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鏡虛의 禪思想(경허의 선사상) ― 頓漸觀을 중심으로 ―

白道 박만주 2012. 5. 9. 08:39

 


5,6-2


鏡虛의 禪思想(경허의 선사상)
― 頓漸觀을 중심으로 ―


韓 重 光


*동국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佛敎의 生命思想에 대한 硏究, 般若空思想 硏究

- < 목 차 > -
Ⅰ.
緖 言(서언)
1). 닦음과 깨달음의 진리 체계 2). 論議의 焦點(논의의 초점)
Ⅱ. 佛敎思想史上의 頓漸論(불교사상사상의 돈점론)
1). 佛敎思想史의 本質的 意味(불교사상사의 본질적 의미)
2). 頓漸論(돈점론)의 전개 3). 현대 학자들의 頓漸(돈점)에 대한 견해
Ⅲ. 경허禪師의 頓漸觀(경허선사의 돈점관)
1). 鏡虛의 생애와 저술 2). 悟道歌에 나타난 頓漸觀(오도가에 나타난 돈점관)
3). 尋牛歌 尋牛頌 尋牛圖法門에 나타난 頓漸觀
(심우가 심우송 심우도법문에 나타난 돈점관)
4).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 社文에 나타난 頓漸觀
(결동수정혜동생두솔동성불과 사문에 나타난 돈점관)
Ⅳ. 結 語
1. 鏡虛의 頓漸觀과 韓國禪의 과제(경허의 돈점관과 한국선의 과제)
2. 닦음[修]과 깨달음[悟]· 몰록[頓]과, 점차[漸]에 대한 中道正見(중도정견)
&. & 參 考 文 獻

鏡 虛의 禪 思 想 ― 頓 漸 觀 을 중심으로 ―

Ⅰ. 緖 言

1-1. 닦음과 깨달음의 진리체계
불교는 生死(생사) 속에서 스스로의 닦음[修(수)]을 통해 生死(생사) 없는 영원한 진리를 깨달아 [悟(오)]한 중생도 제도한 바 없이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自覺(자각)· 覺他(각타)· 覺滿(각만)의 종교이다. 生死(生死)를 버리고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生死(생사) 속에서 生死(생사) 없는 이치를 깨달아 열반에 드는 것이며(生死卽涅槃;생사즉열반), 번뇌 망상을 버리고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참나를 찾는 이치이다(不斷煩惱而入涅槃;부단번뇌이입열반).


부처님께서는 새벽에 빛나는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불교는 부처님의 이 無上正覺(무상정각)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일체중생이 모두 성불하는 때에 불교의 구경의 목적이 달성된다고 할 수 있다. 3천여 년 지난 오늘도 별은 빛나건만, 우리는 왜 새벽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는가? 닦음과 깨달음의 여법한 안목은 무엇인가?


이러한 닦음과 깨달음에 인류의 끝없는 고뇌와 탐구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특히 닦음과 깨달음에 대한 몰록[頓(돈)]과 점차[漸(점)]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어 왔는데, 頓悟漸修(돈오점수)와 頓悟頓修(돈오돈수)가 주된 논란의 대상이었다.


1-2. 論議의 焦點(논의의 초점)


한국불교사상사 중에서 고려의 普照知訥(보조지눌)의 頓漸觀(돈점관)은 근래에 많은 연구논문이 발표되었고, 조선불교 선풍을 확립한 西山大師(서산대사) 淸虛休靜(청허휴정)의 頓漸觀(돈점관)도 종범스님에 의해서 조명된 바 있으며, 현대 性徹禪師(성철선사)의 頓漸觀(돈점관)도 역시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었다.


그러나 근대 선사의 頓漸觀(돈점관)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지 않다. 특히 부처님의 혜명을 다시 잇고 禪法(선법)을 크게 중흥시킨 경허선사의 頓漸觀(돈점관)을 고찰해 보는 것은 조선불교와 현대불교를 잇는 가교가 될 것이며, 한국불교사를 재조명하는 차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닐 것이고, 나아가 불교수행에 있어 요체인 닦음과 깨달음에 대한 佛祖(불조)의 바른 안목을 철견하고 이땅에 선풍을 진작하는 데 토대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먼저 불교사상사에 나타난 頓漸(돈점)에 관한 대표적인 說과 현대 학자들의 견해를 간략히 정리해 보고, 다음으로 근대 韓國禪(한국선)의 중흥조인 鏡虛禪師(경허선사)의 頓漸觀(돈점관)을 고찰해 보고, 나아가 韓國禪(한국선) 韓國佛敎(한국불교)가 지향해야 할 닦음과 깨달음에 대한 여법한 지표를 찾아보고자 한다.


Ⅱ. 佛敎思想史上의 頓漸論(불교사상사상의 돈점론)


2-1. 佛敎思想史의 本質的 意味(불교사상사의 본질적 의미)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 없이 설한 진리법은 오직 一心(일심)이고 一法(일법)이며 一味(일미)이고 一乘(일승)이다. 根本(근본)·原始佛敎(원시불교)에서 部派佛敎(부파불교)·大乘佛敎(대승불교)로 전개되고, 뿌리인 印度佛敎(인도불교)에서 줄기인 中國佛敎(중국불교)와 찬란한 꽃을 피운 韓國佛敎(한국불교)로 전개된 불교사상사의 흐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와 병에 따라서 설해진 것이다. 따라서 불교사상사는 오직 한 맛인 부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려는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史(사)를 여의고는 思想(사상)을 여실히 볼 수 없으며, 思想(사상)을 여의고는 史(사)를 여실히 볼 수가 없는 것이다. 史(사)와 思想(사상)을 中道的(중도적)으로 바라볼 때 부처님의 一味法(일미법)·一乘法(일승법)을 철견할 수가 있을 것이며, 佛敎(불교)와 歷史(역사)에 대한 여법한 혜안이야 말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역사를 선도할 반야용선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유구한 불교사상사 속에서 頓漸論(돈점론)을 고찰해 보는 것은 닦음과 깨달음에 대한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모색함은 물론이고, 이러한 모색을 통해 오늘날 韓國禪(한국선)·韓國佛敎(한국불교)의 모순을 반성하고 나아가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이 땅에 구현하는 걸음걸음이 될 것이다.


