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이무소득고" 제4장 공능분(功能分)

白道 박만주 2013. 4. 27. 10:11

 
 
"이무소득고"
 
제4장 공능분(功能分)
 
공능분(功能分)은 수행의 공덕으로 진리의 세계를 현정(顯正)하게 되는 부분이다.
 

앞에서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을 해석할 때 「지혜도 없고 열반을 성취할 것도 없고 성취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중도의 완성 단계에 왔음을 강의하였다.
 
지혜는 모든 상대적인 관계 즉, 지혜와 무지, 유와 무(有無), 상과 단(常斷)을 일단 부정하여(雙遮) 공(空)으로 가고 공(空)을 다시 부정하여(不空) 재통합하면 서로 비추어서(雙照), 자발광이 드러난다.
이 자발광이 이 언덕에서 저 열반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반야」를 묘사한 것이고, 이 「반야를」「마하반야바라밀다」라고 한다고 「제 1장」에서 설명하였다.
 
지혜가 이와 같은 경지에 오르면 「열반을 얻을 것도 얻지 못할 것도 없다」라고 할 것이며 「지혜도 있다 없다」할 것이 없는 즉, 집착이 끊어진 계위(階位)이라고 본다.
 
본 강의는 위와 같은 수행으로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하였을 때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이익이 얻어짐을 설명한다.
 
전환문구(轉換文句):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셋째, 능관이익(能觀利益):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였다. 그러하니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지고 일체의 뒤바뀐 몽상을 아주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갔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없이 높고 바르고 두루한 큰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1.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얻을 바가 없으므로(대전환 大轉換)
 
지금 「얻을 바가 없으므로」라고 한 이 부분은 앞을 받아 뒤를 일으키는 부분이다.
「얻을 바가 없으므로」란 앞의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 지혜도 없고 지혜가 다함도 없으니 절대 자유의 지혜요 얻을 것이 없고 얻지 못할 것도 없는 절대 자유의 수행의 계위(階位)에 옳았음을 받아서 뒤의 「결과로서 얻을 바」를 일으키는 것이다. 또 다르게 해석할 수 도 있다.
 
위에서 배운바와 같은 수행을 완성할 단계가 되어서 알고 보니 원래 나에게 있었던 것이므로 새롭게 얻은 것이 아니므로 또 더「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안, 덕(德)으로 얻어지는 소득(無所得之所得)은 아래와 같다는 의미이다. 수행에서 그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이익으로 대전환 (大轉換)하는 뜻으로 「이무소득고 以無所得故」라고 하였다고 본다.
 
「무소득(無所得」에 관하여 <열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술(述)하고 있다.
 
소득이 없는 것이야말로 참 지혜이니 보살이 이 지혜를 얻으므로 무소득이라 이름하는데, 이 무소득이 대열반이다. 보살이 무소득 가운데 편안히 머물러 서 일체 제법의 성품이나 모양을 보지 않기 때문에 무소득이라 이름하여, 또한 무소득은 대승보살이 제법에 머물지 않은 것이라 이름하므로 대승이라 한다.

 


(無所得者 卽名爲慧 菩薩得是慧故 名無所得 叉無所得者 名大涅槃 菩薩安住大涅槃中 不見一切諸法性相 故名無所得 叉無所得者 名爲大乘菩薩不住諸法)
 
 
아무리 소득이 없는 소득(無所得之所得) 즉 지혜로 얻어지는 열반을 설명하여도 그것은 설명이고 이론일 따름이지 「지혜」또는 「열반」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을 끊고(絶思量) 말을 떠나(離言說) 다르게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많이 있다고 설명하고 맛이 있고 영양가가 높다고 설명하여도 그것은 설명에 불과한 것이다.
 
내 밥을 내가 먹기 전에는 아무도 내배를 부르게 하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이외는 아무도 없다. 그와 같이 「나의 지혜」「나 의 열반」은 「나」이외는 아무도 대신하여 줄 수 없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참회기도, 정근, 참선, 법문 등을 통하여 스스로 정진하지 않을 수 없다.
 

무소득이 소득(無所得之所得)임을 나타내는 게송하나를 소개한다.
대주혜해(大珠慧海)선사가 처음에 마조(馬祖)를 뵈니, 마조께서 물어셨다.
"어디서 오는가?"
대주, 대답하시되, "월주 대운사에서 옵니다.."
 

