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12연기의 재 해석

白道 박만주 2016. 11. 20. 10:30


 


 

 

  12연기의 재 해석

 

 간략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 연기설이 어떻게 해서 유부(有部)적인 소승의 생멸적 견해로 해석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과정이 대강 짐작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에는 어느 학자도 십이연기를 반드시 생멸적이며 시간적으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하게 생멸적인 소승유부의 주장을 고집하게  되면, 이 사람들은 시대에 역행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부처님의 근본  뜻을 등지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십이연기와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문제가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십이연기와 사성제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이 사성제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생멸사제(生滅四諦)입니다. 이것은 대개 소승의 유부 (有部)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법의 자성을 '있다[有]라고 보기에 이 '있다'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제법은 생멸하다는 피상적인 관찰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보지 못하고  고(苦).집(集). 멸(滅).도(道)의 사제를 순전히 생멸적으로 해석합니다.

 

 둘째는 무생사제(無生四諦)입니다. 이것은 '생멸사제'의 반대로서 사제는 생(生)하지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는다는 해석입니다.  대승불교가운데 반야경(般若經)이나 삼론종(三論宗)의 공사상(空思想)에 근거하여 주장한 해석입니다. 공사상에서 볼때는 사제란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라  합니다.

 

셋째는 무량사제(無量四諦)입니다. 이것은  보살승(菩薩乘)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보살이란 육도만행(六道萬行)을 근본으로 삼고 행동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견해는 육도만행을 하듯이 모든 것이 다 한이 없고 끝이 없다[無量無邊)는 견지에서 사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문. 연각은 이 무량사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넷째는 무작사제(無作四諦)입니다. 이것은 주로 법화경을 만드는 일승원교(一乘圓敎)의 해석입니다. 여기서는 사제를 생멸(生滅).무생(無生). 무량(無量)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생멸하는 당체(當體)가  그대로 실상(實相)이라는 것입니다.

 

생사(生死)가 열반(涅槃)이며 번뇌(煩惱)가 보리(菩堤)이므로, 끊어야 할 고(苦)도 집(集)도 없고    닦고 증득해야 할 멸(滅)도 도(道)도 없으므로 어떤 인위적인 지음도 요청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변견이나 사견(邪見)이나 할 것없이 전체가 다 중도 아닌 것이 없으니 부처와 마구니가 한계선이 없어지고 화합하는 때입니다. 이것이 원융무애한 중도사제(中道四諦)입니다.

 

 원래 사제(四諦)는 자세히 알고 보면 십이연기와 별개의 도리가 아닙니다. 사제 중에서 괴로움을 말하는 고제(苦諦)와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뜻하는 집제(集諦)는 괴로움이 생기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순관(順觀)에 해당합니다. 또 사제에서 괴로움이 멸하는 멸제(滅諦)와 그 멸하는 길을 말하는  도제(道諦)는 괴로움이 소멸하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역관(逆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십이연기와 사제는 서로 대등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가 존재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고 법계 연기이고 보면, 사제 역시 생멸적인 사제만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태대사나 현수대사가 아함경을 소승으로 취급하여 아함의 연기를 생멸연기로 해석하고 , 아함의 사제도 생멸사제로 간주한 것은 결단코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선언하였는데, 중도가 즉 연기이며, 연기가 즉 법성이며, 법성이 즉 법계이며, 법계가 즉 사제 입니다. 이것은 전체가 다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그리하여 제법실상이라든가 법계연기라든가 그 모두가 법계. 연기. 법성 이것을 벗어나서 더 묘한 이론은 없습니다.따라서 부처님이 설명하신 근본불법은 제법실상과 법계연기를  주장하는 천태. 화엄과 같은 일승원교의 입장이지 절대로 소승의 생멸변견적(生滅邊見的)인 불교는 아닙니다.

 