2-2. 頓漸論의 전개(돈점론의 전개)


불교는 절대자에 대한 맹목적 신앙을 통해 구원을 얻는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의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 종교이기 때문에 닦음과 깨달음에 관한 논의는 필연적이라 할 것이며, 따라서 전 불교사상사를 통하여 논의되어 온 것이다.


초기불교에 있어서도 四諦(사제)를 점차로 닦아 가야 하는가(漸現觀;점현관) 아니면 몰록 닦아가야 하는가(頓現觀;돈현관) 하는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중국불교사에서는 鳩摩羅什(구마라집;343∼413)의 제자인 竺道生(축도생;355∼434)이 頓悟說(돈오설)을 주장하자 동문인 慧觀(혜관)은 {漸悟論(점오론)}을, 또 曇無成(담무성)은 {明漸論(명점론)}을 지어서 道生(도생)의 頓悟說(돈오설)을 비난하는 논쟁이 전개되었고, 慧能(혜능)과 神秀(신수) 사이에 벌어진 南頓北漸(남돈북점)의 논쟁, 그리고 티베트의 삼예사원에서 인도 후기 중관파의 대가인 카말라실라(Kamalasila)와 중국의 摩訶衍(마하연)화상 사이의 頓悟(돈오)·漸悟(점오)논쟁이 있었다.


화엄종의
淸凉澄觀(738∼839)은『華嚴經行願品疏』에서 頓悟漸修·漸修頓悟·漸修漸悟·頓悟頓修(先悟後修, 先修後悟, 修悟一時)·本具一切佛法 一念具足十度萬行·非心非佛 無念無修·無漸無頓 無悟不悟·稱頓 階位의 立不立·『楞伽經』의 四漸四頓·華嚴의 頓漸說


청량징관(738∼839)은『화엄경행원품소』에서 돈오점수·점수돈오·점수점오·돈오돈수(선오후수, 선수후오, 수오일시)·본구일체불법 일념구족십도만행·비심비불 무념무수·무점무돈 무오불오·칭돈 계위의 입불립·『능가경』의 사점사돈·화엄의 돈점설 등 당시의 諸頓漸說(제돈점설)을 분류 소개하고 悟修頓漸(오수돈점)을 통한 깨달음을 解悟(해오)와 證悟(증오)에 배대하여 敎(교)와 禪(선)을 회통시키고 있다. 징관의 돈점설을 이어받은 圭峰宗密(규봉종밀;780∼841)은

참고>後漢 明帝 永平 10년(67)에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약 460년간 梁武帝(양무제) 大通元年(대통원년:527) 달마대사가 중국에 들어올 때 까지는 敎宗만이 성하였는데, 달마대사가 "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의 禪을 주창한 이래로 禪(선)·敎(교)가 서로 대립하여 왔다. 宗密(종밀:780~841) 당시에는 禪·敎의 대립과 논쟁이 극도에 달하자 종밀이 禪門玄義에 관한 要語句偈(요어구게)를 모아서 佛心인 禪과 佛語인 敎가 본래 一味法門(일미법문)임을 천명하여 敎禪一致思想(교선일치사상)을 주창하기 위하여 '禪源諸詮集(선원제전집)을 저술하게 된다. 이러한 敎禪一致思想은 종밀사상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더욱 더 분명해진다.


①唐代의 덕종 건중 원년에 果州 西充(서충)에서 출생하여 소년기(16세부터 17세까지)에 유학을 배움, ②18세부터 22세까지 불교경론을 공부함, ③23세부터 2년간 遂州義學院(수주의학원)에서 유학을 공부함, ④25세(27세)에 하택종의 제 4조인 道圓禪師(도원선사)를 만나 득도, ⑤출가 직후 '圓覺經'과의 만남, ⑥元和 3년(808) 荊南張禪師(형남장선사)와 洛陽神照禪師(낙양신조선사)를 친견, ⑦元和 5년(810)에 화엄종 4조인 청량징관의 저술 '화엄경소'와 '연의초'와의 만남, ⑧太和 7년(833) 이후 禪源諸詮集(선원제전집)을 저술. 요컨대 이러한 종밀교학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道圓·荊南張·洛陽神照禪師들로부터 禪을 요달하여 敎禪一致思想의 토대를 형성하렸고, '圓覺經'과의 만남에 의해 사상의 체계화를 이루었으며, 화엄교학과의 만남에 의해 그의 사상이 완성되었다고 생각된다.


『圓覺經大疏(원각경대소)』에서 悟修(오수)의 9대 頓漸(돈점)을 세우고,『圓覺經略疏(원각경약소)』 『圓覺經略疏초(원각경약소초)』에서는 8대 돈점으로 약술하고 있으며,『禪源諸詮集都序(선원제전집도서)』에서는 7대 돈점 漸修頓悟(점수돈오)·頓修漸悟(돈수점오)·漸修漸悟(점수점오)·頓悟漸修(돈오점수)·頓悟頓修(돈오돈수)·法無頓漸(법무돈점)·頓漸在機(돈점재기) 등과 華嚴(화엄) 逐機頓(축기돈)의 頓漸觀(돈점관)을 세우고, 이 중에서 頓悟漸修(돈오점수)가 여래청정선이요, 최상선이며 達磨(달마) 문하에 상전하는 선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종밀의 頓漸觀(돈점관)은 고려의 보조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普照禪師(보조선사;1158∼1210)는 고려 毅宗(의종) 12년에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나 熙宗(희종) 6년에 열반했는데, 속성은 鄭(정)씨이며 그 諱(휘)는 知訥(지눌)이고 自號(자호)는 牧牛子(목우자)이다.


