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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삼회향놀이’

白道 박만주 2011. 2. 25. 12:04

 

 

 

 

                                               

  

 <특별기획> ‘삼회향놀이’

 

 2007년 11월 23일 (금) 김수현/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연구원  ggbn.co.kr 

 

불교전통의례인 영산재의 본의식이 끝나면 뒷풀이인 삼회향 놀이가 펼쳐진다. 현재는 영산재만 전승되고 삼회향놀이는 단절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학계에는 이 삼회향놀이가 대한불교 천태종에 전승돼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윤식 동국대 일본학연구소장을 비롯해 3명이 총 3회에 걸쳐 삼회향놀이의 연원과 형성, 삼회향 놀이의 절차와 의미, 그리고 삼회향 놀이가 천태종에 전승된 연유에 대해 심층적으로 연구, 사실관계를 밝힌다. 첫 번째는 일본학 연구소 김수현 박사가 맡았고, 두 번째는 심효섭 과천 길병원 학예연구사가, 세 번째는 홍윤식 소장이 집필한다.  편집자


삼회향놀이 홍윤식 박사 발굴 고증


어떠한 행사든지 끝마치고 난 뒤에는 그 수고를 치하하며 행사가 성취되었음을 표출하는 흥겨운 뒷풀이 한마당이 펼쳐진다. 작은 행사도 그러한데, 사찰의 불교의례에서도 당연히 있지 않았을까?


그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삼회향(三廻向)이다. 삼회향이란 영산재 등의 본 의식이 끝난 이후 뒷풀이 형식으로 베풀어지는, 가무를 겸한 연희(演戱)의 한 형식을 말한다.


그러나 현재에는 영산재만 전승되고 삼회향은 단절된 상태이기에 일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과연 삼회향은 언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전해지고 있었을까?



부여 영고, 고구려 동맹 등 연원


역사적으로 전승되어오는 재의식의 구조를 보면 본 의식과 뒷풀이 형식으로 나뉘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의식이 제의성(祭儀性)을 강조하고 있다면, 뒷풀이는 강조되었던 제의성이 예술성(藝術性)으로 전환되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제의성과 예술성의 상관구조는 제천의식이 끝난 후 음주가무를 밤낮으로 즐겼다고 하는 부여의 영고(迎鼓)나 고구려의 동맹(同盟), 옥저의 무천(舞天), 삼한의 5월제 10월제 등, 제천의식 후 연희가 뒤따랐다는 기록에서부터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문화전통은 불교가 수용되면서 삼회향이라는 형태로 전개 발전된 것으로 보이는데, 각종 불교행사가 성행하였던 고려시대는 그 직접적인 연원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삼회향은 연희의 형태를 지니면서 본 의식에 참여하였던 모든 대중이 의식에 사용하였던 각종 기물을 들고 나와 한판 놀음을 벌인다.


여기에는 춤과 노래, 탈춤은 말할 것도 없고 의식의 제수를 만들 때 사용하였던 칼과 도마, 꽃을 만들 때의 기구와 각종 동작들이 서로 어울려 백희(百戱)를 연출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백희(百戱) 잡기(雜伎) 등의 기록이 많이 보이는데, 오늘날의 삼회향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시대의 백희 잡기가 연등회나 팔관회 등의 불교의식의 본회가 끝난 이후 열렸던 뒷풀이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종교의식에 있어 뒷풀이 형식으로 벌어지는 각종 연희행사는 어떤 성격을 지니는 것일까? 미국의 인류학자 엘리야드는 이를 엑스터시에 들게 되는 것이라 하고 있다. 이를 불교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환희심을 불러일으킨 것에서 온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삼회향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천태사상 평등성 담겨


‘대승의장(大乘義章)'에서는 삼종회향(三種廻向)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중생회향은 자기가 지은 선근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회향하여 그 공덕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둘째 보리회향은 자기가 지은 온갖 선근공덕을 회향하여 보리의 과덕(果德)을 얻으려 추구하는 것이다.

