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선(祖師禪)의 심성관(心性觀)과 수증관(修證觀) 조사선(祖師禪)
인도의 선보다 달마선이 뛰어나다고 하여 여래선(如來禪)이라는 말이 생겼으며, 그 중에서 특히 질적으로 높은 것을 조사선이라 부른다. 이 명칭은 당나라 후기에 나타났지만, 기초를 만든 것은 하택 신회(荷澤神會)와 마조 도일(馬祖道一) 계통의 선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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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선원,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
조사선의 심성관(心性觀) 달마(達摩)에서 동산법문(東山法門)의 홍인(弘忍)까지의 심성설(心性說)은 망념(妄念)이 진성(眞性)을 뒤덮고 있으므로 망념을 걷어내어야 진성이 드러난다고 하는 진-망(眞-妄) 이원(二元)의 심성설이었다. 그러나 중국 선종(禪宗)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혜능(慧能)은 자성(自性)의 근원성(根源性)을 강조하며 자성만 깨달으면 망념을 따로 걷어낼 것이 없다고 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여, 자성(自性) 일원론(一元論)의 색채를 띄게 된다. 일원론(一元論)의 입장이란 곧 깨달은 자의 입장에 선다는 의미인데, 마조(馬祖)는 혜능과는 달리 심(心) 일원론의 입장인 일심법(一心法)을 주장한다. 일심(一心)의 양 측면을 진성(眞性)과 망상(妄想)으로 구분하므로 자성(自性) 일원론은 아직 완전한 의미에서의 일원론은 아니다. 비록 망상(妄想)도 자성(自性)에서 나오므로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망상을 피하고 진성쪽으로 치우친 감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心) 일원론은 이미 진-망(眞-妄)의 분별을 넘어서 있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는 의미에서 일체법(一切法)은 심(心) 아닌 것이 없으므로, 마조의 심(心) 일원론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일원론이고 철저히 깨달은 입장에 서있으며, 또 그런 뜻에서 보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조의 심성설(心性說)인 일심법(一心法)에서는 심지법문(心地法門)․즉심시불(卽心是佛)․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 심(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심(心)의 의미는 만법(萬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겨나왔으니 마음이 만법의 바탕이라는 일체유심(一切唯心)과, 즉심시불(卽心是佛)이므로 일체법이 모두 불법(佛法)이어서 참[眞]을 떠나서는 설 곳이 없으니, 서는 곳이 곧 참[眞]이라는 일체개진(一切皆眞)․입처즉진(立處卽眞)의 심(心) 일원론이다. 이처럼 심(心) 일원론은 마조선(馬祖禪) 심성설(心性說)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마조계 조사선(祖師禪)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백장(百丈)의 어록(語錄)은 주로 수행의 방편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고 심성(心性)에 관한 언급은 별로 없다. 다만, 본성(本性)은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청정하고 공(空)한 것인데, 분별(分別)하여 염정(染淨)․범성(凡聖)을 구분하면 여러 가지 경계가 나타나므로 분별심을 버리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재(自在)한 것이 곧 해탈이라는 정도의 언급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여기에도 본성(本性)은 청정한데 분별심(分別心)으로 더럽혀져서 중생심(衆生心)이 된다는 선종 심성설의 기본 구도는 드러나 있다. 황벽(黃檗)의 어록인 『전심법요(傳心法要)』는 아마도 심성(心性)에 관하여 가장 자세하게 언급한 선종 어록일 것이다. 그러나 황벽이 마음을 설명하는 골자는 마조와 다를 바가 별로 없고, 같은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우선 모든 부처와 중생은 오직 하나의 마음일 뿐 그 밖에 다른 법(法)은 없으며,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바로 중생이라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일심법(一心法)을 천명한다. 또 안팎의 모든 경계는 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 하여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심지법(心地法)을 말하는 것도 마조와 같다. 또 이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늘 밝게 비추지만,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단지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을 마음이라고 여김으로써 마음의 본래 밝은 본체는 보지 못한다고 하여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과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망념(妄念)에 의하여 중생심을 설명하고 있는 것도 역시 마조와 같다. 