"그대는 여기까지 무엇 하러 왔는가?"
"저는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대주가 간청을 하자 조사께서 곧 말씀을 하시었다.
 

"나는 그대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네. 나에게 한 물건도 없고, 또 내한테 무슨 불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왜 그대는 자기 집의 보배는 돌보지 않고 멀리 떠나 방황하는가?"
깜짝 놀란 대주는 물었다.
 

"저의 보배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곧 조사께서는 간절히 말씀하시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게 질문하는 바로 그 사람이 보배이지, 그 보배 안에 일체 모자람이 없이 다 갖추어 있네. 자네는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며 그 원천은 마르지 않네. 구태여 밖에서 찾을 필요가 어디 있겠나?"

 
말끝에 본심을 스스로 아는 것이지, 깨달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님을 대주스님께서는 아시고 기뻐 뛰면서 절하고 물러났다.
 

2.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보살의 세계)
 

菩提薩唾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
《보리살타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니》
 
 
1) 보리살타(菩提薩唾)
 
제 1장의 14쪽에서 설명하였다. 요약하면
보리(菩提)(bodhi)는 깨달음(覺)이다. 이 깨달음을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치신 바에 따라 수행 정진한다. 그 결과로서 얻어 지는 것은 반야이고, 반야는 초월적 지혜이다. 내가 초월적 지혜를 얻는 것이므로 이것을 자리(自利)라고 한다.
 
살타(薩唾)(sattva)는 중생(衆生)이다. 중생이란 생명 있는 유정(有情)이다. 나도 중생중에 하나이지만 발심하여 내가 하화중생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도록 노력하라는 뜻이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은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 구제한다는 뜻으로 보리(菩提)를 얻은 내가 중생에게 행하는 자비바라밀이다.
중생을 위하는 것이므로 이타(利他)라고 한다.
 
이 보리살타(菩提薩唾)는 이미 저 열반의 언덕에 뛰어 넘을 수 있는 반야를 구족하고 자비행을 하는 보살이다.

 
『팔천송반야경』「초품」은 보리살타를 이렇게 말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디사트바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보디사트바는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법이 걸림 없음을 배우고
또한 실속있게 온갖 법을 알면 이것을 보디사트바의 뜻이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만약 온갖 법의 참모습을 아는 것이 보디사트바의 뜻이라면
다시 무슨 뜻으로 마하사트바(maha-sattva)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대중의 윗자리가 되어 대중에게 헌신하면 마하사트바라고 한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저도 또한 기꺼이 마하사트바라고 하는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말하고 싶으면 곧 기꺼이 말하라.'사리불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디사트바는 나라는 생각(我見), 너라는 생각(人見), 중생이라는 생각(衆生見), 목숨이 있다는 생각(壽者見)을 끊고, 있다는 생각(有見), 없다는 생각(無見), 아주 없어진다는 생각(斷見),
늘 항상한다는 생각(常見)을 끊고 대중을 위해 진리를 설해주므로 그것을 마하사트바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중을 위해 설법할 때도 마음 가운데 집착하는 바가 없으므로 마하사트바라고 합니다.'
 
『팔천송반야경』에 의하면 보디사트바, 마하사트바는 바로 일체법의 참모습을 바로 보는 인식과 대중을 해탈의 길에 이끌어 들이는 설법행의 실천에 의해 마하사트바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 뜻은 다시『팔천송반야경』에서 보디사트바를 내는 모태(母胎)와 산실(産室)이 육바라밀행이라는 말로 재구성된다.
 
아난다여, 보디사트바가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려면 마땅히 여섯 가지 바라밀행을 잘 배워야 한다.
왜 그런가. 아난다여, 여러 가지 바라밀행이 바로 보디사트바의 어머니이니 육바라밀행이 모든 붓다를 낸다. 만약 보디사트바가 이 여섯 가지 바라밀행을 배우게 되면 반드시 위없는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2) 의 반야바라밀다 고(依般若波羅密多故)
「반야바라밀다」에 관한 설명은 제 1장의 6쪽에서 설명하였다. 요약하면:
「반야」란 생명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어 생명체의 안과 밖을 있는 그대로 보는 안목이다.
「바라밀다」란 저 언덕에 도달한다.
 
즉, 괴로운 이 삶에서 벗어나 열반과 같은 즐거운 나의 인생으로 뛰어 넘기 위한 생사를 건 정진이다.
「의반야바라밀다고」는 <불안하고 괴로운 이 환상의 세계를 뛰어 넘어 열반과 같이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광대 무변하고 무애한 초월적 예지를 통하기 때문에>라고 뜻풀이 된다.
 