규봉종밀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普照知訥(보조지눌)의 定慧雙修(정혜쌍수)·惺寂等持(성적등지)·圓頓信解(원돈신해)·頓悟漸修(돈오점수) 등의 선사상은 조선조 때 벽송지엄선사의 四集(사집)의 편집으로 계승되고,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승가의 수행지침으로 자리하고 있다.
보조선사가 일생 깨뜨림의 대상으로 삼았던 수행자들의 병적인 태도는 지혜 없는 어두운 선정[痴禪(치선)]과 선정없는 미친 지혜[狂慧(광혜)]였다. 보조선사는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치유하기 위해 정혜쌍수·성적등지를 제창하고 여실언교를 토대로 한 선지의 참구를 주장한다. 보조지눌의 頓漸觀(돈점관)은 {修心訣(수심결)}에 잘 나타나 있다.


몰록 깨달음이란 범부가 미혹할 때에는 사대로 몸을 삼고 망상으로 마음을 삼아 자성이 참 법신이며 자기의 신령한 앎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마음 밖에 부처를 찾아 물결 따라 어지럽게 달리다가, 홀연히 선지식이 들어가는 길 가르쳐 줌을 입어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신의 참모습을 보면, 이 성품의 땅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샘이 없는 지혜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으므로 몰록 깨달음이라 한다.


점차 닦음이란 비록 본 성품이 부처와 더불어 다름 없음을 깨달았지만, 비롯 없는 습기를 갑자기 없애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해 닦아서 점차로 익히는 공을 이루어 성인의 태를 기르는 것을 오래오래 하면 성인을 이루게 되므로 점차 닦음이라 한다.

普照禪師(보조선사)는 이처럼 頓悟漸修(돈오점수)를 주장하고 頓悟(돈오)한 후에도 漸修(점수)해야 되는 까닭을 다음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얼어붙은 연못이 모두 물인 줄 알았지만 따뜻한 기운을 받아야 녹으며, 범부가 부처인 줄을 깨쳤지만 법력으로써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흘러 적셔야만 비로소 물을 대고 씻는 공을 드러내며, 망상이 다하여 마음이 신령하게 통하여야 마땅히 신통광명의 작용을 나타낼 수 있다.
어린애가 처음 태어난 날에 모든 감관을 구족하고 있음이 다른 사람과 다름이 없으나, 그 힘이 아직 충실치 않아 세월이 경과해야 비로소 성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頓悟頓修(돈오돈수)에 대하여는 '頓悟頓修(돈오돈수) 是最上根機得入也(시최상근기득입야)'라고 하고 과거 전생에까지 비추어 볼 때 依悟而修(의오이수)한 것이므로 頓悟頓修(돈오돈수) 역시 頓悟漸修(돈오점수)라고 회통하고 있다.

대저 도에 들어가는 문이 많으나 요약해 말하자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다. 비록 돈오돈수는 최상근기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만약 과거를 미루어보면 이 다생에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 훈습해 와서 금생에 이르러 들은 즉시 깨달음을 발하여 일시에 몰록 마친 것이라. 실로 논의하자면 이것도 또한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는 근기이다.

요컨대 보조선사는 頓悟漸修(돈오점수)야말로 眞修(진수)의 法(법)이며 佛乘(불승)과 圓旨(원지)에 계합되며 萬行兼修(만행겸수)와 自他兼濟(자타겸제)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性徹禪師(성철선사;1912∼1993)가『禪門正路(선문정로)』를 저술하여 頓悟頓修(돈오돈수)를 올바른 禪修證(선수증)으로 역설하고, 頓悟漸修(돈오점수)를 주장하는 河澤(하택)·圭峰(규봉)·普照(보조)는 지해종사로서 조계적자가 아니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頓悟頓修(돈오돈수)의 임제선 계통이 한국 선종의 正脈(정맥)임을 주장하였다.


무릇 이 邪說(사설) 중의 일례는 돈오점수이다. 선문의 돈오점수 원조는 하택이며 규봉이 계승하고 보조가 역설한 바이다. 그러나 돈오점수의 大宗()인 보조도 돈오점수를 상술한 그의 절요 벽두에서 하택은 지해종사니 비조계적자라고 단언하였다. 이는 보조의 독단이 아니요 육조가 수기하고 총림이 공인한 바이다. 따라서 돈오점수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전부 知解宗徒(지해종도)이다.

성철선사는『선문정로』에서 '선문정전의 견성은 진여자성의 철견으로 아뢰야식의 미세한 망념까지도 끊어진 구경묘각을 말하며 이것이 돈오이다'라고 주장한다.

禪門(선문)은 見性(견성)이 근본이니 견성은 진여자성을 철견함이다. 자성은 그를 엄폐한 근본무명 즉 第八阿賴耶(제팔아뢰야)의 미세망념이 영절하지 않으면 철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문정전의 견성은 아뢰야의 미세가 멸진한 구경묘각 원증불과이며 無餘涅槃 大圓鏡智(무여열반 대원경지)이다.

또 頓悟(돈오)는 더 이상 깨달음을 향한 닦음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부처의 행을 닦아 나감으로써 끊임없이 부처로서 현현할 따름이라고 한다.

돈오견성하면 佛地(불지)이므로 悟後漸修(오후점수)는 필요없고 佛行(불행)을 수행한다 함이니 이것이 無心(무심)을 圓證 後(원증 후)의 無事行(무사행)이다.

따라서 오후보림이란 무애자재한 대해탈일 뿐이라고 한다.

