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백도(白道)로 가는 길

白道 박만주 2017. 9. 28. 09:10

 

 

                                                                                                                        

      


     백도(白道)로 가는 길 
     
    논단 


    동학적 사유의 특성과 21세기 동학인의 좌표(중)
    최민자__ 성신여대 교수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놀란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어설픈 일인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 어떠한 존재인지,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르며 외치는 군중들의 갈채를 추구하거나 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인간은 우주라는 생명의 피륙의 한 올이다. 우주의 본질이 생명이며, 그 진행 방향이 영적 진화이고, 궁극적으로는 영혼의 완성에 이르게 하는 것이 우주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 어떠한 존재인지,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없다. 
     
    스스로가 누구인지조차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칭찬하거나 비난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칭찬이나 비난을 듣고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 둔다는 것, 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도 어리석은 짓인가! 세상사가 겉으로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 보일지라도 그 이면에 담긴 깊은 뜻을, 시련이 주는 교육적 의미를, 영적 진화의 의미를 새기게 되면 삶과 죽음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언덕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아우렐리우스는 역설적으로 말한다.

       현재 당신이 처해 있는 환경보다 철학을 연마하기에 더 좋은 환경이 없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우주 자연과 소우주인 인간, 전체성과 개별성에 대한 그의 깊은 인식은 부동심의 경지, 즉 아파테이아(apatheia)를 희구하며 사해동포의 세계 시민주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아우렐리우스의 정관(靜觀)은 18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이 『로마 제국의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에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그의 치적을 가리켜 ‘온 국민의 행복을 통치의 제일목표로 삼고 42년 간 로마 제국을 예지와 인덕(仁德)으로 다스린 역사상 유일한 시대’라고 평한 단초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물었다.
       “죽음이란 대체 어떤 것입니까?”
       “아직 삶의 의미조차 모르고 있거늘, 하물며 죽음에 대해서 어찌 알겠는가.”
       공자의 대답이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삶의 의미를 깨우치게 되면 죽음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죽음을 삶과 분리된 것으로가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옛 사람이 이른바 ‘거꾸로 매달린 고통을 푸는 것’으로 보게 되어 담담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한다.

     

    영의 본래 자리로 되돌아갔다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은 무덤을 향해 기어가고, 걸어가고, 달려가고 있다. 죽음은 삶이라는 나무 위에 맺어지는 열매라고 했던가. 슬프다, 존재여! 왜 사는지도 모르고 죽어가야 한다는 것은, 그리고 다시 태어남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우치기 위해 인간에게는 재물, 권력, 명예, 인기와 같은 교육 기자재가 주어진다. 그러나 주업(主業)인 공부보다는 근사하게 보이는 교육 기자재에 현혹되어 숱한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그러한 것들이 단지 교육 기자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부는 뒷전이고 교육 기자재를 갖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 인생을 낭비하거나 탕진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깨우친다는 것은 우주 자연의 모습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이 우주 자연의 모습을 닮아 순수성과 단순성, 성실성과 일관성을 견지할 수 있다면 삶과 죽음을 하나의 연결된 고리로 보게 되고 따라서 생사로부터 해방된다. 춘하추동의 사시가 순환하는 것과 같이 우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되면 불길할 것도 해로울 것도 하나 없는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참 좋은 날이 되는 것이다. 
     
    화산 폭발이나 대지진, 태풍이나 해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선도 악도 없다. 단지 자연현상일 뿐이다. 전체와 분리된 ‘나’라는 생각이 자리 잡는 순간 선과 악이 생겨나고, 행과 불행이 그림자처럼 따른다. 그러나 삶은 선도 악도, 행도 불행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에고의 해석일 뿐이다
     

    . 우주 속의 그 어떤 것도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에고라는 잣대로 분리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하여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원수는 영적 성장을 도우는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세상사라는 눈꽃을 바라볼 수는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눈꽃은 우리 영혼이 빛으로 충만할 때 녹아 없어진다는 사실을. 산 자든 죽은 자든, 사랑하는 자든 미워하는 자든, 잘난 자든 못난 자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우주만물은 ‘한생명’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우주가 ‘한생명’임을 체득하기 위한 것이다.

