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애국불교 天台宗의 怪力 연구 사찰수 160여 개, 신도수 200만 명, 승려수 500명… 강력한 중앙집권과 5년간의 승려 교육… 애국·생활·대중성 내세워
● 신도가 중심이 되어 사찰 관리, 僧과 俗이 따로 놀지 않는다. ● 강력한 중앙집권적 조직관리, 신도들이 사찰 재정 관리 ● 24시간 누구에게나 개방되고 있는 天台宗의 사찰 ●『관세음보살』 외치며 기도하면 마음이 합해져서 無心의 상태 도달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hanal@chosun.com) 3大 佛敎 종단
「대한불교 天台宗」은 사찰이나 신도 수 등 외형 면에서 曹溪宗(조계종), 太古宗(태고종)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불교 宗團이다. 天台宗의 현재 신도수는 약 200만 명, 사찰수는 약 160개, 승려수는 500명 가량이다. 천태종은 宗團이 住持 임명 및 사찰 운영 전반을 직접 통제하고 있다. 오늘날 天台宗이 우리나라 불교계의 대표 宗團으로 설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기자는 이런 물음을 안고 지난 5월25일 天台宗의 總本山(총본산) 救仁寺(구인사)로 향했다. 救仁寺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있다. 단양에서 북동쪽으로 구불구불한 33번 국도를 40여 분 달리면 소백산 수리봉 골짜기에 있는 救仁寺가 나타난다. 찾아간 날이 마침 「부처님 오신 날」 하루 前이라 절 입구부터 각양각색의 화려한 燈(등)이 방문객을 맞았다. 救仁寺 경내는 5층짜리 대법당을 비롯하여 삼보당·설선당·인광당·총무원 건물 등 50여 채의 사찰 건물이 가파른 계곡 사이에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건물 대부분은 철골 시멘트로 지어졌다. 사찰의 경내에서 산 봉우리 쪽으로 가장 높은 곳, 수리봉 頂上에서 보면 내리뻗은 골짜기 한가운데 27m 높이의 3층 목조 건물이 웅장하게 들어서 있다. 天台宗을 重創한 上月 圓覺 大祖師를 모신 大祖師殿(대조사전)이다. 무형문화재 제74호 大木匠인 申鷹秀(신응수)씨가 도편수를 맡아 8년간의 공사 끝에 2000년 완성했다. 救仁寺 祖師殿은 건립 초기부터 숱한 話題를 낳았다. 지금은 구하기 힘든 200~300년 이상 된 곧은 태백산 赤松(춘양목) 44만 재 가량이 사용되었다. 祖師殿의 지붕은 백자 제작용 흙으로 구운 「황금 기와」 3만여 장이 들어갔다. 宗團은 『국보급 건물을 만들겠다』는 의지 아래 祖師殿이 완공될 때까지 매년 10억원 이상의 자금을 투입했다고 한다. 이 祖師殿 내부에는 上月祖師의 坐像이 봉안되어 있다. 天台宗은 上月祖師를 天台宗 中興祖로 받들고 있다. 上月祖師는 고려 大覺國師(대각국사) 義天(1055~1101)이 세웠다가 조선 世宗 때 宗脈이 끊어졌던 天台宗을 540여 년 만에 중흥시켰다. 天台宗은 義天을 宗祖로 모시고 있다. 上月祖師의 救仁寺 創建 上月祖師는 1911년 음력 11월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상마읍리 봉촌에서 2代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密陽이고 속명은 準東(준동)이다. 上月은 法名이며 圓覺은 法號(법호)다. 上月祖師는 5세 때 祖父가 서당에 입학시켜 13세까지 한문을 공부했다. 15세 되던 해 삼척의 삼태산에서 100일간 용맹정진하였다. 이때 연못 위에 통나무 몇 개를 걸쳐 놓고 그 위에서 자지도 먹지도 않고 수행을 했다고 한다. 16세 때 上月祖師는 국내 名山大刹(명산대찰)을 두루 다니며 기도했다. 20세 되던 1930년부터 중국 불교성지를 순례하고, 티베트와 몽골을 방문하고 1936년 귀국했다. 그 후 강원도와 소백산을 중심으로 가난한 이와 병든 이를 구호하면서 수행을 계속했다. 이때 上月祖師가 병자를 고치는 등 신비한 능력을 많이 보였고, 그의 자비에 감복하여 따르는 이가 많았다는 게 天台宗의 설명이다. 天台宗에서는 『上月祖師가 정식 출가한 것이 15세 때이지만 일정한 스승이 없이 修行精進을 했으며, 오래 머무는 절 또한 따로 없었다』고 말한다. 1945년 1월 上月祖師는 전국 명승지를 두루 살핀 후 소백산 現 救仁寺 자리에 초가삼간을 짓고 修行精進을 시작했다. 그 며칠 뒤 天台宗의 2代 宗正이 된 南大忠(남대충·속명 益淳) 스님이 上月祖師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5월 단오에는 남자 신도 8명이 입산했다. 