禪門正傳(선문정전)의 悟後保任(오후보임)은 반드시 일념불생처에서 徹證無心(철증무심)함을 전제로 하였으니, 이는 돈수원증후로부터 시발한다. 그리하여 보림장양은 妄滅證眞(망멸증진)하여 病差藥除(병차약제)한 無念無生(무념무생)의 대해탈인 究竟地(구경지)를 말함이다. 그러니 參學高人(참학고인)은 오직 佛祖(불조)의 정전을 표준하고 여외의 이설은 추종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견성의 방법으로는 공안참구가 첩경이므로 견성을 이룰 때까지는 공안참구에만 전력해야 하며, 깨친 다음에 점수하여 완성에 이른다는 돈오점수는 교가의 수행방법으로 이단사설이며 그를 따르는 자는 모두 지해종도라고 한다.
松潭禪師(
송담선사;1927∼?)는 근대 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인 鏡虛(경허)-滿空(만공)-田岡(전강)의 법맥을 이은 살아 계신 선지식이다. 10여 년의 묵언수행과 용맹정진을 통해 1957년 田岡禪師(전강선사)에게 인가를 받고 현재 용화선원에서 조사선을 선양하고 있다. 1990년 10월 頓悟頓修(돈오돈수)와 頓悟漸修(돈오점수)에 관한 국제불교학술회의가 송광사에서 열렸을 때, 송담선사가 설한 頓漸(돈점)에 관한 법문을 통해 頓漸觀(돈점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불교의 목적이 확철대오해서 생사해탈하는 것이 목적이니 頓悟(돈오)란 말은 확철대오란 말인데 확철대오와 확철대오한 뒤에 점수해 나가는 것 오후보림한다고 보통 말들 합니다마는 확철대오했으면 그것으로써 더 이상 닦을 것이 없어야지 확철대오한 뒤에 점점 닦아 갈 것이 있다면 어찌 그것이 참다운 확철대오라 할 수가 있겠느냐? 닦아갈 것이 있다면 확철대오가 아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논란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참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참선을 해가지고 그 애를 쓰는데 결국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해서 그 고행정진을 한다면 참다운 깨달음을 얻어야지 바르지 못한 깨달음을 깨달음으로 착각을 해서야 되겠느냐? 이러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학자들이 모여서 국제학술대회를 갖는다는 것은 참 뜻깊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그러나 실제로 참선을 하지도 아니하면서 입으로만 무엇이 頓悟(돈오)고 무엇이 漸修(점수)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백날 모여서 토론을 해봤자 이것은 구두선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 중국의 천목산 高峰禪師(고봉선사)의 수법제자이신 中峰禪師(중봉선사)께서 '깨달은 뒤에 닦아 갈 것이 있느냐 없느냐?' 이 문제에 대해서 설하신 것이 있어서 몇 말씀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어' 마음에 털끝만큼이라도 과거로부터 쌓은 정습이 다하지 못한 바가 있다면 곧 이것은 깨달음이 원만치 못해서 그런 것이다. 혹 그 마음 깨달음이 원만치 못하다면 모름지기 이 원만치 못한 자체를 쓸어버리고 별립생애여 특별히 따로 생애를 세워서, 이 별립생애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데 깨닫기는 깨달았으나 이제 보림만 하면 자기도 부처님처럼 될 수가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습이 다하지 못하고 또 공안에 막힌 바가 있으면 이것은 자기의 깨달음이 철저하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체중현도리 공의 이치 그런 것을 그런 이치를 좀 보고서 그런 이치에 입각해서 모든 공안을 보면 막힌 바가 없고 다 알 것 같고 화엄경이고 법화경이고 다 읽어 보면 환하게 자기 나름대로 알고 그러니까 자기도 깨달았다고 이렇게 착각을 하고서 이제 나는 보림만 하면 된다, 이러한 병에 걸린 사람이 참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안에 막히거나 정습이 다하지 못했으면 자기의 깨달음이 원만하지 못하다 완전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결판을 내고 별립생애 다시 초학자와 같은 다시 백지 상태로 돌아가서 거기다가 생명을 걸고 용맹정진을 해서 기어코 확철대오를 하도록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중봉스님은 말씀을 했습니다
.


그렇다면 깨달은 뒤에는 닦을 것이 없느냐? 닦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자문을 하고서 답을 하시기를 미리 깨달아 보기도 전에 깨달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느니 없느니 미리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느냐? 통밑구멍이 풍 둘러빠지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경지가 올 때까지, 다시 말하자면 확철대오를 할 때까지 가행정진을 하면 깨친 뒤에 닦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아직 깨닫기도 전에 깨달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느니 없느니 頓悟(돈오)하고 漸修(점수)할 것이 있느니 없느니 이러한 것 가지고 논란을 하는 것은 정법을 비방해 가지고 무간업을 자초하는 것 밖에는 아니 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산승이 이 법상에 올라올 때마다 항상 말씀을 하기를 정말 조사의 깨달음과 같이 확철대오를 못했으면 조금 자기 나름대로 공의 이치 체중현도리 이런 걸 한 소견이 나면 그걸 가지고 누구든지 자기도 깨달았다 하는 그러한 견해에 집착을 해가지고 막행막식하고 그래 가지고 누구든지 자기와 비슷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만나면 쉽게 옳다고 인가를 해주고 이래 가지고 자기도 망하고 많은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불법까지 망하게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頓悟(돈오), 기왕 깨달으면 頓悟(돈오)에 頓修(돈수), 頓修(돈수)라는 것은 닦을 것이 없다는 얘기죠. 몰론 다 닦아버렸으니까. 확철대오함과 동시에 다 닦아 마쳐버렸어. 그러니까 그것이 頓修(돈수)인데 돈수란 닦을 것이 없어야 한다 그 말인데, 부처님이라든지 조사 가운데에는 頓悟頓修(돈오돈수)한 그러한 조사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다 전생 무량겁을 다 닦아서 금생에 몸만 바꿔 났을 뿐이지 이미 닦고 깨닫고 하는 것은 전생에 무량겁을 두고 다 이미 원만성취한 분들은 몸만 바꿔 났으니까 더 간단하게 언하에 대오해 버리고 닦을 것조차 없이 다 돈오돈수가 된 그런 경우도 있을 겁니다. -- 달마스님의『혈맥론』이나『관심론』에 보면 오직 깨닫는 것만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깨닫고 나야 바른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자연히 닦을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스스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


참고>松潭禪師(송담선사)가 1990년 10월에 한 법문내용이다.
참고>高峰原妙(고봉원묘:1238~1295)와 中峰明本(중봉명본:1243~1323)은 원대 임제종의 대표적 고승이다.

