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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수행신심분/네 가지 관(觀)을 설함

白道 박만주 2017. 10. 24. 08:43

 

 

 
 

 

 

 

                         제4장 수행신심분/네 가지 관(觀)을 설함             

 

 

글쓴이: 법상스님  http://cafe.daum.net/omahum/DT9S/17 

 

제4장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네 가지 관(觀)을 설함

 

復次若人唯修於止 則心沈沒

부차약인유수어지 즉심침몰

 

或起懈怠 不樂衆善 遠離大悲 是故修觀

혹기해태 불각중선 원리대비 시고수관

 

다음에 다시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지(止)방편문만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침몰하여지고 혹은 게으른 마음을 일으키어 모든 착한 행위를 즐겨 행하지 않으므로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된다. 이 때문에 관(觀)방편문을 닦아야만 한다.

 

[강의]

여기서서는 지(止)만 닦는 수행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여 관(觀)수행을 겸할 것을 권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지(止)인 사마타만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침몰하여지고 혹은 게으른 마음을 일으키어 모든 착한 행위를 즐겨 행하지 않으므로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이익을 잃고, 나아가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돠어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것을 잃게 된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관(觀)의 위빠사나를 함게 닦는 수행방편문으로 닦아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마음이 침몰한다"는 것은 진여에서 오로지 고요함으로만 취향하기 때문에 마음이 공적의 세계에 쉽사리 침몰하게 된다. 그 때문에 두 가지 실수가 있게 된다. 첫째는 게으름을 피우며 모든 선업을 수행하지 않으므로 자리(自利)를 잃는다. 그 때문에 다음에서 법상관(法相觀)으로써 그것을 다스리고 정진관(精進觀)으로써 성취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 대비심을 멀리 여읜다면 이타(利他)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다음에서 대비관(大悲觀)으로써 그것을 대치하고, 대원관(大願觀)으로써 성취하였던 것이다. 다음에 이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


 

* 법상관(法相觀)

 

修習觀者 當觀一切世間有爲之法 無得久停須臾變壞

수습관자 당관일체세간유위지법 무득수정수유변괴


一切心行念念生滅 以是故苦 應觀過去所念諸法恍惚如夢

일체심행염념생멸 이시고고 응관과거소념제법황홀여몽


應觀現在所念諸法猶如電光 應觀未來所念諸法猶如於雲忽爾而起

응관현재소념제법유여전광 응관미래소념제법유여어운홀이이기

應觀世間一切有身悉皆不淨 種種穢汚無一可樂

응관세간일체유신실개부정 종종예오무일구락

 

관(觀)을 수습하는 자는 마땅히 일체 세간의 유위법은 오랫동안 정지할 수 없어 잠시 사이에 변하고 무너지며, 일체 심의식의 진행은 생각생각이 생멸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관찰해야만 한다.

 

마땅히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 모든 법은 꿈처럼 황홀하다고 관찰해야 하며, 마땅히 현재에 생각하는 것이 모든 법은 마치 번개 불과 같다고 관찰해야 하며, 마땅히 미래를 생각하는 것도 모든 법은 마치 구름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관찰해야만 한다.

 

마땅히 세간의 일체 존재해 있는 몸은 모두가 청정하지 못하고 갖가지 더러움으로 오염되었으므로 한 가지도 즐길 만한 것이 없다고 관찰해야만 한다.

 

[강의]

전통적으로 관법수행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이것이 사념처관(四念處觀)이다. 즉, 관신부정(觀身不淨)·관수시고(觀受是苦)·관심무상(觀心無常)·관법무아(觀法無我)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를 통합적으로 해서 관수시고(觀受是苦)를 상수하여 관신부정(觀身不淨)으로 종결하고 있다.

 

하여튼 관(觀)방편을 닦아 익히는 자는 일체 세간의 유위법은 오랫동안 정지할 수 없어 잠시 사이에 변하고 무너지며, 일체 심의식의 진행은 염념(念念)이 나고 멸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관찰해야만 한다. 과거를사념하는 모든 법은 그 자체가 없어 꿈처럼 황홀하다고 관찰해야 하며, 현재를 사념하는 모든 법은 마치 전광과 같다고 관찰해야 하며, 미래를 사념하는 모든 법은 마치 구름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관찰해야만 한다고 논하였다.

 

그리고 세간의 일체 존재해 있는 몸은 모두가 청정하지 못하고 갖가지 더러움으로 오염되었으므로 한 가지도 즐길 만한 것이 없다고 관찰해야만 한다고 사실적으로 관해야함을 논하고 있다.

 

이러한 관을 수습하는 데는 넷이 있는데, 처음은 법상관(法相觀)이며, 두 번째는 대비관(大悲觀), 세 번째는 대원관(大願觀), 네 번째는 정진관(精進觀)이다.

