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의 관계(關係)
참선(參禪)과 정토(淨土)(염불)는 근본(根本) 이치(理致)상으로는 둘이 아니지만 구체적(具體的)인 수행(修行)의 현실(現實)을 따지자면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오 참선(參禪)은 확철대오(確徹大悟)하고 완전(完全)히 증득(證得)하지 아니하면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날수 없소그래서 일찍이 위산선사(潙山禪師)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돈오(頓悟)의 올바른 인연(因緣)을 만나야만 비로소 홍진(紅塵)을 벗어나는 점진적(漸進的) 인 계단(階段)에 들어서며 매(每) 생애(生涯)마다 퇴보(退步)하지 않는다면 부처의 단계(段階)도 틀림없이 기약(期約)할 수 있다.
처음에 마음이 인연(因緣)에 따라 어느 순간(瞬間) 자성(自性)을 단박 깨달을 수 있지만 시작(始作)도 없는 오랜 옛날부터 쌓여온 업습(業習)의 기운(氣運)은 그렇게 단박에 모두 사라 질수 없다. 그 업습(業習)이 의식(意識)에 나타나는것을 말끔히 제거(除去) 하여야만 비로소 생사(生死)를벗어날수 있게 된다.
이는 마치 사람이 밥을 먹을 때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理致) 라오천하(天下)의 선지식(善知識)들이 열반(涅槃)의 경지(境地)를 증득(證得)하지 못하는 것도 이에 그 공덕(功德)이 성인(聖人)과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오조(五祖) 계선사(戒禪師)는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청(淸)선사는 노공(魯公)으로 다 시 출생(出生)한 거라오 예로부터 확철대오(確徹大悟)하고서도 완전(完全)히 증득(證得)하지 못한 대종사(大宗師)들이 이처럼 수(數)없이 많소.
이는 정말로 오직 자력(自力)에만 의지(依支)하고 부처님의 자비(慈悲) 가피(加被)를 구(求)하지 않은 탓 이오. 미혹(迷惑)이나 업장(業障)이 말끔히 제거(除去)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오.
반면 정토(淨土)염불(念佛)은 믿음과 발원(發願)과 수행(修行)의 삼요소만 갖추면 업장(業障)을 젊어진 채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往生) 할 수 있으며 한번 왕생(往生)하면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영원(永遠)히 벗어나게 되 오. 이미 깨달아 증득(證得)한 사람은 곧장 부처의 후보(候補)자리<보처(補處)>에 오르게 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衆生)이라고 할지라도 불퇴전(不退轉 아비발치)의 경지(境地)를 증득(證得)하게 되오.
그래서 연화장(蓮華藏) 세계(世界)의 모든 중생(衆生)들이 한결같이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발원(發願)하며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수많은 선지식(善知識)들이 나란히 서방정토(西方淨土) 에 왕생(往生)하는 거라오 이는 부처님의 자비(慈悲) 가피력(加被力)에 완전(完全)히 의지(依支)하여 자신(自身)의 간절(懇切)한 믿음과 발원(發願)을 행(行)하기 때문에 쌍방(雙方)의 마음이 서로 교류(交流)되어 빨리 정각(正覺)을 이루는 감응(感應)이 나타나는 것 이오.
지금 같은 세상(世上)에서는 참선(參禪)보다는 정토(淨土)염불수행(念佛修行)에 전념(專念)하는 것이 마땅한 방법(方法)이오.
한티끌도 물들지 아니한 마음가운데서 만(萬)가지 공덕(功德)을 두루 갖춘 위대(偉大)하고 거룩한 나무(南無)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를 지송(持誦)하는 것이오.
더러 소리 내어 염송(念誦)하기도 하고 더러 소리 없이 조용히 암송(暗誦)하기도 하되 끊어짐이나 잡념(雜念)망상(妄想)이 없도록 하오.
반드시 생각(念)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자기(自己) 귀로 들어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살아 있고 한 구절(句節) 한 구절(句節)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염송(念誦)해야 하오.
그렇게 염불(念佛)을 오래 계속(繼續)하다보면 저절로 한 덩어리가되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몸소 증험(證驗)하고 서방정토(西方淨土)의 풍취(風趣)를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그래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육근(六根) ---▪눈 ▪귀 ▪코 ▪혀 ▪몸 ▪생각---을 모두 추스려 청정(淸淨)한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수행(修行)을 삼매(三昧)에 이르는 최상(最上)의 원통법문(圓通法門)으로 삼은 것 이오. 정토(淨土)염불(念佛)로 곧장 선정(禪定)에 드는 방편(方便)이 이보다 더 묘(妙)한게 또어디 있겠소?
참선(參禪)수행(修行)을 하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自身)의 힘(自力)에만 의지(依支)하고 부처님의 가피력(加被力)을 구(求)하지 않소.
그래서 공부에 힘이 붙어 진짜와 가짜가 서로 뒤섞여 공격(攻擊)해 올때 여러가지 경계(境界)가 번쩍 나타났다가 번쩍 사라지면 갈피(葛皮)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쉽소. 그러한 경계(境界)들은 마치 잔뜩 흐리고 비 오던 날씨가 장차(將次) 개이려고 할 때 두터운 구름장이 터지면서 문득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다가 눈 깜박할 사이 다시 어두컴컴해지기를 반복(反復)하여 도대체 날씨 변화(變化)를 예측(豫測)할수 없는 경우(境遇)와 비슷하오.