松潭禪師(송담선사)는 현대 한국불교의 큰 문제점으로, 체중현도리 공도리를 본 것을 구경각으로 착각하는, 스스로를 죽이고 남도 죽이며 불법을 망하게 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佛祖(불조)의 경계 즉 구경각이 아니면 다시 초발심으로 돌아가 용맹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頓悟頓修(돈오돈수)와 頓悟漸修(동오점수)를 회통해서 설하고 있다.

2-3. 현대 학자들의 頓漸에 대한 견해(현대 학자들의 돈점에 대한 견해)
性徹禪師(성철선사)가 1981년에『선문정로』를 발표한 이후의 돈점에 관한 여러 견해를 분류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돈오 점수

돈오 돈수

회 통

강건기

목정배

박성배

김호성

박상수

법 성

법 정

신규탁

인 환

심재열

정경규

종 범

한기두


Ⅲ. 鏡虛禪師의 頓漸觀(경허선사의 돈점관)

3-1. 鏡虛의 생애와 저술(경허의 생애와 저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3000여 년,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지 1600여 년의 불교사상사를 돌이켜보면, 불교가 그 근본정신을 망각하고 썩은 고목처럼 되어 갈 때마다 불보살의 화신이 출현하셔서 썩은 고목나무에 새로운 가지와 잎과 꽃이 피게 하여 佛祖(불조)의 혜명이 다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알 수 있다.


抑佛斥僧(억불척승)의 法難時代(법난시대)인 조선왕조가 멸망해 가고 불법의 혜명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던 근세에 法燈(법등)을 다시 밝히고 한국선 한국불교를 다시 중흥시킨 분이 바로 鏡虛禪師(경허선사)이다.


경허선사는 1849년 8월 24일 전주 子東里에서 부친 宋斗玉(송두옥)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릴 적 이름은 東旭(동욱), 法號(법호)는 鏡虛(경허), 法名(법명)은 惺牛(성우)이다. 일찍이 부친상을 당해 9세 때 경기도 광주 청계사에서 桂虛(계허)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14세 때 청계사에 머물렀던 朴處士(박처사)로부터 글을 배우며 재동으로 칭송이 자자하던 중 은사 계허스님이 환속하면서 추천한 계룡산 동학사에 있는 萬化講伯(만화강백)을 찾아가 일대시교와 유교경전과 노장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23세 때부터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서 크게 명망을 떨치다가, 31세 때 여름 옛 은사스님인 계허스님을 찾아뵈러 가던 도중 천안 인근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나 民家(민가)에 머물러 피하려 했으나 악성 호열자가 만연되어 시신이 널려 있는 참혹한 현장에서 생사의 절박함을 깨닫고 비로소 대발심하여, 동학사에 돌아와 학인들을 해산하며 강원을 철폐하고 靈雲禪師(영운선사)의 驢事未去 馬事到來(여사미거 마사도래;나귀의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 왔다)라는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던 중 11월 보름경 한 사미승이 전하는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에 활연대오하였다. 이때가 고종 16년 1879년 11월 보름경이었으니, 한국근대선이 開眼(개안)하는 순간이며 한국불교가 중흥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32세 때 봄에 연암산 天藏寺(천장사)로 옮겨 보림을 하여 33세 때 일대사를 마치고 주장자를 꺾어 던지며 悟道頌(오도송)을 읊었다.


문득 콧구멍 없다는 소리에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없는 들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이로부터 20여 년간 천장사 수덕사 정혜사를 비롯하여 湖西(호서)일대에 선풍을 크게 진작시키며 많은 기행과 일화를 남겼으며, 영호남의 해인사 범어사 송광사 일대에도 유력하면서 선원을 개설하고 납자를 제접하면서 선을 중흥시켰다. 56세 때 천장암에 돌아온 경허는 만공에게 傳法頌(전법송)으로 後來佛法(후래불법)을 부촉하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大方廣佛華嚴經(대방광불화엄경) 법회에서 법문하고 석왕사에서 오백나한 개분불사를 증명하고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앎은 적고 이름 높아 어지러운 이 세상에
알 수 없네 그 어디에 이 몸 감추랴
어촌인들 술집인들 어찌 그곳 없으랴만
숨긴 이름 더욱 새로워질까 저어할 뿐인 것을.


1905년 57세 이후 경허는 三水(삼수) 甲山(갑산) 長津(장진)을 떠돌다가 강계군의 金鐸(김탁)의 집에 머물며 선비 朴蘭洲(박란주 ) 또는 유발거사 朴進士(박진사)로 訓蒙生活(훈몽생활)을 하기도 하고, 관서와 관북 일대는 물론 만주지방을 비승비속 차림으로 떠돌며 인연 따라 중생을 제도하다가,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법랍 56세, 세수 64세로 입적하였다.

마음 달이 외로이 둥글어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경허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1938년에 中央禪院(중앙선원)이 발행한 {鏡虛集(경허집)}과 1970년에 다시 영인발행된 {鏡虛堂法語錄(경허당법어록)} · 1981년에 人物硏究所(인물연구소)가 발행한 {鏡虛法語(경허법어)} · 1990년에 極樂禪院(극락선원)에서 발행한 {鏡虛集(경허집)}이 있는데, 이에는 경허가 남긴 法語(법어)·序文(서문)·記文(기문)·書簡(서간)·行狀(행장)·影贊(영창)·詩(시)· 歌(가) 등이 실려 있다.


이러한 현존문헌으로는 경허선사가 직접 頓漸(돈점)에 대하여 설한 문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경허가 남긴 문헌과 행장 등에서 경허의 頓漸觀(돈점관)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3-2. 悟道歌에 나타난 頓漸觀(오도가에 나타난 돈점관)
1879년 11월 보름경 31세 때 경허는 靈雲禪師(영운선사)의 驢事未去(여사미거) 馬事到來(마사도래)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던 중 한 사미승이 전하는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라는 말에 生死(생사)가 본래 空(공)한 이치를 철견하고 자기의 본래면목을 확철대오했다. 1880년 봄 32세 때에 경허는 연암산 천장사로 옮겨 1년간 누더기 한 벌로 한번 앉아서 장부의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고, 1881년 6월 33세 때 悟道歌(오도가)를 읊고 傳燈淵源(전등연원)을 밝혔다.