     


    21세기 동학인이 나아가야 할 길


       오늘도 길을 걸으며 나는 ‘그 길’에 대해 명상한다. 수많은 붓다들이, 보살들이, 성자들이 마침내 존재계와 하나가 되어, 영원한 무(無)의 향기가 되어 사라져간 그 길, ‘참나’로 가는 그 길에 대해 명상한다. 아직 집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아이들, 이제 막 집을 떠나려는 청소년들, 맹렬한 삶의 불길 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물신 숭배자들, 허위의식의 늪에 빠져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는 정신 숭배자들, 그들이 걷고 있는 그 길에 대해 명상한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는 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서 훗날 그가 이렇게 회상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는데 나는 인적이 드문 길을 택하였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이 시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쪽으로 여행 중인 한 나그네가 물과 불의 거대한 두 강(二河) 앞에 이르렀다. 남에 있는 불의 강과 북에 있는 물의 강은 너비가 각각 백보로 매우 깊으며 남북의 변(邊)이 없이 중간에 폭이 겨우 네댓 치 정도의 ‘하얀 길(白道)’이 있어 물과 불이 교대로 밀려들고 있었다. 두 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양쪽으로부터 물과 불이 번갈아 넘나드는, 바로 이 좁은 하얀 길뿐이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무서운 도적떼와 맹수들이 그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으므로 나아갈 길이라고는 오직 하나, 하얀 길밖에는 없었다. 나그네가 마음을 굳게 다지고 하얀 길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순간, 아미타불의 음성이 들려왔다. “올바른 생각과 올곧은 마음으로 이 길을 두려움 없이 가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그리하여 나그네는 의심 없이 하얀 길을 따라 걸었고, 마침내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이하백도(二河白道)’의 이야기다. 중국의 승려 선도(善導)가 설한 것으로 정토왕생에 이르는 경로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중생의 성냄과 미워함을 불의 강에, 사랑에 집착함을 물의 강에, 온갖 망상과 번뇌를 도적떼와 맹수에, 정토왕생을 바라는 청정한 신심을 하얀 길에 각각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하얀 길은 ‘참나’로의 길이며, 이는 곧 신으로의 길이다. 이 ‘하얀 길’의 우화는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심오한 메시지다.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곧 자신의 본성인 신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시인 알리기에리 단테(Alighieri Dante)가 남긴 불멸의 거작 『신곡(La Divina Commedia)』은 단테 자신의 영혼의 순례과정, 즉 잃어버린 신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당시는 물론 오늘의 인류 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의 3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신으로 가는 길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세 마리의 야수’(세 가지 아집: 색욕·교만·탐욕)에 의해 지배되는 ‘어두운 숲’(이성과 덕이 결핍된 삶)을 벗어나 먼저 지옥으로, 다음에는 연옥의 산으로 오르며 현세에 있어서의 지선(至善, 지상낙원)에 이른다. 산꼭대기에서 베르길리우스와 작별한 단테는 다시 성녀 베아트리체에게 인도되어 지고천(至高天)에까지 이르고, 그곳에서 한순간 신(神)을 친견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지옥편은 조각에, 연옥편은 회화에, 천국편은 음악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이는 지옥편이 예리한 조각적 표현으로, 연옥편이 섬세한 회화적 표현으로, 그리고 천국편이 시공을 초월한 음악적 표현으로 노래하고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옥은 물질(형상) 차원에 갇힌 무명(無明)의 삶의 행태를 말함이니 조각 작품처럼 표현되고 있는 것이고, 천국은 형상을 초월한 초(超)시공의 영역을 말함이니 음악적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다.