다만 황벽의 특징이라면 마음은 마치 허공(虛空)과 같아서 없는 곳이 없으나, 생멸(生滅)․유무(有無)․형색(形色)을 벗어나 있으므로 무엇이라고 헤아려 보거나 말로 나타낼 수는 없다고 하여 마음을 허공(虛空)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황벽의 심성설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일진법계설(一眞法界說)이다. 마음의 체(體)가 허공과 같다는 것은 모양도 없고 장소도 없어서 볼 수가 없다는 점에서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허무(虛無)는 아니고 무상(無相)․무주(無住)의 끊임 없고 활발한 작용이 있어서 지금 보고․듣고․말하고․행동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황벽의 일진법계설(一眞法界說)이다. 또한 마음의 작용에는 영각성(靈覺性)이 있어서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에 의하여 무궁한 작용인 마음을 깨닫는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마음의 무궁한 작용성(作用性)과 영각성(靈覺性)에 의한 마음의 파악이라고 하는 점은 임제에 의하여 이른바 작용(作用) 또는 작용인(作用人)의 선(禪)으로 계승되어 임제종(臨濟宗)의 가장 큰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마조선(馬祖禪)을 계승하고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가 되는 임제는, 마음의 작용성(作用性)을 극대화하고 그 모든 성격을 하나로 모아서 ‘현용(現用)’ 또는 ‘사람[人]’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선(禪)을 개척하였다. 마조가 자성(自性)의 추상성을 극복하고 일심(一心)이라는 평상심(平常心)의 선을 만들어 선(禪)을 보다 현실적인 종교로 만들었다면, 임제는 마음이라는 말조차도 극복하고 ‘지금 눈 앞에서 작용하는 것’ 또는 ‘지금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하는 지극히 평범한 언어를 구사하여 선(禪)을 더욱 구체화, 일상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임제 역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심지법(心地法)을 계승하고 심즉시불(心卽是佛)의 일심법(一心法)을 말하고 있으며, 허공(虛空)처럼 무상(無相)․무주(無住)인 마음의 무한한 작용성과 만법(萬法)을 인식하는 작용을 말하지만, 임제는 그러한 근원자(根源者)인 마음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설법(說法)을 듣고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 이상으로 구체적이고 피부에 와닿는 평범하지만 진실한 말이 어디에 있겠는가? 임제선(臨濟禪)은 여기에서 최고의 종교성을 얻게 되는데, 이로써 중국선(中國禪)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사선의 수증관(修證觀) 달마(達摩)에서 혜능(慧能) 이전까지의 수증관(修證觀)은 수행을 쌓아서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수인증과(修因證果)의 점수법(漸修法)으로서 그 구체적인 수행법은 좌선간심(坐禪看心)이었다. 혜능은 자신의 언하변오(言下便悟)의 체험을 바탕으로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돈오법(頓悟法)을 제창하여 새로운 중국선(中國禪)의 문을 연다. 혜능의 언하변오(言下便悟)․돈오돈수(頓悟頓修)의 선(禪)을 계승한 마조는 우선 점수법(漸修法)인 수인증과(修因證果)의 주장을 부정하고, 그 실천법인 좌선(坐禪)에 의한 간심간정(看心看淨)의 수행도 불필요하다고 거부한다. 그리하여 마조는 언하변오(言下便悟)․돈오견성(頓悟見性)의 선(禪)에 알맞은 수행법(修行法)을 채택하는데, 그것은 설법(說法)과 문답(問答)을 통하여 스승이 직지인심(直指人心)의 가르침을 펴면, 제자는 그 가운데에서 기연(機緣)이 맞는 경우 돈오견성(頓悟見性)하게 되는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깨달음의 씨앗과 그 씨앗이 싹을 틔울 바탕이 되는 땅이 모두 당사자인 제자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고 보고, 다만 스승의 설법과 문답을 통한 가르침은 그 씨앗이 싹을 틔우는 데 필요한 간접적 조건을 조성하는 빗물과 같은 것으로 보는 입장으로서, 수행이 씨앗이 되어 깨달음의 열매를 맺는다는 수인증과(修因證果)의 입장과는 다른 입장이다. 이와 같이 설법과 문답을 통한 직지인심과 돈오견성이라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선법(禪法)을 확고히 정착시킨 사람이 마조이긴 하지만, 사실 이러한 선법은 돈오법(頓悟法)을 개발한 혜능에게서 이미 실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마조가 혜능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조선(馬祖禪)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학인(學人)은 어떤 정해진 수행의 과정을 실천할 필요는 없고, 다만 선(禪)을 알고자 발심(發心)하여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 전부이다. 