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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육식(肉食) 허용에 대한 고찰

白道 박만주 2017. 12. 4. 09:48

 

 

   불교의 육식(肉食) 허용에 대한 고찰

 

  구인사

  

지난번 '궁금합니다'에 개재되었던 '불교의 육식 허용'에 대한 내용은 한국불교가 수지하는 사분율의 비구250계와 비구니348계를 중심으로 '한국불교 승단이 수지하는 계율상에 육식이 허용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그 답변으로 설명이 충분하지 못했던 점을 사과 드리며,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불교에는 대, 소승의 많은 경전있는데 부처님의 직설에 해당하는 아함부 경전을 소의로 하는 사분율 제14권과, 마하승기율 제3권등의 율장에서는 선정의 수행을 통하여 지혜를 이루고자 하는 비구들에게 부처님께서 오정육(五淨肉)에 해당되는 육식을 먹도록 허락하는 내용이 보이는 반면, 대승불교의 경전인 수능엄경(首楞嚴經)과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그리고 열반경(涅槃經)등에서는 「육식은 자비의 종자가 끊어지기 때문에 보살도를 닦는 수행자는 일체의 육식을 금계로 한다.」 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상호 모순점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수 있다.


부처님 입멸 100년경 결집된 사분율(四分律)이나 오분율(五分律),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은 부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계율에 근거한 것으로 부처님의 근본정신에 가장 가까운 계율로 볼 수 있다. 오늘날 미안마등 남방불교권의 승려들은 사분율에 의한 비구 250계에 정해진 대로 청정계행을 지키고 무소유와 오후불식 그리고 승가의 근본정신인 교단의 화합을 철저히 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선정수행의 체험을 통하여 부처님의 근본정신이 실현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분율(四分律)에 근거하는 비구 250계율상에는...


제3- 사람을 죽이지마라. 제110- 축생을 고의로 죽이지 마라. 제111- 벌레있는 물을 마시지 마라 등 살생을 금하는 항목은 있으나, 육식을 금하는 조항이 없으며 오히려 사분율의 원전과 대승불교의 모태가 되는 대중부(大衆部)의 율전인 마하승기율3권에서는 근식(根食)과 곡식(穀食)과 육식(肉食)등 삼종의 음식은 시약(時藥)이라하여 비구들이 먹을수 있는 음식으로 규정하여 근본불교에서는 출가한 비구들이 육식의 공양을 들었음이 경전상에 나타나 있고, 남방불교에서는 오정육(五淨肉)에 대해서 비구들이 먹을수 있는 음식으로 공식화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을 중심으로한 대승불교권에 들어오면서...


대승불교 계율의 중심이 되는 범망경보살계본(梵網經菩薩戒本)의 십중대계(十重大戒)에서는 육식을 금하는 조항이 없으나 48경계(輕戒)의 제3식육계에서는 「지혜를 완성한 보살은 자비를 근본으로 보살도를 실천함에 있어서 그 실천의 대상을 일체중생으로 하기 때문에 일체의 식육을 금한다. 아라한과의 지혜를 목적으로 하는 점교(漸敎)에서는 세가지 깨끗한 고기를 먹도록 허용했으나 지혜를 완성하고 평등자비의 보살도를 실천함에 있어서는 일체의 육식을 금해야 한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대승입능가경 제6권 단식육품과 능가경 제8권 차식육품에서는 「살생을 하고 육식을 먹는것은 자비의 종자를 끊는 것이므로 보살도를 닦는 수행자는 반드시 금해야 한다. 나는 일찍이 성문을 닦는 비구에게 세가지 깨끗한 고기에 대하여 음식으로 먹어도 된다고 하였으나 이제 이 경은 보살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고기를 금해야 한다.」 하였으며, 또한 수능엄경 제6권에서도 「처음에는 비구들에게 깨끗한 고기를 먹게 하였으나 보살도를 닦는 수행자는 반드시 일체의 고기를 금해야 한다.」 하였다.


모든 것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고,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향하는 점진적이고 점차적인 순리를 따르듯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팔만사천법문을 순차적으로 펼쳐놓으셨는데, 천태지의대사(天台智 大師)는 이를 중생근기의 이둔(利鈍)에 따라서 닦는 수행의 내용으로 원돈지관(圓頓止觀), 점차지관(漸次止觀), 부정지관(不定止觀)등 삼종지관(三種止觀)으로 제시하고있다.