悟道歌(오도가)는 경허의 설할래야 설할 수 없고 볼래야 볼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여지없이 드러낸 글이기 때문에 경허의 頓漸觀(돈점관)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라 생각된다. 그 주요 부분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없어. 봄산에 꽃은 활짝 피고 새가 노래하며, 가을 밤에 달이 밝고 바람은 맑기만 하다. 정녕 이러한 때에 無生(무생)의 一曲歌(일곡가)를 얼마나 불렀던가?


산빛은 문수의 눈이요, 물소리는 관음의 귀로다. 소부르고 말부름이 곧 보현이요, 장서방 이첨지가 본래 비로자나로다. - - 다행히 숙연이 있어 사람되고 장부되어 출가하고
득도하니 네 가지 얻기 어려운 가운데 하나도 모자람이 없도다.


어떤 사람이 희롱해 말하기를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함을 인해서 그 말 아래
나의 본래면목을 깨닫고 보니, 이름도 공하고 형상도 공하여 텅비고 고요한 가운데 항상 빛나더라. 이로부터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아 눈앞은 외로이 밝은 적광토요, 정수리 뒷모습은 금강의 세계로다. - - 사대 오음이 청정한 법신이요, - - 눈에 부딪치는 대로 본래 천진면목이니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 -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대법왕이 되었음이로다. 저 법에 모두 자재함이니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에 어찌 걸림이 있을까 보냐. - -
송으로 이르되,
홀연히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위의 오도가 중에서 ① 득도하니 네 가지 얻기 어려운 가운데 하나도 모자람이 없고 ② 나의 본래면목을 깨닫고 보니 사대 오음이 청정한 법신이며 ③ 대법왕이 되어서 ④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른다라는 구절에서 살펴보면, 경허의 깨침은 佛祖(불조)의 견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구경각이며,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頓悟頓修(돈오돈수)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허의 경계는 그의 선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무사가 오히려 일이거늘
사립문 밀치고 졸다가 보니
그윽한 새들은 나의 고독을 알고
창 앞에 와 어른거리네.


속세와 청산 어디가 옳은가
봄 성터 어디엔들 꽃 아니 피랴
누군가 성우의 일을 묻는다면
돌계집 마음속 겁외의 노래라 하리라.

위의 선시에서 ① 무사가 오히려 일이거늘 ② 누군가 성우의 일을 묻는다면 돌계집 마음속 겁외의 노래라 하리라라는 구절에서도 일대사 인연을 요달하고 장부의 일을 마친 無事道人 無位眞人(무사도인 무위진인)으로서의 경허의 취모검이 번쩍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悟道歌(오도가)나 여러 偈頌(게송)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경허는 頓悟頓修(돈오돈수)의 선풍을 사자후하고 있다.

3-3. 尋牛歌·尋牛頌·尋牛圖法門에 나타난 頓漸觀(심우가·심우송·심우도법문에 나타난 돈점관)
十牛圖(십우도)는 禪修行(선수행) 과정에서의 경지와 나아가는 길을 소와 목동의 관계에 비유하여 열 가지로 나누어 그림과 송으로써 간명하게 설명한 선서인데, 이에는 宋(송)의 淸居皓昇(청거호승)·大白山 普明(대백산 보명)·廓庵師遠(곽암사원) 등의 십우도가 있으며, 圓悟克勤(원오극근)의 문하인 雪庭元淨(설정원정)의 四牛圖(사우도) 自得慧暉禪師(자득혜휘선사)의 六牛圖(육우도)·佛國惟白禪師(불국유백선사)의 八牛圖(팔우도) 등이 있다.


이러한 십우도는 선수행에 있어서 닦음과 깨침의 과정을 설한 것이기 때문에 경허의 尋牛歌(심우가)·尋牛頌(심우송)·尋牛圖法門(심우도법문)에서 頓漸觀(돈점관)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尋牛歌(심우가)·尋牛頌(심우송)·尋牛圖法門(심우도법문)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尋牛歌(심우가)
① 尋牛(심우) ② 見跡(견적) ③ 見牛(견우) ④ 得牛(득우) ⑤ 牧牛(목우) ⑥ 騎牛歸家(기우귀가) ⑦ 忘牛存人(망우존인) ⑧ 人牛俱亡(인우구망) ⑨ 返本還源(반본환원) ⑩ 垂手入廛(수수입전)


2) 尋牛頌(심우송)
① 尋牛(심우) ② 見跡(견적) ③ 露現全體(노현전체) ④ 調伏保任(조복보임) ⑤ 任運歸家(임운귀가) ⑥ 忘牛存人(망우존인) ⑦人牛俱忘(인우구망) ⑧ 異類中事(이류중사)


3) 尋牛圖法門(심우도법문)
① 尋牛(심우) ② 見跡(견적) ③ 見牛(견우) ④ 得牛(득우) ⑤ 牧牛(목우) ⑥ 騎牛歸家(기우귀가)

경허의 尋牛歌(심우가)·尋牛頌(심우송)·尋牛圖法門(심우도법문)은 첫째 尋牛頌(심우송)에서 ④ 得牛(득우)와 ⑨ 返本還源(반본환원)이 생략되어 8단계로 설해져 있는 점, ③ 見牛(견우)를 露現全體(노현전체)로 ④ 牧牛(목우)를 調伏保任(조복보임)으로 ⑤ 騎牛歸家(기우귀가)를 任運歸家(임운귀가)로 ⑩ 垂手入廛(수수입전)을 異類中事(이류중사)로 하고 있는 점, 둘째, 尋牛圖法門(심우도법문)에서 ⑥ 騎牛歸家(기우귀가)까지만 설하고 있는 점에서 그 특징이 발견된다.
경허의 尋牛歌(심우가)·尋牛頌(심우송)·尋牛圖法門(심우도법문)에서 ③ 見牛(견우)·露現全體(노현전체) ④ 得牛(득우)가 진여불성을 철견한 頓悟(돈오)이고, ⑤ 牧牛(목우)·調伏保任(조복보임) 이후의 단계는 漸修(점수)로 볼 수 있다.
특히 경허는 ⑤ 牧牛(목우)·調伏保任(조복보임) 단계에서 漸修(점수)를 분명히 설하고 있다.