이러한 상황(狀況)은 진짜 도안(道眼)이 뜨인 자(者)가 아니면 식별(識別)해낼수가 없소 이때 만약 한 소식(消息) 얻은 걸로 착각(錯覺)하면 악마(惡魔)에 집착(走火入魔)하여 미쳐 날뛰게 되고 어떤 의약(醫藥)으로도 고칠 수 없게 됩니다.
염불수행(念佛修行)하는 사람이 진실(眞實)한 믿음과 간절(懇切)한 발원(發願)으로 온갖 공덕(功德)을 갖춘 위대(偉大)한 명호<萬德洪名--南無阿彌陀佛>를 염송(念誦)하는 방법(方法)은 마치 밟은 해가 중천에 걸린 대낮에 큰길을 가 는 것과 같아서 단지(但只) 마귀(魔鬼)나 요정(妖精) 도깨비들이 얼씬도 못하고 자취를 감출뿐만 아니라 tot길로 빠지거나 시비(是非)를 따질 염두(念頭)조차 일어날 여지(餘地)가 없다오.
이러한 염불수행(念佛修行)을 꾸준히 계속(繼續)하여 공부가 순수(純粹)해지고 힘이 지극(至極)히 붙으면 결국(結局)은 온 마음이 부처이고 온 부처가 마음이 되어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마음과 부처가 하나가 되는(全心是佛 全佛是心 心佛不二 心佛一如)경지(境地)에 이르는 것이오.
이러한 이치(理致)와 이러한 수행(修行)을 사람들이 잘몰라서 부처님이 중생(衆生)들을 두루 제도(濟度)하시고자 한 원력(願力)에 부합(附合)하지 못할까 걱정될 따름이오. 그러니 어찌 은밀(隱密)히 숨겨 두고 전(傳)해 주지않거나 또는 어떤 특정인(特定人)에게만 전(傳)해 주는 일이 있겠소? 만약 아무도 모르게 은밀(隱密)히 입과 마음으로만 전수(傳授)하는 미묘(微妙)한 비결(秘訣)이 있다면 이는 삿된 악마(惡魔)나 외도(外道)일 것이며 불법(佛法)은 아니라오.
법당회장(法幢和尙)은 숙세(夙世)에 영특(英特)한 근기(根機)를 타고나 처음에는 진실(眞實)한 유학자(儒學者)였다가 나중에 진실(眞實)한 스님이 되셨소. 그러니 글공부하고 도(道)닦은게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칭송(稱頌)할만 하오.
세상(世上)에 진짜 유학자(儒學者)가 있어야 비로소 진짜스님이 있게 되오 별볼일 없이 어중이 떠중이로 노닐던 무뢰한(無賴漢)들이 출가(出家)하면 정말로 거의 모두 불법(佛法)을 파괴(破壞)하는 마왕(魔王)과 외도(外道)가 되기 십상이오.
법당화상(法幢和尙)의 어록(語錄)은 모두 사람들 마음의 눈을 곧장 통쾌(痛快)하게 확 틔워주는 휼륭한 법문(法門)으로 인쇄(印刷)하여 널리 유통(流通)시키고 선가(輝家)의 보배로도 삼을 만하오.
그러나 이는 오직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 본성(本性)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하는(直持人心 見性成佛)길을 규명(糾明)하여 놓았을 따름이오.
우리들은 오로지 정토염불(淨土念佛)을 수행(修行)하기만하면 되니 그 말씀의 구절(句節)들을 붙잡고 씨름하여 둘 다 손해(損害)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기 바라오. 선가(禪家)에서 주창(主唱)하는 것은 오직 근본(根本)의 요지(要旨)에 국한(局限)되며 그 밖에는 일체(一切)를 밝히지 않소.
원인(原因)을 닦아 과보(果報)를 얻고 미혹(迷惑)을 끊어 진아(톨我)를 증득(證得)하는 일은 모두 스스로 묵묵(黙黙)히 수행(修行)해 나가야할 공부라오.
그런데 문외한(門外漢)들은 선가(禪家)에서 이러한 수행(修行)과 증득(證得)의 도리(道理)를 뚜렷하게 언급(言及)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선가(禪家)에서 이러한 방법(方法)을 쓰지 않는다고 말 하는구려. 이는 곧 선가(禪家)를 비방(誹謗)하고 부처님과 불법(佛法)을 비방(誹謗)하는 죄악(罪惡)이오.
교리(敎理)를 좀아는 총명(聰明)한 사람들은 으레히 염불수행(念佛修行)이 왜 굳이 서방(西方)의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往生)하려고 선택(選擇)하는지 따져 질문(質問)을하곤 합니다.
마치 상대적(相對的)인 분별(分別)과 취사선택(取捨選擇)을 완전(完全)히 초월(超越)한 수행(修行)만이 절대(絶對) 궁극(窮極)인양 생각하는 가 봅니다. 그러나 이는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궁극(窮極)의 경지(境地)는 부처가 된 다음의 일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오.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다면 설령(設令) 미혹(迷惑)을 완전(完全)히 단절(斷絶)하고 진리(眞理)를 증득(證得)하는 것 조차 모두 취사선택(取捨選擇)의 편(偏)에 속(屬)하오. 미혹(迷惑)을 완전(完全)히 끊고 진리(眞理)를 증득(證得)하는 취사선택(取捨選擇)을 인정(認定)한다면 염불법문(念佛法門)이 동방(東方)대신 서방(西方)을 향(向)하고 혼탁(混濁)한 사바고해(沙婆苦海)를 떠나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往生)하려는 발원(發願)을 어찌 허용(許容)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참선법문(參禪法門) 같으면 취사선택(取捨選擇)이 모두 잘못이지만 염불법문(念佛法門)에서는 취사선택(取捨選擇)이 모두 옳다오.
