간절하게 참선을 하게 되면 육체와 관련된 의식들이 일어나지 않아 끊어지고 탈락되는 선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고(眼) 듣고(耳) 냄새 맡고(鼻) 맛보고(舌) 촉감(身)을 느끼는 감각이 모두 탈락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전오식(前五識)이 끊어지면 전오식(前五識)과 반연(絆緣)하는 경계들도 모두 사라집니다.

 

 이런 삼매(선정)에 들어서는 주위의 소리가 아무리 요란해도 들을 수 없고 눈앞에 환한 빛을 비춰도 보이지 않으며 어떠한 악취가 나도 냄새를 맡지 못하며 바늘로 찔러도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치 몸이 사라진 것과 같은 경계여서 호흡도 느낄 수 없습니다. 실재로 몸은 호흡을 하나 호흡을 전혀 인지할 수 없게 되는 선정입니다.

 

 

2. 감정(受)이 일어나지 않아 끊어진 선정이 있습니다.

 

 위와 같이 모든 육체의식(前五識-眼耳鼻舌身)이 탈락하고 나면 점차 감정(受)들이 고요해지며 일어나지 않게 되어 결국 끊어지는 경계에 들어갑니다. 그야 말로 그 어떠한 감정도 일어나지 않아 마치 자신이 기계처럼 된 듯이 보입니다. 좋음과 싫음을 여의게 되며 기쁘지도 슬프지도 분노하지도 환희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선정 중에 법희(法喜-수행 중 일어나는 기쁨)를 느끼는 경계라면 아직 모든 감정이 탈락한 선정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감정이 모두 탈락하게 된 선정의 경계에서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모두 없습니다. 다만 간절한 의단(疑團)만이 있을 뿐입니다.

 

 

3. 6식이 일어나지 않아 끊어진 선정이 있습니다.

 

 6식이란 쉽게 생각하여 논리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의식입니다. 예컨대 ‘1+3=4’와 같은 계산을 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의식입니다. 이러한 6식이 사라지면 더 이상 그 어떠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선정에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잠시도 언어(생각-6식)를 쉬지 못합니다. 계속하여 속으로 말을 하며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꿈속에서조차 말을 쉬지 못합니다. 반면 이와 같은 선정에 들어본 이는 평상시 생활에서도 이 언어를 쉬어버릴 수 있습니다. 언어를 떠올려 말하기가 오히려 번거롭게 되어야 이 선정에 익은 자라 할 수 있지요.

 

 이와 같이 언어가 사라지고 거친 사유들이 끊어지는 선정에 들면 수행자는 논리적 사유는 끊어진 체 바라보는 주시상태의 의식(이는 사실 7식-말나식입니다)으로 남게 됩니다. 만약 수행자가 수행 중에 선악에 대한 시비를 할 수 있다면 혹은 자신이 현재 들어온 경계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다면 혹은 자신이 현재 처한 경계에 대해 언어적인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면 아직 6식이 탈락한 선정에 들지 못한 것입니다.

 

 6식마저 끊어진 삼매(선정)에 들었다 하여도 간절함이 지극하지 못하면 많은 수행자들이 잘 못 빠지는 경계가 있습니다. 흔히들 무기공(無記空)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이런 무기공에 들면 육신이 없음으로 텅 빈 듯 하고 감정이 없음으로 편안한 듯 하며 생각이 모두 끊어짐으로 일체를 아우른 듯하나 이는 아직도 죽고 사는 것을 해결하지 못한 귀신굴일 뿐입니다.

 

 어둡고 텅 비기만 하여 아무런 것도 없는 그런 것을 깨달음으로 삼게 되면 이 자는 막행막식을 무애행(無碍行)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되며 많은 이들을 오도하여 자신도 남도 함께 속여 같이 지옥에 처하게 됩니다. 많은 사이비 수행단체에서 이런 무기공을 깨달음으로 인가하여 참으로 입에 담지도 못할 일들을 벌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간절하고 간절하게 수행자는 자라면 주시하는 의식 상태인 7식의 경계로 들어갑니다.

 

 

4. 자의식이 끊어지고 멸하는 선정이 있습니다.

 

 7식(말나식-末那識)이란 미세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의식이며 또한 자의식(에고의식)이 있는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비언어적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어리석음은 바로 이 7식의 자의식으로 인한 것입니다. ‘내가 있다’ ‘이것이 나다’라는 뿌리 깊은 무명의 뿌리입니다.

 