특별히 정해진 수행의 과정을 실천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마조는 이른바 불수론(不修論)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마조선(馬祖禪)의 증오론(證悟論)을 간략히 말하면, 일념반조(一念返照)에 의한 견성(見性)이라고 할 수 있다. 차심즉불(此心卽佛)․삼계유심(三界唯心)․본유금유(本有今有)라는 마조의 일심법(一心法)에서는 일체법(一切法)을 작용하는 마음이라고 하므로 무엇을 가리키든지 곧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일체법이 작용하는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여기에는 무상(無相)․무주(無住)․무명(無名)의 순수한 작용 그 자체인 성(性)과 그 작용에 의하여 드러나는 유상(有相)․유주(有住)․유명(有名)인 상(相)이라는 두 측면이 있어서, 마음의 작용 가운데 상(相)을 따르면 이는 미혹한 중생심(衆生心)이고 성(性)을 따르면 이는 불심(佛心)이다. 상(相)을 따른다는 것은 밖으로 모양 있는 대상경계를 따르는 것이고, 성(性)을 따른다는 것은 견문각지(見聞覺知)․행주좌와(行住坐臥)하는 주인공인 자기 스스로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깨닫는다는 것은 밖으로 대상경계를 따르던 마음을 돌이켜서 안으로 스스로를 반조(返照)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회광반조(廻光返照)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 바로 선지식의 설법과 문답을 통한 직지인심(直指人心)의 가르침이다. 마조는 깨달음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수행은 불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므로, 마조선에서 수증(修證)의 관계는 불수돈오(不修頓悟)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마조의 불수돈오(不修頓悟)는 혜능의 돈오돈수(頓悟頓修)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혜능의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내용은 정혜불이(定慧不二)의 불이법(不二法)에 바탕한 오수동시(悟修同時)로서 사실상 돈오(頓悟)만 말하고 수행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혜능은 불수(不修)나 무수(無修)라는 말은 사용치 않고 돈수(頓修)라 하고 있는데 비하여 마조는 분명히 불수(不修)를 말하고 있는 것이 발전된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혜능의 언하변오(言下便悟)․돈오견성(頓悟見性)의 선(禪)은 마조에 와서 그 의미와 수증(修證)의 방법이 확실히 틀을 잡게 되어 이른바 중국 조사선(祖師禪)의 완성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마조 문하의 선(禪)은 후대 임제종(臨濟宗) 계통에서 간화선(看話禪)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모두 그 기본적인 틀이 마조의 선(禪)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다만 각 조사마다 나름의 특색있는 방편(方便)의 사용이나 설법(說法)에서 강조하는 점을 달리하는 정도가 갈라질 따름이다. 마조(馬祖)의 3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백장회해(百丈懷海)는 내적(內的)으로 마조선(馬祖禪)을 그대로 계승하여 그것을 외적으로 제도화시켰다. 백장은 선승(禪僧)이 거주하는 절을 새로이 만들었는데, 그 절의 구조는 이제까지의 절들과는 달리 방장(方丈)․법당(法堂)․승당(僧堂) 등의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선사(禪寺)의 구조는 곧 그 속에 거주하는 대중(大衆)이 혜능과 마조에 의하여 새로 확립된 중국선(中國禪)에 걸맞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하여, 그 절에서 교화(敎化)의 주인이 되며 학인(學人)들의 스승인 장로(長老)가 거주하는 방을 방장(方丈)이라 하고, 불상(佛像)을 모신 불전(佛殿)을 세우지 않고 부처와 같은 존재인 조사(祖師)가 설법(說法)하는 법당(法堂)을 두었으며, 모든 학인(學人)들이 함께 생활하도록 승당(僧堂)을 두었는데, 승당은 곧 학인들이 먹고 자고 공부하는 생활 공간이었다. 대중(大衆)은 승당(僧堂)에서 살면서 장로(長老)의 상당설법(上堂說法)이 행해지면 모두가 열을 지어 앉아서 듣고, 장로와 학인이 또는 학인과 학인이 서로 빈주(賓主)가 되어 선문답(禪問答)을 주고 받으며 공부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은 앞서 마조의 수증관(修證觀)에서 살펴본 마조선(馬祖禪)의 수행형태인 설법(說法)과 문답(問答)에 의한 수행의 구체적인 실천 모습인 것이고, 백장은 그러한 실천을 위하여 그 실천에 걸맞는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혜능에서 시작하고 마조에게서 완성된 언하변오(言下便悟)의 새로운 중국선(中國禪)이, 백장에 와서는 외적(外的) 형식까지 완성을 보았던 것이다. 한편 『백장록(百丈錄)』에 나타난 백장선(百丈禪)의 중요한 하나의 특징은 설법과 문답에서의 언어에 대한 반성이다. 