참선(參禪)은 오로지 자기(自己) 마음(自心)만 참구(參究)하는 것이고 염불(念佛)은 부처님의 힘을 함께 믿고 의지(依支)하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렇게 서로 판이(判異)한 법문(法門)의 근본원리(根本原理)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망령(妄靈)되이 참선(參禪)법문(法門)을 가지고 염불법문(念佛法門)을 공격(攻擊) 비판(批判)히는 것은 그 의도(意圖)가 몹시 잘못 되었소. 참선(參禪)에서 취사선택(取捨選擇)을 안하는 것은 본디 최상(最上)의 정수(精髓)이지만 염불(念佛)에서도 취사선택(取捨選擇)을 없애려 한다면 곧 독약(毒藥)이 되 고 만 다오.
여름에 모시옷 입고 겨울에 털 가죽옷 입으며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밥먹는 것은 지극(至極)히 당연(當然)한 순리(順理) 아니겠소? 서로는 비난(非難)할수도 없거니와 또 어느 한쪽만 옳다고 고집(固執)해서도 안 되오. 오직 각자(各者)의 근기(根機)와 본성(本性)에 적합(適合)한 방편(方便)을 골라잡는다면 폐해(弊害)가없이 유익(有益)할 것 이오.
동방(東方)을 버리고 서방(西方)을 취(取)하는 것 이 생멸(生滅)이라고 비방(誹謗)하는 자(者)들은 거꾸로 동방(東方)을 고집(固執)하여 서방(西方)을 버리는 것이 단멸(斷滅)임을 모르고 있소. 대저 아직 미묘(微妙)한 무상(無上)정각(正覺)을 증득(證得)하지 못한 중생(衆生)이라면 누가 취사선택(取捨選擇)을 벗어날 수 있겠소?
3아승지겁을 수련(修練)하고 백겁(百劫) 동안 원인(原因) 자리를 닦아 위로 불도(佛道)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며 미혹(迷惑)을 끊고 진리(眞理)를 증득(證得)하는 일체(一切)의 수행(修行)과정(科程)이 어느것 하나 취사선택(取捨選擇)의 연속(連續)이 아니겠소?
모름지기 여래(如來)께서 모든 중생(衆生)들이 한시 바삐 진리(眞理)의 몸<법신(法身)>과 고요한 광명(光明)<적광(寂光)>을 증득(證得)할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하여 특별(特別)히 나무(南無)아미타불(阿彌陀佛) 명호(名號)를 지송(持誦)하여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하라고 간곡(懇曲)히 권(勸)하셨음을 잘 알 고 명심(銘心)해야 합니다.
여래(如來)께서 설(說)하신 일체(一切)의 법문(法門)은 모두 미혹(迷惑)을 끊고 진리(眞理)를 증득(證得)하여야 만 비로소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 날 수 있으며 미혹(迷惑)과 업장(業障)을 다 끊지 않고서 생사(生死)를 벗어 날 수 있는 법문(法門)은 결코 없음을 알아야 하오. 그런대 염불법문(念佛法門)은 미혹(迷惑)을 끊은 자(者)가 왕생(往生)하면 법신(法身)을 곧장 증득(證得)하고 미혹(迷惑)과 업장(業障)을 젊어지고 왕생(往生)하더라도 이미 성인(聖人)의 경지(境地)에 우뚝 올 라 서게 되니 이 아니 수승(採勝)하겠습니까.
하나는 오로지 자신(自身)의 힘에 의지(依支)하고 하나는 오로지 부처님의 힘에 의지(依支)하면서 자신(自身)의 힘을 아울러 보태니 두 가지 법문(法門)의 쉽고 어려움은 어찌 하늘과 땅 차이(差異)가 아니겠소?
으레히 보면 총명(聰明)한 사람들이 선서(禪書) 좀 섭렵(涉獵)하다 재미있는 걸 느끼고는 마침내 참선(參禪)을 최고(最高)로 여기고 마치 사방(四方)으로 통달(通達)한 도인(道人)처럼 자처하는 경우(境遇)가 많소. 대부분(大部分) 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의 이치(理致)를 제대로 모르고 스스로 과대망상(誇大妄想)에 잠긴 부류(部類)라오. 이러한 생각과 견해(見解)는 결코 따라서는 안되오. 만약 이들을 따르면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나는 일은 티끌처럼 수많은 겁(劫)(해)이 지나도록 전혀 가망(可望)이 없을 것 이오.
권(權)이란 여래(如來)부처님께서 중생(衆生)의 근기(根機)를 굽어 보시고 거기에 맞춰 드리운 방편법문(方便法門)<임기응변(臨機應變)>을 일컫고 실(實)이란 부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증득(證得) 한 도의(道義) 그대로 설법(說法)하심을 일컫소 또 돈(頓)이란 점차적(漸次的)인 과정(科程)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빠르게 단박에 뛰어넘어 들어감을 일 걷 고 점(漸)이란 점차(漸次) 닦아 나아가고 점차(漸次) 증험(證驗)해 들어가 반드시 많은 세월(歲月)과 생명(生命)의 과정(科程)을거쳐 바야흐로 실상(實相)을 몸소 증득(證得)하는 것이오.