 이런 7식의 경계를 넘어가기가 참으로 힘드니 그 이유는 간절함이 부족해서입니다. 참으로 크게 죽는다 함은 이 자의식(에고의식)을 넘어섬이요 모든 무명의 뿌리를 뽑는다 함도 이 자의식을 뿌리 뽑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고를 귀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어찌 귀한 에고를 죽이고 뿌리 뽑겠습니다. 참으로 간절하고 간절하여 스스로를 길바닥의 먼지보다 못하게 여기는 자가 되어서야 아무런 미련 없이 7식을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람이 되어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이지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해 자신을 포장하거나 꾸미는 사람이 되어서는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또한 이런 주시하는 의식을 마음(근원, 부처)으로 삼아 깨쳤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주시하는 의식을 오렷한 그 무엇이라 잘못 오인하여 이것을 마음으로 삼아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마음(부처, 근원)의 본래의 지혜가 아닌 7식입니다. 아직 그 무엇을 인식할 대상(객관)이 있고 인식할 주체(주관)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 둘이 아닌(不二)경계가 아닌 둘로 갈라진 차별경계인 것이지요. 주와 객이 분명한 상태에서의 의식이라 이 의식은 나와 내가 아닌 것(주와 객)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정에서는 간혹 부처님이나 보살님을 보거나 환한 금빛을 보거나 황홀한 음악이 들리거나 천상이나 지옥을 보는 등의 환각 환청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닌 7식이 만들어 내는 거짓임에도 이런 것에 의미를 두는 수행인은 더 이상 나아갈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혹은 이와 같은 선정에 까지 들어 주시자의 깨어 있음을 귀히 여겨 수행하면 간혹 신통이 생기는 바 이런 신통들을 또한 귀히 여겨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의 특성은 아직도 자아(에고)를 귀히 여겨 차마 죽지 못하는 것으로 만약 이런 자들이 간절함이 없이 7식을 넘어서고자 하다보면 선정에 들어서도 갑자기 두려움이 일어 선정에서 깨어나곤 하는 것입니다.

 

 

5. 8식(阿羅耶識)이 탈락하는 선정(삼매)이 있습니다.

 

 8식이란 기억의 창고인 것인데 8식을 나라고 삼는 7식이 일어나지 않아 끊어져 탈락하면 자연 8식의 기억에 관련된 습들은 모두 탈락합니다. 그런 중에서도 8식에 있는 본래 마음의 지혜가 들어나게 되는데 이때가 깨달음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의 8식을 아마라식(阿滅識) 혹은 백정식(白淨識) 등으로 불리는데 이것이 바로 반야(般若)로 마음의 본래의 지혜작용입니다. 사실 이것은 이미 식이 아닙니다. 이름을 하여 식이라고는 하나 이는 그저 비춤입니다. 말로 하나 비춤이라 하지만 이는 무슨 빛도 아닙니다. 그 성품이 빛과 같다 함이지요.

 

 또한 이 9식이란 것은 깨어있음도 아니요 잠듦도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의식이라면 깨어있음이란 말이 가능할지 모르나 이는 이미 의식이 아닌 그저 비춤입니다. 오로지 비추일 뿐이며 주관과 객관 경계가 모두 없는 그야 말로 둘이 아닌 경계 아닌 경계입니다.

 

 간혹 주시하는 의식 상태를 ‘소소영영’ ‘성성적적’에 결부하여 깨달음과 연결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소소영영’과 ‘성성적적’은 9식을 이르는 말이지 어떠한 의식상태를 말함이 아닙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 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를 깨달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수행인이 화두를 들고 나아갈 때에 6식이 탈락한 선정에 해당합니다. 9식에 이르면 이는 동정일여도 몽중일여도 오매일여도 이미 아닙니다. 백정식이 들어난 선정에서는 이미 시간과 공간이 없으며 선과 악이 없으며 좌와 우가 없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습니다. 오로지 일체를 비추일 줄 아는 지혜작용(반야)만이 성성하여 끊이지 않습니다.

 

 

6. 비로소 깨달음이라고 하는 멸진정(滅盡定) 이란 선정(삼매)이 있습니다.

 

 9식(백정식)의 소소영영(昭昭靈靈)하며 끊이지 않는 지혜작용(반야)이 문득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그 자신을 고스란히 비추입니다. 문득 제 스스로를 비추는 순간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지혜작용이란 것도 없고 본체랄 것도 없고 없다는 것도 다시없는 그야 말로 멸진정(滅盡定)의 선정에 듭니다. 고스란히 모든 것이 쉬고 쉬어 뭐라고 할 수 없는 깊은 선정에 들게 됩니다. 오로지 그 본래의 마음(근원, 부처)으로만 남아 있는 경계가 바로 이 멸진정의 선정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로소 멸진정의 선정에 들어 둘이 아니게 마음이 마음을 깨쳐야만 비로소 모든 경전의 구절들이 바로 풀어지고 모든 조사들의 말씀이 고스란히 알아집니다. 허나 이와 같이 깨쳤다 하여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땅에 넘어진 자는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이 마음을 깨쳤다면(體)다시 그 마음이 나투어(用) 일어난 현상세계에 대한 일체의 법(종지)을 지혜로 살펴 꿰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석존께서 마음을 깨치신 뒤 다시 선정에 들어 12연기를 깨치셨다 함과 같은 연유입니다.

 

이와 같지 않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 어떤 귀한 상태이든 그 어떤 고귀한 인품을 수행한 것이든 불안(佛眼)과 법안(法眼)의 안목이 없다면 그런 것은 자신도 남도 구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견해를 내어 수행하는 것이 안타까워 이와 같이 대략의 길을 밝히니 위에 비춰 자신의 견해와 어긋남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자신의 견해에 대해 차분히 살펴보시길 권하며 아울러 체득한 것만을 말하라 하신 분이 계시기에 이는 본인이 체달한 것에서 더하지도 덜지도 않은 것임을 밝힙니다.

출처
[직접서술]

  srotapanna

  2010.03.19 22:19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http://blog.daum.net/mjpark39/16404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