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상월원각대조사님에 대한 최초의 학술논문으로서 한국선학회에 발표되었습니다. 2002년 10월 19일 동국대학교 문화관 덕암세미나실에서 발표된 논문이며, 『한국선학』제5집에 실려 있습니다. |
Ⅰ. 緖言 Ⅱ. 생애를 통해본 현대 천태종의 重創 Ⅲ. 上月祖師의 悟道와 천태종의 觀音信行 Ⅳ. 上月祖師의 수행관에 보이는 天台敎觀 Ⅴ. 불교의 대중화 이념 Ⅵ. 結語
Ⅰ. 緖言
한국과 중국에 있어 종파불교는 그 문화적 역할에 많은 비중을 둘 수 있다. 석존의 45년의 佛說을 지역적 정서에 맞게 발전시킨 중국의 불교는 선종을 비롯한 종파불교를 성립시켰으며 동북아 지역의 종교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가운데 천태종은 天台智의禪師의 講說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파로서 교학적으로는 華嚴宗과 비교되는 天台敎學과, 실천문에 있어서는 禪宗과 비교되는 天台止觀을 발전시켰다. 현대의 천태종은 조선 초기 명맥이 끊어졌던 천태종을 현대에 중창시키고 불교종파로서 새롭게 자리 매김하고 있다. 또한 천태종 본산인 救仁寺를 중심으로 많은 불자들의 운집과 함께 각종 불사와 함께 대법회가 개최되어 교세가 확장되고 있다. 특히 한국불교에 있어 종단간의 교류에 있어 많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현대의 천태종에 맞는 교학적 바탕과 실천 수행문의 원류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미한 수준이라 하겠다. 이러한 배경에 있어 先行 연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시점에서 소박하지만 이전에 출판된 소수의 책자를 기초로 하여 천태종을 重創한 上月祖師의 생애를 조명하고 또한 깨달음을 얻은 수행법과 그 바탕이 되었던 실천문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Ⅱ. 생애를 통해본 현대 천태종의 重創
조선 초기까지 종파의 세력으로 남아 있는 천태종은 세종 때 종파가 통폐합된 이후 544년간 천태종명이 사라졌다가 1966년 국가에 불교 종단을 등록하였다. 상월조사가 소백산에서 수행을 시작한 이후 사부대중이 형성되면서 세종 때 사라진 天台宗名으로 현대 천태종을 새롭게 중흥(重興)시키고 있다. 상월조사가 천태종을 중흥시키기까지 생애에 있어 몇 가지 전환점을 중심으로 천태수행에 대하여 고찰해 볼 수 있다. 우선 幼年期와 出家修道期 그리고 遍歷期와 敎化期의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의 생애에 대한 조명과 함께 수행상에 나타난 천태관법에 대한 소개와 함께 그 자료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上月祖師의 본명은 準東이며 법명은 上月이며 법호가 圓覺이다. 10대 중반 구법수행에 뛰어든 이후 각고의 고행 끝에 천태종을 중창하고 현대 한국불교에 새롭게 등장한 '상월원각대조사'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연대순으로 간략히 나열할 수 있다.
