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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와 의상의 통합 사상

白道 박만주 2018. 1. 18. 08:47

 

 

                                                                                                                        

      

     

     원효와 의상의 통합 사상

     

      염기성인 그녀님

    한국 고대사상의 대표적 거봉인 원효와 의상은 존재 분열의 통합을 위한 사상 작업을 전개한다. 현상의 차이들을 배타적 분열과 다툼이 아닌 평화적 공존으로 가꾸어 가려는 원효와 의상의 통합 사상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원칙을 전제로 구성되고 있다. 모든 존재들이 실체적 분리를 극복하고 '둘 아님(不二)'으로 만날 수 있는 원리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이고, 그 원리는 자기 완성의 토대인 동시에 타자 존중과 적극적 배려를 그 필연이자 당위로 수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그리하여 원효와 의상은 각각 일심과 화엄일승의 경지에서 '둘 아님'의 통합 원천을 확보하는 동시에, 원효는 각(覺) 사상을 통해, 의상은 성기(性起) 사상과 무분별지(無分別智)를 통해 '둘 아닌' 통합의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특히 원효의 경우 화쟁의 의지 역시 본각(本覺)의 이익에 의거하여 구현하고 있다.

    주제분야 : 한국불교, 원효, 의상
    주 제 어 : 통합사상, 일심, 각, 화엄일승, 성기, 무분별지

    1. 통합 이념의 시대적 요청

    신라불교의 특징을 규명하는 키워드로서 '통합(統合)'을 빼놓을 수 없다. 신라 불교인들은 시대적 상황과 요청에 부응하여 특히 통합과 화쟁(和諍)을 의식하며 불교사상을 소화, 전개시켰는데, 동시대 중국 대륙에서의 불교이론 수준과 추이에 시차 없이 부응하며 통합과 화쟁을 개성으로 반영시킬 정도로 체화(體化)시켰던 신라불교의 정점에는 원효(617∼686)와 의상(625∼702)이 자리잡고 있다.


    통합과 화쟁이라는 신라불교의 개성을 잉태시킨 외연(外緣)은 분열의 시대 상황이었다. 원효와 의상을 배출하던 때의 한반도는 배타와 독점으로 표현되는 분열의 정신이 넘쳐나고 있었는데, 신라의 경우 그 분열의 정신은 크게 존재와 언어 두 측면에서 구분해 볼 수 있다.

    존재 분열은 신분제인 골품제(骨品制)와 전쟁으로 표현되었다. 경주에 거주하는 진골(眞骨)의 독점적 특권과 지위를 보장하는 독점 이데올로기였던 골품제는 그에 속한 구성원들의 삶을 부당하게 차별하는 배제와 독점의 차등적 신분체제였다. 존재 분열의 또 하나의 표현은 전쟁이었다. 통일 전후의 삼국 쟁투는 격렬하고 빈번한 전쟁의 참상으로 이어졌다. 타자 부정과 공격의 극단적 표현인 전쟁은 인간 삶의 모든 희망을 빼앗는 절망의 늪이다. 전쟁이 분출하는 배타의 살기 속에서, 사람들은 '다툼의 화해(화쟁)'와 '하나됨(통합)'의 통로를 갈구하였을 것이다.

    언어 분열의 소음은 사상계에서 요란하였다. 원효 시대의 한반도에는 층을 달리하는 다양한 불교이론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대승불교 이론의 두 축인 중관(中觀)과 유식(唯識)을 비롯하여, 반야·열반·법화·화엄 등의 후기 고급 불교이론은 물론, 초기불교의 다양한 경론(經論)들도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었음은 원효 자신의 저술 목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불교이론들의 도입은 사상계의 혼란을 초래하였을 것이다. 당시 중국이나 한반도에 소개된 불교 이론들은 초기불교와 후기불교의 이론 유형들을 망라하는 것이었는데, 모든 불경들을 붇다 한 사람의 육성으로 간주했던 사람들은 그 다양한 불교 전적들이 제공하는 이론의 다양성에 곤혹스러워 했다. 동일한 내용일지라도 경전마다 이론적, 사상적 수준이 달랐기에 혼란스러웠고, 각 경전의 다양한 내용이나 표현 방식은 곧잘 화해시키기 어려운 이질성(異質性)으로 보여 이해가 충돌하기도 했다.


    하나의 이론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이해력이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이해가 등장하기 마련인데, 하물며 이론의 내용과 수준, 형식들마저 다양하였으니, 그로 인한 사상계의 혼란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불교 이론을 놓고 저마다 자기 이해가 옳다며 다투는 사람들, 자기가 선호하는 불교 이론이 최고라며 쟁론하는 사람들로 인해 사상계는 분열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원효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러한 정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말 그대로 취한다면 두 주장은 모두 옳지 못하다.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워 다투면서 부처의 뜻을 잃는다. 그러나 만일 결정적인 고집이 아니라면 두 주장이 모두 옳다. 법문(法門)은 걸림이 없어서 서로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도는 넓고 탕탕하여 걸림이 없고 범주가 없다. 영원히 의지하는 바가 없기에 타당하지 않음이 없다. 이 때문에 일체의 다른 교의가 모두 다 불교의 뜻이요, 백가의 설이 옳지 않음이 없으며, 팔만의 법문이 모두 이치에 들어간다. 그런데 자기가 조금 들은 바 좁은 견해만을 내세워, 그 견해에 동조하면 좋다고 하고 그 견해에 반대하면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마치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사람이,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지 않은 사람은 모두 하늘을 보지 못하는 자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이런 것을 일컬어 식견이 적은데도 많다고 믿어서 식견이 많은 사람을 도리어 헐뜯는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또한 현장(玄 602∼664)의 역경(譯經)에 의해 막을 연 신역불교(新譯佛敎) 및 법상(法相) 신유식(新唯識)이 촉발시킨 중국 사상계의 쟁론들은, 중국과 보조를 맞추며 발전하고 있던 한반도의 사상계에도 곧바로 이식되었다. 현장의 신역불교가 점화시킨 중국 사상계의 쟁론은 곧장 한반도 사상계에도 이전되어, 가히 동북아시아 지성계 전체가 유식사상이 주역이 된 사상논쟁에 휘말리고 있었다.


    사유와 언어의 불가분리성을 염두에 둔다면, 사상적 쟁론은 곧 언어의 다툼이기도 하다. 다양한 불교 이론들에 대한 교판론적(敎判論的) 언어 분열, 구역(舊譯)·신역(新譯) 및 중관(中觀)·유식 (唯識) 언어의 분열적 대립. - 이것이 원효와 의상 당시의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 사상계의 정황이었다. 삼국 전쟁으로 그 절정에 이른 존재 분열과 함께 사상 분열, 즉 언어 분열이라는 또 하나의 심각한 인간 분열이 전개되었고, 그 분열의 수습이 시대의 요청으로 부각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원효와 의상은 그 분열의 수습을 위한 통합 작업을 불교에 입각하여 펼쳐간다. 무지와 배타적 편애와 탐욕으로 인한 부정·배타·정복의 정신을, 포용·공존·화해·상호 존중으로 극복하라는 '통합'과 '화쟁'의 시대적 요청에 대하여, 원효와 의상은 그 사상적 응답을 불교라는 지혜 속에서 확보하여 실천한다.


    2. 통합 이념의 조건

    현상의 차이들을 배타적 다툼이 아닌 평화적 공존으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할까? 원효와 의상의 통합 사상에서는 두 가지 조건이 공통적으로 목격된다. 모든 존재들이 실체적 분리를 극복하고 '둘 아님(不二)'으로 만날 수 있는 원리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이고, 그 원리는 자기 완성의 토대인 동시에 타자 존중과 배려를 그 필연으로 수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본고(本考)에서는 이 두 조건이 원효와 의상에게서 각각 어떤 모습으로 구성되고 있는지 탐구해 볼 것이다.