天台宗은 이날을 救仁寺 창건일로 지정했다. 上月祖師는 41세가 되던 1951년 12월28일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上月祖師는 이날부터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上月祖師는 宗團과 總本山 건립을 진행했다. 上月祖師는 1966년 8월 法華(법화)·天台 사상과 관음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天台宗의 重創을 선포했다. 上月祖師가 수행할 때 법화경의 깊은 뜻을 마음에 두면서 수행했고, 깨달음의 본질이 天台宗 교리의 근간을 이루는 법화경 사상과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上月祖師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이념으로 三諦圓融(삼제원융), 一心三觀(일심삼관), 會三歸一(회삼귀일)의 사상을 宗團의 기본 이념으로 내세웠다. 三諦圓融에서 三諦는 空(공)·假(가)·中(중)이다. 우주 만물은 모두 이 세 개의 眞理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圓融은 이 세 개의 眞理는 서로 융화하고 상호 상관하는 緣起(연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天台宗에서는 空·假·中의 이치를 한마음으로 보는 것을 一心三觀이라 하고, 이는 곧 天台 수행의 방법이 된다. 天台宗의 이러한 사상은 부처님의 중생구제의 가르침을 요약한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법화경)의 핵심 사상이기 때문에 天台宗은 法華經을 所依經典(소의경전: 기본이 되는 경전)으로 삼고 있다. 天台宗은 空·假·中의 진리를 나타내는 3개의 원을 포개어 놓고 그 안에 불교에서 마음의 번뇌를 부순다는 「금강저」를 그려 넣은 모습을 宗團의 상징마크(宗旗)로 정했다. 宗正들 上月祖師는 1974년 64세로 入寂했다. 그 후 南大忠 宗師가 2代 宗正으로 취임했다.
南大忠 宗師는 1925년 12월 충북 단양에서 태어났다. 21세 되던 해인 1945년 1월 上月祖師를 은사로 출가했다. 上月祖師가 天台宗 포교를 시작으로 기틀을 마련했다면, 南大忠 宗師는 天台宗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宗正에 오를 당시 약 70만 명이던 신도가 1980년대 이후 약 150만 명으로 늘었으며, 사찰도 두 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南大忠 宗師가 1993년 69세로 입적한 후 金道勇(60·속명 永春) 스님이 3代 宗正을 맡아 지금까지 오고 있다. 1944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金道勇 宗正은 1977년 救仁寺에 들어와 스님이 되었다. 그가 宗正에 오를 당시 法臘(법랍: 스님이 된 나이)이 불과 16세였다고 한다. 金道勇 宗正은 출가 후 지금까지 長坐不臥(장좌불와: 잠자리에 눕지 않는 수행)를 해 오고 있다고 한다. 天台宗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행하는 것을 「晝耕夜禪(주경야선)」이라 하여 上月祖師의 중요한 가르침으로 받들고 宗風으로 지켜 내려오고 있다. 天台宗은 「애국불교, 생활불교, 대중불교」를 宗團의 3大 지표로 내걸고 있다. 애국불교를 강조하는 天台宗은 모든 법당에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있으며, 법회時에는 반드시 국운 융창을 기원하는 순서를 포함하고 있다. 救仁寺를 돌아보고, 다음날인 「부처님 오신 날」에 天台宗 총무원장 田雲德(전운덕·67) 스님을 만났다. 그는 1981년 총무원장을 맡아 宗團을 실무적으로 이끌고 있다.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田스님은 出家 前 동국大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근무했다. ROTC 1期다. 田스님은 지금까지 3代째 宗正을 모시고 있다. 田스님은 1966년 2월 上月祖師를 만나러 救仁寺에 왔다가 그 자리에서 出家했다. 田스님은 『天台宗이 오늘날의 발전을 이룬 것은 上月 大祖師님의 원력이 그만큼 크고 깊기 때문』이라며 『上月 大祖師님은 正覺을 이룬 분』이라고 말했다. ―正覺이 무엇입니까. 『上月 大祖師님을 한 번이라도 뵌 사람은 그분을 「살아 있는 부처」라고 말했습니다. 