그런데 참선(參禪)하는 사람들은 참선(參禪)의 법문(法門)이야말로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직지인심(直指人心)) 본성(本性)을 보고 불도(佛道)를 이루게 하는(見性成佛) 법문(法門)으로 정말로 실(實)이고 돈(頓)그 자체(自體)의 수행(修行)이라고 으레히 자랑하는구려. 설사(設使) 참선(參禪)으로 확철대오(確徹大悟)하여 마음을 밝히고 본성(本性)을 본다(明心見性)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但只) 마음에 본래(本來) 갖추어져 있는 진리(眞理)와 본성(本性)상의 부처<이성불(理性佛)>을 보는것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고하는 소리라오.
만약 대보살(大菩薩)의 근기(根機)와 성품(性品)을 지닌 사람이라면 확철대오(確徹大悟)하면서 증득(證得) 하여 스스로 삼계(三界)고해(苦海)를 벗어나 영원(永遠)히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탈(解脫)함과 동시(同時)에 위로 불도(佛道)를 추구(追求)하고 아래로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여 복덕(福德)과 지혜(智慧)의 기초(基礎)를 튼튼히 다 질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이러한 대보살(大菩薩)의 근기(根機)와 성품(性品)을 갖춘 경우(境遇)는 이른바 확철대오(確徹大悟)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 백천(百千)분(分)의 일(一)이나 될까 말까 할 따름이라오.
그 나머지 근기(根機)가 조금이라도 처지는 사람은 제아무리 미묘(微妙)한 도(道)를 확철대오(確徹大悟)했을지라도 --보고 생각하는 번뇌(煩惱)(見思煩惱)--를 완전(完全)히 끊을 수 없어서 여전(如前)히 삼계(三界)고해(苦海)에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되풀이해야 한 다오.
그렇게 생사(生死)를 되풀이하다 보면 깨달음에서 미혹(迷惑)으로 빠지는 경우(境遇)가 훨씬 많고 미궁(迷宮)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게 사바세계(沙婆世界) 수행(修行)의 현실(現實)이오.
이러한 즉 참선(參禪)법문(法門)이 비록 제아무리 실(實)이고 돈(頓)그 자체(自體)의 수행(修行)이라고 할지라도 정말로 근기(根機)가 몹시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실(實)과 돈(頓)의 진짜 이익(利益)을 받지 못하고 결국 권(權)과 점(漸)의 방편법문(方便法門)이 되고 마 는 게 아니겠소?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자신(自身)의 힘(自力)에만 의지(依支)하기 때문이오자신(自身)의 힘이 100% 완전(完全)히 갖추어져 있다면 얼마나 다행(多幸)이겠소? 그러나 현실(現實)상 조금이라도 부족(不足)하게 되면 진리(眞理)와 본성(本性)을 단지(但只) 깨달을 수 있을 뿐 몸소 증득(證得)할 수는 없게 되오. 지금 말법시대(末法時代)에 확철대오(確徹大悟)한 사람도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現實)인데 하물며 확철대오(確徹大悟)한 바를 증득(證得)한 사람은 말할 나위가 있겠소.
여기에 비교(比較)하면 염불(念佛) 법문(法門)은 위로도 통(通)하고 맨 밑바닥 까지 통(通)하며 임기응변(臨機應變)의 권(權)이면서 항상(恒常) 불변(不變)의 실(實)이기도 하고 점차적(漸次的) 이면서 단박에 뛰어넘는<돈(頓)> 수행(修行)법(法)이기 때문에 보통(普通)의 교리(敎理)로 시비(是非)와 우열(優劣)을 따질 수 가 없다 오. 위로는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菩薩)<등각보살(等覺菩薩)>로부터 아래로는 아비지옥(阿鼻地獄)의 중생(衆生)에 이르기까지 모두 닦아 익혀야 할 법문(法門)이오.
여래(如來)께서 중생(衆生)에게 설법(說法)하심은 오직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끝마치고 벗어나도록 이끌기 위함일 뿐이오. 다 른 법문(法門)들은 최상(最上)의 근기(根機)를 지닌 자(者)만이 그 일생(一生)에 생사(生死)를 마칠 수 있으며 낮은 근기(根機)의 중생(衆生)은 수많은 겁(劫)을 닦아도 해탈(解脫)하기 어렵소. 오 직 염불법문(念佛法門) 하나만은 어떤 종류(種類)의 근기(根機)와 성품(性品)을 타고난 중생(衆生)이던지 모두 현생(現生)에 서방세계(西方世界)에 왕생(往生)하여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끝 마 칠 수 있다 오. 이 처럼 곧장 빠르게 갈수 있는데 어찌 점차(漸)의 수행(修行)법(法)이라고 이름 붙 일 수 있겠소?
