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無常과 常住의 상관관계
조 동 섭(동국대 선학과 박사과정)
1. 들어가는 말
2. 無常의 필연성
3. 常住의 불변성
4. 無常과 常住의 상관관계
ⅰ) 조사의 방편
ⅱ) 기연의 사례
5.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한 시대를 풍미한 위인이나 흔적 없이 살다간 범부나 모두들 세상은 덧없으며 영원한 것은 없다는 短見과 함께 인간이 미약한 존재임을 느껴왔다.
이런 덧없다는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 불교 역시 이것들이 無常하다고 말하는 동시에 영원의 涅槃을 향한 가르침을 전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즉 만물이 流轉하여 모든 것이 부질없고, 덧없음에 깨달음을 얻어 涅槃에 이르자는 것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쉼 없이 변화하니 그 모든 것이 無餘한 寂滅의 상태에 이르자는, 유한하여 불안한 動에서 무한의 안락한 靜을 향한 가르침이 바로 불교라 할 것이다.
석가세존은 근본교의 중의 하나인 三法印 중 첫 번째로 등장하는 ‘諸行無常’을 통해 세상의 모든 유위의 존재를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고 영원히 똑같을 수 없다는 존재의 유한을 설명하여 그 한계를 설하였다.
이와는 달리 석가세존은 그의 恒河沙 같은 교설과 金剛石 같은 교리 속에 常住不變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진리인 佛, 法, 僧의 三寶이며 깨달음의 궁극적 도달처인 涅槃이라 하였다.
쉬운 생각으로 ‘항상 하지 않는’ 無常과 ‘항상 머무는’ 常住가 반대개념임을 알고 있지만 상기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석가세존 교설의 시작인 三法印과 그 끝인 涅槃의 교설이 無常과 常住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서 이 서로 상반된 두 개의 개념으로 佛法이라는 큰 원(法輪)과 불교에서 말하는 法界가 형성되어 있음 역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拙稿의 제목대로 無常과 常住에의 접근은 불교교리의 전방위에 걸쳐 근본불교를 시작으로 소승과 대승불교 각각에 대해 많은 방법과 이론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拙稿에서는 연구의 미진함을 無常과 常住에 대한 개괄적이고 보편적 소개로 갈음하며, 그 無常과 常住를 축으로 한 법륜이 석가세존의 근본교설에서 그치지 않고 禪宗의 諸宗師의 사상에 발현되어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禪思想의 脈을 이루고 있다는 필자의 짧은 소견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諸行無常’과 ‘涅槃常住’의 두 개의 화두를 시작으로 하여 無常과 常住의 상호 반대적 두 개념을 통해 佛法과 法界를 파악해보고 동시에 佛祖의, 禪思想의 要諦를 찾아보고자 한다.
2. 無常의 필연성 無常은 범어로는 ‘anitya’, 빨리어로는 ‘anicca’라 하여 일체의 有爲法(saṃskṛta dharma)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항상 生滅遷流한다는 뜻이다. 이 유위법은 모두 因緣의 화합에 의해 生하고 일시적 형상을 갖고 살며 그 사이에도 끊임없이 변화하다 끝내 없어져 버리는 生住異滅의 有爲四相의 특질을 갖는 것으로 찰나에 생멸하여 本無今有, 今有後無 한 것을 두고 ‘無常’, 혹은 ‘덧없음’이라 이름 붙인다.
無常에 대한 典據를 찾아보면,『雜阿含經』제 10권 <262>에,
“色은 無常, 受想行識도 無常, 一切의 行은 無常하다”이라 하고,『中阿含經』제 29권 「無常經」에 “色은 無常이고, 無常은 苦다. 苦면 神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나,『雜阿含經』제 3권 <76>에
“色에는 我가 없다. 我가 없는 것은 곧 무상이다. 무상한 것은 苦다. 만약 苦라면 그 모두는 我가 아니요, 我와 다른 것도 아니요,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 라고 하였으며,『大般涅槃經』제 14 「聖行品」에는“諸行은 無常하고, 이것은 生滅의 法이다.”라고 하여, 이는 곧 外界의 모든 물질〔色〕이나, 그로 인한 정신적인 모든 작용들〔四蘊〕 역시 無常한 까닭에 (有爲한) 모든 존재가 無常하며, 때문에 無常은 苦의 원인으로 보았다. 또한 無常한 것은 生滅하여 고정된 실체가 없다하여 (有爲한) 모든 것은 無常하며 이는 곧 無我〔非神: 非我〕인 것이라 한 것이다.