    원효 사상에서는 그 근본 원리의 자리를 일심(一心)이 차지하고 있다. 원효 사상과 삶을 일관하는 핵심 원리가 일심에서 나오고 있음은 모든 원효 사상 연구에서 공히 지적되고 있다. 원효 사상이 보여주는 통합적 기능 역시 일심을 그 원천으로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이 있다. 원효 일심사상이 지니는 '둘 아님'의 통합 기능이 현실화될 수 있는 구체적 통로가 '각(覺) 사상'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종래의 연구에서 간과되고 있는 부분이다. 원효에 있어서는 각(覺) 사상이야말로 '둘 아님(不二)'의 통합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통로로서 더욱 비중 있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상의 경우, 화엄일승(華嚴一乘)의 도리에서 통합의 상위 원리를 확보하는 한편, 성기(性起)사상과 무분별지(無分別智)를 통합의 통로로 마련하고 있다. 종래 의상 화엄사상 연구의 거의 유일한 저술로 활용되던 {화엄일승법계도} 뿐만 아니라 최근 새롭게 발굴된 {화엄경문답}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이하에서는 원효의 경우는 일심과 각 사상을, 의상의 경우는 화엄일승과 성기 사상 및 무분별지를 중심으로, 상기한 통합의 두 가지 조건이 어떤 모습으로 확보되고 있는지 탐구해 볼 것이다.


    3. 원효의 통합 사상

    1) 통합의 원천 - 일심(一心)

    이성이라 부르던 마음이라 부르던 간에, 인간은 분명 타 생명체에서는 목격할 수 없는 사유 능력을 보여준다. 이해, 판단, 추리, 기억 등이 얽혀 펼쳐지는 인간의 사유 능력은 인간의 정서와 행위에 작용하며 인간 존재를 독특한 수준으로 이끌어 간다. 원효가 인간 존재의 궁극적 희망으로 주목하는 일심(一心)은 이러한 인간 특유의 사유 능력의 연장선 위에 있다.


    다만 종래의 이성 능력이 아직 실체(實體) 관념에 의거한 분별지(分別知)의 범주에 머물러 사물을 분리와 소유, 집착으로 경험하며 존재의 동요(개인적 苦)와 관계의 훼손(사회적 苦)을 그 후유증으로 겪는데 비해, 원효의 일심은 실체 관념을 극복하여 모든 이원적 분리와 분별을 해체시키고 그 존재론적 각성의 필연적 산물인 자발적 우호감(同體大悲)으로써 타자들과 관계 맺는다. 일심의 경지는 인간에게 자리잡은 사유 능력의 차원 높은 발전 단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일심 사상을 풀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승의 법은 오직 一心이 있을 뿐이며 一心 이외에 다른 법은 없다. 단지 무명이 一心을 미혹시켜 六道에 流轉하게 하지만, 이때에도 역시 一心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일심으로 말미암아 온갖 세계(六道)를 지어내기 때문에 널리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願을 일으킬 수가 있고, 온갖 세계가 일심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몸으로 여겨 일으키는 큰 자비심(同體大悲)>을 낼 수 있는 것이니, 이리하여 의혹을 버리고 發心할 수 있게 된다.

    또한 二門을 열은 것은 <여래가 세운 수많은 가르침의 체계들(敎門) 가운데 어떤 것을 의지하여 처음 수행에 들어가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풀어주기 위함이다. 즉, 비록 많은 가르침의 체계들이 있지만 처음 수행에 들어가는 것은 다름 아닌 二門에 의해서이다. 다시 말해, 眞如門에 의지하여 止行을 닦고 生滅門에 의지하여 觀行을 일으켜 止와 觀을 동시에 운용하면 萬行이 갖추어지는 것이니, 이 二門에 들어가서 모든 가르침의 체계들을 통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의혹을 버리고 수행 길에 접어들 수 있게 된다.'

    '모든 존재의 참 모습은 생겨남(生)과 사라짐(滅)이라는 이분법적 구분과 분리가 없으며(無生無滅) 일체의 인위적 구별이 원천적으로 해체된 상태(本來寂靜)이니, 오직 一心이라 할 경지이다. 이와 같은 상태를 心眞如門이라 하기 때문에 {능가경}에서는 <모든 인위적 분별과 분리가 해소된 경지를 一心이라 한다(寂滅者名爲一心)>고 말한 것이다.


    또 이 一心의 바탕은 본래적 깨달음(本覺)이지만 無明을 따라 동작하여 분별 작용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이 경우(실체적 분별을 행하는 마음. 生滅門) 여래의 성품이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것을 如來藏이라 부른다. (…) 이와 같은 뜻이 생멸문에 있기 때문에 {능가경}에서는 <一心을 如來의 가능성이 간직되어 있는 상태라 한다(一心者名如來藏)>고 말한 것이니, 이것은 一心의 生滅門을 나타낸다. (…) 俗되거나 脫俗한 모든 것들의 참 모습은 俗(染)이니 脫俗(淨)이니 하는 분별이 없는 것이고, 참된 眞如의 체계(眞如門)니 그릇된 분별의 왜곡 체계(生滅門)니 하는 것도 근본에 입각해 보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一)>라는 말을 붙인다. 동시에 이 이원적 분별과 분리가 해체된 진실의 경지는 허공과는 달라서, 성품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아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마음(心)>이라는 말을 붙인다. 그런데 이미 둘로 분별할 것이 없으니, 하나가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라고도 할 수 없다면, 무엇을 <마음>이라는 말로 지칭할 것인가? 이와 같은 도리는 언어적 범주를 벗어나고 모든 것을 이원적·실체적으로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경지라서 무슨 말을 붙여야 될지 알 수 없는데, 억지로나마 <한 마음(一心)>이라 불러 본다.'

    원효는 타자 부정과 다툼의 도구로 오용되는 인간의 사유 능력(분별심) 속에서 오히려 가장 위대한 희망을 발견한다. 실체적 분별로 인한 탐착·배타·공격에 물든 분별심에 절망하지 않고, 그 이면에 존재하면서 아직 구현되지 않은 찬란한 가능성을 확인한다. 분별심이 지관(止觀)에 의해 변환되면, 삶과 죽음(존재와 비존재, 生과 滅)·성스러움과 속됨·선악의 자의적 규정(淨과 染)·진실과 허위(眞如와 生滅) 등의 분별과 분리가 근원에서 해체되어 그들이 '둘 아님'으로 만나는 동시에, 타자 부정의 충동이 '하나됨에서 자발적으로 발현되는 끝없는 우호감(同體大悲)'으로 전환되는 일심의 경지가 된다는 것. - 여기서 원효는 인간 통합의 원천을 확보한다.


    2) 통합의 통로 - 각(覺)

    통합의 원천인 일심을 구현하는 구체적 통로를 원효는 본각(本覺)·시각(始覺)·불각(不覺)을 설하는 {대승기신론}의 각(覺) 사상에 입각하여 마련한다. {대승기신론}은 인간 마음이 지닌 두 가지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고 있는데, '진리와 같아지는 측면(眞如)'과 '진리 이탈의 측면(生滅)'이라는 두 가능성을 각각 본각·시각 및 불각에 의해 해명하고 있다.


     인식의 이해 결핍(無明)과 그로 인한 왜곡 과정(分別, 心生滅)을 밝히는 것이 불각이고, 마음이 지닌 심진여(心眞如. 마음이 진리와 같아진 경지)로서의 측면, 그 일심(一心) 구현의 측면을 밝히는 것이 본각과 시각이다. 원효는 이와 같은 {대승기신론}의 각 사상에 의거하여 일심 구현의 구체적 통로를 확보하고 있는데, 각 사상에 대한 그의 관심은 말기 저술인 {금강삼매경론}에 이르러 더욱 완숙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마음이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국면을 각각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설정한 후, 심생멸문에서 마음의 심진여적(心眞如的; 마음이 진리와 같아지는) 가능성과 심생멸적(心生滅的; 마음이 진리를 등지는) 가능성을 동시에 논하고 있다. 이 때 심생멸문에서 두 가지 가능성이 구체화되는 통로가 바로 시각·본각 및 불각이다.