- - 얻기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렵도다. 또한 조금 얻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모름지기 선지식을 찾아가 많은 단련이 있어야 비로소 얻으리라.

풀밭에 놓아 먹인 지 얼마였던가
실로 고삐를 놓기 어려웠네
다행히 오늘에 노력함이 있어
강산을 내가 거두어 다하리.


경허는「중 노릇하는 법」에서도 頓悟(돈오)한 후에 漸修(점수)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 - 내 마음을 깨달은 후에 항상 그 마음을 보전하여 깨끗이 하고 고요히 하여 세상에 물들지 말고 닦아 가면 한없는 좋은 일이 하도 많으니, 부디 깊이 믿으며 죽을 적에라도 아프지 않고 앓지도 않고 마음대로 극락세계에도 가고 가고 싶은 데로 가나니라. 부처님 말씀하시기를 남자나 여인이나 노소를 물론하고 이 법문을 믿고 공부하면 모두 부처가 되리라 하시니 어찌 사람을 속이리오.…

경허 당시 지리산 화엄사에서 대강사로 당대를 주름잡던 陳震應(진진응)스님이 하루는 경허선사에게 좋은 안주와 곡차를 올리면서 "스님께서 왜 이런 것을 좋아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경허선사가 즉석에서 한 答頌(답송)에서도 頓悟漸修(돈오점수)를 설하고 있다.

돈오하여 이치를 깨침은 부처님과 동일하나
다생으로 익혀 온 습기는 오히려 생생하구나.


그리고 경허의 偈頌(게송) 중에는 漸修頓悟(점수돈오)에 관한 것도 있다. 그렇다면 경허의 頓漸觀(돈점관)은 서로 모순되는가? 그렇지 않다. 경허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중생의 병에 따라서, 중생의 집착하는 바에 따라서 頓悟頓修(돈오돈수) 頓悟漸修(돈오점수) 등 여러 頓漸(돈점)에 관한 이치를 원융무애하게 설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4.「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결社文」에 나타난 頓漸觀
「결동수정혜동생두솔동성불과결사문」에 나타난 돈점관
경허는「함께 정혜를 닦고 함께 도솔천에 나며 함께 성불하기 위한 결사문」에서는 頓悟頓修(돈오돈수)와 頓悟漸修(돈오점수)를 회통하고 있다.

- - 수승한 근기는 한번 뛰어 들어가서 요긴한 법을 잡아 결단하고 나라를 안정케 함이 어찌 그 다른 데 있겠느냐? 그러나 하근기는 단번에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옛사람이 이르되 '죽순이 마침내 대가 되지만 당장에 뗏목을 만들려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하근기는 오래도록 익혀야 필경에 증득하게 될 것이다. - -

이상에서 경허의 법어집을 통해 경허의 頓漸觀(돈점관)을 고찰하였다. 경허는 頓悟頓修(돈오돈수)의 활구참선에 입각해 있지만, 때와 근기에 따라서 頓悟漸修(돈오점수)·漸修頓悟(점수돈오)도 설하여 회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Ⅳ. 結 語(결 어)

4-1. 鏡虛의 頓漸觀과 韓國禪의 과제(경허의 돈점관과 한국선의 과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대 한국선의 중흥조인 경허선사는 頓悟頓修(돈오돈수)·頓悟漸修(돈오점수)·漸修頓悟(점수돈오) 등 여러 頓漸觀(돈점관)을 회통하여 시간과 공간 범부중생의 병과 집착에 따라서 원융무애한 頓漸觀(돈점관)을 설하고 있다. 이러한 경허선사의 頓漸觀은 닦음과 깨달음에 대한 佛陀(불타)의 근본정신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현재 한국선의 시급한 과제중의 하나인 禪思想(선사상)의 體系化(체계화) 및 修行觀(수행관)의 定立에 혜안을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문명사적·교단사적 전환의 세기인 오늘날 선풍을 진작하여 올바른 수행가풍을 정립하고 여법한 선수행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4-2. 닦음[修(수)]과 깨달음[悟(오)]·몰록[頓(돈)]과 점차[漸(점)]에 대한 中道正(중도정견)

부처님께서 별을 보시고 깨달으신 진리법은 오직 一法(일법)이고 一味(일미)이며 一心(일심)이고 一乘(일승)이자 最上乘法(최상승법)이다. 부처님께서 이 한 법을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설하셨지만 중생은 각자 근기에 따라서 달리 받아들인다.

무엇을 돈점이라 하는가? 법에는 돈점이 없으나 사람에게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므로 돈점을 말하게 된다.

佛法(불법)은 무색투명한 摩尼珠(마니주)와 같아서 근기에 따라서 시대와 대상에 따라서 중생의 병에 따라서 설해지는 것이다. 有(유)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無(무)라 설하게 되고, 無(무)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有를 설하게 되고, 有(유)와 無(무)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非有(비유)와 非無(비무)를 설할 수 밖에 없고, 非有(비유)와 非無(비무)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是有(시유)와 是無(시무)를 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경허선사는 藤菴和尙(등암화상)에게 다음과 같은 법어를 설하였다.