1911년 삼척 상마읍리 출생 1915년( 5세) 한문서당 입학 1919년( 9세) 조부사망으로 인생에 대한 懷疑 1925년(15세) 三台山에 초막을 짓고 백일간 千手陀羅尼 呪 念誦 1926년(16세) 금강산 묘향산을 비롯한 국내 名刹을 찾아 巡禮 1930년(20세) 중국 입국, 五臺山, 普陀洛伽山, 峨嵋山 淸凉山 등 巡歷 1936년(26세) 귀국, 9년간 강원도와 소백산을 오가며 수행 1945년(35세) 현 구인사 터에 소법당을 짓다. 1950년(40세) 공주 마곡사 등지에 피난과 구제활동 1951년(41세) 천수천안관세음보살 용맹정진 중 豁然大悟 1974년(64세) 입적<각주: 상월조사의 생애를 참고할 수 있는 서적이 몇 권에 불과하지만 연도가 약간씩 틀리고 있다. 본 연대는 천태종 2대 종정인 南大忠宗師가 說하고 趙明基博士가 書한 『上月圓覺大祖師悟道記略』을 중심으로 표기하고 있다.> 비록 9세에 해당하지만 자신을 끔찍하게 아껴주었던 祖父의 사망으로 생에 대한 懷疑와 함께 思索에 잠겼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생애를 통한 상월조사의 불교 수행은 觀世音菩薩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구체적으로 上月祖師의 불교와 혹은 불법수행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에 대하여 구체적인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15세가 되면서 홀로 인근의 산인 三台山으로 올라가 초막을 짓고 용맹정신을 시작하였다. 精進의 내용은 '千手陀羅尼' 呪를 念誦했던 것으로 100일의 시간을 두고 生死를 건 祈禱였다. 三台山 계곡위에 통나무를 걸쳐 놓고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 위에 앉아 부엌칼을 앞에 세워놓고 졸음을 참으면서 천수다라니 念誦을 계속했다. 특히 정진도중 여치가 손가락을 파먹어도 참고 진행했으며, 식사는 一日一食, 二日一食, 四日一食으로 줄이다가 이후 죽이나 물로 연명하면서 환골탈태와 함께 신통력을 얻어 자재하게 되었으며 차력이나 축지술을 겸비했음을 구전으로 전하고 있다. 山中精進으로부터 歸家한 準東은 이듬해 慈母를 하직하고 名山大刹을 찾아 歷訪을 시작하였다. 小白山을 비롯하여 太白山, 金剛山, 九月山, 妙香山 普賢寺, 法住寺, 松廣寺, 海印寺, 銀海寺, 月精寺 등 5년 동안 국내의 각지를 순례하면서 공부를 쌓아갔다. 그러나 위와는 다르게 準東은 15세에 金剛山으로 출가하여 토굴아래서 혼자 수도하고 있던 法隱스님을 만나 得度와 受戒를 하고 上月이라는 法名을 받았으며 사미과와 사집과 그리고 사교과를 공부하고 스승을 시봉하면서 頭陀行을 쌓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스승으로부터 『법화경』 제25품인 「觀世音菩薩普門品」에 귀의하여 信心을 통한 行과 교화방편을 일으켜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각주: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서울: 홍법원, 1990) p.465.> 이 후 상월조사의 생애와 천태종 信行의 중요한 요체가 되었던 것이다. 20세 되던 1930년 상월스님은 국내 불교 성지의 순례에 이어 중국의 명승지를 순방하기 위해 만주를 통해 입국하였다. 上月스님은 五台山 文殊道場, 普陀洛伽山 觀音靈場, 峨嵋山 普賢道場, 淸凉山 華嚴聖地 등 각지의 명소를 순방하고 다시 新彊과 몽골지방을 돌면서 여행을 통해 크게 안목을 넓혔다.
26세 되던 1936년에 귀국하여 布施行을 통하여 중생구제를 서원하고 빈궁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보시하거나 민간요법을 이용한 봉사활동을 하였으나 이내 그 한계를 느꼈다. 上月스님은 法을 통한 중생제도를 표방하고 소백산과 강원도를 오가면서 도량을 삼고 9년간 수행정진만 매진하였다. 자신의 道가 충만하다면 곧 중생구제가 이루어진다고 서원하였던 것이이다. 이후 삼척으로 잠시 돌아왔다가 閔元洪, 閔敬德 대학출신 2人을 대동하고 現 충북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小白山 九峰八門下에 道場을 일구기로 결정하고 산너머 民家에서 다시 修道에 들어갔다. 上月스님은 閔氏 형제와 더불어 鼎坐하고 철야로 千手陀羅尼經을 高聲으로 合誦하면서 精進에 전념하였다. 수일 후 근처에 살던 南益淳(2代 宗正)과 洪承元 등이 참여하면서 승단으로 출발하였다. 45년 (음)3월에 소법당의 상량식과 함께 그 해 단오일에 소수의 신도를 맞이하면서 四部衆이 형성되었으며, 시간을 정하고 철야로 정진에 들어갔던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충남 麻谷寺를 중심으로 피난민들을 위하여 구제활동을 펼쳤으며 그 온정으로 인하여 많은 信者가 귀의하였다. 피난민 구제활동 6개월 만에 다시 귀사하여 초토가 된 법당 자리에 다시 三間茅屋을 엮고 禪定과 呪力을 계속하였다. 上月스님 세수 41세가 되던 51년 겨울 음력 12월 21일부터 "우리의 공부가 가장 깊게 되고 있으니 대중은 엄숙하라 발소리도 기침소리도 내지 마라. 그리고 나를 보라"<각주: 南大忠說·趙明基書 『上月圓覺大祖師 悟道略記』(서울: 신유문화사, 1987), p.22.> 라고 하니 그 때부터 모든 대중은 더욱 열심히 정진에 임하니 7일이 경과하면서 28일 子正에 千手陀羅尼를 呪誦하던 소리가 달라지면서 새벽 3시에 벼락치는 소리처럼 상월스님은 크게 외쳤다.