    인간의 사유 활동은 시각과 본각을 내용으로 하는 '깨달음의 기능(覺義)'과 불각을 내용으로 하는 '깨닫지 못하는 기능(不覺義)'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것과, 그 두 잠재력의 구현 과정을 밝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유 능력을 깨달음의 길로 유도하게 하려는 것이 {대승기신론} 심생멸문의 구성 취지이다. 원효는 인간 사유 능력에 대한 이와 같은 {대승기신론}의 관점에 서서 각(覺) 사상을 전개해 간다. 이하에서는 원효 사상에서 나타나는 통합의 두 가지 조건인 '실체적 분리를 극복하고 둘 아님(不二)으로 만날 수 있는 원리의 확보'와 '그 원리에 의한 자기 완성 및 타자 존중과 배려의 필연적 실천'에 해당하는 원효 각(覺) 사상의 구성 원리를 네 가지로 정리하여 음미해 본다.

    (1) 시각·본각·불각은 실체적 자성(自性)이 아니다
    원효에 의하면, 현실의 인간은 '깨닫지 못한 상태'이다. 생명계 진화에서 인간 사유 능력의 첫 출발 때부터 내재했을 근본적 이해 결핍(無明)을 대부분의 인간들은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해 결핍에서 생겨난 무지와 오해가 빚어내는 인식과 감정, 행위와 삶의 진리 이반(離反) 구조와 내용을 밝히는 것이 불각(不覺)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깊고 두터운 무지의 그늘에서 탈출할 수 있다.


    근본 무지와 그 산물들이 원래 없는 생명의 본 바탕으로 귀환할 수 있다. 그 귀환의 여정을 시각(始覺; 깨닫기 시작함. 시초가 되는 깨달음)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의 귀환 작업이 가능한 것은 근본 이해 결핍(무명)과 그로 인한 진리 왜곡과 이탈(분별·망념) 및 그 산물들(생멸의 동요와 불안·苦)이 없는 '온전한 본래의 깨달음(本覺)'이 귀환의 잠재력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원효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러한 뜻을 전하고 있다.

    "각의 뜻이라 하는 것은 곧 두 가지가 있으니, 본각과 시각을 말한다. 본각이란 이 심성이 不覺相을 여읜 것을 말하니, 이 覺照의 성질을 본각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아래 글에서 '이른바 自體에 큰 지혜 광명의 뜻이 있다'고 한 것과 같다. 시각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心體가 무명의 연을 따라 움직여서 망념을 일으키지만, 본각의 훈습하는 힘에 의하여 차츰 각의 작용이 있게 되어 究竟에 가서는 다시 본각과 같아지는 것이니, 이를 시각이라 말한다."

    "이 四相을 총괄하여 一念이라 하며, 이 일념·사상에 의하여 四位의 단계적인 강하를 밝혔다. 이는 본래 無明不覺의 힘에 의하여 生相 등 갖가지 夢念을 일으켜 그 心源을 움직여 점차로 滅相에 이르고, 오래도록 삼계에 잠들어 六趣에 유전하다가, 이제 본각의 불가사의한 훈습에 의하여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찾는 마음을 일으켜 점점 본원으로 향하여 비로소 멸상과 내지 생상을 쉬고 환하게 크게 깨달아 自心이 본래 동요한 바가 없음을 깨닫고, 이제는 고요한 바도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一如의 자리에 머물게 됨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니, 이는 {금광명경}에서 말한 꿈에 河水를 건너는 비유와도 같은 것이다."

    '깨닫지 못한 상태(불각)'를 반성하고 혐오하며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본래의 깨달음(본각)'에서 솟아오르는 불가사의한 계발적 자극과 계기(不可思議한 熏習)에 의해 주어진다. 그 본각의 불가사의한 자극에 의하여 근본 무지가 초래한 삶의 동요와 불안(生滅)을 싫어하는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여 비로소 깨달음의 각성이 밝아지기 시작한다(시각). 그리고 그렇게 드러나기 시작한 깨달음을 온전히 가꾸면 마침내 '본래의 깨달음의 상태'와 합일하게 된다. 시각이 곧 본각이라 말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런데 현실의 불각이 이처럼 시각과 본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불각·시각·본각이 불변의 실체적 자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각각 불변의 실체적 자성을 지닌 것이라면 이러한 본질적 변환은 불가능하다. 불각과 시각과 본각은 상호 의존적으로 성립하는 실체 없는 가설(假說)적 존재이다. 깨닫지 못함(不覺)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깨달음(本覺)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본각은 불각의 연기론적(緣起論的) 조건이다. 마찬가지로 시각은 불각을 조건으로 한다.


    비로소 깨달아 간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각과 시각과 본각은 상호 연기론적 조건으로 상호 의존적으로 성립하는 공성(空性)이기에, 현실의 불각 상태는 시각과 본각으로 바뀌어 극복될 수 있다. 통합의 원천인 일심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은 세 종류의 각(覺)이 실체적 자성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원효는 그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중의 대의는 시각이 불각을 기다리고 불각이 본각을 기다리며 본각이 시각을 기다리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미 서로 기다리는 것이라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자성이 없다면 覺이 있지 않을 것이요, 覺이 있지 않은 것은 서로 기다리기 때문이다. 相待하여서 이루어지니 覺이 없지 않으며, 각이 없지 않기 때문에 '覺'이라 말하는 것이지 자성이 있어서 覺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본각이 있기 때문에 본래 불각이 없고, 불각이 없기 때문에 끝내 시각이 없는 것이며, 시각이 없기 때문에 본래 본각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본각이 없음에 이른 것은 그 근원이 본각이 있기 때문이고, 본각이 있는 것은 시각이 있기 때문이며, 시각이 있는 것은 불각이 있기 때문이고, 불각이 있는 것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展轉하여 서로 의지하니, 바로 모든 법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있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님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본래 무명을 따라서 모든 식이 일어나다가 이제 시각을 따라서 마음의 근원에 다시 돌아가니, 마음의 근원에 돌아갈 때 모든 식이 일어나지 않으며, 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시각이 원만하여짐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 '性에는 각이 없다'고 한 것은 空性 가운데 단지 식이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시각도 없음을 말하니, 각이 없는 이치를 깨달아 알면 시각의 지혜가 된다. 그러므로 '깨달으면 각이 된다'고 한 것이다. '각이 없음을 깨달아 안다'고 한 것은 앞의 시각을 나타낸 것이다. 시각이 원만할 때에 여덟 가지 식이 일어나지 않으니, 각이 없음을 깨달음에 따라 모든 식이 없어지기 때문이며, 궁극을 깨달음에 따라서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불각·시각·본각에 실체적 자성이 없다는 것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열반과 생사'·'진(眞)과 속(俗)' 그 어느 것도 소유적 머뭄(住)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도 통한다. 또한 불각의 근본 원인인 무명(無明)의 내용 역시 본래 존재하지 않는 실체적 자성을 존재한다고 하는 오해가 그 핵심이므로, 시각과 본각은 바로 '깨달음은 소유할 수 있는 실체적 자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은 불각의 생멸(俗)에 머물지 않는 동시에 시각·본각의 열반(眞)도 머뭄의 대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그 어떤 실체적 자성도 설정하지 않아 그 무엇도 소유와 머뭄의 대상으로 경험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진실과 허위·성스러움과 속됨·선과 악 등의 대립과 갈등을 통합(포섭)할 수 있는 상위 차원이 확보된다. 원효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러한 뜻을 담고 있다.