보고 듣고 배워서 아는 것은 완벽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上月 大祖師님은 가 보지 않고, 듣지 않고도 아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正覺은 진리를 터득한 부처의 깨달음인데 上月 大祖師가 그런 분이었습니다』 田스님은 『上月祖師는 신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을 예견하고, 1967년 신도들과 함께 구인사와 영춘 사이의 도로를 닦았다』며 『홍수가 나서 신도들이 못 올 경우를 대비해 1973년 소백산 험준한 보발재(해발 600m)에 도로를 개설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신도들과 황폐한 산에 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나라 없는 불교 없다 天台宗에서는 일반 신도나 修行者들에게 『관세음보살』을 외치며 기도하게 한다. 田스님은 『根機(근기: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가 약한 修行者들에게 參禪보다 맞는 수행법이고, 소리를 통해 마음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존의 參禪은 話頭를 잡고 수행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수행법입니다. 大祖師님은 많은 기도법을 섭렵한 후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것이 修行者들이 수행하는 데 가장 좋다고 판단하신 겁니다. 一心으로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면, 번뇌를 끊고 성불할 수 있습니다. 이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수행법입니다』 ―宗團 운영을 중앙집권적으로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大祖師님은 天台宗을 중창하시면서 天台宗 발전에 있어 舊習을 답습하면 안 된다고 보시고 잘못된 것은 과감하게 개혁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宗團뿐 아니라 신도 조직을 일원화하고 체계화했습니다. 「그물코처럼 한 번 당기면 전체가 딸려 와야 힘 있는 宗團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현재까지 세 분의 宗正을 모셨는데, 그분들은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上月 大祖師는 영웅호걸상이고, 2代 南大忠 宗正은 자비하신 관세음보살상입니다. 2代 宗正은 말이 없고, 한평생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天台宗이 탄생하기까지 실제적인 일을 다 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現 金道勇 宗正은 眞人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욕심에서 벗어난 분입니다』 ―天台宗의 3大 지표인 애국불교·생활불교·대중불교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우리나라 불교가 대중과 함께하는 불교가 아니라 승려 중심, 사찰 중심의 불교가 되었습니다. 大祖師님은 민중불교·在家불교를 강조하면서 불교가 국민 속에 동화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이 생활 속에서 불교이념을 실천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애국불교를 내세운 것은 大祖師님 자신이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시련을 당했기 때문에 「나라 없는 불교 없고, 국가 발전 없이 불교 발전 없다」는 신념을 표현한 것입니다』 35만 신도를 가진 부산 三光寺 대중불교·생활불교를 표방한 天台宗은 도심 속에 사찰을 건립하고 있다. 실제 총본산인 救仁寺 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찰이 도심 속에 있다. 지난 5월31일 부산 三光寺를 찾았다. 부산 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옆에 있는 三光寺는 天台宗 사찰 중 신도수와 규모가 가장 크다. 