 

처음의 법상관이 넷으로 나뉘는데 이는 그 가운데서 최초의 관법은 무상관(無常觀)이고,

 

두 번째의 고관(苦觀)이며,

 

세 번째는 무아관(無我觀)이다. 과거는 주재하는 자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 그 실체를 쫓기 어렵고, 현재는 찰나찰나에 흐르며 안주하지 않고, 미래는 본래 적취(積聚)함이 없이 단지 인연이 집합하여 홀연히 있으므로 시방세계의 시간 속에서 실재하는 법이 찾아온 것은 아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부정관(不淨觀)이다. 이상의 사법상관(四法相觀)으로 범부들의 사전도(四顚倒), 즉 제법을 상(常)·낙(樂)·아(我)·정(淨)이라고 집착하는 망상을 제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제법은 상주하여 항상하다고 집착하는 것은 무상관(無常觀)으로, 즐거움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은 고관(苦觀)으로, 영원히 주재한다고 하는 아(我)에 집착하는 마음은 무아관(無我觀)으로, 청정하다고 집착하는 마음은 부정관(不淨觀)으로 대치한 것이다.

 

이러한 관법의 내용의 {기신론}에 언급된 특이한 관법수행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념처관(四念處觀) 역시 사전도(四顚倒)를 대치하는 수행법인데 여기서는 새로운 관법을 제시하여 대치시키고 있다.

 

하여튼 이상으로 네 법상관수행은 끝이 났다.

* 대비관(大悲觀), 대원관(大願觀), 정진관(精進觀)

 

如是當念 一切衆生從無始世來 皆因無明所熏習故令心生滅

여시당념 일체중생종무시세래 개인무명소훈습고령심생멸

 

已受一切身心大苦 現在卽有無量逼迫 未來所苦亦無分齋

이수일체신심대고 현재즉유무량핍박 미래소고역무분제

 

難捨難離而不覺知 衆生如是甚爲可愍

난사난리이불각지 중생여시심위가민

 

作此思惟 卽應勇猛立大誓願 願令我心離分別故

작차사유 증응용맹립대서원 원령아심리분별고

 

遍於十方修行一切諸善功德 其未來 以無量方便救拔一切苦惱衆生

변어시방수행일체제선공덕 기미래 이무량방편구발일체고뇌중생

 

令得涅槃第一義樂 以起如是願故 於一切時一切處 所有衆善 己堪能

영득열반제일의락 이기여시원고 어일체시일체저 소유중선 기감능

 

不捨修學心無懈怠 唯除坐時專念於止 若餘一切悉當觀察應作不應作

불사수학심무해태 유제좌시전념어지 약여일체실당관찰응작불응작

 

이와 같이 마땅히 일체 중생은 시작이 없는 세월로부터 흘러오면서 모두가 무명이 훈습하여 그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었다. 이미 일체 신심(身心)의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의 괴로움 또한 한계가 없어 버리기 어렵고 여의기 어려운 데도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한다. 중생은 이와 같으므로 매우 불쌍하다고 사념해야만 한다.

 

이러한 사유를 했다면 곧 마땅히 용맹하게 큰 서원을 세워야 한다. 나의 마음이 분별을 여의었기 때문에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일체 모든 선공덕을 수행하고 미래제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일체 고뇌하는 중생을 구제하여 하여금 열반제일의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고 발원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대원을 일으켰기 때문에 일체의 시간과 일체의 처소에 있는 뭇 선을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만큼을 따라서 버리지 않고 수학하면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오직 앉아 있을 때 지(止)를 전념해야 한다. 만약 나머지 일체에서도 다 마땅히 해야 하는지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다 관찰해야만 한다.

 

[강의]

여기서는 앞에서 언급한 나머지 삼관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마땅히 일체 중생은 시작이 없는 시간으로부터 흘러오면서 모두가 무명이 훈습하여 그 때문에 심의식이 생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과거에 이미 일체 몸과 마음의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에도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의 괴로움 또한 한계가 없어 버리거나 여의기 어려운 데도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했다. 중생은 이와 같으므로 매우 불쌍하다고 사념해야만 한다고 논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이 사유했다면 응당 용맹하게 큰 서원을 세워야만 한다고 하였다. 나의 마음이 분별을 여의었기 때문에 시방세계에 두루 편만하여 일체 모든 선공덕을 수행하고 미래제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일체 고뇌하는 중생을 구제하여 열반의 제일의(第一義)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고 발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원을 일으켰기 때문에 일체의 시간과 일체의 처소에 있는 뭇 선을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만큼을 따라서 버리지 않고 수학하면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오직 앉아 있을 때 지(止)를 전념하는 것을 제외한 그 나머지 일체에서도 해야 하는지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다 관찰해야만 한다고 논하였다.

 

다시 말해서 대비관(大悲觀)은 중생은 괴로움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싫증을 내는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괴로움 또한 한이 없다. 이것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심오한 대비가 아니면 그들을 구제할 수가 없다.

 

그리고 대원관(大願觀)은 일체 중생을 일심의 자체는 동일하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제하리라고 발원하는 것이다. 즉, "분별을 여의었다"는 것은 동체대비이고, "미래제가 다한다"고 하는 것은 장시심(長時心_이며,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 것은 광대심(廣大心)이며, "열반을 얻게 한다"고 하는 것은 제일심(第一心)이다.

 

그리고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정진관(精進觀)이다. 다음에는 지관쌍수(止觀雙修)에 대해서 논한다.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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