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은 28품이다. 그중에서 전반 14품과 후반 14품을 나누어 적문과 본문으로 구분하는 것이 천태스님 이래의 전통적인 이해 방식이다. 그리고 전반 14품의 핵심으로 방편품을, 후반 14품의 핵심으로 여래수량품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천태스님 이래의 전통적 구분에서도 방편품이 《법화경》의 핵심에 속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현대적인 불교학 연구 방법이 등장한 이후 《법화경》을 연구하는 방식 역시 달라졌다. 문헌학 내지 사회학적인 방법의 등장은 《법화경》이 한 날 한 시에 성립되었다는 가정 아래 연구되었던 과거의 연구 방법과 다른 연구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이 공통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법화경》이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법화경》의 설립과정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 보고는 많았다. 각각의 주장에 타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어느 학설이 가장 정확하다고 결론지울 수 없다. 다만 3단계 정도의 과정을 거쳐 오늘 날 우리들이 읽고 있는 《법화경》이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 중에서 방편품은 맨 처음 편집된 《법화경》에 속한다. 흔히 원시 《법화경》이라 불리는 부분이다. 이들의 내용은 또한 산문과 운문(시로 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운문이 성립한 뒤에 산문이 등장한 것으로 추정한다.
간략하게 《법화경》의 성립에 관해 소개했지만 그것은 방편품이 최초기에 속하는 원시 《법화경》에 해당하며, 그 중에서도 핵심 품이란 점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원시 《법화경》은 방편품을 중심으로 비유품과 신해품을 가장 일찍 성립한 것으로 보며, 거기에 약초유품, 수기품, 화성유품을 더하기도 한다.
필자 역시 이러한 견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보며, 약간의 시차를 두고 약초유품과 수기품, 화성유품이 부가되어 원시 《법화경》을 형성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방편품이 원시 《법화경》의 사상과 이론을 소개하는 품이라면 비유품과 신해품은 그 내용을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화적인 형식을 빌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초유품 이하 화성유품 역시 방편품의 사상을 해설하는 품이다.
원시 《법화경》을 방편품에서 약초유품까지 보고, 이어 시차를 두고 서품을 비롯한 촉누품제22까지 차례로 《법화경》에 편입되었다. 이들을 제2기 《법화경》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품들 역시 방편품의 사상을 부연하며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결국 방편품의 사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설명하면서 불교적 실천의 완성은 무량한 공덕이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법화경》의 사상적 핵심은 방편품에 들어 있다. 물론 전통적 이해의 방식에선 여래수량품을 《법화경》의 핵심으로 간주해 왔지만 그것은 불타의 영원성과 편재성이 중국인들의 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방편품을 이해하면 《법화경》 전편을 이해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품이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방편품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후에 등장하는 품들의 내용과 구성을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방편품이 그렇게 중요한가? 《법화경》의 핵심 사상과 교리가 이 품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방편은 우리들을 ‘깨달음의 세계' 혹은 《법화경》에서 말하는 일불승의 세계(이 경우 불지견의 세계와 개념상 동일)로 이끌어 주는 수레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먼저 이해하고 넘어가면 좋은 것은 방편이란 단어의 개념과 방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유마경》의 문질품에도 방편이란 단어가 등장하며, 이 경전에서는 부처님이나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방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록 몸에 병을 지니고 있더라도 항상 생사에 머물면서 일체의 중생을 이롭게 하되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는 것을 방편이라 한다. 설사 몸에 질병이 있어도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는 것을 방편이라 한다.” 《유마경》에선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방편이며, 그들의 병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방편이라 풀이한다.
그런데 《법화경》은 《유마경》처럼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다만 “내가 성불한 이래 여러 가지 인연과 비유로 널리 가르침을 펼쳤으며, 무수한 방편으로 중생들을 인도하여 모든 집착을 여의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여래가 방편과 지견바라밀을 이미 다 갖추었기 때문이니라.”라 말할 뿐이다. 가르침과 방편으로 중생들이 집착을 벗어나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래께서 방편바라밀과 지견바라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먼저 방편바라밀과 지견바라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방편이란 수단이며, 그 수단은 중생들이 집착을 끊고 열반에 들어가게 만들어 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교사상에서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8만4천 법문으로 알려져 있는 가르침을 한마디로 법이라 표현하기도 하지만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무수한 방편이다.
따라서 그것은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은 것이며,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넘어가기 위해 타는 수레와 같은 것이다. 우리들을 피안으로 건네주는 것은 좋지만 피안에 도달하고 나면 그 효용성이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에 지견바라밀은 피안에 도달했을 때 얻어지는 정신적 경지를 말한다. 흔히 부처님의 지혜란 표현을 쓰며, 달리 일불승 혹은 일승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란 차원에서 자연지(自然智), 진실지(眞實智)라 말하기도 한다. 부파불교 이래 방편지와 자연지로 구분되어 온 것이다.
예컨대 우리들이 시골에서 서울에 올 경우 다양한 길이 있을 수 있다. 자가용, 버스, 자전거, 도보. 비행기 배 등등.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경우는 서울에 도착하면 어떻게 왔다는 과정의 문제는 될지언정 서울에 이미 도착했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방편을 통해 부처님의 지견을 터득하더라도 터득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방편은 이미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다만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한 자들 혹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에겐 여전히 방편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천태지의 스님은 방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방(方)은 본받는 것이며, 편(便)은 사용하는 것이다. 혹은 방편이란 문이다. 문이란 통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고 보는데 방편이란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용문과 같이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천태스님과 같은 시대에 활동한 길장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일승이 진실이란 점을 나타내고자 하면 먼저 삼승이 방편이란 점을 밝혀야 한다. 만일 먼저 삼승이 방편이란 점을 밝히지 않으면 일승이 진실이란 점을 나타낼 수 없다. 때문에 경전에서 ‘방편문을 써서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한 것이다”
천태스님이나 길장스님이나 방편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방편은 바로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게 만들어 주는 통로라는 점을 강조한다. 틀리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방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 즉 법(法)인 것이다.
한문으로 법은 가르침이란 의미도 있지만 본받는다는 의미도 있다. 천태스님은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제불보살의 행적을 본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깨달음의 길이 있고, 그것을 본받으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성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방편은 언제나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보가 방편이며, 《법화경》에서 방편품이 앞에 놓여 있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