비록 제아무리 뛰어난 근기(根機)로 참선(參禪)수행(修行)을 하더라도 보통(普通)의 근기(根機)로 원만(圓滿)하고 곧장 닦아가는 염불(念佛)만은 못 할 것 이오. 겉보기에는 느리고 둔한 것 처럼 보이지만 그 법문(法門)의 위력(威力)과 여래(如來)의 서원(誓願)이 평범(平凡)한 중하근기(根機) 중생(中生)들도 막대(莫大)한 이익(利益)을 단박에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니 그 이익(利益)은 완전(完全)히 부처님의 자비(慈悲)광명(光明) 가피력(加被力)을 믿고 의지(依支)하는 것이라 오.
무릇 참선(參禪)하거나 강경(講經)하는 사람들이 정토(淨土)염불법문(念佛法門)을 깊이 연구(硏究)해 보지 않으면 너무 평범(平凡)하고 쉽다고 여겨 가볍게 보거나 거들떠보지도 않기 일쑤라오. 만약 그들이 염불법문(念佛法門)을 한번만 제대로 깊이 연구(硏究)해 본다면 마음과 힘을 다해 널리 펼치게 될 것이 틀림없소. 그런데 어찌 권(權)이네 실(實)이네 돈오돈수(頓悟頓修)네 돈오점수(頓悟漸修)네 하는 잘못된 시비(是非) 논쟁에 끄 달려서 스스로를 망치고 중생(衆生)들까지 혼란(混亂)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짓만 저지르고 있겠습니까?
집착(執着)하지 말라(不執着)거나 또는 집착(執着)을 놓아 버리라
(방하착(放下着))는 따위의 말은 추상적(抽象的)이치(理致)로는 지극(至極)히 옳지만 구체적(具體的) 현실(現實)상황(狀況)은 보통(普通) 평범(平凡)한 중생(衆生)들이 행(行)할 수 있는바가 결코 아니오.
온종일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집착(執着)하지 않는다고 사치(奢侈)스럽게 지껄이는 것은 며칠 동안 물 한 잔 쌀 한 톨 얻어 먹지 못하여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허기져 금방 쓰러져 죽게 생긴 사람이 “나는 용(龍)의 간이나 봉황(鳳凰)의 골수(骨髓)조차 더러운 쓰레기로 보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는 판인데 하물며 그 보다못한 물건(物件)들을 거들 떠 보기라도 할 소냐고 허풍(虛風)을 떠는 것과 똑같은 빈말<공담(空談)>에 지나지 않소.
요즘 세상(世上)에 불교(佛敎)의 이치(敎理)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곧장 참선(參禪)에만 파고 드는 사람들은 대부분(大部分) 이러한 텅빈 해탈병(空解脫病)에 걸려 있소. 좌선(坐禪)을 좀 하여 생각이 맑아지고 텅빈 경계(境界)<空境>가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잡념(雜念)망상(妄想)을 고요하고 맑게 가라앉혀 어쩌다 펼쳐지는 환상(幻想)의 경계(境界)<환경(幻境)>에 지나지 않다오.
그런데 이를 마치 무슨 한소식(消息)이라도 얻은것 처럼 착각(錯覺)하여 크게 환희심(歡喜心)을 내면 마음을 잃어버리고 미쳐 날뛰게 되어 부처님도 고 칠 수 없게 된다오. 다행(多幸)히 수행자(修行者)가 이를 몸소 알아차리고 집착(執着)하지 않으면서 환상(幻想)과 망상(妄想)을 내버리면 마침내 모든 법문(法門)을 일관회통(一貫會通)하는 경지(境地)에 이를 수 있소. 비유(譬喩)하자면 오랫동안 가시밭길을 헤쳐 걸어 온 뒤 문득 사통팔달(四通八達)의 큰길에 도달(到達)하는것과 같다고 할 수 있소
말법시대(末法時代)의 우리 중생(衆生)들은 근기(根機)가 형편(形便)없는데다가 선지식(善知識)조차 매우 드물다 오. 만약 부처님의 자비(慈悲) 가피력(加被力)에 의지(依支)하여 정토(淨土)염불법문(念佛法門)수행(修行)에 전념(專念)하지 않고서 단지(但只) 자신(自身)의 힘만 믿고 참선(參禪)에만 매달린다면 마음을 밝혀 본성(本性)을 보고(明心見性) 미혹(迷惑)을 끊어 진리(眞理)를 증득(證得)<斷惑證眞>하는 이가 매우 적을 것이오.
뿐 만 아니라 환상(幻想)을 진짜로 착각(錯覺)하며 홀림을 깨달음으로 오인(誤認)하고 악마(惡魔)에 집착(執着)하여 미쳐 날뛰는 자들이 정말 많아질 것이오. 그래서 영명선사(永明禪師)나 연지대사(蓮池大師) 같은 선지식(善知識)들이 시절(時節)인연(因緣)과 중생(衆生) 의 근기(根機)를 관찰(觀察)하여 염불(念佛)하자고 정토법문(淨土法門)을 적극적(積極的) 힘써 펼친 것 이라오.
참선(參禪)이라는 법문(法門)을 어찌 그리 쉽게 말 할 수 있겠소? 옛날 위대(偉大)한 수행자(修行者)가운데 조주종섬선사(趙州從諶禪師)같은 분은 어려서 출가(出家)하여 나이 여든이 넘도록 행각(行脚)을 계속(繼續)했다오. 그래서 그를 칭송(稱頌)한 시(詩)에도 “조주 <趙州>는 여든에 여전히 행각(行脚)하였으니 단지(但只) 마음자리가 아직 고요해지지 않아서 였네 .라는 구절(句節)이 있소.