그것은 설법과 문답을 통한 새로운 선수행(禪修行)의 문제점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 문제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경처(究竟處)에 들어가지 못했으면서도, 스승의 설법의 요점을 잘 파악하여 나름의 견해(見解)를 세우고, 그것으로써 입처(入處)를 얻은 것으로 여기는 학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방편에 불과한 언어를 방편으로서 극복하고 넘어가 선(禪)의 입처(入處)를 얻지 못하고 방편인 언어에 매여 벗어나지 못하는 이러한 병폐는, 사실 설법과 문답이라는 형식을 통한 직지인심(直指人心)과 돈오견성(頓悟見性)이라는 선법(禪法)에서는 피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하변오(言下便悟)․돈오견성의 선법(禪法)을 개발한 혜능 자신이 이미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백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언어의 구속 곧 지해(知解)의 구속을 벗어나야 선(禪)에 들어간다고 강조하며, 그 해결책의 하나로 삼구투과(三句透過)라는 방편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삼구투과(三句透過)란, 초선(初善)에서는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하나의 입장을 지키고, 중선(中善)에서는 초선의 입장을 버리며, 후선(後善)에서는 초선의 입장을 버렸다는 생각[知解]도 버린다는 구조를 가진 수행법(修行法)이다. 이것은 학인이 설법이나 문답을 통하여 올바른 지해(知解)를 얻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입처(入處)를 지시하는 방편이며, 궁극적으로는 그 지해(知解)를 벗어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마음의 깨달음을 얻어야 올바른 입처(入處)에 들어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황벽이나 임제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예컨대 황벽은 학인들이 교설(敎說)에서 지해(知解)를 통해서는 많이 깨닫지만 마음에서의 깨달음인 심해탈(心解脫)은 얻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심해탈을 얻어야 성불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임제는 많이 들어서 아는 것으로서 무슨 현지(玄旨)를 얻은 듯이 착각하는 무리들을 극렬히 비난하고 깨달음이란 묵연(黙然)히 계합(契合)하는 것이지 말에 있지 않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방편인 언어를 극복하는 문제는,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선(禪)의 본질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설법과 문답을 수행의 방법으로 하는 조사선(祖師禪)에서는 그 교육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열쇠였다. 그러므로 이른바 선문답(禪問答)이라는 특별한 문답법(問答法)이 개발되기에 이르렀고, 나아가 간화선(看話禪)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 필연성도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장에게서 배운 황벽(黃檗) 역시 마조선(馬祖禪)의 기본적인 면들은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므로 수인증과(修因證果)의 조작적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부정(否定)하고 있다. 황벽의 가장 특징적 수증관(修證觀)이라면 그것은 곧 무심수증(無心修證)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심(無心)이란 곧 용심(用心)치 않는 것인데, 용심(用心)치 않는다는 것은 생심동념(生心動念)이 없는 것을 말하고, 생심동념(生心動念)이 없다는 것은 상(相)에 집착하여 경계(境界)를 취하는 망념(妄念)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무심(無心)은 곧 일체의 상(相)을 떠나는 것이고, 또 제연(諸緣)을 쉬고 망상분별(妄想分別)치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심(無心)하면 본체(本體)가 저절로 나타나므로 무심(無心)은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무심(無心)하여 깨닫는다는 것은 곧 말없이 계합(契合)하는 것이니, 밖으로 경계(境界)의 상(相)에 끄달려 망상분별(妄想分別)치 않고 무심(無心)해지면 심성(心性)의 본체(本體)가 저절로 드러나, 따로 마음을 일어키지 않고 말없이 그 본체(本體)에 계합(契合)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심(無心)하여 묵연(黙然)히 계합(契合)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공적(空寂)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무심(無心)을 통하여 계합(契合)하는 본래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이 무상(無相)․무주(無住)이지만, 동시에 지금 여기서 활발히 살아 움직이며 지각(知覺)하고 행동(行動)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망상(妄想)을 짓지않고 무심(無心)하게 되면 무상(無相)․무주(無住)의 그 순수한 작용에 계합(契合)하여 더욱 활발히 살아 있게 되지 공적(空寂)에 빠지는 일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황벽은, “바로 지금 말하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다.”