       『장자(莊子)』에서는 ‘천악(天樂)’ 즉 우주 자연의 오묘한 조화로서의 하늘음악을 노래했고, 『부도지(符都誌)』에서는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하늘 소리)이 계시니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초형상·초시공의 소리의 오묘한 경계를 나타낸 것으로 우주 삼라만상의 기원과 천국의 조화성을 이로써 보여 준다.
     
    지옥이 물질 차원에 갇힌 에고의 영역(어두움의 세계)이라면, 천국은 물질과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전체의식의 영역(빛의 세계)으로 하늘 음악은 바로 조화자의 말씀 그 자체다. 그리고 이 양단의 중간에 지옥보다 순화된 회화적 표현으로 연옥편이 나타나고 있다. 지옥편에서 연옥편을 거쳐 천국편으로의 여행은 물질에서 의식 차원으로의 변환, 즉 의식의 자기 확장을 의미한다.


       영혼이 가난해지면 걸신(乞神)이 자라기에 적합한 토양이 된다. 육체라는 집은 걸신으로 우글거리게 되고, 그 숱한 걸신을 먹여 살리자니 매일 먹이감을 사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걸신증’ 환자처럼 허덕이며 계속해서 먹을 것을 찾지만, 끝내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것을 충족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큰 도적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결국 허망한 소유욕으로 인해 우주 생명의 뿌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니, 소탐대실(小貪大失)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좀도둑은 물건을 훔치지만, 큰 도적은 나라를 훔친다. 물건을 훔친 좀도둑은 감옥에 가지만, 나라를 훔친 큰 도적은 왕좌에 앉는다. 그러나 그 본질이 반(反)생명인 물신(物神)은 태생적 한계로 인해 그 지배력이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서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위 ‘한 자리’ 하기 위한 발판일 뿐이다. 이런 사람의 논리는 지극히 간단명료하다. ‘한 자리’ 하는 데 도움이 되면 선이고, 방해가 되면 악이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독재자들이 권력의 마력 앞에 자신들의 영혼을 팔아 바쳤던가. 권력에 대한 집착, 그것은 일종의 병이다. 자기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사람일수록 돈이니 권력이니 명예니 하는 외적인 것에 대해 강한 집착을 한다. 이 지구학교에 있는 모든 것은 공부하기 위해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교육 기자재에 불과한 것인데, 공부는 뒷전이고 교육 기자재에 탐심을 일으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으니 이 어찌 병이 아닌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난 돈이나 권력 따위엔 관심도 없어.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오직 명예뿐이야.” 그러나 그 명예라는 것이 미덕이 없는 껍질뿐인 것이라면? 여기에는 마음의 속임수가 숨어 있다. 허식이 강할수록 진실에서 그만큼 멀어진다. 명예욕 또한 권력욕과 마찬가지로 소유욕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또 어떤 사람은 평생을 ‘하나님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선교 활동으로 보내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세속적인 것을 초월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마다 각자의 고유한 길이 있으니 역할이 다른 것이지, 종교계에 몸담고 있다고 해서 정신이 순화되고 성스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름을 통해 에고가 작용하게 되면서 ‘나’만의 ‘하나님’, 내 종교만의 ‘하나님’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나’와 내 종교가 동일시되고 교세의 확장이 곧 ‘나’의 확장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개인적 차원의 에고가 종교적 차원의 에고와 결합할 때 에고의 힘은 더욱 강력해진다. 종교적 광신이 불러오는 유혈충돌 또한 양 차원의 에고가 결합하여 나타난 경우이다.


       또한 현세보다는 내세에서의 행복을 희구하며 평생을 아낌없이 이타주의적으로 사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존재할 뿐, 나 개인의 행복은 문제가 되지 않아.” 그러나 이런 사람의 이타적 삶은 내세에서의 행복이 그 댓가인 셈이다. 어떤 댓가─그것이 현세에서의 것이든, 내세에서의 것이든─를 바라는 선행은 참사랑의 나타남이 아니다.
     