『大般涅槃經』제 14권 「聖行品」에는 “선남자야, 나는 모든 법이 다 無常하다고 관한다. 어떻게 아는가 하면, 인연으로 말미암은 까닭이니, 만약 어떤 법이든지 인연에 따라 생기는 것은 無常한 줄 알지니라.”라고 하고,『大智度論』제 19권에 “이 有爲法은 모두 因緣에 속해 있으므로 無常이다. 앞에서는 없었다가 이제는 있다던가 지금 은 있어도 나중에는 없어지므로 無常하다. 또 나중의 무상한 相은 항상 유위법에 따르기도 쫓기도 하므로 유위법은 증감하는 일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일체의 유위법이 서로간에 침투하거나 억누르기에 無常하다.”라고 하고,『大智度論』제 23권에는 “一切의 有爲法이 無常하다는 것은, 새롭게 生滅하는 까닭이고, 因緣에 속하는 까닭이고, 늘지도 쌓이지도 않는 까닭이다. 그리고 生하는 때 오는 곳이 없듯이 滅하는 것 역시 가는 곳이 없다. 이런 까닭에 無常이라 이름 한다.”라고 하여, 因緣한 모든 것들 緣起法에 의해 생멸하는 모든 것들은 無常한 것이라 하였다.
『增壹阿含經』제 12권 「三供養品」에서
“이 三有爲法에는 三有爲相 있으니, 어떤 것이 세가지인가, 生起를 알고, 遷變하는 것을 알며, 마땅히 滅盡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나『顯揚聖敎論』제 14 「成善巧品」에 “無常性이라는 것은 이른바 有爲法을 말함이니 세가지 有爲의 相과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생기는 모양(生相), 두 번째는 없어지는 모양(滅相), 세 번째는 머물다 달라지는 모양(住異相)을 말한다.”라고 하여, 모든 유위법이 전부 因緣에 의해 생기고, 生住異滅의 三有爲相(또는 4相)과 합해져서 찰나에 생멸하고, ‘本無今有, 今有後無’ 하여 無常이라고 이름 한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無常의 설명과는 별도로『大智度論』제 43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갈파하기도 하였다.
“無常에는 2가지가 있다. 생각 생각마다 滅하는 것으로 일체의 유위법이 순간의 一念에 머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念念無常〕이고, 두 번째는 상속의 법이 무너지는 것을 무상이라 이름한 것〔相續無常〕으로 사람의 목숨이 다하여 것이나 불에 초목이 타는 것, 물이 끓어 증발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辨中邊論』에는, “無常에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망상된 것〔遍計所執〕을 가리켜 이것이 항상하지 않는 까닭에 無性無常이며, 두 번째는 갖가지 다른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依他起〕을 가리켜 일어남에 다함이 있는 까닭에 生滅無常이며, 세 번째는 완성된 것〔圓成實〕을 가리켜 상태가 轉變하는 까닭에 垢淨無常이라 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我도 아니고, 法도 아닌 것을 實我와 實法이라고 하는 迷執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잘못 분별하는 ①遍計所執性과 物이나 心등의 온갖 법은 모두 다른 인과의 이치에 의해 생기는 仮有의 존재로 인연에 의해 생긴다는 ②依他起性, 완성된 것, 진실한 것에도 自性이 없고 空하다는 것을 뜻하는 ③圓成實性 등의 徧依圓三性에 기인하여 無性無常(또는 無物無常), 生滅無常(또는 起盡無常), 垢淨無常(또는 有垢無垢無常)으로 나뉘는 것을 설한 것이다.
또『顯揚聖敎論』제 14권, 「成善巧品」에는 다음과 같이 6種 및 8種으로 無常을 분류하였다.