특히 점차지관은 초단계의 수행으로서 중생의 근기와 성향에 따라서 다양한 수행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데, 번뇌심(煩惱心)이 많은 사람은 수식관(數息觀)을, 탐욕심(貪慾心)이 많은 사람은 부정관(不淨觀)을, 진에심(嗔 心)이 많은 사람은 자비관(慈悲觀)을, 치암심(痴暗心)이 많은 사람은 인연관(因緣觀)을, 두꺼운 업력으로 말법시대에 태어난 둔근(鈍根)의 사람은 염불관(念佛觀)을 닦도록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과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에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제시된 수행 방법들은 삼독오욕에 찌들어 들뜨고 거칠어진 중생심을 고요하고 조촐한 무심으로 닦게 하는 초단계의 선정수행으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거칠어진 중생의 근기를 성숙시킨뒤, 부처님이 하근기(下根機)를 위한 교설과 수행형식을 초월하여 심경(心境)을 마주하여 바로닦아(頓修) 깨달음을 바로얻는(頓悟) 원돈지관을 닦아야 한다고 천태지의대사(天台智의大師)는 설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이 붓다가야 적멸도장(寂滅道場)에서 깨달음을 그대로 설하는 화엄설법으로, 중생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그와 같은 방법으로는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수 없음을 알고, 바라나시 녹야원(鹿野苑)으로 장소를 옮겨서 법설의 수준을 낮추어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시었고, 이어 중생근기의 성숙에 따라서 방등(方等), 반야(般若) 법화(法華)의 순으로 설법의 수준을 높여가는 부처님 일대교설(一代敎說)의 수순에 따른 것이다.


또한 천태대사가 제시한 수행자의 환경과 성향에 따라 수행할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상행삼매(常行三昧), 상좌삼매(常坐三昧),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등 사종삼매(四種三昧)의 수행방법이 있는데, 이는 다양한 근기와 환경에 있는 일체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겠다는 부처님의 자비정신에 기인된 것이다.


이는 쉬운말로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대학생등을 가르치는 데에는 받아 들이고 이해하는 능력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가르침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으로 유치원생에게 대학의 전문적인 학문을 가르치려 하거나 대학생에게 유치원 교육방식으로 가르치려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간곡한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계율 또한 수행의 효율성과 수행의 좌절을 막기 위하여 시기적으로 환경적으로 수행자의 필요에 따라서 제정된 것으로, 살생(殺生), 투도(偸盜), 음행(淫行)등 근본적인 계율은 대, 소승을 막론하고 꼭 지켜야 하는 것으로써 대, 소승의 계율상에 조금도 다를것이 없지만, 부수적이고 가벼운 계율에 대해서는 대, 소승이 차이를 두고 있다.


특히 육식의 허용에 관련된 계율에 있어서는

경전상에서 의도하는 부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두 가지를 완성하신 분으로서 그것은 지혜(智慧)와 복덕(福德)이다. 지혜는 자기 내면에 드리워진 삼독오욕의 번뇌심을 삼종지관과 사종삼매를 통하여 깨끗이 정제하여 티끌만큼 현혹되는바가 없는 선정에 들었을 때 본성의 지혜가 발현되어 자아의 실체와 우주만유의 실상(實相)을 관하는 것으로 이를 지혜완성이라 하며, 복덕은 지혜를 이룬 성문(阿羅漢) 깨달음의 법락(法樂)에 머물지 않고 일체에 대하여 평등한 자비심(慈悲心)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보시(布施)의 실천으로 보살만행(菩薩萬行)을 닦았을 때 구족되는 것으로 이 두 가지를 다 갖춘어른이 삼귀의례(三歸依禮) 서두에 나타나는 양족존(兩足尊) 부처님이시다.


만약 이때 지혜를 이룬 아라한(阿羅漢)이 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에 머물러서 있으면서 평등자비심을 이르켜 중생을 구제하지 않으면 이를 곧 벽지불( 支佛)이라 하고, 일체에 평등한 자비심을 이르켜서 중생구제에 나서면 이를 보살(菩薩)이라 하는데, 선정지혜를 완성한 모든 아라한은 평등자비심(平等慈悲心)을 이르켜 무량겁동안 보살도를 닦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뇩多羅三먁三菩提)를 이루고 부처님이 되신다고 한다.