    "'깨닫게 되면'이라 한 것은 시각을 말한다. 해석한 가운데 '본래 일어남이 없음을 깨닫는다'고 한 것은 생사가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니, 그러므로 생사에 집착하는 번뇌를 떠나게 된다. '본래 고요함이 없음을 깨닫는다'고 한 것은 열반은 본래 寂靜함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니, 그러므로 열반에 들어간다는 움직임을 떠나게 된다.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다'는 것은 생사와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고, '출입함이 없다'는 것은 세속의 有와 진여의 空을 보지 않는 것이다. '암마라(唵摩羅; 제9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심의 바탕은 존재에 대한 두 가지 오해(二邊)를 떠난 것인데 이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기 때문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무름이 없어야 비로소 해탈을 얻게 되나니, 열반에 머물면 속박을 떠나지 못한다."

    "({금강삼매경};) 무주 보살이 말했다. <불가사의하나이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아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연한 것은 바로 본각의 이익입니다. 그 이익은 움직임이 없어서 항상 존재하여 없는 것이 아니지만 없지 않다는 것을 두지도 않으며, 없음이 아니지만 깨달음도 아닙니다.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의 이익인 본각이니, 깨달음이란 것은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으니, 決定性이기 때문입니다. 불가사의하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렇다.>


    ({금강삼매경론};)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아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연하다고 말한 것은, 앞의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일어나지 않게 하면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하다'라는 구절을 이해한 것이니, 이것은 시각의 궁극 경지이다. 다음은 뜻을 이해한 것이니, '곧 본각의 이익이다'라고 한 것은 시각이 본각과 다름이 없다는 뜻을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기신론}에서 "(…)"라고 말한 것과 같다. (…) 이와 같이 깨달음이 없다는 도리를 깨달아 알면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의 이익인 본각이다'라고 하였다."

    (2) 세상(경계)과 중생이 바로 본각이다
    원효의 통합 사상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의 인간 삶'을 그 대상으로 한다. 세계를 외면하고 세계 밖으로의 초월을 구하는 것도 아니며, 세계 안에서 세계를 경멸하며 은둔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 안에서 세계의 결핍을 본질적으로 극복하여 세계를 다시 안으려는 '세계내적(世界內的) 포섭'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 중생에 대한 본질적인 대긍정이 필요하다.

    원효는 그 대긍정의 통로를 본각 사상에서 마련한다. 본각 사상에 의하면 세상은 본래 허물이 없다. 허상인 실체 관념으로 세상을 왜곡하는 중생의 무명 불각이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불각에 대한 반성과 자각에서 밝아지기 시작한 깨달음(시각)이 온전해지면, 그 본래의 허물없는 세상과 하나가 된다. 무지와 오해로 인한 곡해가 해체되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如如하게)' 대할 수 있게 된다.


    진리와 하나되어 근원적 존재 해방이 실현된 진여(眞如)의 경지, 그 본래의 왜곡 안된 모습(본각)이 구현된 것이다. 이 세상은 중생이 깨닫건 깨닫지 못하건 간에 본각의 모습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투철하게 알 때, 시각은 본각으로 완성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본각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 그리고 중생들 그대로가 바로 본각이다.' 그리하여 원효의 이렇게 말한다.

    "({금강삼매경};) 무주 보살이 말했다. <모든 경계도 또한 그러하여 공의 상도 아니며 공의 상이 없는 것도 아니겠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렇다. 저 모든 경계는 자성이 본래 결정성이니, 결정성의 근본은 처하는 곳이 없다.> 무주 보살이 말했다. <覺도 또한 이와 같아서 처하는 곳이 없겠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렇다. 覺은 처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청정하고, 청정하므로 覺이 없으며, 사물은 처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청정하고, 청정하므로 색이 없다.>

    ({금강삼매경론};) 이 아래 세 가지는 다르지 않은 상을 밝힌 것이다. 그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각과 경계가 같은 상임을 밝혔고, 뒤의 하나의 문답은 각과 식이 같은 상임을 밝혔다. 처음 가운데 앞의 것은 경계가 각과 같음을 밝혔으니, 모든 허망한 경계는 본래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공의 상이 있겠으며, 이미 공이 있지 않는데 어찌 공을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공의 상도 아니며, 공의 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니, 이로써 말한다면 각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 뒤의 문답은 각이 경계와 같음을 밝힌 것이다. '각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한 것은 각 역시 인연으로 생겨서 본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답 가운데 '청정하므로 각이 없다'고 한 것은 공의 이치를 깨달아 모든 상을 떠났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한 것이다. 각의 자성이 이미 공하고 공 가운데는 각이 없으니, 마치 색의 공함에서는 색의 상이 없는 것과 같다."

    "({금강삼매경};) 무주 보살이 말하였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一覺의 성스러운 힘과 네 가지 큰 지혜의 경지는 곧 일체 중생의 근본 깨달음의 이익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중생은 곧 이 몸 가운데 본래 원만하게 갖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삼매경론};) 시각이 원만해지면 곧 본각과 같아져서 본각과 시각이 둘이 없기 때문에 '一覺'이라 하였고, 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성스러운 힘'이라 하였으며, 일각 안에 네 가지 큰 지혜를 갖추어 모든 공덕을 지니기 때문에 '지혜의 경지'라 하였고, 이와 같은 네 가지 지혜가 일심의 양과 같아서 모두 두루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큰 지혜'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일각은 곧 법신이고, 법신은 곧 중생의 본각이기 때문에, '일체 중생의 근본 깨달음의 이익'이라 하였다. 본래 무량한 性의 공덕을 갖추어 중생의 마음을 훈습하여 두 가지 업을 짓기 때문에 '본각의 이익'이라 하였다. 이 본각의 둘이 없는 뜻으로 말미암아 한 중생도 법신 밖으로 벗어남이 없기 때문에 '곧 이 몸 가운데 본래 원만하게 갖추어 있다'고 말하였다."

    원효가 보여주는 적극적인 세상 통합의 의지는 세상과 중생을 곧 본각으로 볼 수 있는 대긍정의 관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3) 본각은 자기 이익과 타자 이익을 동시에 실현시킨다
    모든 현상적 차이들을 배타적 다툼이 아닌 평화적 공존으로 통합할 수 있으려면, 그 상위 원리가 자기 이익과 타자 이익을 동시에 완성시키는 한편 타자 이익에의 기여를 존재의 당위로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원효나 의상의 통합 사상을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원칙이다. 이와 관련하여 원효는 각(覺) 사상, 특히 본각 사상에서 그 구체적 통로를 확보한다.

    원효에 의하면 본각의 본성은 청정(淨)과 오염(染)과 같은 상대적 가치 판단을 본질적으로 초월하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각의 초월적 특성은 무작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떤 인위적 가치 판단에도 집착하지 않으므로, 동요 없고 해방된 마음으로 타자를 위해 필요한 행위들을 할 수 있다.

    "묻기를, 이 本覺性이 통틀어 染淨의 因性이 되어야 하는가, 다만 모든 淨法의 본성이기만 해야 하는가? 만약 다만 淨法의 因이라고만 말한다면 어째서 {능가경}에서 '여래장은 善·不善의 因이다'고 하면서 널리 설명하고 있으며, 만약 통틀어 染淨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무슨 까닭으로 '性功德을 구족한다'고만 말하고 '性染患을 구족한다'고는 말하지 않는가?

    답하기를, 이 理는 통틀어 染淨과 함께 性을 이루는 것이니, 그러므로 오직 性功德을 구족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理가 淨性을 여의었기 때문에 緣을 따라 모든 染法을 지을 수 있으며, 또한 染性을 여의었기 때문에 연을 따라 모든 淨法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染淨法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통틀어 染淨의 본성이 되는 것이며, 染淨性을 여의었기 때문에 오직 性功德인 것이다. 어째서 染淨性을 여의어야 모든 공덕을 이루게 되는가? 染淨性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망상이기 때문이다."