“6종의 無常은 ①無性無常, ②失壞無常, ③轉移無常, ④別異無常, ⑤得無常, ⑥當有無常이며, 8종의 無常은 ①刹那門, ②相續門, ③病門, ④老門, ⑤死門, ⑥心門, ⑦器門, ⑧受用門이다. 이중에 刹那와 相續의 2종의 無常은 一切處에 치우치고 病등의 三無常은 內色에 있으며, 心無常은 오직 이름으로 존재하고, 器와 受用의 二無常은 外色에 존재한다”라고 한 것으로 부언하자면 6종의 無常은 ①體性이 없어 無常함, ②무너져 無常함, ③변해 달라져 無常함, ④떠나 이별해 無常함, ⑤얻어 無常함, ⑥있게 되어 無常함을 말하며 8종의 無常이란, ①찰나의 도리, ② 계속하여 이어지는 도리, ③병드는 도리, ⑤늙는 도리, ⑤죽는 도리, ⑥마음인 도리, ⑦그릇인 도리, ⑧受用(경험하는 것)의 도리라 할 수 있다.
『大乘阿毘達磨雜集論』제 6권에는, “어떤 것들이 無常의 相인가. 12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서로 壞滅하고, 變하는 거짓된 것을 가리켜 ①非有相, ②壞滅想, ③變異相, ④別離相, ⑤現前相, ⑥法爾相, ⑦刹那相, ⑧相續相, ⑨病等相, ⑩種種心行轉相, ⑪資産興衰相, ⑫器世成壞相이다.라고 하여 無常을 12가지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결국 無常은 因緣에 의해 生滅하는 모든 것〔有爲法〕들의 體性인 것이며, 석가세존은 이를 “諸行無常”이라 說하여 현실세계의 문제점을 중생들에게 자각시킴으로써 “그래서 (혹은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는 大疑團을 일으켰다.
3. 常住의 불변성 常住는 범어로는 ‘nitya’, 빨리어로는 ‘nicca’로 항상 있다(거주한다, 산다)는 뜻으로 常이라고도 하고 常然한다고도 한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三世에 걸쳐 항상 존재하고 不變하는, 즉 生滅變異 하지 않는 것으로 因緣을 벗어난 존재, 인과관계를 벗어난 존재로 時空을 초월한 涅槃, 解脫과 연기의 理(法)등의 無爲法(asaṃskṛta dharma)을 常住하다고 한다.
『雜阿含經』제 30권 <854>에
“如來가 세간에 출현하던 하지 않던 法性은 常住하니, 이것이 如來가 스스로 깨닫고 이룬 깨달음이다.” 라고 한 것이나,『大般涅槃經』제 34권 「迦葉菩薩品」에
“十二因緣은 부처가 있으나 없으나 본체와 현상은 常住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緣起法性의 이치가 항상 불변함〔常住〕을 설명한 것이다.
또『勝鬘經』 「自性淸淨章」에 “세간의 언설에 따라 죽고 살고, 死는 것은 모든 根이 무너지는 것이고, 生한다는 것은 새롭게 모든 根이 일어나는 것이다. 如來藏은 나고 죽는 것이 아니다. 如來藏은 有爲의 相을 떠나고, 如來藏은 常住不變한다.”라고 하여 如來藏 즉 佛性 역시 常住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으며,『大般涅槃經』제34권 「迦葉菩薩品」에 “法身은 즉 이 常樂我淨에 있어 영원히 일체의 生老病死를 떠난다. 희지도 검지도 않고 길지도 짧지도 않으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으로 學도 無學도 아니다. 만약 佛이 세간에 출현하거나 않거나 이는 常住不動한 것으로 變易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여래의 모습인 法身(이나 化身, 報身)등이 常住不變하다 하다고 밝혔다.
