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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선사 〈상〉 “본래 한 물건도 없다”…돈오 설파 ‘六祖’

白道 박만주 2016. 5. 12. 08:47

 

 

 

 

 

 

 

 

 

 

     

 


 혜능선사 〈상〉
 
 “본래 한 물건도 없다”…돈오 설파 ‘六祖’
 
돈황본 〈단경〉에 의하면 남종선의 조사인 “혜능(慧能: 638~713)의 속성은 노(盧)이고, 본관이 범양(范陽: 지금의 河北省 啄縣)이고, 좌천되어 영남 신주(新州: 지금 廣東省 新興縣)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일찍이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나무를 팔아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가 저자에서 땔나무를 팔 때 어떤 사람이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一聞經語)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心卽開悟). 〈신회어록〉에 의거하면, 22세에 기주 황매산으로 가서 5조 홍인을 참문하여 “사람은 남북이 있지만, 불성은 남북이 없다”고 한 불성등의 문답으로 입실하게 된다. 이러한 불성평등의 인간불교사상은 뒷날 “사람이 곧 부처(卽人是佛)”라는 조사선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혜능이 홍인의 문하에서 8개월간 방앗간에서의 노동과 수행을 거쳐, 홍인이 3일 동안 설한 〈금강경〉의 “마땅히 머문바 없이(應無所住), 그 마음을 내라(而生其心)”고 하는 구절에서 여래지견을 문득 깨닫고 선종 6조의 부촉을 받게 된다. 여기서 혜능이 홍인의 “한 마디 말 아래 바로 깨달았다(言下便悟)”고 하는데, 이른바 “언하변오(言下便悟)”가 바로 남종이 제창한 돈오선의 수증방법이다.


불성평등.언하변오 가르침


‘체계적 점수’신수와 대조


돈황본 〈단경〉에 설해진 “불성은 항상 깨끗하다(佛性常淸淨)”거나, 훗날 수정본의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라는 게송의 구절은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時時勤拂拭)”라는 신수 게송에 대응해 제출된 것이다.


신수가 경론에 의거하여 체계적인 점수의 방법론으로 깨달음을 개현한다면, 혜능은 번뇌가 본래 공한 줄 돈오한 곳에서 비로소 닦음 없는 묘한 닦음(妙修)이 현전한다는 의미의 무수지수(無修之修)를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선을 “스스로 그러한 본바탕(自然體)”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고요함(寂滅性)에 앉아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닦음을 폐기하고, 실천행을 방기하는 선류들을 향해 중도정관(中道正觀)에 의한 중도정행(中道正行: 반야바라밀행)을 실천할 것을 주장하는 말이다.


그리고 신수의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라”고 한 게송이 제도불교의 귀족적 점수선의 상징어라면, “본래 한 물건도 없다”라고 하는 것은 서민을 중심으로 한 돈오선의 표상어라고 할 수 있다.


즉 혜능이 노행자의 신분으로 한 마디 말 아래 단박 깨달아(頓悟) 육대 조사가 되었다는 파격적 입도기연(入道機緣)은 점수를 핵심으로 하는 북종의 권위와 체계를 돌파하여 남종이 돈오선 사상을 수립하는 종파적 대립상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혜능의 남종선은 달마로부터 신수에 이르는 초기선에서 좌선을 중심으로 하는 점수적 수증방법에 자칫 번뇌와 보리의 이원화(二元化)적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을 좌(念不起爲坐)라 하고, 본성을 보아 어지럽지 않음이 선(見本性不亂爲禪)”이라는 좌선의 관점에서 “번뇌가 바로 보리(煩惱卽菩提)”라는 일원적 돈오선관을 제시하고 있다.