장경선사(長慶禪師)는 좌선(坐禪)으로 방석(方席) 일곱 개를 닳아 뜨 린 뒤 돌아다녔으며 설봉선사(雪峰禪師)는 세 번 투자산(投子山)에 올랐고 아홉 번 이나 동산(洞山)에 오르기도 하였소. 이처럼 위대(偉大)한 조사(祖師)들도 확철대오(確徹大悟)하기가 그토록 어려웠거늘 악마(惡魔)에 물 들린 무리들은 악마(惡魔)의 말을 한번 듣고서 모두 다 깨쳤다고 날 뛰고들 있으니 앞에 말한 조사(祖師)들이 몸소 이들의 신발을 들어준다고 할지라도 쓸데가 없구료.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서(西)쪽에서 온 것은 부처님의 마음 새김(佛心印)을 전(傳)하고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서 <직지인심(直指人心)> 본성(本性)을 보고 부처가 되게 (見性成佛)하기 위함이었소. 그러나 여기서 보고 이룬 다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 본래(本來) 갖추어진 천진불성(天眞佛性)을 가리켜 말 함이오.
사람들에게 먼저 그 근본(根本)을 알아차리게 하면 수행(修行)과 증득(證得)의 법문(法門)은 모두 그 인식(認識)을 바탕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으며 마침내 더이상 닦을게 없고 더 이상 증득(證得)할 것도 없는 궁극(窮極)의 경지(境地)에서 저절로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 오. 한번 깨달음과 동시(同時)에 곧장 복덕(福德)과 지혜(智慧)가 함께 나란히 갖추어지고 궁극(窮極)의 불도(佛道)가 원만(圓滿)히 이루어진다는 의미(意味)는 결코 아니라 오.
마치 용(龍)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어 넣으면(畵龍點睛) 용(龍)이 곧장 살아나 천지(天地)를 진동(振動)시킬 만큼 휘황(輝煌)찬란(燦爛)하게 날아 오르는 것에 비유(比喩)할 수 있소. 그 효용(效用) 은 각자(各者) 몸소 받아 느낄수 밖에 없소. 그래서 그대로 곧장 마음이면서 부처인 도(道)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법(法)이 함께 나란히 온 세상(世上)에 확 퍼지게 되었소.
타고난 근기(根機)가 뛰어난 자(者)는 한 경계(境界) 한 기미(氣味)에 곧장 그 조짐(兆朕)을 알아차리고 진리(眞理)의 말을 토(吐)해 내며 평범(平凡)의 소굴(巢窟)에서 스스로 벗어나 나고 죽음에 걸림이 없이 대자유(自由)와 대해탈(解脫)을 누리게 되오.
그러나 근기(根機)가 조금만 처지는 자(者)는 설령 확철대오(確徹大悟)할지라도 번뇌(煩惱) 업습(業習)의 기운(氣運)이 말끔히 사라질수는 없기 때문에 여전(如前)히 생사(生死)의 바퀴를 돌게 되 오.
그러면 중음(中陰)을 거치고 태반(胎盤)을 나오면서 대부분(大部分) 혼미(昏迷)와 후퇴(後退)를 거듭하기 마련이오. 확철대오(確徹大悟)한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소? 그래서 정말로 부처님의 자비(慈悲) 가피력(加被力)을 굳게 믿고 의지(依支)하는 정토염불법문(淨土念佛法門)에 전심(專心) 진력(盡力)하는 것이 가장 확실(確實)하고 온당(穩當)한 계책(計策)이라오
율종(律宗)이나 교종(敎宗) 선종(禪宗)은 맨 처음 교리(敎理)를 분명(分明)히 배운 뒤 그에 따라 수행(修行)하여야 하오. 수행(修行)공부가 깊어져 미혹(迷惑)을 끊고 진리(眞理)를 증득(證得)하여야만 바야흐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나게 된다오. 그런데 교리(敎理)조차 잘알지 못하면 눈먼 소경의 수행(修行)이 되어 무엇인가 조금 얻으면 다 통(通)했다고 착각(錯覺)하거나 악마(惡魔)에 들려 미쳐 날뛰기 십상이오.
설사 교리(敎理)를 분명(分明)히 알고 수행(修行) 공부가 깊어졌다고 할지라도 미혹(迷惑)을 다끊지 못하고 터럭끝 만큼만 남겨두면 여전(如前)히 윤회(輪廻)고해(苦海)를 벗어날 수 없게 되오. 미혹(迷惑)과 업장(業障)이 깨끗이 사라져 생사(生死)고해(苦海) 벗어나기를 계속(繼續) 기대(期待)하는 것은 부처님의 경지(境地)와는 너무도 멀리 동떨어져 얼마나 수많은 겁(劫)을 더 수행(修行)하여야 비로소 부처의 과보(果報)를 원만(圓滿)히 이룰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소.
비유(譬喩)하자면 평범(平凡)한 서민(庶民)이 태어나면서부터 몹시 총명(聰明)하고 지혜(智慧)로워 책읽고 글공부 시작(始作)한지 십여(十餘)년(年) 만에 갖은 고생(苦生) 끝에 어느 정도(程度) 학문(學文)이 이루어져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과 같소. 그가 아주 큰 재주와 능력(能力)이 있다면 낮은 관직(官職)부터 점차(漸次) 승진(昇進)하여 재상(宰相)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오.