佛性이나 여래의 法身 등이 常住不變하다는 것에 대해서
『大乘莊嚴經論』제 3권에는 “일체 제불이 모두 함께 常住하니 自性이 항상하기 때문이다. 일체 제불의 自性身이 常住하니 쉼 없이 항상하여 결국에는 無漏한 까닭이다. 일체 제불의 食身이 常住하니 상속하여 항상하여 법이 끊임없이 설해지기 때문이다. 일체 제불의 化身이 常住하니 비록 여기서는 멸하더라도 다시 저곳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여래의 三身이 모두 常住한다는 즉, 法身을 本性常, 報身을 無間常, 應身을 相續常 등의 三種常으로 말했으며,
『佛性論』「無變異品」에서는 “常住하는 것은 10종의 인연에 의한다. 10가지는 ①因緣無邊, ②衆生界無邊, ③大悲無邊, ④ 如意足無邊, ⑤無分別智無邊, ⑥恒在禪定無散, ⑦安樂淸凉, ⑧行於世間八法不染, ⑨甘露寂靜遠離死魔, ⑩本性法然無性無滅이다.” 라고 하여, ①因緣의 끝이 없음, ②衆生界가 끝이 없음, ③大悲의 끝이 없음, ④如意를 얻음에 끝이 없음, ⑤無分別智의 끝이 없음, ⑥항상 禪定에 머물러 흩어짐이 없음, ⑦安樂淸凉, ⑧세간의 8法을 행해도 오염되지 않음, ⑨甘露寂靜하여 死魔에서 멀리 떨어짐, ⑩本性이 저절로 나타나니 無生無滅하다는 10종의 因緣이 있음을 밝혔으며, 佛性의 不變하는 相에 대해 다음처럼 9가지로 6종과 3종으로 나누어 논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아홉가지 비유로 ①無前後際變異 ②無染淨變異, ③無生變異, ④無轉變異, ⑤無依住變異, ⑥無滅變異를 無變異라 이름하며 6종으로 뜻을 나누어 규명했다. 다시 6가지를 합하면 3가지가 되는데 첫째는 전후가 적정함이니, 이를테면 과거세나 미래세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둘째는 流가 없는 것이니 이를테면 無染淨異이다. 셋째는 無爲한 것으로 이를테면 生住滅 등의 사상이 없기 때문에 변이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妄想의 모든 법은 3가지로 變異하니 과보가 果報盡變異가 그 하나이고, 對治變異가 그 둘이고, 念念壞變異가 그 셋이다. 법신이 그렇지 않는 것은 이 3가지 과실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첫째의 전후가 적정하기 때문에 과보가 다 됨으로써 변이하는 것이 없고〔無果報盡變異〕, 둘째 유전이 없기 때문에 대치의 파괴로 말미암아 변이하는 것이 없으며〔無對治變異〕, 셋째 유위법이 아니기 때문에 찰나찰나에 멸함으로 말미암아 변이하는 것이 없는지라〔無念念壞變異〕 이것을 이름하여 無變異라 한다.
또『大般涅槃經』제 4권 「如來性品」에는 “여래가 常住하고, 法과 僧도 그러하다.”라고 하여 佛, 法, 僧 三寶가 常住함을 말하고 있으며. 제 9의 月喩品에서는 달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여래의 성품에 生滅이 없지만 衆生敎化를 위해 生滅하는 듯 보이는 것이라 하여 여래가 常住함을 설하고 있다.
“如來의 성품에는 실로 生滅이 없으나, 衆生敎化를 위해 生滅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常住는 無常한 존재가 그리는 영속성을 대변한 것으로 석가세존은 이에 대해 “涅槃常住”라 하여 열반에 이르러서 만이 영속할 수 있다는 해답을 제시하였고, 無常한 세계에서 涅槃에 이르기 위한 서포터인 佛, 法, 僧의 三寶도 常住한다하여 종교적 구색을 갖춤과 동시에 중생 개개인의 涅槃을 향한 發心을 중시하였다.
4. 無常과 常住의 상관관계 앞에서 살펴본 無常과 常住의 근거는 無常은 현실세계요, 常住는 종교적 이상세계를 말한다 할 수 있겠다. 이것은 현실과 이상이라는 막연한 상반 개념에 그치지 아니하고 시간과 공간 등 인간 경험과 사유를 기준으로 하여 보편적인 그것을 초월한 超越知와 超越境界를 常住라 하는 것으로,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갖을 수밖에 없는 인간 본성에의 해답을 제시한 것으로, 이는 종교로도 불교가 단순한 철학적 사유가 아닌 현실의 투철한 고민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상세계를 향하는 ‘믿음의 종교’라는 것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석가세존은 無常의 교설을 통해, 중생심으로 만나는 모든 존재를 不定한다 하여, 佛, 法, 僧 三寶등이 常住하여 法을 알아 바로 수행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涅槃의 교설을 설함으로서 그 끝을 명확히 하였다.