三光寺는 부산의 天台宗 신도가 35만 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은 10만 명의 신도가 3만5000여 평 三光寺의 부지를 꽉 메운다고 한다. 三光寺에서는 매월 1일과 2일 정기 법회가 열린다. 지난 6월1일 법회를 하루 앞두고 많은 신도들이 철야기도를 하고 있었다. 부산 서구 대신동에서 왔다는 이손선(77·여)씨는 『이곳에 오면 친정에 오는 것보다 마음이 더 편해 자주 온다』고 했다. 天台宗 사찰은 24시간 사찰이 개방되어 있다. 『누구나 기도하고 싶을 때 와서 기도할 수 있는 도량을 만들어야 한다』는 上月祖師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기도하는 「晝耕夜禪」의 생활불교를 실현하기 위해서 사찰 개방이 필수라는 것이다. 법회가 있는 6월1일, 아침 일찍부터 三光寺는 분주했다. 법회가 시작되자 법회 장소인 「지관전」은 입구에서 3층까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上座제도 없애 법회를 마치고 三光寺 주지인 金道圓 스님을 만났다. 金道圓 주지는 『三光寺가 天台宗이 주창하는 생활불교·대중불교의 典型을 보여 주는 곳』이라고 했다. ―天台宗에서 절을 크게 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大祖師님께서 「많은 이가 오는 불교 道場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대승불교를 지향하기 때문에 사찰이 일부 수양자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짧은 天台宗에서 전통이라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法統에 있어서 곁가지를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一統一脈(일통일맥)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上座제도라는 것이 없습니다. 어느 큰스님 아래서 스님이 될 수 있는 제도下에서는 종단의 宗正이 바뀔 때마다 내분이 일어나고 복잡한 분파가 생깁니다. 우리는 總本山의 지시가 말단 신도에게까지 빠르게 전달되고 모든 것이 本山 중심으로 돌아가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신도들이 찾아 옵니까. 『하루 2000명은 항상 기도를 합니다. 기도 주간에는 4000~5000명 정도 될 겁니다. 어느 사찰보다 30~40代 남자 신도층이 두텁습니다. 신도 인력자원이 많아 봉사활동이 활발합니다』 ―부산 불교계에서 三光寺가 차지하는 위상은 어느 정도입니까. 『단일 사찰 중에 신도수가 가장 많습니다. 그래서 三光寺를 「부산 종교 1번지」라고 부릅니다. 부산 지역의 각종 불교행사에 사람이나 장비를 가장 많이 지원합니다. 이곳의 신도 간부들은 웬만한 사찰의 스님보다 더 바쁩니다』 金道圓 주지는 『신도들이 「三光寺가 시주 돈을 받아 사회에 환원하고 시민과 함께한다」는 인식을 갖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절에서는 1년에 두 번 4박5일간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佛敎 교리교육을 합니다. 매년 1000여 명의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교리교육도 실시합니다. 불교 하면 떠오르는 고리타분한 이미지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天台宗을 이야기하면서, 「신도회」 조직을 빼놓을 수 없다. 三光寺 金道圓 주지는 『天台宗의 재정운영과 사찰 운영 전반은 신도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며 『三光寺의 경우 신도들이 사찰 운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8% 이상 된다』고 했다. 5년 교육 後 승려가 된다 三光寺에 상주하는 스님은 주지를 포함해 5명이다. 사찰의 불공 의식을 진행하거나 도와주는 準성직자 개념의 「거사」들이 4명 있다고 한다. 반면 신도회와 信行단체의 간부는 약 2000명에 이른다. 宗團은 각 사찰의 주지뿐 아니라 신도회의 간부를 임명한다. 신도회 간부는 임기가 3년이고, 각 사찰의 주지와 스님들은 4년이다. 부산 三光寺 신도회 부회장 金炯大(김형대·76)씨는 『스님과 신도가 함께 절을 운영해 나가기 때문에 신도들의 소속감이 높다』고 했다. 