    {금강삼매경}과 그에 관한 원효의 주석에서는 본각이 제공하는 자기 이익과 타자 구제의 공능 및 본각과 타자 구제의 필연적 연결이 더욱 적극적으로 역설되고 있다.

    "일체의 유정은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무명의 긴 밤에 들어가 망상의 큰 꿈을 지으니, 보살이 觀을 닦아 無生을 얻을 때에 중생이 본래 적정하여 다만 본각임을 통달하여, 一如의 침상에 누워 이 본각의 이익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한다. 이 품은 이러한 도리를 나타내기 때문에 本覺利品이라 한 것이다.


     (…) 무생의 행에 의하여 본각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일체를 널리 교화하여 이롭게 할 수 있다. (…) 처음에 무주 보살이라 한 것은, 이 사람이 비록 본각은 본래 일어나 움직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적정에 머물지 않고 항상 널리 교화함을 일으키니, 그 공덕에 의하여 명칭을 세워 '無住'라고 한 것이다. 머무름이 없는 공덕이 본각의 이익에 계합하기 때문에 이 사람으로 그 宗要를 나타낸 것이다."

    참선(觀) 수행을 통해, 실체 관념으로 인한 주객의 분별과 동요가 사실은 본래 '생겨남이 없음(無生)'을 깨닫게 되면, 중생이 본래 본각임을 통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본각으로 귀환한 자는 중생을 모두 동일한 본각으로 보게 되어 그들을 '본각으로서의 한 몸'으로 교감하게 되고(一如의 침상에 누움), 그 결과 중생을 근본적으로 긍정하는 태도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일으키게 된다.


    모름지기 본각과 하나가 되어야 모든 타자들에 대한 이타행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본각과 하나가 된 사람은 실체 관념으로 인한 주객 분별과 그 동요로부터 해방되는 동시에, 무작용의 고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본각으로서의 타자들'에 대한 일체감에 충동되어 머뭄이 없는 무집착의 적극적 이타행을 펼쳐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머뭄 없는 이타행'은 바로 자신이 성취한 본각에 내재한 이익들이다.

    본각에 귀환하였다는 것은 이처럼 무작용의 적정(寂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작용의 공능을 그 이익으로 확보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 본각의 이익을 {금강삼매경}과 원효는 대승불교가 주창하는 삼취계( 三聚戒; 攝律儀戒·攝善法戒·攝衆生戒)의 공능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금강삼매경};)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네 가지 緣이란, 첫째는 擇滅을 짓는 힘으로 취하는 緣으로서 攝律儀戒이고, 둘째는 본각의 이익인 淨根의 힘으로 모아 일으키는 緣으로서 攝善法戒이며, 셋째는 본각의 지혜인 大悲力의 緣으로서 攝衆生戒이고, 넷째는 一覺의 通智力의 緣으로서 如에 따라 머무는 것이니, 이것을 네 가지 緣이라고 한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네 가지 큰 緣의 힘은 事相에 머물지 않지만 공용이 없지 않으며, 일체의 처소를 떠나 있기에 곧 구할 수가 없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한 가지 일이 六行을 통틀어 포섭하니, 이것이 부처의 菩提이고 薩般若의 바다이다.

    ({금강삼매경론};) 처음 중에 '네 가지 연'이라고 말한 것은, 일심 본각의 이익 중에서 四力의 작용을 갖추어 세 가지 계율의 연을 짓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멸함에 의지하는 연이고, 둘째는 생겨남에 의지하는 연이며, 셋째는 포섭함에 의지하는 연이고, 넷째는 떠남에 의지하는 연이다. 멸함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각 중의 性의 고요한 공덕이 모든 번뇌의 자성과 상위한 것을 말하니, 이 연으로 섭율의계를 이룬다.


    생겨남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각 중의 性의 선한 공덕이 모든 善根의 자성과 서로 따르는 것을 말하니, 이 연으로 섭선법계를 이룬다. 포섭함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각 중의 性이 大悲의 자성을 이루어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을 말하니, 이 연으로 섭중생계를 이룬다. 떠남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각 중의 性이 반야의 자성을 이루어 모든 事相을 버리고 여의는 것을 말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三聚戒로 하여금 事相을 버리고 여의어 如에 따라 머물게 한다. 앞의 세 가지는 별개의 연이고, 뒤의 한 가지는 공통의 연이다. 보살이 발심하여 三戒를 받을 때에 본각의 이익에 따라서 받아 지니는 것이니, 이 네 가지 인연으로 세 가지 계율을 구족하게 된다."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간 본각은 '네 가지 힘(四力)의 작용'을 그 이익으로 갖추고 있으며, 그로 인해 대승불교의 계율을 제대로 지니게 된다. 본각은 번뇌에 동요하지 않을 수 있는 힘(고요함의 공덕)을 지녔기에 번뇌를 제어하는 윤리적 행동을 지키는 섭율의계를 성취하게 되고, 자기와 타자 모두를 이롭게 하는 힘(선한 공덕)을 지녔기에 선한 일을 하는 섭선법계를 성취하게 되며, 타자들을 한 몸으로 여겨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힘(大悲의 자성)을 지녔기에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 섭중생계를 성취한다.


    아울러 본각은 주관과 객관의 그 어떤 대상적 경험(境界)도 실체로 보지 않아 그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의 힘(반야의 자성)을 지녔기에, 삼취계를 지니면서도 자신의 행위와 관련된 주·객관의 경험에 대해 소유 및 집착하지 않고 '하나로 같아진 경지(一如)'를 유지할 수 있다. 결국 대승의 구도자(보살)는 본각의 이익에 응하여 계율을 받아 지녀야 삼취계를 완전하게 성취하게 된다.

    또한 일천제(一闡提; 원효는 '대승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어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사람'이라 풀이한다)가 여래의 실상(實相)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다섯 가지 계위(五位; 信位·思位·修位·行位·捨位) 역시 모두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비롯된다.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自利)과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利他)이 모두 본각에 내재한 이익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금강삼매경};) 선남자여, 다섯 계위는 一覺이니,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들어간다. 만일 중생을 교화하려면 그 本處를 따라야 한다.


    ({금강삼매경론};) 다섯 계위의 모든 행위가 본각을 떠나지 아니하여 모두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으며, 행위를 이룰 때에 앞으로부터 뒤로 들어가기 때문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自利), '교화한다'는 것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利他), 이와 같은 두 가지 행위는 모두 본처를 따른 것이다."

    결국 통합의 원천인 일심으로 귀환하는 모든 행위는 본각이 지닌 이익을 취할 때라야 가능하게 되는 셈이다. 원효가 추구한 통합의 구체적 원동력은 바로 본각이 지닌 이익인 것이다. 이러한 뜻을 원효는 '마하반야바라밀'의 풀이와도 관련시키고 있다.

    "({금강삼매경};) 사리불이 말하였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일에 앞서 본각의 이익을 취해야 합니다. 이 생각은 적멸한 것이고, 적멸은 진여(일여)이니, 모든 덕을 다 지니고 있고 모든 법을 망라하고 있으면서 원융하여 둘이 아니니, 불가사의하나이다. 이 법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이니, 大神呪이고 大明呪이며 無上明呪이고 無等等呪임을 알겠나이다.

    ({금강삼매경론};) '일에 앞서 본각의 이익을 취한다'고 한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무릇 佛事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에는 항상 먼저 그 본각의 이익을 취해야 한다. 이 생멸하는 생각은 본래 적멸한 것이고, 이와 같이 적멸한 것이 곧 如如한 理이다. 이 理 가운데 본각과 시각의 모든 덕을 다 포섭하고 있고 또한 생멸하는 모든 법을 망라하고 있으면서 원융하여 둘이 아니니, 이 때문에 매우 심오하여 불가사의하다. 이 가운데 비록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지만, 그 바탕은 오직 본각과 시각이 평등하여 둘이 아닌 것이니, 그 때문에 '바로 마하반야이다'라고 하였고, 이와 같은 반야는 근원에 사무치고 性을 극진히 한 것이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하였다."