無常과 常住는 개념적으로는 상반된 개념일 수 있지만,『大般涅槃經』의 「梵行品」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여래는 오직 제불여래의 경계로 無常을 常이라 하고, 常을 無常이라고도 하는 등 覺者의 입장에서는 차별이 없을 수 있다. 이런 方便施設을 염두에 두고 중생이 처한 法界를 이해하고자 하면 그것은 항상 하는 것이 있기에, 항상 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상대적일수도 연기적일수도 있는 두 개념의 존재와는 별개로, 또 앞서 서두에 언급한 無常과 常住의 축으로 法輪이 轉한다는 단순한 사유와는 별개로〔그림 ①〕, 常住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 항상 하지 않는 것들이 流轉한다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으며〔그림 ②〕, 常住하는 核〔眞我〕을 정점으로 형성된 無常法界〔그림 ③〕로의 이해 등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常住의 核을 중심으로 하여 경계가 형성되어 있고 그 안을 無常한 것이 채우고 있을 것이라는 이해만으로는 종교적인 구원 혹은 해탈에의 믿음이 부족할 수 있기에 常住하는 핵〔我〕를 둘러싼 無常法界〔穢土〕과 그 밖의 常住法界〔佛國世界〕 〔그림 ④〕와 같이 표현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常住하는 핵은 衆生 개개인을 뜻한다 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마음이며, 佛性이다. ‘나’를 둘러싼 無常法界는 無明으로 미혹되어 갇혀 있다가 언젠가 반드시 벗어나야할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봤을 때 佛性이 갇힌 無常法界를 자각시켜 해탈과 열반에의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석가세존의 無常에 대한 교설이며, 이것이 불교이고 갇힌 無常世界를 뚫고 나아갈 힘을 기르는 것이 불교의 제 수행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선수행을 하여도, 염불수행을 하여도, 기도수행을 한다 하여도 이 수행들을 통해 常住法界에 이르기 위해서는 ‘啐啄同時’로 대변되는 成道의 필요충분조건인 機緣이 절실히 요구된다 하겠다.
<無常과 常住로 표현한 法界>
無常 (法輪) 常住
無常法界 ↑ ←常住法界→ ↓ 無常法界 常住 無常法界
常住하는 眞我 (佛性) 無常法界 常住法界 常住法界에 이르기 위해서는 ‘啐啄同時’로 대변되는 成道의 필요충분조건인 機緣이 절실히 요구된다 하겠다.
ⅰ) 조사의 방편설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拙稿는 無常과 常住를 소재로 하여 禪에 발현된 의미를 찾음에 목적이 있다 하였다. 이에 대해 祖師나 禪師의 사상을 두고 추상적으로 접근하여 서술할 것인가 혹은 발췌된 어록의 문답에 치중하여 서술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 볼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각각의 사상에 대한 서술을 뒤로하고 발췌한 일부 禪典을 통한 서술로 대신하려 한다.
『六祖大師法寶壇經』중에 육조혜능에게 승려 지철이 無常과 常(常住)의 뜻을 물어 답한 내용이 있다.