"東天에 큰 별이 나타나서 내 입으로 들어오니 뱃속이 환하게 밝고 日月이 머리 위에 있으니 天地가 크게 밝도다"<각주: 위의 책 p.23.> 라고 하였다. 그리고 寺內에 서광이 비치고 있었으며, 모든 대중들을 모아놓고 깨달음을 설법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월스님은 깨달음을 선포한 이후 여러 날을 지속적으로 많은 說法을 이어갔음을 당시 참여했던 많은 대중들이 후일에 그 목격담을 내놓고 있다. 悟道 이후 신통력으로 병이나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구제하자 그 소식과 함께 전국에서 많은 불자들이 운집하였으며 교세가 계속 확장되었다. 많은 불사와 함께 救仁寺 도량이 세워지고 전국에 많은 천태종 사찰이 건립되었다. 이후 '上月圓覺祖師'는 1974년 4월 27일 입적하였으며 佛祖慧命이은 天台智者大師와 義天大覺國師를 잇는 한국 천태종의 重創祖로서 거듭나고 있다. 제자로서 초기 小白山 蓮花地에 법당 터를 지정하면서 함께 고락을 했던 현대 천태종의 2대 종정인 南大忠 宗師(1993년 입적)와 많은 제자가 있다. 大忠宗師의 열반과 함께 새로이 제3대 종정인 道勇禪師가 추대되어 그 맥을 잇고 있다. Ⅲ. 上月祖師의 悟道와 천태종의 觀音信行 상월스님의 초기의 수행은 천수다라니의 呪誦이었다. 누구로부터 배웠는지 아니면 어떤 스승이 권고하여 陀羅尼를 주송했는지에 대해서 확인해야 하지만 초기부터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千手陀羅尼를 誦함으로써 수행을 시작했다. 이 부분에 대하여 1990년에 출판된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에 出家의 부분이 수록되어 있지만, 趙明基博士가 書한 『上月圓覺大祖師悟道略記』에는 三台山에서 홀로 수행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 불교성지와 중국 등지를 5, 6년간 遍歷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지만 귀국해서도 또한 천수다라니를 誦함으로써 수도를 재개했던 것이다. 이 때에 세운 誓願은 다음과 같다.
①큰 법을 깨달아 이 곳에서 장엄불사를 전개하겠다. ②깨달음을 얻지 않고는 중생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③성취한 공덕은 중생에게 회향하여 함께 깨달음을 얻게 하겠다.<각주: 금강불교 청소년교화연구회, 『연꽃 어린이법회』(서울: 동쪽나라, 1990)>
高聲으로 誦하면서 고행정진을 시작하여 1951년 음력 12월 28일에 비로소 깨달았음을 외치고 있다. 한 밤중임에도 서광이 비쳐 낮처럼 밝았으며 산속에 커다란 메아리가 울려펴졌음이 목격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千手千眼陀羅尼의 呪誦끝에 터뜨린 '悟道頌' 가운데 첫부분이다. 蓮花極樂 다시오니 내 하나가 第一이다 三千大千 世界造化 어느 누가 濟度하랴 내 하나가 第一이다. 三世間이 得利하나 어느 누가 濟度할고 光明天地 밝은 날에 내 하나가 第一이다.<각주: 南大忠說·趙明基書 『上月圓覺大祖師悟道略記』(서울: 신유문화사, 1987), p.24.> <이후 생략>
이 부분은 제2대 종정인 남대충 종사가 기억한 바의 일부의 悟道頌을 남긴 것으로 희열에 찬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했던 것이다. 상월스님은 大悟 이후 깨달은 바를 대중들에게 3일 낮과 밤을 쉬지 않고 설법했음을 『上月圓覺大祖師悟道略記』를 비롯한 몇 가지의 기록문에 전하고 있다.