「보리살타 의 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菩提薩唾 依 般若波羅密多故 心無 」는
<불안하고 괴로운 이 환상의 세계를 뛰어 넘어 열반과 같이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광대 무변하고 무애한 초월적 예지를 갖추신 보리살타가 반야를 실천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체 걸림이나 장애가 없이 본래의 진면목을 나타나게 한다>라고 뜻풀이 된다.
 
「의반야바라밀다」의 「의(依)」는 지팡이에 「의지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수행한다」라는 의미로 보디사트바와 반야바라밀다를 서로 규정한다.
전체적으로 「보살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3.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無 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결과, 소득, 효용)
일체의 걸림이 없으므로
마음의 두려움이 없으며
마침내 뒤바뀐 꿈같은 세상을 멀리 여의어서
문득, 더 나아갈 수 없는 열반에 든다.
 
 

1) 심무가애(心無 )
 
첫 째, 마음에 걸림이 없음이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行成]지는
소득 산스크리트어(語)로는 아시타야라나(acitt varana)이다.

 
「아 a」는 부정(否定)하는, 없는, 무(無)의 뜻이다.
「시타 citta」는 생각, 사념, 마음, 심(心)이다.
「야라나 avarana」는 덮개, 장애, 구속 등을 의미한다.
 

한역의 「가掛 혹은 가 」는 건다, 거리끼다의 뜻이다.
「애碍 혹은 애 」는 지장, 장애, 방해한다는 의미이다.
「가애( 碍 혹은 掛 )」는 걸림이 있어 지장이 있다는 뜻이다.
「가애( 碍) 걸림이 있어 지장이 있다」라는 것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이장(二障)으로 말미암아 걸림과 지장이 있다는 의미이다.
 
번뇌장의 번(煩)은 몸이 어지럽고 번다함을 말하고, 뇌(惱)는 마음이 산란함을 말하는데 지혜로운 마음을 덮어 버리고 장애 하는 기능을 한다고 해서 장애(障碍)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이 장애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번뇌로, 번뇌의 작용은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의 미망(迷妄)으로 인하여 근본번뇌로 작용한다.
 
소지장(所知障)이라 하면 아는 것이 우리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구속함이니, 바로 지적(知的)오염을 의미한다. 사상, 주의, 신앙, 철학, 종교, 학문이 우리의 본래면목을 가리는 것을 가리킨다.
잘못 습이 들었거나 알고 있는 불교가 오히려 장애가 되는 수가 있다. 이러한 것이 소지장에 해당한다.
 
「심무가애(心無 )」는 유무(有無), 생사(生死), 선악(善惡) 취사(取捨) 등 대립되는 관념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변견(邊見)에서 오는 번뇌이므로 망념(妄念)이라고 규정한다.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는 삶의 구속으로 접어들어 무명을 부르며 생, 노, 병, 사, 우, 비, 고, 뇌(生老病死憂悲苦惱)를 부르고 인간성의 상실로 가는 순서로 된다. 이와 같은 고뇌는 나의 지혜를 밖에서 덮어씌워서 생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착각이 자기를 구속하고 덮는 것이다.
 
이 「마음」, 이 「나」는 밖에서 오는 무엇으로도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밖이라 지칭되는 것은 우리의 관념이지 밖에는 아예 한 물건도 올 것이 없으며 우리 자신, 이 「나」가 밖이고 곧 안이어서 실제 밖이 없다. 그래서 내외명철(內外明徹) 상적상조(常寂常照)하다고 표현한다.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으면 육체적인 병고(病苦)의 원인과 외력의 침해를 받을 원인이 소멸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병도 육체적인 병도 없는 자재로운 몸과 마음이 된다.

 
실로 우리는 이 자리에 그냥 있지만, 자기를 상실하고, 구속하고 번민하고 할뿐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속박하고 우리의 본래면목을 가리는데, 이 착각적인 현상에서 「참나」를 찾음이 견성(見性)인 것이다. 상대되는 두 대립을 쌍차(雙遮)후 실상본지(實相本地)에서 살펴보면 모두가 공(空)하여 무소득의 소득을 맛보게 되고 마음이 비사유(非思惟)의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무수히 일어나는 망념이 저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졌을 뿐, 한치도 이 진면목은 떠나 있지 않았고 또한 장애받지 않았음을 문득 깨닫는 것이 돈오(頓悟)라 한다.
 

