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봄으로 존재 자체를 음미하기 - 원아(圓我) 유종열 | 혼침(昏沈)과 산란(散亂) 이 문제가 우리 전체 문제이다. 혼침하다가 망상(산란)하다가 혼침하다가 망상(산란)하다가 그것이 고통이고 괴로움이고 어두움이고 중생의 삶이다. 무심한 가운데 잠(혼침)에도 안 떨어지고 산란심(번뇌망상)에도 안 떨어졌을 때가 운용(用)이 잘 되고 체성자리(體), 무심자리가 잘 지탱(支撐)이 되는 것이다. "무심한 가운데 일심의 지도리를 세우라" 이 이야기를 수없이 했는데 머리로만 이해가 되지 체달(體達, 통달하여 깨달음)을 못한다. 일상생활에서 '아, 이거 안 하면 내가 죽는 길이구나!'라고 느껴야 한다. 무심한 가운데 무심을 지속시키려면 일심을 운용해야 되고 일심을 운용해야 무심이 지속이 된다.
보존과 운용이 같은 것이다. 운용을 해야 보존이 되고 보존이 돼야 쓸 수 있다. 그것이 무심과 일심이다. 콘센트레이션(concentration, 정신집중)을 어텐션(attention, 정신차림)으로 돌려야 한다. 어텐션이 일심을 배양하는 것인데 그 자체가 굉장히 막강한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무궁무진하고 막강한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특별한 법이 있어야 한다. 그냥 해서는 일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선 감각을 가지고 깨치려고 해보자. 봄 자체, 존재 자체를 느껴보려고 눈으로 보려고 하면 어떠한가? 안 보여 ~ 귀로 들으려 하면 어떠한가? 안 들려 ~ 냄새 맡아보려고 해도 안 되지? 맛보려 해도 안 되지? 말로 하니까 이렇게 복잡한데 실제로는 단순하다. 도대체 알 수 없는 데까지 이르러야 폭발적인 힘이 나오는 것이다. 보려고 해도 못 보고 들으려고 해도 못 듣고 느끼려고 해도 안 느껴진다. 그것을 통과해야 거기서부터 일심의 힘이 폭발된다. 눈앞에 나타난, 현전(現前)하는 무심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 둘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떠한가? (보는 자가 없다) 보는 자가 없다는 건 무엇인가? 보려는데 안 보인다 !! 그러니까 하나이다. 막강한 에너지이다. 들으려는데 듣는 자가 없다. 안 들린다.
이것이 노하우다 !! 이렇게 되었을 때 무심의 저변에 있는 에너지가 가동되고 빛이 가동된다. 거기에는 모른다는 생각도 없다. 좌우지간 보는데 안 보인다. 말로써는 그렇게 표현한다. 그런데 보려고 하는 마음도 있다. 보려는데도 하나도 안 보인다. 들으려는데도 하나도 안 들린다. 모른다. 물질이 아닌 영성이라서 그렇다. 물질은 감각으로 다 포착이 되는데 이것은 감각기관으로 포착이 안 된다. 영감(靈感)이 표출되기 위해서는 지금 한번 해보자 !!!! 눈으로 보는데 하나도 안 보이고 들으려고 하는데 하나도 안 들린다. 맛보려고 하는데 한 맛도 없으며 냄새 맡으려고 해도 아무런 냄새도 없다. 이것이 아주 고양된 자리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존재 자체를 발견한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고 운용할 때 그 맛을 보는 것이다. 깨달음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 단계를 넘어가면 경계가 없을 때도 쓸 수 있고 경계가 있을 때도 쓸 수 있다. 눈으로 보입니까? 들립니까? 맛이 있나요? 향기가 있나요? 그렇게 자문자답하자. 그렇게 자문자답을 빠른 시간내에 해야 한다. 수 백번 천번 만번 해야 한다. 안 들리는 자리가 하나 자리, 합일자리다. 합일이 되면 무궁무진한 에너지가 마치 자기 논에 물 대논 것 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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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원대 http://cafe.daum.net/transurfing/RTSa/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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