“제자가『涅槃經』을 항상 보아왔지만 아직 常과 無常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和尙께 자비를 구하오니, 설하여 주시옵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시길 “無常은 곧 佛性이며, 常은 곧 모든 선하고 악한 일체 제법과 분별심이다.” “화상의 말씀은 경문에 크게 어긋납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처의 心印을 전했는데 어찌 부처의 경전에 어긋날 수 있겠는가?” “경에는 佛性이 常住한다 하였는데 화상께서는 도리어 無常하다 하시며, 선하고 악한 모든 법과 나아가서는 보리심까지도 모두 無常한데 화상께서는 도리어 常住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경문과 서로 다르므로 배우는 이에게 의혹을 더욱 더해줍니다.” ... (중략) ... “너는 아느냐? 佛性이 만약 常住한다면 다시 무슨 선악의 모든 법을 말할 것인가. 나아가서 겁을 다해도 한 사람도 보리심을 발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까닭에 내가 無常하다고 말함이 바로 부처가 말한 참된 常住의 도리이다. 또한 일체 제법이 만약 한낱 無常할진데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기 自性이 있어 生死을 받아들일 것이니, 그렇다면 眞常性은 두루하지 않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常住한다 말하는 것이 바로 부처가 말한 참된 無常의 뜻이다.” 이것은 석가세존이 佛性을 常住不變한다고 했으나 그 體性이 無常과 常住의 어느 경계에도 치우지지 않고 中道를 지킨 경계임을 나타낸 것이다. 결국 無常과 常住의 경계가 凡夫의 보편적 사유로는 도달할 수 없는 覺者의 경계이며, 육조혜능이 無常에 집착-常住하는 지철을 위해 佛說을 顚倒하여 설한 方便說로 혜능이 말한 佛性의 無常함은 바로 법신의 적멸함에서 발현되는 해탈의 활동을 말함이며, 諸法이 항상하다고 함은 제법이 生生하되 본래 生이 없음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석가세존의 敎說에서 要諦를 깨친 육조혜능의 이러한 禪적 가르침은 영가선사의『證道歌』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諸行의 無常함이 바로 無我인 무상이며, ‘無生之生’을 아는 것이 바로 여래의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諸行이 無常하여 온갖 것이 空하니 이는 곧 여래의 大圓覺이요, ....(중략)..... 相 없고 空 없고 空하지 않은 것도 없으니 이는 곧 여래의 진실한 相이다."
앞서 살핀 육조혜능의 說義와 관련하여『趙州錄』에서 趙州從諗(778897)선사는 다음의 禪問答을 통해 有無의 경계를 깨뜨리고 있다.
(한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佛性이 있습니까?” 대사가 말했다. “없다” 學人이 (다시)물었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개에게는 어찌하여 없습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그것은 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佛性이 있습니까?” 대사가 말했다. “집집마다 그 문전에는 장안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이것은 개에게 佛性이 있느냐, 없느냐의 물음에 ‘없다’라는 부정적 견해와 ‘있다’라는 긍정적 견해를 반복한 것이다.
이는 질문자에게 話頭로서 疑團을 일으킨다는 방법론적 이해를 떠나, 有爲法에 끄달린 자에게는 ‘없다’고 한 것이고, 無爲法을 깨친 자에게는 ‘있다’고 한 것으로 깨달음이란 常과 無常, 我와 無我, 苦와 樂, 淨과 不淨 등 是非와 分別의 경계를 초월한 것임을 밝힌 것이라 하겠다.
이런 시비를 떠난 禪적인 경계에 대해 송대의 임제종 황기파 靑原惟信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승이 30년 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았을 때는 ㉠산을 보니 산이었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선지식을 친견하여 무언가 알고 나니 ㉡산을 봐도 산이 아니었고, 물을 봐도 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깨닫고 보니 ㉢산은 의연히 산이고 물은 의연히 물이다.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앞의 〔그림④〕를 통해 法界를 이해해 본다면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인 경계는 無常法界를 자각하지 못한 범부의 경계에서의 말이요,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닌 것은 無常法界를 깨달은 수행자의 경계에서의 말이요, ㉢다시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라는 것은 無常法界를 벗어나 常住法界에 다다른 覺者의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육조혜능의 말이나, 영가현각, 조주종심, 청원유신 등 禪師들의 가르침처럼 그들의 깨달음은 비록 경지는 다를지언정 석가세존이 증득한 깨달음과 다를 바 없다. 無常한 현실에 대한 疑團을 시작으로 현실에 대한 투철한 自覺을 통해 常樂我淨한 涅槃의 경지에 도달함에 동일한 방법과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은 깨달음에 대한 보편성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ⅱ) 기연의 사례 3장의 끝에서 언급한 대로 無常法界의 껍질을 뚫고 常住法界의 경지로 나아가려면 마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 ‘啐啄同時’로 대변되는 機緣을 필요로 한다.
無明을 벗고, 無常을 떠나 常住處로 향하고자 하는 불교에서의 수행이라면 그 유형이 한정되어 있지만 이 機緣에의 유형은 보편적이라기보다 개인마다 크게 다르다.