 

셋째 실제회향은 자기가 닦은 선근공덕으로 무위적정(無爲寂靜)한 열반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별회향(別廻向), 총회향(總廻向), 보회향(普廻向)이라 한다. 영혼천도재 등의 모든 의식절차에 이들 삼회향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 천태종 사상에서 본다면 삼체원융(三諦圓融)의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 삼회향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삼회향은 불교의식을 통하여 기원과 수행의 성취가 이루어진 환희심을 함께 하면서 일종의 예술세계를 표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 의식 행사에서는 종교적 주체와 객체가 따로 구분되어 있고 의식을 집행하는 소임이 각각 법주(法主), 바라지 등 계층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의식이 성취되고 나면 이와 같은 구분과 계층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환희심으로 일치가 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런 경지를 불교의 모든 경전에서는 기악과 천녀의 춤으로 환희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삼회향은 모두가 평등하고 그 평등함은 균일성을 지닌 절대평등이 아니라 각자가 특성을 지닌 상대적 평등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평등성은 천태사상의 체계를 이루는 제법실상(諸法實相) 사상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법실상 사상이야말로 개개의 현상을 모두 평등한 실상으로 보는 평등주의이기 때문이다. 제법실상이란 법의 진실성이란 뜻을 지니고 구경(究竟)의 진리, 진여(眞如)·법성(法性)이라고도 한다.


천태에서는 제법실상을 설명하기 위해 천태종 성립의 이론이기도 한 삼제(空諦, 假諦, 中諦)를 설하고 있는데, 이는 삼제를 동시에 관하여 원융의 진리에 도달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천태의 제법실상 삼체원융의 원리가 원활하게 구현될 때 여기에는 각각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되는 문화가 꽃피울 수 있고, 다른 한편 이들 각자의 개성이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원융의 작용력을 발휘할 때 보다 심오하고 광대한 문화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시대는 천태종이 중추적 역할을 하면서 불교문화의 원활한 발전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삼회향은 그 표본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되면 천태종이 쇠퇴하고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되면서 삼제원융에 의한 문화적 기능은 약화되어 갔다. 하지만 그 기능은 전통적인 종단으로 흡수되어 오늘에 전승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회향 정신 담긴 연회


삼회향은 오늘날의 조사 결과 1960년대까지는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본 의식이 아닌 영산재의 뒷풀이로서의 성격으로 인해 문헌에 보이는 사료를 찾아내기는 힘든 실정이다.


그러나 유교주의를 표방한 조선사회에서도 불교재의식은 꾸준히 설행되어왔는데, 영산재의 형식으로 치루어진 조선초기 왕실의 기신재(忌晨齋)와 49재, ‘영산회'라고 명명되는 의식절차가 16세기부터 확인되고 있는 바에서 삼회향의 존재 또한 더불어 생각해 볼 수 있다.


7일 또는 열흘 동안이나 행하였다고 하는 영산재의 규모에서 알 수 있듯이, 영산재에 참여한 모든 대중들이 영산재와 함께 한 공덕과 환희심을 회향의 정신에 담아 연희로서 개최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삼회향의 기록이 문헌상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삼회향의 연희적 성격은 조선후기 서민문화의 발달 속에서 그 맥락이 이어져 오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흔히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가면극이 민중의 설움을 대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산대놀이 12과장 중 9과장이 스님과 관련된 불교적 내용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 황해도 탈놀이도 원칙적으로 4월 8일 연등의 전통을 그대로 지켰다는 점, 팔먹춤이나 법고춤도 불교의 춤사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은 서민놀이 문화가 불교의 연희적 성격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반증하는 예이다.


특히 인조(1623-1649)때 나례가 공식적인 국가 연례행사에서 폐지되고 산대도감 또한 해체되면서 이곳에 종사하던 예인들은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결국 국가적 행사가 민간으로 넘어오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된다.


즉 조선전기의 산대희나 사장 등에 의해 불교전문 집단에 의해 행해지던 것이 양란을 거치면서 이들 집단이 서민화, 세속화의 성격을 보이고 불교적인 성향보다는 여러 전문 놀이패의 문화로 서서히 변화되어 간 것이다.


이는 나아가 18-19세기의 시대조류와 부흥하여 탈춤이나 판소리와 같은 지방 문화의 발달과 서민문화의 정착으로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구체적인 기록은 현존하지 않으나, 삼회향은 서민들의 일체화합의 장으로서 서민놀이문화의 중추적 토대가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후기 대중불교의 한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회향의 역사적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삼회향의 예능적 기능은 1960년대까지 권수근 스님으로 유일하게 전승되어 오다가 이후 천태종 스님들께 전수하고자 하였던 점에서, 오늘날 그 전통이 천태종에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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