상월조사의 깨달음으로 그 수행과 교화가 미치기 시작하고 수많은 대중이 운집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수행관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즉 기존의 '천수천안다라니' 呪誦 보다 '관세음보살'의 정진은 많은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쉽게 誦할 수 있는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 신앙의 형태와 수행의 형태가 갖추어진 '관세음보살'의 呪誦이 救仁寺 대중들에게 자리잡았다. '관세음보살을 誦한다'라기보다 '관세음보살을 呪誦한다' 혹은 '觀音精進'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 초기 상월스님이 공부를 했던 '千手千眼陀羅尼'의 정진과 깨달음이 '觀音精進'으로 이어지고 현재는 전국의 천태종 사찰에서 관음정진이 행해지고 있다. 『上月圓覺大祖師悟道略記』에 나타난 '千手千眼陀羅尼'의 呪誦修行은 현대에 들어 정진수행과 신앙을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수행법으로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Ⅳ. 上月祖師의 수행관에 보이는 天台敎觀
天台智의(538-597)禪師가 천태산을 중심으로 天台敎相과 止觀의 가르침을 펼치고 天台三大部를 중심으로 그의 천태사상이 형성되었으며 또한 천태라는 이름의 종파가 탄생되어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隋天台智者大師別傳』에는 智의禪師가 7세에 절에 놀러갔다가 관세음보살의 念誦을 듣고 있다.<각주: 『隋天台智者大師別傳』(『大正藏』 50, p.191中), "至年七歲喜往伽藍 諸僧口授普門品"> 상월스님 또한 15세에 홀로 산중수행을 시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의 이름인 '千手天眼陀羅尼'를 呪誦했다는 점이다. 굳이 천태 지의선사와 관련 지을 수는 없지만 일찍이 관세음보살과 관련을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상월스님는 이후 줄곧 千手陀羅尼를 誦함을 수행정진으로 삼았지만 어떠한 동기였는지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다. 15세에 출가하여 金剛山 토굴에서 수행하던 法隱스님을 만나 공부하는 과정에서 『법화경』과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5를 접하게되고 信行의 밑바탕으로 삼았던 것으로 앞서 언급한 것과 같다. 천태 지의선사가 남북조시대의 전란을 통해 바라본 참상과 함께 관세음보살의 구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請觀音經疏』<각주: 經의 번역은 東晉의 難提이며 본래의 經名은 『請觀世音菩薩消伏毒害陀羅尼呪經』 1卷으로서 『大正藏』 39卷에 수록되어 있다.> 등에서 보이고 있다면, 상월조사 또한 日帝와 6.25 한국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고 있다. 따라서 千手天眼 觀世音菩薩의 구원관이 천태 지의선사와 자연스럽게 비교될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국가에 천태종단을 공식 등록(1966)하고 『法華經』의 所依經典으로 채택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悟道頌에서 『法華經』의 사상인 會三歸一을 통한 중생구제의 원력을 세우고 있다.