재상(宰相)은 더 이상 올라 갈 수 없는 최고(最高) 정점(頂點)의 관직(官職)으로 모든 신하(臣下) 중의 으뜸 자리라 오. 그러나 재상(宰相)도 만약 태자(太子)에 비교(比較)한다면 귀천(貴賤)이 하늘과 땅처럼 현격(懸隔)히 차이(差異) 나오. 하물며 황제(皇帝)에 빗대겠소? 평생(平生) 신하(臣下) 로서 군주(君主)의 명령(命令)을 받들어 행(行)하며 신명(身命)을 다 바쳐 나라 다스림을 도와야할 운명(運命)일 따름이오.
그러나 이러한 재상(宰相)의 직위(職位)도 오르기가 정말 쉽지 않소. 반 평생(半平生)힘과 재주를 다해 수고(愁苦)하면서 온몸으로 감당(堪當)한뒤 운(運)좋게 황제(皇帝)에게 인정(認定)받아야 말년(末年)에 잠시(暫時) 그 자리에 오를까 말까 하는 것 이요. 만약 학문(學文)이나 재능(才能)이 조금이라도 모자라는 점(點)이 있다면 그 자리에 이름조차 거론(擧論)되지 못할 것은 당연(當然)하오. 그러한 자(者)가 백천만(百千萬)억(億)이나 되는데 이는 곧 자신(自身)의 힘(自力)에만 의존(依存)하는 것 이라오.
학문(學文)과 재능(才能)은 교리(敎理)를 분명(分明)히 알아 그에 따라 수행(修行)함을 비유(比喩)하고 직위(職位) 가 재상(宰相)까지 승진(昇進)하는 것은 수행(修行)공부가 깊어져 미혹(迷惑)을 끊고 진리(眞理)를 증득(證得)함을 비유(比喩)하오. 또 단지(但只) 신하(臣下)로 일컬어질 뿐 끝내 군주(君主)가 될 수 없는 것은 비록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날지라도 아직 불도(佛道)를 이루지는 못함을 비유(比喩)하오.
(신하(臣下)는 결코 황제(皇帝)가 될 수 없소
황실(皇室)에 탁생하여 황태자(皇太子)로 태어나지 않는한 마찬가지 이치(理致)로 기타(其他) 법문(法門)을 수행(修行)하여도 부처가 될수 있지만 다만 정토염불법문(淨土念佛法門)과 서로 비교(比較)하면 너무 동떨어진 차이(差異)가 나게 되오. 독자들은 이 비유(比喩)가 함축(含蓄)하는 뜻을 잘 음미(吟味)하고 문자(文字)에 얽매이지 않기 바라오.
그런데 화엄경(華嚴經)의 맨 끝에 보면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菩薩)조차 오히려 십대원왕으로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往生)하길 회향(回向)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재상(宰相)이 황실(皇室)에 탁생하여 황태자(皇太子)로 태어나겠다는 비유(比喩)와 의미(意味)가 서로 통(通)한다고 볼 수 있소. 염불법문(念佛法門)이 화엄경(華嚴經)을 얻음으로써 마치 큰 바다가 온 강(江)물을 집어 삼키고 너른 허공(虛空) 이 삼라만상(森羅萬象)을 감싸고 있는 것 처럼 밝혀졌으니 정말로 위대(偉大)하지 않을 수 없소-------
그리고 학문(學文)이나 재능(才能)이 조금이라도 모자라 재상(宰相)이 되지 못하는 자(者)가 몹시 많다는 것은 미혹(迷惑)을 완전(完全)히 끊지 못하여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衆生)이 너무도 많음을 비유(比喩)하는것이 되겠소.
그런데 염불법문(念佛法門)은 설령(設令) 교리(敎理)를 잘 모르고 미혹(迷惑)과 업장(業障)을 다 끊지 못했다 고 할지라도 단지(但只) 믿음과 발원(發願)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만 지송(持誦)하여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구(求)하면 임종(臨終)때에 틀림없이 아미타(阿彌陀)부처님께서 친(親)히 맞이해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하게 되오.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면 부처님을 뵙고 법문(法門)을 들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은 뒤 바로그 생애(生涯)에 부처 후보(候補)의 지위(地位)에 오른다 오.
이는 부처님의 힘(佛力)이자 또 자신의 힘<자력(自力)>을 겸비(兼備)하는 것이오. 믿음과 발원(發願)으로 부처님 명호(名號)를 지송(持誦)하는 것은 자신(自身)의 힘으로 부처님을 감동(感動)시킴이요
48대서원(大誓願)으로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바라는 모든 중생(衆生)을 자비(慈悲)로이 맞이하시는 것은 부처님의 힘이 나에게 호응(呼應)<응집(凝集)>하심이라 오. 감동(感動)과 호응(呼應)<감응(感應)>의 통로(通路)가 서로 교차(交叉)하여 이와 같은 효험(效驗)을 얻게 되 오.
또 만약 교리(敎理)를 깊이 분명(分明)하게 알고 미혹(迷惑)을 끊어 진리(眞理)를 증득(證得)한 사람이 극락(極樂)에 왕생(往生)하게 되면 그 품위(品位)가 더욱 높고 불도(佛道)를 훨씬 빨리 원만(圓滿)하게 성취(成就)하게 되 오. 그래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포함(包含)한 화장세계(華藏世界)의 대중(大衆)이나 마명(馬鳴)과 용수(龍樹) 같은 역대(歷代) 위대(偉大)한 종사(宗師)와 조사(祖師)들이 한 결 같이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발원(發願)한 것 이오.