위의 설명으로 볼 때 지혜는 무명중생이 닦는 수행의 계위이고 자비는 지혜를 이룬 보살이 닦는 수행의 계위로서, 일체를 평등하게 보는 지혜를 완성하지 않고는 일체에 평등한 자비가 실천되지 않는다고 제경에서는 설하고 있다.


부처님의 근본경전인 아함경(阿含經)은 삼독오욕의 중생심을 벗어나서 지혜완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아함경을 소의(所依)로 하여 지혜를 효율적으로 성취하고 수행중도에 좌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곧 사분율(四分律)이나 마하승기율전(摩訶僧祇律)이라 할수 있는데, 이 율전에서 오정육의 육식을 수행자에게 허용한다는 것은 오늘날 지혜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수행자에게 오정육의 한도내에서 육식의 허용은 지혜완성에 장애가 없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선정의 완성인 지혜의 종자가 육식을 먹음으로서 훼손되었다면, 어찌 부처님께서 근본경전인 아함경을 소의로하는 율부(律部)에서 육식을 허용하셨으며, 부처님이래 십대제자를 비롯한 법맥을 이은 근본불교의 선지식들이 육식을 공양하고도 어찌 지혜를 이루었겠는가.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의 특성으로 볼 때, 수행의 계위가 수승해 짐에 따라 그에 알맞은 말씀을 강력하게 주장하심을 볼 수 있다. 이는 일체를 평등하게 보는 지혜가 완성되면 자연히 자신만의 범주를 벗어나서 일체중생을 자신과 동일체로 보는 평등자비를 통하여 중생구제의 구체적인 실천을 하게 되는데, 이때 평등자비를 실천하는 보살은 자신의 생명과 동일한 다른 생명의 몸을 먹는 것은 곧 자비의 종자가 끊어진다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따라서 이는 곧 지혜를 추구하는 수행자에게 육식을 해도 장애가 없다는 것은 오늘날 지혜와 자비를 함께 닦는다고 하는 대승불교권에 있어서 지혜와 자비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는 바, 지엽적인 오정육의 육식에 대해 연연하며 근본적인 것을 소홀히 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다양한 수행방법으로 지혜완성에 힘써야 할 것이다. 결국 지혜를 완성하면 완벽한 자비의 실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제돼야 할 것은 수행자에게 육식이 허용된다는 것은 오정육의 한도로 엄격히 지켜져야 할것이다.


불설의 전체적인 구조와 율전규정의 의도로 보거나 오늘날 사분율의 율법에 의해 육식을 허용하는 남방불교 수행자들의 철저한 수행과 청정계율, 무소유는 성직자(聖職者)로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높은 위상으로 볼때, 형식적으로 육식을 금하는 오늘날 한국불교에 비교하겠는가. 수행자의 육식공양에 대한 논란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대승불교권 이면서도 근본불교의 계율인 사분율에 의한 비구 250계를 수지하고 있는데, 같은 계율을 수지하는 남방불교와 달리 계율에 없는 육식에 대하여 금계(禁戒)하고 있는 것은 중국에서 제정된 범망경보살계본(梵網經菩薩戒本)의 48경계(輕戒)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분율에 의한 구족계(具足戒)의 요건상 250여가지의 복잡다난한 계율항목을 수지해야 하는데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 현실의 수행환경과 이에 따라 저하된 중생근기로 이와같은 계율의 지계(持戒)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현실사회 여건상 지킬수 없는 복잡다난한 계율을 받아서 지키지 못하는 것은 우선 계율을 정하신 부처님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고 또한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며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스스로 타락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는 곧 스스로 고통의 수렁을 파놓고 들어가는 것과 같지 않을수 없다.


수행자가 깨달음으로 들어가는데는 계율이 좋은 사다리라고 하듯이, 불교의 수행법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고 수행의 완성을 뒷받침하는 계율 또한 시대와 환경,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으므로 곧 자신이 지킬수 있는 계율을 수지하여 여법하게 지켜 가는 것이 청정한 계행일 것이다.


계율의 뜻이 아무리 크고 높다고 하더라도... 지켜지지 않음은 계율이 아니다.


한국불교는 이제 남을 의식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부처님과 자신과 약속한 것에 대한 신뢰회복이 필요한 때이다. 21세기는 초첨단 스피드시대이며 국제화, 종교다원화시대이다. 따라서 이제는 보수적으로 내가 고집하는 한가지의 수행과 계율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모두가 근기와 능력에 따라 지키고 닦아 나아가서 온 인류속에 한국불교가 우뚝 서도록 다양한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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