 일승도(一乘道)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흔히 이것은 대승불교에서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법화경에서'시방 국토 가운데 오직 일승법이 있으니 모든 부처님의  방편설은 제외 한다'라고 설하시어, 부처님의 근본 뜻은 일승(一乘)에 있음을 천명하셨습니다. 때로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二乘)도 말하고, 때로는 이승에 보살(菩薩)을 더한 삼승(三乘)도 말씀하지만 그것은 방편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에서 삼승을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첫째 성문승(聲聞乘)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항상 생멸(生滅)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성제(四聖諦)를 설할 때도 생멸적인 관점에 서서 해석하며, 열반을 증득해도 유여열반(有餘涅般)이요 무여열반(無餘涅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둘째는 연각승(緣覺乘)입니다. 스스로 인연을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연을 관해도 생멸적인 변견으로 관하는 것이지 중도 정견[中道正見]으로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역시 무여열반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보살승(菩薩乘)입니다. 보살승은 순전히 자기의 이익[自利]보다  타인의 이익[利他]이 근본이 되어서 남을 위해서는 나의  해탈은 그만두고 지옥을 하루에 천번 만번 가도 좋다고 하는 대보리심을 내어서 보시.지계. 인욕. 정진. 선정.지혜의 육바라밀을 비롯한 수많은 수행[六道萬行]을 닦습니다. 일체중생을  위해서 무량한 아승지겁 동안 육도만행을 닦으며, 한없는 세월동안 중생을 위해서 살아가는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위해서 남을 도우며  살면서 마침내는 무상정각을 이룹니다. 이러한 사람을 보살승이라고 하며, 이승과는 달리 유여열반이 아닌 무여열반을  증득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근본 관점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성문도 연각승도 보살승도 아닌 오직 일승(一乘)입니다.  보살승은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의 무한한 세월 동안 남을 위해  노력해서 정등각(正等覺)을 이룸을 말하는데, 일승(一乘), 일불승(一佛乘)이란 진여법계를 지금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곧 중도만 정등각하면 진여법계가 그대로 현전 하므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법계를 그대로 바로 보는 이것을 일승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승은 중도를 내용으로 한 진여법계를 깨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불법을 성취함에 있어서는 오직 중도를 바로 깨쳐서 진여법계를 바로 증득하면 화장세계에서 임의자재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니  이것이 바로  곧은 길[直路]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처님 당시에 모든 제자들이 부처님의 법문 끝에 바로 깨쳐서 중도를 증득 했지 무슨 다른 길을 빙빙 돌아서 공부를 성취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본래 바른길, 즉 지름길로 가서 부처님 법문을 깨치고 불법을 성취했지 무슨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한다든지 삼아승지겁  동안을 닦아야 한다든지 하는 얘기는 근본 원시경전에는 없는 말입니다. 진여법계로 바로 들어가는 이것이 일승입니다.

 

 그러면 왜 삼승을 설하였는가?   소승불교와 대립적인 입장에 선 대승불교에서 방편으로 한 것 입니다. 부파불교인 소승불교에서는 이들은 순전히 자리에만 치중하고 이타는 생하지 않았다고 대승에서 주장합니다. 이타가 없기 때문에 소승의 자리 적인 편견을 부수기 위해서 이타의 육도만행을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승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중도일승(中道一乘)에서 볼 때는 일종의 방편이지 실지의 구경법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지.관 (止觀), 정.혜(定慧)를 함께 닦아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로  들어가면 그만이지 거기에서 보면 무슨 이승이니 삼승이니 하는 헛된 길 [空路]은 없습니다.

 

원시경전에 부처님 제자들이 깨친 경로가 삼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하는 등의 수증(修證)의 점차(漸次)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비구 교진여가 부처님의 중도법문을 듣고 바로 깨치고 나서 '집(集)이 곧 멸(滅)이라고 , 즉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하니 부처님께서 인가하셨다는 말은 내가 앞에서도 여러번 귀따가울 정도로 말했습니다. 말로서만 '생사 즉  열반'이 아니라 확실히 깨친 사실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모두가 바로 깨쳐 들어갔지, 삼아승 지겁을 닦아 성불한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둘러가는  공로(空路)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은 일승 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크게 주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일승이라는 말이 반드시 대승경전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아함경(阿含經)에 일승도 (一乘道)라는 형태로 드물기는 하지만 그 용례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비구들이여, 이 일승도(一乘道)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여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며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四念處)니라. 어떤것을 사념처라 하는가. 몸에서 몸(身)을 관하여 열심히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상념하여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조복하여 머물며, 수(受)에서 수를 관하여 마음[心]에서 마음을 관하여법(法)에서 법을 관하여 머무느니라.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며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고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니라.

[南傳大藏經제16권 상, 상응부경전 5, pp357~358]

 

 여기서 말하는 일승도(ekayana)란 신(身).수(受).심(心).법(法)의 네가지를 바로 알고 바로 생각[正知正念]한다는 것입니다.

 즉 몸은 청정한 것이 아니며, 수는 즐겁지 못한 괴로움이고, 마음은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이며, 법은   자성이 없는 무아 (無我)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근본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설한 여러가지 수행법 가운데 사념주(四念住),또는 사념처를 바로 일승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역(韓譯)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다소 다르게 말합니다. 그 한역의 내용 일부를 다음에 인증해 보겠습니다.

 

 어느때 부처님은 비사리(毘舍離)의 미후연못곁에 있는 중각 강당에 계시었다. 존자 아난은 이차(離車)에게 말하였다.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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