- - 또 옛사람이 이르기를 '한 법도 옳다고 결정하지 말며, 한 법도 그르다고 결정치 말라'하였으니, 망령됨을 물리치고 참됨을 도모하며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함이 아울러 이 밧줄로 스스로를 묶는 것이다. 만일 대도를 깨달은 사람은 한 법도 옳은 것을 보지 않나니 어찌 한 법이 그른 것이 있으리오. - -

조사어록에도 頓悟漸修(돈오점수)라는 표현도 나오고 頓悟頓修(돈오돈수)라는 표현도 나오며, 경전에도 때로는 修(수)라 하고 때로는 不修(불수))라 하며, 때로는 修證不無(수증불무)라 하고 때로는 不修不證(불수불증)이라 한다. 이 법의 진리를 확연히 깨달은 사람은 때에 따라서 자유자재하게 설하게 될 것이요 어떻게 법을 설하더라도 알아들을줄 아는 사람은 그 말에 떨어지지않고 有(유)나 無(무) 그 중간에도 떨어지지않고 설할래야 설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계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相(상)을 통해서 相(상)없는 도리에 눈뜨게 하고 말을 통해서 말없는 경지에 계합하게 하는 이것이 불법인 것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근기에 따라서 깨달아야 한다고 설할 수도 있고, 깨친 뒤에 닦아야 한다고 설할 수도 있으며, 깨친 뒤에 닦을 것이 없다고 설할 수도 있고, 깨닫기 전에 이미 닦을 것도 깨달을 것도 없다고 설할 수도 있다. 부처님의 진리법은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애자재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깨친 부처님과 역대조사의 견지에서는 깨달아야 한다고 설해도 맞고, 깨친 뒤에 닦아야 한다고 설해도 맞으며, 깨닫기 전에 이미 깨달을 것도 닦을 것도 없다고 해도 맞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頓悟漸修(돈오점수)는 깨달음의 신비에 안주하거나 깨달음을 실체화하는 병을 깨뜨리기 위한 가르침이며, 頓悟頓修(돈오돈수)는 한 법도 밖으로 구할 것이 없음을 가르친 것이다라고 하는 법성스님의 견해는 돈점논쟁에 대한 혜안을 제시해주고 있다 할 것이다.


- - 돈점논쟁에 관한 필자의 기본 입장은 돈오점수 돈오돈수라는 개념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객관적인 깨달음의 영역이 따로 따로 실재한다는 입장이 아니고, 모두 깨달음을 구현하는 실천의 길에서 중생의 병통과 치우침에 따라 설정한 언교(言敎)라는 관점이다. 돈오점수 돈오돈수를 중생이 깨달음에 들도록 하기 위해 설정된 언교로서 볼 때만, 돈오점수란 깨달음이 깨달음 자체로서 고정화될 수 없음을 보이기 위한 가르침이며, 돈오돈수라는 최고의 지표는 돈오점수 밖에 있는 새로운 경지가 아니라 닦을 것도 없고 닦지 않을 것도 없는 중도적 실천행을 보인 것인줄 알게 된다. - -

불교는 근본적으로 본질과 현상 현상과 현상을 中道的(중도적)으로 인식하고 中道正見(중도정견)에 입각해서 실천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頓漸(돈점)에 대한 문제도 中道的(중도적)으로 인식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닦음 [修(수)]을 여의고는 깨달음 [悟(오)]이 있을 수 없고 바른 깨달음 [正覺(정각)]을 여의고는 진정한 닦음 [眞修(진수)]이 있을 수 없으므로, 修(수)와 悟(오) · 正覺(정각)과 眞修(진수)는 不一不二(불일불이)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몰록[頓(돈)〕을 여의고는 점차 [漸(점)]가 있을 수 없고 점차 닦음[漸修(점수)]을 여의고는 몰록 깨달음 [頓悟(돈오)]이 있을 수 없으므로, 頓(돈)과 漸(점)·漸修(점수)와 頓悟(돈오)는 相卽相入(상즉상입)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닦음과 깨달음 몰록과 점차 역사와 사상의 양변을 여의지도 않고 양변에 떨어지지도 아니하면서 中道的(중도적)으로 인식할 때 頓漸(돈점)에 대한 佛陀(불타)의 근본정신에 계합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本覺道理(본각도리)에 입각해서 보면 본래 迷(미)한 바가 없기 때문에 닦을 것도 깨달을 것도 없지만, 始覺道理(시각도리)에 입각해서 보면 우리 깨닫지 못한 중생의 입장에서는 몸과 목숨을 바쳐서 닦아야 하고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며, 일체 중생이 바로 佛祖(불조)와 조금도 차별이 없는 부처님이지만 깨닫지 못한 부처님이기 때문에 닦음이 없이 닦아야 하는 것이다.

-< 參 考 文 獻 >-
原典
{禪源諸詮集都序}(大正藏 48)
{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 48)
{傳燈錄}(大正藏 48)
{圓覺經大疏}(卍續藏經 1)
{修心訣}(韓佛全 4)
著書 및 單行本
姜健基 金浩星 編,『깨달음,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 서울, 民族社, 1992.
鏡虛惺牛禪師法語集刊行會 編,『鏡虛法語』, 서울, 人物硏究所, 1981.
大東佛敎硏究院 編,『鏡虛集』, 서울, 寶蓮閣, 1970.
釋明正 譯,『鏡虛集』, 極樂禪院, 1990.
性徹,『禪門正路』, 서울, 藏經閣, 1987.
鄭性本,『中國禪宗의 成立史硏究』, 서울, 民族社, 1991.
,『禪의 歷史와 禪思想』, 서울, 三圓社, 1994.
韓基斗,『韓國禪思想硏究』, 서울, 一志社, 1991.
鎌田茂雄,『禪の語錄 9』, 東京, 筑摩書房, 1971.
論文 및 定期刊行物
목정배,「禪門正路의 頓悟觀」,『修多羅』, 2532, 3.
朴商洙,「頓悟頓修의 起源과 主張者 및 佛敎歷史의 評價」,『白蓮佛敎論集』, 1994, 4.
尹元澈,「『禪門正路』의 修證論」,『白蓮佛敎論集』, 1994, 4.
심재룡,「頓漸論으로 본 보조선의 위치」,『譜照思想』, 1988, 2.
鄭景奎,「普照 圓頓門의 性澈禪師의 圓頓批判」,『白蓮佛敎論集』, 1994, 4.
鄭性本,「初期 中國禪宗史에 있어서 頓漸의 問題」,『普照思想』, 1990, 4.
Robert buswell,「Chiul's Ambivalent Critique of Radical subitism」,『普照思想』, 1988, 2.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http://blog.daum.net/mjpark39/16404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