라 하고, 또 “다만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곳에서 본래 마음을 알라.”고도 하며, 또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모든 소리와 색이 모두 부처의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마음의 활발한 작용성(作用性)은 이미 『단경(壇經)』에서 혜능이 무주(無住)를 근본(根本)으로 한다고 밝힌 이래로 남종 돈오선(頓悟禪)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 마조가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방편으로 즐겨 사용한 것이 행동을 유발시켜서 움직임 속에서 마음을 파악하도록 유도한 일이라든지, 백장이 삼구투과(三句透過)라는 방편을 통하여 무주(無住)를 강조한 것이라든지, 황벽이 견문각지(見聞覺知)․어묵동정(語黙動靜)이 모두 부처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 등이 모두 마음의 살아있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활발한 작용을 누구보다도 강조한 조사(祖師)가 바로 임제이다. 임제의 선은 한 마디로 살아 움직이는 선(禪)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임제가 깨달음의 대상인 진심(眞心)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마음’이라는 비교적 정태적(靜態的) 용어 보다는, ‘청법인’(聽法人)이라든지 ‘무의도인’(無依道人)이라든지 ‘지금 눈 앞에서 듣고 있는 것’이라든지 하는 훨씬 동태적(動態的)이고 현용(現用)의 의미가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임제선(臨濟禪)은 바로 이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다. 임제는 ‘이 사람’의 특징을, 만법(萬法)이 생겨나오는 바탕이며, 만법을 인식하는 주체(主體)이고, 모양도 없고 뿌리도 없이 활발하고 자재(自在)하게 작용한다고 하고, ‘이 사람’이 바로 조사(祖師)요 부처라고 한다. 또 만법과 ‘이 사람’의 관계를 보면, 만법은 ‘이 사람’을 근원(根源)으로 하여 나타나므로, ‘이 사람’과 만법은 같은 현상을 두 측면에서 부르는 명칭이며, 이 사람이 유일하게 진실하고 만법(萬法)은 공상(空相)으로서 명칭과 말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부처요 조사인 ‘이 사람’을 깨닫는 방법은, 밖으로 남의 말이나 언구 위에서 지해(知解)를 일어키지도 말고, 대상경계 위에서 상(相)을 따라가지도 말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닦아서 이룬다는 생각도 버리고, 오직 지금 당장 스스로를 믿고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지금 듣고 말하고 생각을 내며 살아 움직이는 ‘이것’을 파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로써 보면 마조계(馬祖系) 조사선(祖師禪)의 수증관(修證觀)은, 첫째는 수인증과(修因證果)의 점수법(漸修法)을 부정하는 불수론(不修論)과, 둘째는 설법과 문답이라는 형식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방편을 통하여 학인이 스스로를 회광반조(廻光返照)토록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언하변오(言下便悟)의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유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선법(禪法)이라는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물론 지금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일심(一心)의 작용(作用)이 만법(萬法)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심성설(心性說)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이미 제5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또 하나 조사선(祖師禪)의 수증관(修證觀)에서 지적해야 하는 것은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하는 방법이 설법과 문답이라는 언설(言說)을 통한 교육이므로, 어떻게 언설이라는 방편을 극복하고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참된 선(禪)의 길에 입문(入門)하느냐 하는 것이 그 교육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설법과 문답은 이른바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방편인 손가락에 불과한데, 어떻게 하면 학인이 손가락에 머물지 않고 손가락을 통하여 달을 보게 하느냐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식(善知識)들은 언설(言說)에 미혹되지 않고 언설을 통하여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하는 문제, 나아가 언설을 포함한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여러 방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서 언급하고 있으며, 나아가 선문답(禪問答)이라는 조사선(祖師禪)의 독특한 대화법(對話法)을 개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혜능 이후 남종(南宗) 조사선(祖師禪)의 공통된 수증관(修證觀)은 불수돈오(不修頓悟) 혹은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수증관(修證觀)은 곧 혜능 이후의 일원적(一元的) 세계관의 반영이다. 