天上天下 하나 되니 그 걱정을 누가 하리 험한 山川 저버리고 衆生濟度 다해 보자. 妙相 覺智 得勢하니 萬民衆生 父母되어 불쌍하게 다시 보며 會三歸一 그 아닌가.<각주: 南大忠說 趙明基書 『上月圓覺大祖師悟道略記』(서울: 신유문화사, 1987). p.28.> 『法華經』의 「觀世音菩薩普門品」은 역사를 통해 수많은 불자들의 신앙과 귀의처였지만 天台宗에 있어서도 觀音精進의 수행과 신앙의 바탕이 되고 있다. 상월스님의 초기 수행방식과 내용에 관한 부분은 口傳의 형태로 남아 있어 학술적으로 조명하기에는 아직 자료의 정리와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몇 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기존의 수행방식이었던 『千手經』의 '千手天眼陀羅尼' 즉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사다바야....." 를 중심으로 한 기도는 소수가 함께 모여 몇 가지의 呪誦 혹은 상월스님이 자신의 체험을 위주로 세웠던 몇 가지의 수행방법이 있었으나 구두로만 전해지고 있다. 이후 小白山 救仁寺에 사부대중이 운집하고 거대도량을 이루면서 승려의 수행과 신도의 신앙이 조화된 형태를 필요로 하였으며 곧 대중이 함께 誦할 수 있는 觀音精進으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월대조사 교시문」에 나타난 고려 대각국사가 수입한 중국 천태종에 대한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 의천 대각국사가 입송하여 천태교관을 수입하고 宗을 수립하여 고려불교의 중심세력을 이루었으나 조선조의 선교양종의 통합을 일컫는 부분에 있어 천태종의 교관을 이어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각주: 朴炯喆, 『上月祖師와 天台宗』(서울: 천태종보사, 1981), p.210.> 또한 상월조사 20세의 나이로 중국에 입국하여 유명성지에 대한 순례에서 普陀洛伽山의 觀音靈場과 天台山 國淸寺를 참배한 사실을 비추어 볼 때 天台敎觀과 『法華經』을 통한 관음수행에 대한 향방을 결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각주: 금강불교 청소년교화연구회, 『연꽃 어린이법회』(서울: 동쪽나라, 1990), p.16.>
향후 계속되는 연구에 의하여 상월스님과 관련된 초기의 수행과 오도송에 대한 수행형태와 제반의식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수행과 신앙이 교차하는 핵심부분은 '觀世音菩薩'로 일컬어질 수 있다. 보통 '觀音精進', '觀音呪誦', '觀音念誦'의 형태로 사부대중이 함께 구인사 뿐만 아니라 전국의 천태종 불교회관에서 행해지는 祈禱 혹은 수행의 형태이다. 비록 觀世音菩薩 精進은 소망을 희구하는 祈禱와 信仰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수행의 측면에서 현대 천태종의 行軌에 있어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Ⅴ. 불교의 대중화 이념
1. 國民佛敎의 이념
천태종이 중창되면서 불교운동의 목표로 내세운 것이 '삼대지표'이다. 1966년 천태종이 重創되면서 새로운 이념의 필요와 함께 당시 국가와 대중이 요구하는 지표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애국불교, 대중불교, 생활불교의 기치는 곧 국가와 대중을 먼저 생각하는 시대적 소망을 담고 있다. 일제치하의 고통과 6.25라는 한국전쟁의 참담함을 직접 체험하였으며, 남과 북이라는 이념적 이데올로기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천태종을 重創하고 교단을 새롭게 발전시켜온 만큼 애국불교의 지표를 설정한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각주: 天台宗 總本山 救仁寺, 『天台宗略典』(서울: 佛敎思想社, 1979 5판), p.9.> 朴炯喆씨가 편집한 『上月圓覺大祖師와 天台宗』에 보이는 상월조사의 「교시문」에는 "羅·麗 천년의 찬란한 문화사를 창조하였을 뿐 아니라 호국불교의 전통을 세워왔으며 국가민족과 그 흥체의 운명을 함께 하여 敎運이 융성할적엔 國運도.....오늘 우리 겨레에게는 국가재건 민족중흥....."<각주: 朴炯喆, 『上月祖師와 天台宗』(서울: 천태종보사, 1981), p.210.> 의 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민불교 혹은 국가불교에 대한 이념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애국불교의 표방은 천태종단이 수행할 수 있는 국가시책을 수용하고 불교운동과 접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구인사 주변 산림에 대한 조림사업은 당시 전란으로 폐허가 된 산천에 식목하고 직접 관리는 물론 벌목에 이르기까지 소백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운동이다. 또한 오지를 연결하는 도로사업은 물론 물을 건너는 다리놓기 사업 또한 종단의 중요한 지표였다.