    3) 본각(本覺)의 이익에 의한 화쟁(和諍)

    원효 사상에서 두드러지는 화쟁의 의지 또한 본각의 이익을 통해 실현된다. 통합 사상의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는 '다툼의 화해'는 일심(一心)의 근원을 그 원천 및 상위 원리로 하는 동시에, 본각의 이익을 그 구체적 동력원으로 삼는다.

    "({금강삼매경};) 이에 여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들은 본각의 이익에 깊이 들어가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만일 말세의 좋지 않은 때에 진여에 응하여 설법하고 시류의 이익과 함께 하지 말라. 혹은 순응하여 말하고 혹은 순응하지 않고 말하며, 같지도 않게 하고 다르지도 않게 하여, 서로 응하게 설하여 모든 精과 智를 이끌어 薩般若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저 허공의 바람을 취하지 않게 하여 저들로 하여금 一味의 神孔을 원하게 하라.>

    ({금강삼매경론};) '혹은 순응하여 말하고 혹은 순응하지 않고 말한다'는 것은, 만일 다만 저들의 마음에 순응하여 말하면 잘못된 집착을 움직이지 않고, 설혹 오직 순응하지 않고 말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않으니, 저들로 하여금 바른 신심을 얻게 하고 본래의 잘못된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훅은 순응하고 혹은 순응하지 않고서 말해야 한다. 또한 다만 이치에 순응하여 말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않으니, 저들의 뜻과 어긋나기 때문이고, 이치에 순응하지 않고 말하면 바른 이해를 내지 않으니,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이해를 얻게 하기 위하여 순응하기도 하고 순응하지 않기도 하며 말해야 한다. 만일 여러 가지의 다른 견해가 엇갈려 쟁론하고 있을 때에 有見에 의해 설한다면 空見과 다를 것이요, 또 만일 空執에 동의하여 설한다면 有執과 다를 것이다. 그리하여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쟁론만 더욱 일어나게 할 것이다. 또 저 두 가지에 다 동의하면 자기 안에서 서로 논쟁할 것이고, 저 두 가지에 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둘과 더불어 서로 논쟁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같지도 않게 하고 다르지도 않게 하며 설한다. '같지 않게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취하면 모두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고, '다르지 않게 한다'는 것은 그 뜻을 이해하여 말하면 허용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저들의 情에 어긋나지 않고, 같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精에 있어서나 理에 있어서나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응하여 말한다'고 하였다."

    다툼의 심리적 태도인 집착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집착을 놓고 진실을 향한 신뢰와 이해로 향하게 하려면, 상대의 마음이나 이치에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순응하지 않으면서 탄력적 태도로 상대에 맞추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필요에 따라 상대의 견해에 동의하기도 하고 동의하지 않기도 하면서, 상대의 감정이나 이성에 맞추어 가면서 진리에 대한 바른 믿음과 이해로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순응하여 말하기도 하고 순응하지 않고 말하기도 하며, 같지도 않게 하고 다르지도 않게 하면서' 상대에 응하여, 그들의 감정과 이성에 맞추어가면서 지혜로 이끌어 화쟁시킬 수 있는 능력은 다름 아닌 본각의 이익에서 나온다.


    4. 의상의 통합 사상

    1) 통합의 원천 - 화엄일승(華嚴一乘)의 경지

    의상은 존재들의 평화로운 공존과 화해, 포용과 상호 존중의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상위 원리를 화엄사상에서 설하는 화엄일승(華嚴一乘)의 경지에서 확보한다. 근원적 동질성(相卽)과 상호의존 및 침투(相入)의 관계로 불가분(不可分)의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총체적이고 치밀한 '관계의 그물망(인드라망)'이라는 관점으로 이 세계를 파악하는 화엄적(華嚴的) 연기관(緣起觀) 속에서, 의상은 다양성의 평화로운 공존공생과 상호 존중, 그리고 '하나됨의 통일적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대통합의 사상적 원리인 화엄일승의 도리를 마련한다. 이 화엄일승의 장엄한 경지를 불과 30구(句) 210자(字)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속에 압축시켜 의상은 이렇게 말한다.

    "존재의 참모습은 원융(圓融)하여 실체적 분리(二相)가 없고, 모든 것들은 분별이나 배제의 요동이 없이 본래 고요하네. 언어적 분리도 해체되고 형상적 구별도 사라져 모든 분리와 배제가 극복되었으니,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증득해야 알 수 있는 일이지 다른 방법으로는 알 수가 없도다. 진리의 경지는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니,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연(緣)을 따라 모습을 이루노라.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들어와 있고 모든 것 가운데 하나가 들어와 있으며,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로다.


    한 티끌 속에 시방 세계를 포함하고 있고, 모든 티끌 속에도 마찬가지라네. 한량없는 시간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무량한 시간이로세. 구세(九世)와 십세(十世)가 서로 상즉(相卽)하노니, 그러면서도 뒤죽박죽 섞여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상을 확보하노라. 처음 마음을 일으킬 때가 곧 올바른 깨달음이요,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 하는도다.

     

    도리(理)와 사물(事)이 별개의 것이 아니니, 십불(十佛)과 보현대인(普賢大人)의 경지로다. 능히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들어, 갖가지로 나타냄을 뜻대로 하는 것이 불가사의하구나. 내리는 비처럼 많은 보배로운 것들로써 중생을 돕는 일을 허공을 가득 채울 만큼 하니, 중생은 자기 그릇 크기대로 이익을 얻네. 그러므로 화엄 수행자는 진리 자리로 돌아가 마침내 망상을 쉬게 되고, 무연(無緣)의 매우 교묘한 방편을 뜻대로 잡아, 진리 집으로 돌아가면서 분수대로 자량(資糧)을 얻네.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 법계의 진실한 보배 궁전을 장엄하여 마침내 진리인 중도(中道) 자리에 앉으니, 옛부터 움직이지 않음을 부처라 이름하노라."

    이와 같은 화엄일승의 경지를 최근 발굴된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에서 의상은 이렇게 말하고도 있다.

    "삼승(三乘)에서 일(事)은 마음의 연(緣)이나 물질적 장애 등이고 이치(理)는 평등한 진여(眞如)이니, 비록 理와 事가 같지는 않지만 상즉(相卽)하고 상융(相融)하여 서로 방해나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또한 서로 방해하지는 않지만 事의 뜻이 理의 뜻은 아니다. 보법(普法. 華嚴一乘)에서의 事와 理는, 理가 곧 事이고 事가 곧 理이며 理 가운데 事가 있고 事 가운데 理가 있어서, 즉(卽)과 중(中)의 관계 속에서 걸림이 없다. 비록 事와 理가 서로 섞이지는 않지만 그윽하여 둘이 아니니, 말에 따라 남김없이 드러나게 되며, 남김없이 드러나지만 또한 남김없이 드러나지도 않는다.

     

    理와 事에서처럼 事와 事에서도 그러하다. 마음으로써 일체법을 말하면 마음 아닌 것이 없고, 물질로써 일체법을 말하면 물질 아닌 것이 없다. 인간과 사물에 관한 기타 일체의 교의(敎義) 등 차별법문이 모두 그러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연기다라니(緣起陀羅尼)의 걸림 없는 법은 일법(一法)을 들어(擧하여) 일체를 남김없이 포섭하면서 무애자재하기 때문이다. 하나가 없으면 일체가 없기 때문이다. 삼승은 그렇지 않다. 理를 폐(廢)하고 오직 事를 말하여 한결같이 理를 事와 섞지 못하니, 事 가운데서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일상(一相)의 교문(敎門)은 정식(情識)에 따라 머물러 理를 남김없이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상이 자신 있게 설하는 이 화엄일승의 세계는 분명, 세속을 오염시키며 주도하고 있는 실체적 분리와 부정, 배타와 독점의 논리 및 그에 입각한 삶을 극복한 경지이다. 이 화엄일승의 경지에서는 실체적 분별과 그로 인한 격리가 해소되어 모든 존재들이 근원적 동질성(卽. 相卽)과 상호 의존적 관여 및 침투(中. 相融) 속에 '한 몸'으로 통합된다.