    아무리 선행을 하여도 그것이 댓가성에 기초한 것이거나 상을 받고자 하는 다른 목적이 있다면, 그 행위는 새로운 카르마(karma, 業)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중요한 것은 행위 그 자체보다는 어떤 마음자리로 임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연구와 사색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고자 하는 과학자나 철학자, 사상가의 삶은 어떤 것일까? 그들은 이성과 논리의 세계에 갇혀 있으며, 지식 축적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러나 진리는 초이성·초논리·직관의 세계로, 지식으로 닿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들의 지식은 진리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손가락을 진리의 달 자체라고 보는 데서 부질없는 공론(空論)이 일게 된다. 그리하여 ‘산을 버리고 골짜기로 돌아가거나 나무를 버리고 큰 숲으로 달려가는 격’이 되는 것이다. 지식의 한계를 깨달을 수 있을 때 보다 높은 단계로의 발전이 가능하다.


       평생을 선(禪)이나 명상 등의 수행에 몰입하는 정신 수행자들의 삶은 또한 어떤 것일까? 그들은 이성과 논리의 세계를 초월해 있으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진리에 접근하고자 한다. 비운다는 것은 순수해지는 것이고, 에고가 사라지는 것이고, 이는 곧 존재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는 비우는 것이 채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에고 차원의 육체적 자아는 본능적으로 소유하고 집착하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에고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에고의 사라짐은 공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정신 수행자가 삿된 마음을 일으키면 어두운 기운에 쉽게 감염된다. 온갖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이 없이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세속적인 성공에는 편법이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정신 수행의 길에 편법이란 것은 없다. 오직 쉬임없는 정진만이 있을 뿐이다. 비워야 한다는 생각도, 도(道)에 대한 집착마저도 방기되어야 궁극적인 ‘참나’[神]에 이를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의 삶의 형태가 다양한 것은 영적 진화의 단계에 따라 학습해야 할 과목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세속적인 삶을 살든 정신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든, 종교라는 통로를 통하든 통하지 않든, 우리 모두는 우리의 본신인 신(神)으로 가는 도상에 있다.
     
    어떤 사람은 오늘, 또 어떤 사람은 내일,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모레…, 거기에 이를 것이다. 언젠가 ‘존재의 집’에 이르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소를 타고 소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우리의 본신인 신을 찾아 천지사방을 헤매었다는 것을.

       내게도 소를 타고 소를 찾아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소를 타고 소를 찾아 나선 길에서 나는 한 수행자를 만났다.
       “‘콧구멍 없는 소’ 못 보았소?”
       내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산으로 가 보시오.”
       하여 나는 산으로 향했다.
       ………………………………
       종일토록 ‘콧구멍 없는 소’를 찾아 헤매었건만,
       소는 보지 못하고 다리가 쉬도록 아지랑이 능선만 밟고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 웃음 짓고 의식의 등불 밝히니,
       ‘콧구멍 없는 소’가 그 모습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의 신성이다.”
       “그러면 당신은 신(神)이십니까?”
       내가 되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라고 부르지 말라. 나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대 의식이 아직도 이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식이 물질 차원에 가까울수록 나는 형상화된다. 그대 의식 속에서 신이라는 형상을 지워버리면 나는 곧 그대 자신이다.

       여기서 ‘콧구멍 없는 소’란 고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의식 즉 우리의 신성을 말한다. ‘콧구멍 없는 소’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신이요 ‘참나’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했던가. 우리 모두는 보이지 않는 신의 그림자다.
     