『天台宗 신도로 등록되면 사찰에서 운영하는 무료 법률상담·세무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역 병원과 연계해 신도들에게 병원비를 할인해 줍니다』 天台宗의 신도가 되려면 교육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선 각 사찰에서 신도 등록을 하고 救仁寺에서 열리는 입교법회에 한 번 참석해야 한다. 그 후 다시 구인사에서 4박5일간의 기도를 마쳐야 신도로 인정이 된다. 불교계에서는 『天台宗의 스님 되기가 가장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다. 다른 宗團이 길어야 3~6개월간의 行者 기간을 마친 후 戒를 주는 데 비해 天台宗의 行者 기간은 3년이기 때문이다. 3년간의 行者 기간에는 救仁寺를 떠나지 못한다. 강원 교육을 포함한 3년간의 行者 기간을 마치면 授戒에 이어, 서울의 觀門寺에 개설된 금강불교대학 천태학과에 입학해서 2년간 불교 교리를 교육받아야 한다. 5년 의무교육인 셈이다. 이후 동국大 불교학부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天台宗이 세운 4년제 대학인 충남 논산의 금강대학교 불교학과에 진학한다. 行者 기간에,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수행을 하는 晝耕夜禪이 계속된다. 救仁寺는 영춘면 일대 약 7만 평의 땅에서 벼농사를 비롯해 고추·콩 등을 기른다. 天台宗의 500여 승려 중에 비구니 승이 절반을 넘는다. 天台宗의 비구니들은 조계종과 달리 삭발을 하지 않고 머리를 뒤로 말아 올려 핀을 꽂는다. 僧俗一如 天台宗은 일반인을 위한 다양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금강불교대학은 서울 觀門寺와 부산 三光寺에 개설된 2년제 불교 전문 교육기관이다. 지난 5월31일 저녁 부산 三光寺에 있는 금강불교대학 강의를 참관했다. 救仁寺에서 내려온 金勇岩(김용암·44) 교육부장 스님이 강의를 맡고 있었다. 오후 7시부터 2시간30분 동안 강의가 진행됐다. 강의를 마친 金勇岩 스님을 만나 보았다. 『저는 「信行입문」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습니다. 일반 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초급 과정입니다. 1년의 초급 과정을 마치면 다시 1년의 중급 과정을 들을 수 있습니다. 초급·중급 모두 週 1회 1년에 4과목을 가르칩니다. 이 과정을 마치면 교법사 과정에 입학할 수 있습니다. 週 2회 8과목을 들어야 합니다. 교법사 과정에는 1년에 70명 가량이 입학해서 80% 이상이 수료를 합니다』 金勇岩 스님은 『天台宗은 宗團에서 매년 포교 활동에 대한 감사를 실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간다』고 했다. 『天台宗 스님들은 보통 1인 多役을 맡고 있습니다. 저도 서울 삼룡사 주지이자 총무원 교육부장이며, 금강大(논산 所在 4년제 대학) 재단이사, 천태종 복지법인의 감사역을 맡고 있습니다. 어떤 스님들은 2개 이상의 사찰 주지를 맡기도 합니다』 ―天台宗의 조직 운영이 모두 上月祖師의 가르침을 따른 겁니까. 『大祖師님은 「僧俗一如(승속일여)」, 즉 신도들이 자발적이고 실천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천태종의 夏安居와 冬安居에는 스님과 신도 구분 없이 모두 동참합니다』 ―天台宗 불자들은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이게 수행에 어떤 도움이 됩니까. 『입으로 소리를 내면 소리와 마음이 합해져서 無心의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소리를 좇아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수행의 특징은 모든 수행은 「自力 수행」이란 것입니다. 自力은 닦고자 하는 마음이고, 이런 마음이 있으면 구원의 손길, 즉 他力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他力」은 중생이 누구라도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 자비의 손길을 펼치는 「부처님의 힘」입니다』 金剛大學 天台宗이 자랑하는 金剛대학교는 충남 논산시 상월면 대명리에 있다. 계룡산 자락에 있는 금강大는 현재 기숙사 棟과 본 강의 棟만 들어서 있다. 