阿難尊者가 摩訶迦葉의 찰간대를 꺾어버리라는 소리를 듣고 용맹정진 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과 靈祐志勤이 복사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과, 香嚴智閑은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또 寶壽和尙은 두 사람이 싸우다 화해하면서 “面目이 없네.”라는 소리를 듣고 “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러한 機緣은 예상할 수도 없고 짐작할 수도 없이 어느 순간 지나가는데 玄則의 “丙丁童子來求火”에 얽힌 이야기처럼 (靑峰과 法眼 등) 서로 다른 禪師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으나 이야기를 해준 주체나 듣고 있는 상황에 따라 깨닫기도 하고 깨닫지 못하기도 하는 일이 있다.
이처럼 경전과 조사어록 등을 읽거나 법문을 듣거나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상 가운데 온갖 것들이 깨달음의 機緣으로 나타나지는데 이는 각각의 根氣에 따라 깨달음의 보편성만큼이나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은 ‘줄탁동시’의 기연을 만나 인과관계 내지는 그 순간의 심경의 상태가 각각의 機緣을 만나 표출된 것이다.
이것을 無常과 常住의 견지에서 이해해 본다면, 깨닫기 위해 필요한 줄탁동시의 機緣조차도 常住한 因緣法에 의해 지어진 無常한 것으로 常住法界로 들어서기 위한 方便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해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이는 無常한 것 없이는 常住한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며, 常住한 것 없이는 無常한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그 둘의 관계가 상호대립적 상반개념에 그치는 것이 아닌 유기적이고 상호의존적이며, 緣起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앞서 살핀 禪典의 인용문들처럼 禪에서는 여래경계에서나 가능한 방편을 단박에 꿰뚫고 어느 하나에 치우친 偏見 없이 외줄을 타듯 無常과 常住 등의 대립적 개념속에서 中道를 견지하며 悟道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無常과 常主의 경계를 넘나들며 외줄을 타는 듯한 禪의 행보는 자칫 범부의 눈에는 파격적이고 불규칙하며, 신비롭게 비춰질 수는 있으나, 그것들이 모두 中道와 般若의 線上에서 이탈하지 않은 파격 속의 정격을 견지하며 禪의 고유영역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할 필요가 있다.
5. 맺음말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拙稿는 그 범위가 불교 전체에 아니 미치는 곳이 없을 만큼 광범위할 뿐더러 철학적 사유의 주제나 종교학적 관점에서도 수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석가세존의 교설처럼 우리가 처한 현실세계는 모두 無常한 것이며, 그것을 여실히 깨달은 이후의 깨달음의 세계〔涅槃〕는 寂靜하며 常樂我淨한 常住不變한 것이라는 것이다. 석가세존의 이같은 인식에 따라 그의 교설은 無常을 통한 현실인식, 常住를 통한 이상실현이라는 구조를 갖는다.
결국 諸佛祖師의 모든 교설과 법문은 無常의 常住의 분별을 통해 無常한 현실을 常住하는 法을 통해 자각함으로써 常住하는 寂靜한 佛世界로 중생을 인도하는 方便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의 4장을 통해 禪宗에서는 이러한 방편에 대해 많은 禪師들 역시 禪問答 혹은 평범치 않은 언행으로 그것들을 표현한다는 사실 등을 살펴보고 그 機緣에 대해 살핌으로써 無常과 常住로 이룬 법륜이 석가세존의 근본교설에서 그치지 않고 禪宗에 까지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즉 中道와 般若로 대변되는 佛祖의 骨髓가 禪思想의 脈이 되어 禪宗에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拙稿의 맨 처음에서 가졌던 疑團에 대해 우리 중생들 모두는 각자 佛性이라는 常住하는 핵을 갖고 있으나 그것이 無明에 가려져 미혹된 상태에서 無常한 현실에 휘둘리며 살고 있는 바, 석가세존의 無常의 교설을 통해 이를 투철히 자각하고 常樂我淨의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수행을 하여 그 수행을 통해 줄탁동시의 機緣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끝으로 佛祖의 요체는 단순한 헛됨을 말하는 無常이나 영속됨을 주장하는 常住 등이 아니라 無常과 常住의 표현과 분별경계를 초월한 中道와 般若智에 있다고 할 것이다.
출처 :심우정(尋牛亭) 원문보기▶ 글쓴이 : 목우자(牧牛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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