비유(比喩)하자면 황실(皇室)에 태어나면 한번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고귀(高貴)한 태자(太子)로 모든 신하(臣下)를 거느리게 되는 이치(理致)와 비슷하오이는 바로 황제(皇帝)의 힘이오. 태자(太子)가 자라면서 점차(漸次) 학문(學文)과 재능(才能)이 하나씩 갖추어지면 마침내 황제(皇帝)의 지위(地位)를 물려 받아 천하(天下)를 다스리게 되고 모든 신하(臣下)와 백성(百姓)이 그의 말을 따르게 될것이오. 이는 황제(皇帝)의 힘과 자신(自身)의 힘을 겸비(兼備)한 것 이라 오.
염불법문(念佛法門) 또한 이 와 같소. 미혹(迷惑)과 업장(業障)을 완전(完全)히 끊지 못 한채 부처님의 자비(慈悲) 가피력(加被力)으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하면서 바로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벗어남은 태자(太子)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신하(臣下)를 압도하는 것과 비슷하오.
그리고 왕생(往生)한뒤 미혹(迷惑)과 업장(業障)이 저절로 끊어져 부처 후보(候補)의 지위(地位)에 오름은 태자(太子)가 자라면서 학문(學文)과 재능(才能)을 갖추어 황제(皇帝) 지위(地位)를 물려 받음과 비슷하오. 또 이미 미혹(迷惑)과 업장(業障)을 끊은 이는 마명(馬鳴)이나 용수(龍樹)같은 역대조사(歷代祖師)와 같고 벌써 부처 후보(候補)의 지위(地位)에 오른 이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나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소 화장세계(華藏世界) 대중(大衆)이 모두 왕생(往生)을 발원(發願)한 것은 마치 예전(預前)에는 변방(邊方)의 시골에 처박혀 감히 황제(皇帝)자리를 물려받을 엄두도 못 내던 이들이 지금은 동궁(東宮)에 거처(居處)하면서 머지않아 등극(登極)할 차례(次例)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오.
우리 중생(衆生)들의 심성(心性)은 부처와 똑 같소. 단지(但只) 미혹(迷惑)되어 진리(眞理)를 등짐으로써 끊임없이 윤회(輪廻)하고 있을 따름이 오. 이를 불쌍히 여기신 여래(如來)부처님께서 자비(慈悲)로이 근기(根機)에 맞춰 설법(說法)하심으로써 모든 생명(生命)에게 본래(本來)의 집에 되돌아 갈 길을 열어 주셨소.
그 법문(法門)이 비록 많긴 하지만 크게 둘로 요약(要約)될수 있소.
바로 참선(參禪)과 정토염불(淨土念佛)이오
두 가지 모두 해탈(解脫)이 가장 쉽지만 참선(參禪)은 오직 자신(自身)의 힘만 의지(依支)하고 염불(念佛)은 부처님의 힘을 겸비(兼備)하기 때문에 양자(兩者)를 서로 비교(比較)하면 염불법문(念佛法門)이 시절(時節)인연(因緣)과 중생(衆生) 근기(根機)에 가장 잘 들어맞는 셈이오.
비유(比喩)하자면 사람이 강(江)이나 바다를 건널 때 직접(直接) 헤엄치지 않고 배에 올라타야만 안전(安全)하고 재빨리 저쪽 언덕<피안(彼岸)>에 도달(到達)하면서 몸과 마음 모두 가뿐 한 것과 같은 이치(理致)라오.
말법시대(末法時代)의 중생(衆生)들은 오직 크고 안전(安全)한 배<舟船>와 같은 염불법문(念佛法門)에 의지(依支)해야 제대로 수행(修行)할 수 있다 오. 그렇지 않고 한번 근기(根機)에 어긋난 법문(法門)에 들어서 시절(時節)인연(因緣)을 놓치면 애써 수고(愁苦)만 다 할뿐 도(道)를 이루기는 어려울 것 이오.
대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하고 진실(眞實)한 믿음과 서원(誓願)을 발(發)하여 평생(平生)토록 오직 --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명호(名號)만 굳게 지니고 염송(念誦)하기 바라오. 염송(念誦)이 지극(至極)해지면 모든 감정(感情)을 잊어버리고 이에 염송(念誦) 그 자체(自體)가 무념(無念)이 되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미묘(微妙)한 의리(義理)가 저절로 철저(徹底)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오.
그러다가 임종(臨終)에 이르면 아미타(阿彌陀)부처님과 보살(菩薩)님이 몸소 오시어 직접(直接) 염불(念佛)의 자(者) 영접(迎接)해 갈 것이니 곧장 최상(最上)의 품위(品位)에 올라 앉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證得)하게 되오.
오직 한 가지 비결(秘訣)이 있을 따름이니 정말 간절(懇切)히 일러 주겠소.
정성(精誠)을 다하고 공경(恭敬)을 다하면 미묘(微妙)하고 미묘(微妙)하며 또 미묘(微妙)하고 미묘(微妙)하리로다
(竭誠盡敬·妙妙妙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