교정을 들어설 때 경치 좋은 콘도에 들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금강大는 4년제 대학으로 불교문화학부·통역학부·사회과학부로 편성되어 있다. 天台宗團은 天台宗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미래를 짊어지고 갈 人材가 불교문화학부에서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어·중국어·영어로 나뉜 통역학부는 외국어 전문 인력을 기르기 위해 개설된 학과다. 사회과학부에는 사회봉사 요원을 기르기 위한 사회복지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금강大는 각 학년 정원이 100명씩, 도합 400명이다. 그러나 2년 전 첫 신입생을 뽑았기 때문에 현재 2학년까지의 학생들만 재학 중이다. 신입생은 종교에 상관없이 선발하지만 수학능력시험 2등급 이상의 상위 점수를 받아야 지원자격이 주어진다고 한다. 수능시험 2등급이면 상위 11% 이내에 드는 성적이다. 입학한 학생들은 기숙사비와 학비 전액을 天台宗 宗團에서 지원받는다. 天台宗은 학교에 매년 80억원 가량을 투자하고 있다고 밝혔다. 종교학과 崔琮錫(최종석·51)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 앞에 편의 시설이 없기 때문에 학생들은 24시간 학교內에서 생활합니다. 학교는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침대가 딸린 기숙사를 1인 2실로 제공하고 있고, 이 기숙사에는 무료 PC방·탁구장·노래방·당구장 등의 오락시설이 있습니다』 금강大 총장은 金裕赫(72·김유혁) 前 단국大 부총장이다. 金총장은 현재 天台宗 전국 신도회 중앙회장직을 맡고 있다. 기자가 금강大를 찾은 지난 5월31일 金총장은 중국에서 온 손님 접대에 분주했다. 손님은 北京大에서 온 胡軍(호군) 철학과 교수와 그 일행이었다. 金총장은 앞으로 北京大와 금강大가 교류하기 위해 논의하는 중이라고 했다. ―금강대학을 어떻게 키울 생각입니까. 『첫째, 2006년 1월에 완공되는 도서관에 「족보연구 자료실」을 둘 계획입니다. 둘째, 한국이 오늘에 이른 과정을 보여 주는 「한국경제 발전사 자료실」을 만들 예정입니다. 외국에서 견학하러 왔을 때 지난 50년간의 한국 발전상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할 계획입니다. 셋째, 「사찰 자료실」을 만들어 소중한 우리나라 사찰 문화유산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義天이 입적한 북한 영통사 복원 서울 觀門寺(주지 변춘광)를 찾았다. 서울 서초구 우면동 「예술의 전당」 부근에 있다. 연건평 6700여 평에 지하 4층, 지상 7층 규모의 觀門寺에는 법당을 비롯해 국제회의실·박물관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어 天台宗 불교회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觀門寺는 天台宗이 최근 들어 활발하게 펼치는 對北사업과 각종 사회복지 활동을 집행하는 사찰이다. 天台宗이 세운 非정부기구(NGO)인 「나누며 하나 되기 운동본부」는 최근 북한 開城에 있는 靈通寺(영통사) 복원에 나섰다. 북한 영통사 복원을 위해 여섯 차례에 걸쳐 기와 46만 장을 전달했다. 영통사는 현재 80%까지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 「나누며 하나 되기 운동본부」 사무총장 金務元(김무원·46·天台宗 총무원 사회부장) 스님은 북한을 11차례나 다녀왔다. 金스님은 『영통사 복원 사업에 30억원 이상의 돈이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통사는 대각국사 義天이 출가하고 입적한 곳입니다. 天台宗에게는 聖地입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의 자유도 선전할 수 있고, 전통사찰도 복원하는 격입니다』 ―영통사 기와 지원 과정에서 북한이 합의서를 이행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기와를 싣고 개성을 관통해 영통사까지 세 번 갔다 주었습니다. 4차 기와 지원 차량을 보내려고 하는데, 북한이 기와를 「개성까지만 갔다 놓고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원칙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4차 기와 전달 일정이 두 차례 연기되었습니다. 