북종선이 점수를 통한 돈오를 주창함은 몸을 중심으로 한 좌선을 위주로 하여 마음을 조복하려함이라면, 남종선은 돈오를 통해 점수를 통합하고자 하기 때문에 마음의 조복을 강조하여 몸과 마음의 회통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신수와 혜능은 다같이 홍인 문하에서 동산법문을 계승하고 있지만, 수증가풍과 생활환경의 차이로 인해 신수선은 점문(漸門)을 혜능선은 돈문(頓門)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월암스님 선원 수좌


[불교신문 2208호/ 3월4일자] 


“본래 한 물건도 없다”…돈오 설파 ‘六祖’ 
 

돈황본 〈단경〉에 의하면 남종선의 조사인 “혜능(慧能: 638~713)의 속성은 노(盧)이고, 본관이 범양(范陽: 지금의 河北省 啄縣)이고, 좌천되어 영남 신주(新州: 지금 廣東省 新興縣)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일찍이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나무를 팔아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가 저자에서 땔나무를 팔 때 어떤 사람이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一聞經語)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心卽開悟). 〈신회어록〉에 의거하면, 22세에 기주 황매산으로 가서 5조 홍인을 참문하여 “사람은 남북이 있지만, 불성은 남북이 없다”고 한 불성등의 문답으로 입실하게 된다. 이러한 불성평등의 인간불교사상은 뒷날 “사람이 곧 부처(卽人是佛)”라는 조사선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혜능이 홍인의 문하에서 8개월간 방앗간에서의 노동과 수행을 거쳐, 홍인이 3일 동안 설한 〈금강경〉의 “마땅히 머문바 없이(應無所住), 그 마음을 내라(而生其心)”고 하는 구절에서 여래지견을 문득 깨닫고 선종 6조의 부촉을 받게 된다. 여기서 혜능이 홍인의 “한 마디 말 아래 바로 깨달았다(言下便悟)”고 하는데, 이른바 “언하변오(言下便悟)”가 바로 남종이 제창한 돈오선의 수증방법이다.


불성평등.언하변오 가르침


‘체계적 점수’신수와 대조


돈황본 〈단경〉에 설해진 “불성은 항상 깨끗하다(佛性常淸淨)”거나, 훗날 수정본의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라는 게송의 구절은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時時勤拂拭)”라는 신수 게송에 대응해 제출된 것이다. 신수가 경론에 의거하여 체계적인 점수의 방법론으로 깨달음을 개현한다면, 혜능은 번뇌가 본래 공한 줄 돈오한 곳에서 비로소 닦음 없는 묘한 닦음(妙修)이 현전한다는 의미의 무수지수(無修之修)를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선을 “스스로 그러한 본바탕(自然體)”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고요함(寂滅性)에 앉아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닦음을 폐기하고, 실천행을 방기하는 선류들을 향해 중도정관(中道正觀)에 의한 중도정행(中道正行: 반야바라밀행)을 실천할 것을 주장하는 말이다. 그리고 신수의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라”고 한 게송이 제도불교의 귀족적 점수선의 상징어라면, “본래 한 물건도 없다”라고 하는 것은 서민을 중심으로 한 돈오선의 표상어라고 할 수 있다.


즉 혜능이 노행자의 신분으로 한 마디 말 아래 단박 깨달아(頓悟) 육대 조사가 되었다는 파격적 입도기연(入道機緣)은 점수를 핵심으로 하는 북종의 권위와 체계를 돌파하여 남종이 돈오선 사상을 수립하는 종파적 대립상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혜능의 남종선은 달마로부터 신수에 이르는 초기선에서 좌선을 중심으로 하는 점수적 수증방법에 자칫 번뇌와 보리의 이원화(二元化)적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을 좌(念不起爲坐)라 하고, 본성을 보아 어지럽지 않음이 선(見本性不亂爲禪)”이라는 좌선의 관점에서 “번뇌가 바로 보리(煩惱卽菩提)”라는 일원적 돈오선관을 제시하고 있다.


북종선이 점수를 통한 돈오를 주창함은 몸을 중심으로 한 좌선을 위주로 하여 마음을 조복하려함이라면, 남종선은 돈오를 통해 점수를 통합하고자 하기 때문에 마음의 조복을 강조하여 몸과 마음의 회통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신수와 혜능은 다같이 홍인 문하에서 동산법문을 계승하고 있지만, 수증가풍과 생활환경의 차이로 인해 신수선은 점문(漸門)을 혜능선은 돈문(頓門)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월암스님 선원 수좌


[불교신문 2208호/ 3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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