실로 이 자리는 원래 우리의 자리여서 새삼스러이 닦아야 할 것도 없다. 그래서 돈오하면 돈수될 뿐이다.
돈오란 착각적인 장애 현상에서 바라밀 본지가 오롯이 현전됨을 말한다.

 


그러므로 실로 우리의 마음은 가애( 碍)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애초부터 중생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마음에 걸림이 없음」은 능관이익(能觀利益)중 첫 번째 이익으로 서,
보리살타가 반야의 실천을 함으로서 이루어지는 이익이다.
 


여기에서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 개공도일체고액"이 성취되는 것이다.
 
 
 

2)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無 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헛된 생각 멀리 떠나
 

[둘 째, 장애를 끊는(斷障) 소득]
 
두 번째의 소득으로 장애를 끊음이다. '걸림이 없으므로'란 앞의 걸림이 없다는 말을 받아서 뒤의 장애가 끊어진 해탈의 경계를 일으켜 준 것이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밖으로 악한 무리 [魔]나 적대세력[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니, 객관의 잘못된 조건들이 사라짐이다. '뒤바뀐 헛된 생각 멀리 떠난다'는 것은 안으로 본질을 전도시키는 허위의식의 장애가 없음이니, 현실을 소외시키는 주체적 요인이 다함이다.
 
본질을 전도시키는 허위의식은 존재의 있는 모습이 연기된 것인 줄 모르고 꼭 있는 것으로 집착함으로써 형성된 개념과 의식의 고정화이다.
 

의식의 고정화가 사물의 실상을 다시 닫혀진 것으로 붙들어 버리고, 의식의 오염을 가중시킨다.
 
보디사트바 는 존재의 모습이 모습 아님을 통달함으로써 의식의 오염을 벗어나고, 일상 경험활동 속에서 의식의 고정화를 지양함으로써 존재의 연기적 역동성을 억압하지 않는다.
 
보디사트바는 생각에서 생각을 떠남으로써 존재의 모습을 모습 아님으로 지양하고, 생각 없음에서 생각 없음마저 떠남으로써 존재의 새로운 연기 생성을 주체화한다.
 
반야행에 서 있는 보디사트바는 이처럼 억압된 문명과 규정된 사회체제가 늘 꼭 그렇다 할 것이 없는 줄 요달함으로서 그것을 꼭 그러함으로 규정해 내는 집단적 허위의식을 부정하고 억압된 문명,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해탈과 번영의 역사로 끌고 간다.
 
그러므로 보디사트바는 지금 나의 삶을 소외시키는 왜곡된 문명 속에서 그것의 공성(空性)을 통달함으로써 온갖 얽매임과 두려움을 벗어나고, 외적 세계와 사물들의 있는 모습에 갇힌 뒤바뀐 허위의식과 없음을 없음으로 규정하는 허무의식을 넘어 현실 역사를 떠나지 않고 현실의 장애와 질곡 가운데서 해탈과 자유를 구현해 간다.
 
 
3) 구경열반(究竟涅槃)
 

문득, 더 나아갈 수 없는 열반에 든다.
 

[세 째, 열반을 얻음(得果)]
 
세 번째는 열반을 얻음이다. 열반이란 범어 니어바나(Nirv na)의 음역으로 번역하여서는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圓寂), 적정(寂靜) 또는 멸(滅)이라고만 쓰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열반이나 적정은 같은 뜻이 된다. 그리고 원래 니어바나(Nirv na)란 말은 〈불어서 끈다(吹滅)〉든지 혹은 〈불이 꺼진 상태〉를 나타내는 정도의 말이었는데 이 말이 불교에 흡수되어서는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미혹의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멸을 체득한 불교 최고 이상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심화되었다.
열반을 경에서는 어떻게 정의하는지 알아본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염부차(閻浮車)라 하는 사리자(舍利子)의 옛 친구이며 대답은 바로 부처님의 제일 제자 사리자이다.
 
"사리자여, 열반, 열반하는데 도대체 열반이란 무엇인가?"
 

"벗이여, 열반이란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 일체의 번뇌가 영원히 다하는 이것이 바로 열반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열반을 실현할 방법이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하여야하는가?"
 

"벗이여, 있다. 바로 팔정도가 그것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마음씨,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생각, 올바른 정신통일이다."
 