    그런데 이 통합은 '보편적 하나됨'과 '다양한 개별성'이 동시에 확보되는 포섭이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개별적 위상을 유지하면서도 실체적 자기 주장이나 분별 및 그로 인한 상호 부정으로 나아가지 않고 상즉(相卽)과 상융(相融)의 '하나됨'을 확보하는 것이다.


    2) 통합의 통로 - 성기(性起) 사상과 무분별지(無分別智)

    (1) 성기사상
    의상은 통합의 원천을 화엄일승의 경지에서 구하는 동시에 그 사상적, 실천적 통로를 성기(性起) 사상 및 무분별지(無分別智)에서 확보하고 있다. {화엄경(華嚴經)} [성기품(性起品)]의 '성기(性起)'라는 용어를 주목하여 성기론을 출발시킨 사람은 의상의 스승 지엄(智儼. 602∼668)이다. 해탈이라는 자기 해방과 타인 구제를 삶의 유일한 목표로 삼은 구도자(보살)는, 세계를 철저히 성기적 관점으로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어야 그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지엄의 법계연기론이며 성기사상이다. 의상은 이러한 지엄의 사상을 계승하여 화엄적 통합의 통로로서 성기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의상에 의하면 성기란 '연을 따르지 않음(不從緣)'이다. 불교의 연기설에 비추어 볼 때, 근본 무지(無明)를 조건으로 하여 사물을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名色)로 간주하여 존재와 비존재로의 변화(生滅)를 소유와 집착으로 경험해 가는 것은 '연을 따르는 것'이다. 반면 사물을 실재대로 파악하는 지혜에 의해 무아(無我)·공(空)의 무실체적 관점으로 세계를 무소유·무집착으로 경험하는 것은 '연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연기(緣起)를 실체 관계의 생성이 아니라 무실체적 공성(空性)의 현현인 성기(性起)로 볼 수 있을 때, 화엄일승의 경지에 이르러 화엄적 세계 통합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묻습니다. 성기와 연기라는 두 말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하겠다. 성기란 것은 곧 자체이니 연(緣)을 따르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연기라고 하는 것은 여기(성기)에 들어가는 가까운 방편이니, 모든 것은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연을 따라 생겨나는데, (생겨난다고 할지라도 본래 자성이 없다는 관점에서 보아) 이 생겨남이 아닌 차원으로 들어가 깨닫게 하는 것을 말한다.


    성기라고 하는 것은 곧 그 법성(法性)이니, '생겨남이 없음'을 본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즉 '생겨남이 아님'을 가지고 생겨남으로 삼는 것이다. (…) 묻습니다. 그렇다면 곧 생겨남이 아니라는 것인데, 무슨 이유로 생겨난다(起)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답하겠다. '생겨난다'는 것은 곧 그 법성이 분별을 떠난 보리심 안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곧 '생겨남이 아님(不起)'을 가지고 생겨남(起)으로 삼는 것이니, 그 법의 본성과 같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이름할 뿐이지 '생겨나는 모습이 있는 생겨남(有起相之起)'은 아니다. (…) 묻습니다. 만약 연을 보지 않는다면 어째서 법 가운데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을 두는 것입니까? 답하겠다. 실로 그러하다. 그 연을 보지 않으면 곧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을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연 가운데서 곧 '연을 떠난 본성'에 의거하여 '성기'를 논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기연(機緣)을 따라 설하는 것이니, 그 법 가운데 이러한 '생겨남'이라든가 '생겨나지 않음' 등의 모습이 있다고 보지는 말아라."

    실재대로 파악하는 올바른 이해(如實正見)에 의해 실재대로 드러난 성기의 세계에는 실체적 분별과 분열 및 그 동요가 본래 '생겨나지 않는다'. 이 때 존재들은 실재대로의 모습(法性)에 계합하여 상즉(相卽)과 상융(相融)의 화엄적 통합의 통로가 열린다.

    이러한 성기사상에 의한다면 연기는 곧 실체적 분별로 분열된 세속이다. 그러나 성기적 통합은 연기적 존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실체적 분별과 분열을 일삼는 '연기적 오해'를 '성기적 통찰'로 전환시키는 일이다. 연기 속에서 반성과 자각으로 깨달음의 조건을 확보하고(이것을 의상은 緣修·修生·新生 등으로 표현한다), 마침내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성취하여 '본래의 진실성(이것을 지엄과 의상은 本有라고 한다)'에 계합하는 것, 즉 '연기에 의거한 수행'을 통해 진실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것은 성기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계기적 근거이고 토대이며 방편이다. 그런 점에서 성기적 진실은 연기적 왜곡과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닌(不一不二)' 혹은 '다르지 않은(不異)' 관계이다.

    그런데 연기적 왜곡으로부터 성기적 진실로 전환하는 과정의 출발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자각(보리심)'이다. 본래의 진실성을 등지고 있는 중생은 깨닫고자 하는 마음(보리심)을 통해 비로소 본래의 진실성과 이어진 통로에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의상은 이 점을 향배(向背)라는 말로써 거론하고 있다.


    궁극적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無上菩提心)을 일으켜 마침내 스스로 본래의 진실성(性起法)에 눈뜨는 것은 성기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므로 '향함(向)'이라 하고, 반대로 궁극적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진실성에 눈뜨지 못하는 것은 성기를 등지는 것이므로 '등짐(背)'이라 부른다.

    본각의 이익에 따라 자리와 이타를 동시에 실현하는 원효의 경우처럼, 연기를 성기로 볼 수 있게 된 자는 자기 구제와 중생 구제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자기 구제와 중생 구제의 본질적 결합(自利卽利他)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연기를 성기로 파악하게 된 자, 연(緣. 삶의 상황)에 의거하여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본래의 진실성에 계합하게 된 자는, 그 성기적 진실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중생 구제와 연결시킨다.

    깨달음의 경지는 뭇 생명에 대한 보편적 사랑(慈)이 완전하게 드러난 상태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기 역시 중생에 대한 보편적 사랑(慈)을 그 당연한 속성으로 한다.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보리심)을 일으켜 얻은 무분별지(無分別智)로써 본래의 진실성에 계합하여 연기를 성기로 보게 된 자는 중생을 향한 자애의 마음을 끝없이 펼친다. 화엄일승의 관점으로 보면 세계는 상즉(相卽)과 상입(相入)의 관계로 복잡하게 연결된 불가분리의 '하나의 그물망'이기 때문에, 성기의 자비광명은 필연적으로 '한 몸'인 타자들을 향해 펼쳐진다.

    "묻습니다. 잠용자성문(潛用資成門) 가운데서 경은, '여래의 성기광명(性起光明)이 사견(邪見)을 지닌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마치 일광(日光)이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 눈 먼 중생은 그것을 모르는 것과도 같다'고 말합니다. 그 사견을 지닌 중생은 진리를 크게 위배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익을 얻습니까?


    그 당시에 이익을 얻는 것입니까, 후에 이익을 얻는 것입니까? 답하겠다. 두 때에 모두 이익을 얻는다. 묻습니다. 후에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당시에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답하겠다. 비록 사견의 성질로 진리를 위배한 중생이라도 곧 그 성기의 자애를 입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과보를 얻게 된다. 그 과보는 성기의 자애가 아니면 곧 과보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깊은 자애이니, 일체 중생이 알 수 없는 자애이다."