    물체와 그림자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듯, 신과 우리는 본래 하나다. 사실 따로이 신이라고 부를 필요도, 신을 믿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의식이 이분화되어 있다 보니 설명의 편의상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콧구멍 없는 소’란 얽매임이 없는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우리가 자유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콧구멍 없는 소’를 찾아 나선 길에서 나는 많은 영혼의 순례자들을 만났다.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소를 타고 소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콧구멍 없는 소’와 만나기 위해서는 오직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을 뿐, 천지사방을 헤맨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 권력, 명예, 인기 등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콧구멍 없는 소’로 가는 길이 아님을 알게 될 때, 그리하여 진정한 포기가 일어날 때 그때 비로소 내면으로의 길은 열리게 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며 학습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지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라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이다. 어린아이의 단순함이 에고가 생기기 전의 단순함이라면, 깨달은 자의 단순함은 에고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의 단순함이다.
     
    말하자면 전자는 영혼이 아직 순례를 시작하기 전의 단순함이고, 후자는 영혼이 순례를 마치고 존재의 집으로 돌아온 후의 단순함이다. 익지 않은 단순함은 빗나갈 수 있지만, 무르익은 단순함은 빗나가는 일이 없다.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없이는 인간은 진화할 수 없다.


       에고란 말이 쌓인 것으로 말은 곧 생각이다. 묵언 수행의 비밀은 말없음을 통해, 생각의 끊어짐을 통해 에고를 지우는 데 있다. 그러나 수신[止行, 坐禪)만으로는 순수의식에 이를 수 없으며, 헌신적 참여[觀行, 行禪]가 병행될 때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완성에 이를 수 있다.
     
    헌신적 참여란 댓가성이 아닌 봉사성에 기초한 참여를 말한다. 영적 진화과정에서 수신과 헌신적 참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마치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가운데 고요함이 있는 것처럼. 수신과 헌신적 참여의 길은 곧 신으로 가는 길이다.
     
    아름다운 영적인 시로 이루어진 『바가바드 기타 The Bhagavad Gita』 경전에는 전사인 아르주나(Arjuna)가 비슈누(Visnu) 신의 화신인 크리슈나(Krishna)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크리슈나여, 당신은 행위의 포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또한 신성한 행위의 길을 권면(勸勉)하십니다. 지혜의 길(the path of wisdom, Jnana Yoga)과 행위의 길(the path of action, Karma Yoga),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 길입니까?”


       이것은 아르주나의 물음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물음이기도 하다. 여기서 ‘지혜의 길’과 ‘행위의 길’은 ‘지행(止行)’과 ‘관행(觀行)’ 또는 ‘좌선(坐禪)’과 ‘행선(行禪)’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전자가 행위를 멈추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면 후자는 사심 없는 행위를 하는 것으로, 이는 곧 수신과 헌신적 참여를 말함이다. 이 둘은 깨달은 자의 눈으로 본다면 결국 하나이며 그 목표는 같은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행위를 포기하는 길보다는 행위의 길이 더 낫다고 크리슈나는 말한다.


       “아르주나여, 행위의 길을 따르지 않고 완전한 포기가 일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지혜로운 자는 순수하고도 헌신적인 행위의 길을 통해 곧 브라만(Brahman)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브라만은 곧 ‘하나’님, 도(道), 불(佛), 진리, 순수의식, 우주의식, 전체의식, 우주의 창조적 에너지, 불멸 등으로 다양하게 명명될 수 있다. 이는 한마디로 궁극적 실재를 일컬음이다. 행위의 길에 대한 크리슈나의 영적인 가르침은 지금 이 순간에도 행위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심오한 메시지다.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인생이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두가지 선물인 아름다움과 진실 가운데, 아름다움은 사랑하는 마음속에서, 진실은 일하는 사람의 손에서 찾아내었다고 했다. 또한 자신의 꿈을 황금과 은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몰락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고 단언했다. 행복이란 아름다움과 진실의 동의어다. 사랑하는 마음과 헌신적인 행위는 에고를 초월하기 위한 명상이요 기도다. <다음 호에 계속>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http://blog.daum.net/mjpark39/16404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