기와 전달을 연기하면서까지 북한에 끌려 다니지 않은 것은 북한 측에 「한번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金務元 스님은 『결국 북한의 사정을 고려해 개성까지만 기와를 전달하기로 했지만 이 과정에서 북한은 약속의 중요함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 보이지 않는 곳의 봉사활동 天台宗은 사회복지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춘천의 노인복지회관이나 구미의 장애인복지관을 지방자치단체가 시설물을 지어 天台宗에 위탁운영을 한 것이다. 天台宗은 춘천에 콩나물 공장을 운영하면서 노인들의 일터를 마련해 주고 있다. 맞벌이 부부를 위해 서울 서초동에 270명, 망우동에 120명의 어린이를 수용할 수 있는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天台宗 복지재단의 李今福 감사는 『춘천의 노인복지회관에 3억원, 구미 장애인복지관에 5억원의 운영비를 투입했다』며 『각 복지시설에는 연간 1억여 원의 운영비가 별도로 지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天台宗은 결식아동을 돕기 위해 「3인 릴레이 운동」을 벌이고 있다. 세 명이 한달에 1만원을 내어 모은 3만원으로 1명의 결식아동의 점심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니르바나 자원봉사대」를 조직해서, 지금까지 700명의 자원봉사 호스피스를 배출했다. 총무원 사회부장 金務元 스님은 『天台宗은 정부나 사회가 미처 돌아보지 못하는 死角지대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 天台宗의 역사 天台宗은 중국 智者大師(지자대사·538~597)가 성립한 宗團이다. 智者大師는 중국 南北朝 말기와 隋나라에 걸쳐 활동했다. 智者大師는 혼란한 시대에 법화경을 따라 불교를 체계화하여 천태·법화 철학을 완성시켰다. 智者大師가 중국 浙江省(절강성)에 있는 천태산에서 수행했기 때문에 그가 창시한 교단을 「天台宗」이라고 부른다. 天台宗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나, 종파로 문을 연 것은 고려 대각국사 義天에 의해서다. 義天은 고려 제11대 임금 文宗의 넷째 왕자로 11세에 출가했다. 1084년 宋나라에 들어가 有誠法師(유성법사)에게 화엄과 天台宗의 깊은 뜻을 배워 깨우쳤다. 1086년 본국에 돌아온 義天은 숙종 2년(1097) 개경에 國靑寺란 절을 짓고 天台宗을 開宗했다. 義天은 고려 불교가 禪宗과 敎宗으로 갈라지며 대립하던 시기에 禪敎일치를 주장했다. 조선조 세종 6년(1424) 그때까지 남아 있던 불교의 7종파를 禪·敎 양종으로 통합하면서 天台宗은 禪宗으로 통폐합되었고 그 종맥이 끊어졌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각종 종파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곳곳에 사찰과 포교당을 짓고 활동을 하였다. 이때 일본의 帶妻僧(대처승) 제도가 우리나라에 이식되었고, 사찰운영과 僧風이 혼란해졌다. 광복 후 불교의 宗團은 일제시대 이후 불교 교단을 거의 장악하고 있던 대처승과 사찰 정화를 주장하는 비구승 간의 주도권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1962년 4월 비구승의 종단인 조계종이 출범하였고, 1968년 11월 대처 측이 「한국불교 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1966년 上月祖師가 「애국불교」, 「생활불교」, 「대중불교」를 주창하며 단양 救仁寺에서 天台宗을 重創했다. 天台宗은 한국 불교계의 3大 宗團으로 성장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사무총장 李泓坡(이홍파·관음종 총무원장) 스님은 『적어도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할 일을 몇십 년 만에 이룩한 天台宗은 한국 불교사의 새로운 역사를 수립한 宗團』이라고 평가했다. 출처 블로그 > 이사람 원본 http://blog.naver.com/les130/80004057877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http://blog.daum.net/mjpark39/164047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