혜능 이후의 불이법(不二法) 즉 일원적(一元的) 세계관에서는 필연적으로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수증관(修證觀)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만, 혜능의 돈오선(頓悟禪) 나아가 불수론(不修論)을 주장하는 남종(南宗) 조사선(祖師禪)의 선법(禪法)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남종 조사선의 분명한 이해를 위하여 다시 한번 돈오돈수(頓悟頓修)․정혜불이(定慧不二)의 일원적 수증관의 의미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미오(迷悟)와 돈점(頓漸)은 사람에게 있을 뿐, 법(法)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혜능이 말하고 있듯이, 이원적 관점은 항상 중생의 전도된 관점이지 법(法)은 불이법(不二法)이다. 즉 세계는 하나의 세계일 뿐인데, 사람이 어리석어서 미오(迷悟)와 돈점(頓漸)을 말하는 것이다. 세계는 인식(認識)되는 세계 즉 마음에 의식(意識)되는 세계이다. 의식(意識) 속에 나타나는 세계는 미오(迷悟)․돈점(頓漸)의 불완전한 이원적(二元的) 세계로서 번뇌가 따로 있고 보리(菩提)가 따로 있다. 그러므로 이원적 세계는 진망(眞妄)․호오(好惡)의 상대적 갈등세계이다. 그러나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다양한 의식세계는 모두 일심(一心) 혹은 일성(一性)에 속한다. 일원적 세계에서 상대적 갈등이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중생은 의식(意識)의 세계에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하므로 이원적(二元的) 세계의 갈등상황을 해탈할 수가 없지만, 일심(一心) 혹은 일성(一性)을 깨닫는 견성(見性)을 체험하면 그 갈등상황이 스스로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허구임을 알게되고, 따라서 갈등상황은 있다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되어버린다.
즉 갈등상황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갈등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여 중생의 미혹한 이원적 관점도 견성하여 지혜를 얻고 보면 모두 일성(一性) 혹은 일심(一心)의 일일뿐이고 별개의 무엇은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어리석던 중생이 지혜롭게 된 것일 뿐이고, 버리거나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리석은 집착(執着)을 버리고 반야의 지혜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집착이건 지혜이건 모두 일심(一心)의 작용이고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이 둘이 다르다고 착각하는 것이 바로 미혹된 중생이다. 중생은 이원적 의식(意識)의 세계에 매여있기 때문에 집착과 지혜가 다르다고 보지만, 견성(見性)하고 보면 그 다른 의식들이 사실은 같은 하나의 마음일 뿐이다. 즉 중생은 다름[諸相]을 보지만 부처는 그 다름[諸相]이 곧 같음[非相]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도는 닦아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道不用修].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이므로, 도는 곧 마음이다. 마음은 어리석을 때나 지혜로울 때나 그 마음 그대로일 뿐, 만들어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을 깨닫는다는 일이 있을 뿐, 그 깨달음이 수행이 원인이 되어 얻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수돈오(不修頓悟)니 돈오돈수(頓悟頓修)니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말하는 것도 아직 중생의 이원적(二元的) 입장에 있는 것이고, 깨닫고 보면 본래 미혹과 상대되는 깨달음이란 것도 없다. 그러므로 무수무증(無修無證)을 말하는 것이다. 이치[理]의 측면에서는 이처럼 돈오돈수(頓悟頓修)니 불수돈오(不修頓悟)니 무수무증(無修無證)이니 하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견해(見解)이지만, 사실[事]의 측면에서는 습기(習氣)라는 문제가 있다. 즉 비록 언하(言下)에 견성(見性)하여 반야지(般若智)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익혀온 습기(習氣)는 금방 바뀌어지지 않으므로 이전의 습관대로 분별사량(分別思量)에 떨어지기가 쉽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의식(意識)의 장벽을 무너뜨렸으므로 이전처럼 완전히 사량분별의 이원적 세계에 머물지는 않는다. 