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과 연기(緣起)와 중도(中道) (2)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이 여덟 가지 부정의 게송은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유물론이나 유심론 등 무엇이 먼저 존재한다는 모든 사상을 부정한다. 생함과 멸함이 본래 없다는 것은 종자와
싹의 생멸 관계를 예로 설명할 수 있다. 싹은 종자에서 오지만 싹이 되어도
종자는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종자 속에도 역시 싹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를 소급해 보면 그 이전의 식물은 끝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본래 생이 없는
것이며 싹이 다시 종자가 되었을 때도 역시 그 식물은 소멸된 것이 아니므로
불멸인 것이다. 그러나 종자가 싹으로 변환되었을 때 그 종자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므로 불상(不常)이며 그렇다고 그 상속 작용이 끊어지지
않음으로 불멸인 것이다. 그것은 동일한 것도 다른 것도 아니다.
또한 어디에서 온 것도,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이를 시간적으로 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추상적인 시간을 초월하여 오지도 가지도 않는 것이다.
마치 바닷물이 바람의 인연으로 물결이 일었다가 다시 잔잔해지나 본래 바닷물은
생함도 멸함도 없는 것과 같다. 연기설은 상호 의존적 관계 외에 독립적인
존재의 생을 부정하며 무(無)로부터의 창조설이나 상응론(相應論)도 부정한다.
이 논리의 중심은 동일성과 상대성과의 딜레마를 연기설로 해명하는 것이다.
태어남은 오히려 태어나지 않음이며 멸함도 또한 멸함이 아니다. 원인에 의해
결과가 생긴다고 해도 원인이 그대로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지도 않으며 끊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대승의 연기관은 초기 불교의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비판한 불이적(不二的)
중도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중송’ 에 설하고 있는 바와같이 “연기하는 것은
곧 공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식을 위한 가상의 명칭(假名)일 뿐이며,
그 공성은 바로 중도(中道)이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 연기를 공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의 언어적 시설에 지나지 않는다.
중도는 분별 작용을 넘어서 개념이나 언어적 사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서
열리는 세계이다. 여기에서 초기 불교의 중도 사상이 대승불교에 와서는
공사상의 철학적 배경이 되었고 또 이 공사상은 대승의 종교적 실천 수행의
길을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국대 불교학과
허튼 소리 (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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