2. 불교의 大衆化에 대한 노력
대중화에 대한 노력이 보이는 부분은 한국불교에 있어 특히 두드러진 부분이다. 자리이타의 보살사상을 이념의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새로운 불교운동을 제창하고 있다.
기복(祈福)불교에서 수복(修福)불교로 둔세(遁世)불교에서 구세(救世)불교로 산중(山中)불교에서 사회(社會)불교로 관념(觀念)불교에서 실천(實踐)불교로 소비(消費)불교에서 생산(生産)불교로<각주: 金吉祥編,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서울: 홍법원, 1990), p.479.> 대한불교 천태종은 宗正을 중심으로 사부대중을 형성하고 있으며 師資相承에 의한 다음의 종정이 추대됨과 동시에 사부대중은 자연적으로 현 종정의 제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종정은 곧 수행과 신행의 중심으로서 종단의 儀傳과 행정의 대표로 강력한 종단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중불교운동을 전개시킬 수 있다.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불교운동은 도심에 포교당을 설립하는 촉진제가 되고 있다. 山門을 거점으로 불교운동을 펼치기보다 도심의 빌딩공간에 사찰을 건립하거나 불교회관을 설치하여 소백산 구인사인 총본산과 연결되는 支部, 支會의 불교회관을 설치하고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구인사를 제외한 모든 천태 사찰은 신도회를 중심으로 寺院 운영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승려인 住持와 합의제로 운영하지만 실질적으로 신도회장을 중심으로 사찰운영 시스템이 돋보이고 있다. 즉 자발적으로 신행 활동에 참여하고 또한 종단의 총무원이 추진하는 갖가지 불교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신도들의 적극적인 사찰운영의 참여는 자연스런 결속력과 각종 행사와 캠페인에 대한 구상과 결정 및 佛事의 진행은 신도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관세음보살'의 구두정진은 생활 속에서 그대로 반영할 수 있으므로 대중 속으로 쉽게 전파될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3. 생산불교에 대한 승단개념 정립
1945년대 초반 승단의 출발과 함께 생산불교라 할 수 있는 자급적 형태를 띠고 있다. 도회와 떨어진 소백산맥 오지(奧地)라는 부분도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百丈懷海의 '一日不作 一日不食'을 몸소 실천하는 초기 교단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후 논과 밭은 물론 산림개간과 과수원과 목장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농업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Ⅵ. 結語
지금까지 현대 천태종의 중창조인 상월조사의 생애를 통한 수행관을 살펴보았다. 많은 부분이 정확한 기록 보다 일단 口傳에 의한 부분이 많으며 상월조사의 생애를 통한 傳記자료가 충분히 존재하지 않으므로 기존의 단행본과 잡지의 기사 등을 참조하여 수행관을 조명하였다.
1966년 종단 등록과 함께 한국에 천태종이 重興하는 계기를 맞고 있지만, 어찌보면 신흥종단으로 새롭게 출발한 점이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과거 隋의 智者大師가 세운 천태교학과 천태수행에 의거하여 敎觀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상월스님 자신의 용맹정진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펼치면서 천태교관에 적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 불교종단에서 굴지의 종단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때 宗祖의 행적과 사상, 그리고 교단의 형성과 발전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가 필히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본 연구는 대한불교 천태종의 중창조인 상월조사에 대한 연구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으며, 향후 悟道와 修證과정, 그리고 과거 천태종과 연계성 등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학술적 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또한 본 연구를 새롭게 기획하면서 천태교단이 나아가야 할 천태교학의 수용 방향에 대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으며 곧 宗·學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참고서적 天台宗 總本山 救仁寺, 『天台宗略典』(서울: 佛敎思想社, 1970초판, 1979 5판) 朴炯喆, 『上月祖師와 天台宗』(서울: 천태종보사, 1981) 大韓佛敎 天台宗, 『天台宗統紀』(단양군: 대한불교천태종, 1983.) 南大忠說·趙明基書, 『上月圓覺大祖師 悟道略記』(서울: 신유문화사, 1987) 금강불교 청소년교화연구회, 『연꽃 어린이법회』(서울: 동쪽나라, 1990) 金吉祥編,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서울: 홍법원, 19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