분별의식의 감옥은 빠져 나왔지만 습기(習氣) 때문에 지금까지 익숙했던 감옥 주위를 기웃거린다고 할까, 그런 상태이다. 따라서 이 때에는 혜능이 말하는 반야행(般若行)을 열심히 실천할 필요가 있다. 마치 날때부터 감옥에서만 살았던 사람이 이제 감옥밖으로 나와 자유세계에 적응하는 훈련을 하는 것처럼. 이러한 반야행(般若行)이 바로 보림(保任)이라고 하는 오후(悟後)의 수행이다. 과거의 습기 때문에 반야행을 완전하게 행하지는 못하나, 이제는 습기조차도 모두 일심(一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과거의 이원적(二元的) 입장과 같지는 않다. 즉 본래 감옥이란 없고 스스로가 감옥 속에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감옥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감옥 속에 있다는 익숙했던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때에는 감옥은 본래부터 없다는 진실을 더욱 확실히 다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남종 조사선의 수증관(修證觀)에서 돈점(頓漸)의 문제는, 이치[理]로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옳지만, 사실[事]의 측면에서는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직 돈오점수(頓悟漸修)만을 혜능선(慧能禪)의 정통이라고 하는 종밀(宗密)의 주장은 사실의 측면에만 근거하고 있는 불완전한 수증관(修證觀)임을 알 수 있다. 장경사(章敬寺) 회휘(懷暉)를 계승한 천복사(薦福寺) 홍변(弘辯)은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에 관하여 말하기를, 마치 굶던 사람이 밥을 먹더라도 첫 숫가락에 배가 부를 수는 없는 것처럼 자성(自性)을 문득 깨닫더라도 습기(習氣) 때문에 점수(漸修)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즉(理卽) 돈오돈수(頓悟頓修)요 사즉(事卽)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남종 조사선의 수증관(修證觀)은, 다음과 같은 위산영우(潙山靈祐)의 말에 잘 드러나 있다. 그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돈오(頓悟)한 사람도 다시 닦습니까?” 위산(潙山)이 답했다. “만약 진실로 깨달아 근본을 얻어 그 스스로 알 때에는 닦고 닦지 않고 하는 것은 두 개의 상대적인 말일 뿐이다. 지금 초발심한 사람이 비록 인연따라 한 생각에 문득 진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아직 무시광겁(無始曠劫)의 습기(習氣)는 문득 맑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에는 모름지기 그로 하여금 현업(現業)으로 흘러가는 식(識)을 맑게 정화토록 해야하니 이것이 바로 닦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따로 그가 닦아 나아갈 법(法)이 있다고 해서는 안된다. 가르침을 듣고서 진리에 들어가니, 깊고 묘한 진리를 들으면 마음은 본래 두루 밝아서 미혹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이때에는 비록 온갖 묘한 뜻을 접고 펼친다 하여도, 이것은 곧 앉아서 옷을 입고 벗는 것으로 살림살이를 삼는 것과 같다. 요점을 말하면, 진리의 바탕에서는 한 티끌도 용납하지 않으나 만행(萬行)의 문에서는 한 법(法)도 버리지 않는다. 만약 이 자리에서 바로 깨달으면, 범(凡)이니 성(聖)이니 하는 생각은 사라지고 본체의 참되고 항상함이 드러나며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니 그대로 여여(如如)한 부처이다.” ==================================================================
선오후수(先俉後修)
그 이전에 점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돈오 후에 점수한다[先悟後修]는 주장이 있다. 당(唐)나라 신회(神會)의 남종선(南宗禪) 계통은 후자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후의 선종은 주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입장을 취하였다.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론’도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오(悟)’를 햇빛과 같이 갑자기 만법이 밝아지는 것이고, ‘수(修)’는 거울을 닦는 것과 같이 점차 밝아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면서, 만일 깨우치지 못하고 수행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 하여 선오후수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조사선(祖師禪)의 심성관(心性觀)과 수증관(修證觀) 진실 2009/11/18 23:01 http://blog.naver.com/wholesavior/140095284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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