니어바나(Nirv na)가 〈불이 꺼진 상태〉이므로 그 반대는 〈불이 타고 있는 상태〉가 된다.
 
<불>을 탐진치 삼독에 비유하므로,〈불이 타고 있는 상태〉란 탐, 진, 치 삼독이 치성함으로 인하여 번뇌가 극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번뇌의 영원한 멸진이라 함은 바로 양쪽에 치우친 변견(邊見)을 막는 곧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쌍비(雙非)하고 쌍차(雙遮)되는 진공의 심청정(心淸淨)을 말하며, 또 양변에 치우친 견해를 막는다 하면 결국 자리(自利)를 말함이니, 이제 곧 심광명(心光明)의 묘유(妙有)가 성스러운 덕으로 사방을 두루 비추게 될 따름이다.
이 열반은 적극적이며 활동적인 실생활과는 둘이 아님이 대승사가(大乘師家)들에 의해 논의되었다. 이곳은 참으로 영원하고, 즐겁고, 깨끗한 곳이며 온갖 성덕(聖德)을 갖추어 자발광(自發光)하는 곳이며, 진공묘유(眞空妙有)이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강력한 곳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구경열반을 <이렇게 이렇게 하여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하는 식의 열반에 이르는 경로 혹은 결국 열반에 이를 수밖에 없는 어떤 원인의 결과로 구경열반이라 경전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모두 결국 문득 알고 나면 자기가 있는 그 자리가 구경열반이고, 더 나아갈 수 없어서 머물지 않는 열반을 지칭하여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라 한다.구경열반(究竟涅槃)에 대한 남양 혜충국사의 말씀을 <반야심경삼주(般若心經三注)>에서 살펴본다.
 
혜충스님이 이르기를 마음에 만약 생기는 것이 있으면, 곧 없애야 할 것이 있게 되고, 마음에 본래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다면 실로 없애야 할 것이 가히 없다. 생길 것도 없앨 것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한다. 구(究)란 것은 <다한다>는 뜻이고 경(竟)이란 것은 <마친다: 盡>는 뜻이다. 과거, 현재, 미래에 이어지는 티끌 같은 망념이 본래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았음을 아는 까닭에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 한다.
 
원효스님의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의 말씀을 인용한다.
 
열반의 도는 도가 없으면서도 도 아닌 것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면서도 머물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이 도는 지극히 가까우면서도 지극히 먼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도를 증득한 사람은 그지없이 고요한 동시에 또한 그지없이 시끄럽다.
 
그지없이 시끄러우므로 팔성(八聲)을 두루 떨쳐 허공을 다니면서 쉬지 않고, 그지없이 고요하므로 십상(十相)을 멀리 떠나 진리의 끝과 하나가 되어 담연하다.
 
지극히 멀기 때문에 가르침을 따라 가면서 천겁을 지나도 이르지 못하고, 지극히 가깝기 때문에 말을 잊고 찾되 한 찰나에 스스로 만난다.
이 경은 불법의 큰 바다요, 대승(方等)의 비밀창고이며, 그 가르침은 측량하기 어렵다.
 
실로 넓고 탁 트이어 가이없고 매우 깊어 밑이 없다. 밑이 없기 때문에 다하지 않음이 없고, 가이없기 때문에 갖추지 않음이 없다.
여러 경전의 부분을 통합하여 온갖 흐름을 일미(一味)로 돌아가게 하고, 지극히 공정한 부처님의 뜻을 열어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워 다툼을 화해시킨다.
 
이리하여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생(四生)을 무이실성(無二實性)으로 돌아가게 하고, 오랜 잠에서 꿈꾸는 중생들을 한결같이 대각(大覺)의 극과(極果)에 이르게 한다.
 
극과(極果)의 큰 깨달음이라 함은 실성(實性)을 체득하여 마음을 잊는 것이고, 무이실성(無二實
性)이라 함은 참된 것과 거짓을 섞어서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미 둘이 없으니 어찌 하나가 있겠으며, 진망(眞妄)이 섞여 있으니 어느 것이 진실이겠는가.
 
이것이 이치와 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이름과 뜻이 아주 끊어진 것이니, 이것을 열반의 그윽한 뜻이라 한다. 다만 모든 부처님이 그것을 증득하고서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되, 응하지 않음이 없고,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을 열반의 지극한 가르침이라 한다.
 
그러나 그윽한 뜻이면서도 한번도 고요한 적이 없었고, 지극한 가르침이면서도 한번도 말 한적이 없었다. 이것을 이치와 가르침의 일미(一味)라 한다.
 
『팔천송반야경』「초품」은 보디사트바의 니르바나가 정체된 관념의 신비가 아니라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의 모순 속에서 모순이 공한 중도를 체달함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해탈의 관계로 전환시키되, 전환하는 행에도 또한 머물지 않는 창조적인 행 자체임을 이렇게 말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디사트바가 크나큰 장엄을 발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크나큰 장엄을 발한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보디사트바는 내가 응당 한량없는 아승지 중생을 구제하리라고 생각하되 중생을 구제하고서는 구제한 중생이 없다.
 
왜 그런가. 모든 법의 참모습이 그렇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환술사가 네거리에서 환술로 사람을 만들어 그 환술로 사람의 목을 자른 것과 같으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거기 상처를 입거나 죽은 자가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디사트바도 이와 같아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지만 모두 제도하고 나서는 실로 제도한 중생이 없는 것이다. 만약 보디사트바가 이러한 일을 듣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보디사트바가 바로 크나큰 장엄을 발한 줄 알아야 한다.'
 
 

4.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략삼보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故 得阿 多羅三貌三菩提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없이 높고 바르고 두루한 큰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결과에 대한 증명)
 
깨달음의 성과가 완전히 실현됨을 말한 부분이다.
처음은 실천의 주체와 주체가 의지하는 실천법을 들고, 두 번째는 얻은 바 해탈의 성과를 밝히고,
세 번째는 그 성과를 증명하는 부분이다.
 
1) <삼세제불(三世諸佛) 의반야바라밀다고

(依般若波羅密多故)>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에게도 인간해탈의 실천에서 다른 어떤 길이 있지 않고 우리들과 똑같이 오직 반야의 한 문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라고 말한 것이다. 삼세제불의 최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삼약삼보리>도 주체인 삼세제불의 <반야바라밀다>의 실천의 결과이며 다른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팔천송반야경』「촉루품」에 의하면:
 
모든 붓다의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 모두 반야바라밀을 좇아 생긴다. 아난다여, 만약 지난 세상 모든 붓다의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 모두 반야바라밀다를 좇아 생긴 것이라면, 앞으로 올 모든 붓다의 위없는 깨달음도 또한 반야바라밀을 좇아 생길 것이며, 현재의 모든 붓다의 위없는 깨달음도 반야바라밀다를 좇아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보디사트바가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려면 마땅히 육바라밀을 잘 배워야 한다.
 
위 경전의 뜻에 의하면 붓다의 깨달음이란 완성된 절대의 경지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반야행의 결과로 주어지며 반야행으로 발현되는 것이니, 경전은 반야를 통해 구현된 붓다의 깨달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2) 아뇩다라삼먁삼보리
 

阿 多羅三貌三菩提
 

Anuttara-Sammak-sambodhi
「아 A」는 없다, 무(無)이고
「뇩다라 nuttara」는 위, 상(上)
「아뇩다라 Anuttara」: 위없는, 무상(無上)
「삼 Sam」은 바르다, 정(正)
「먁 mak」은 평등하다의 등(等)
「삼먁 Sammak」: 정등(正等), 정변(正遍), 부처님의 지혜를 나타낸다.
「삼 sam」은 바르다의 정(正)
「보리 bodhi」는 깨달음의 각(覺)이다.
「삼보리 sambodhi」: 바른 깨달음, 정각(正覺)
곧 <위없고 바르며 두루한 바른 깨달음>,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른다.
줄여서 정각(正覺)이라 한다.
 

경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기술된 붓다의 완전한 깨달음은 모든 질곡과 장애가 사라졌다는 뜻으로 '크나큰 니르바나[대열반(大涅槃)]라 하고, 공덕과 지혜가 충만하므로' 법신, 반야, 해탈의 세 가지 덕[열반 삼덕: 법신, 반야, 해탈]이라 한다.
 
법신, 반야, 해탈은 중생의 번뇌의 장애[煩惱障]와 생활의 장애[業障], 소외와 질곡으로서의 삶의 장애[報障]가 창조적으로 전환됨으로써 구현된다.
 
http://www.hwagyesa.org/college/1_college_a_9.htm
참조 자료 [검색] : 인터넷 화계사 불교대학 강의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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