    (2) 무분별지
    연기(緣起)의 세계를 실체적 분별로 분열시켜 가는 무지와 오해를 극복하고 성기적(性起的) 진실로 나아가려면 '깨달음을 구하려는 자각(보리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자각은 '실체적 분별의 극복'으로 이어져야 한다. 불교에서는 '상호의존적 관계성(緣起)' 및 '고정불변의 독자적 실체의 부재(無實體, 無我, 空)'라는 존재의 실재를 허구의 실체 관념으로 왜곡하여 분리와 집착 및 그로 인한 분열과 불안을 전개하는 마음의 구조와 내용을 분별심(分別心)이라 한다.


    인간세 모든 해악적 분열의 인식적 원천이 바로 분별심이다. 따라서 화엄적 통합의 원천인 화엄일승의 세계로 귀입(歸入)하는 관건도 '분별의 극복'에 달려있다. 그리하여 의상은 무분별(無分別)과 무분별지(無分別智)를 화엄일승의 통로로 설정한다.

    의상은 {법계도(法界圖)} 화엄사상의 수미일관하는 요점을 '무분별'이라는 말로 압축하고, '무분별지'를 그 실천의 결정적 관건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화엄경문답}에서는 그 무분별지의 증득 방법으로 반정법(返情法)을 제시하고 있다.

    의상에 의하면, 모든 존재들을 별개의 독립된 실체로 분리해 보거나(分別) 불변의 독립된 실체로 고정시켜 버리는(住) 사고 방식에서 탈피하여, '분별을 극복하고(無分別)' '머물지 않으면서(不住)'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 원교(圓敎)인 화엄일승의 경지이다.


    그리고 이 분별 없음(無分別)과 머물지 않음(不住)의 관점을 체득케 하는 것이 바로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무분별(無分別)·부주(不住)의 도리를 체득할 수 있으려면, 그리하여 그 도리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려면, 생각 생각마다 무분별지를 밝혀야 한다. 그리고 무분별지를 밝히는 구체적 수행법이 바로 반정법(返情法)이다. '무분별'이 화엄일승의 세계를 여는 사상적 관건이라면, '무분별지'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실상(實相)인 성기(性起)의 경지로 들어가는 수행상의 실천적 관건인 셈이다.

    "묻기를, 이미 '머무는 것이 없음(無住)'에 대한 교설을 듣고 '머무는 것이 없음'의 이치를 믿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미혹하다는 것입니까? 답하길, 분별하는 이해이기 때문이다. 만일 '머무는 것이 없음'에 대한 교설을 듣고 그 마음의 견해가 '머무는 것이 없음'의 이치로 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단지 자기 마음이 지어낸 '머무는 것이 없음'일 뿐이지 부처가 말한 '머무는 것이 없는 도리'는 아니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자기 마음으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니, 어찌 저 '머무는 것이 없음'의 도리를 볼 수 있겠는가?

     

     만약 그 도리를 보지 못했으면서도 보았다고 한다면 어찌 올바른 믿음이 되겠는가? 자기 안에 바른 믿음이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설법한다면 이는 남을 속이는 일이요, 또 아직 부처의 경지를 증득하지 못했으면서도 '부처는 이렇게 말하였다'면서 설하는 것은 부처를 비방하는 일이다.


    또한 부처의 경지를 보지 못했으면서도 보았다고 하는 것은 법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얻었다고 하는 아만(增上慢)이기 때문에 용맹정진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이 만일 자기와 소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만나면 곧 있는 대로 성을 내어 갖가지 악업을 짓기 때문에 모든 선근을 끊는 길(闡提道)로 들어가게 된다. 조심해야만 하니, 이것이 수행인이 크게 중시해야 할 점이다."

    "묻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그 도리를 봅니까? 답하길, 이미 無分別의 도리를 들었다면 단지 無分別智로써 곧 증득하는 것이니, 생각 생각마다 무분별지를 닦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편이 없다. 묻기를, 어떻게 해야 부처의 말을 올바로 믿습니까? 답하길, 부처 말 가운데의 말을 이해해야만 한다. 불법은 말로 드러낸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이처럼 말하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있어서 견해가 어디에도 붙들려 매이지 않는다면 곧 믿고자 하는 것이 이해되고, 이해되지 않던 것을 증득하여 알게 된다. 그러므로 무분별지를 속히 닦아라. 성인의 뜻이 어찌 이처럼 닦는 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태까지 지어온 갖가지 문장의 뜻들은 모두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하니, 말 그대로는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의상에 의하면, '머무름 없는(無住)' 도리를 증득하지 못하는 것은 무분별지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분별지를 증득하지 못했으면서도 믿음과 깨달음을 주장하며 아만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부정과 적대감으로 대하면서 악행을 범하여 깨달음의 조건들을 모두 저버리게 된다. 무분별지의 증득이야말로 올바른 믿음과 진정한 깨달음을 가능하게 한다. 화엄일승의 도리를 몸에 익혀 실천하려면 무분별지를 증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무분별지를 증득할 수 있는 구체적 수행 방법에 대해 {화엄경문답}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일승연기의 법은 정식(情識)으로 헤아려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비록 정식으로 헤아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멀리서 구하지는 말아라. 정식을 돌이키기만 하면 된다. 묻습니다. 정식을 돌이키라는 것은 그 방편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답하겠다. 비록 방편이 무수하지만 그 요점을 말하겠다. 보이는 것을 따라 가면서 마음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들리는 것을 따라 가면서 들리는 대로 취하여 집착하지 말아라. 그러면 곧 그것이 말미암은 바를 이해할 수 있고, 또 존재의 참다운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의상에 의하면, 화엄 일승의 경지는 정식(情識)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정식을 버리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정식으로도 안되고 정식을 떠나서도 안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식을 돌이켜 살펴라'는 것이 의상의 대답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정식을 돌이키는 것'인가? 의상이 제시하는 요점은 이렇다; '보이는 것을 따라가면서 마음을 집착하지 말고, 들리는 것을 따라 가면서 들리는 대로 취하여 집착하지 말라.'

    불교의 인식론적 반성에 따르면, 정식(情識)은 무명에서 비롯된 '선입 이해 방식'에 지배받는 중생의 인식 활동이다. 보고 들리는 대상들을 향해 던져지는 '이해의 선입 틀과 그 관성'을 그대로 방치하며 그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인식 과정이 정식이다. 그러므로 정식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그대로 따라가며 분리된 소유물과 분열된 세계로서 경험하고 그에 집착한다.' 실체성을 부여하는 '선입 이해 방식'에 지배된 채 사물을 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식에 의해 사물을 파악하는 한, 화엄일승이 전하고자 하는 연기의 실상(實相)은 왜곡되어 사물의 진실은 은폐된다. 무분별(無分別)·부주(不住)라는 사물의 참모습은 분별과 고정으로 일그러진다.

    정식에 의한 이와 같은 진실의 왜곡과 은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분별지를 증득해야 한다. 그리고 무분별의 인식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정식을 돌이켜, 보고 들리는 대로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정식을 돌이킨다'는 것은 '선입 이해 방식'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또한 '보고 들리는 대로 쫓아가 집착하는 것'이 무지에서 비롯된 '선입 이해 방식'에 지배되어 사물을 실체와 고정의 관점에서 왜곡하는 과정인데 반해, '보고 들리는 대로 따라가 집착하지 않는 것'은 그 이해의 선입 틀에 휘말리지 않은 채 보고 들리는 사물을 '지켜보는 것(팔정도의 正念)'이다. 무분별지를 증득하려면 '말 그대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莫如言取解)'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 놓여있다. 언어로 지칭되는 사물을 선입 이해 방식에 지배된 채 받아들이는 것이 '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의상이 설하는 무분별지의 증득 방법은 결국 붇다 이래 계승되어 온 불교 고유의 전통적 참선 수행과 맞닿아 있다. 의상은 통합의 원천인 화엄일승의 경지에 올라서는 실천적 기반을 무분별지로 압축시킨 후, 무분별지의 구체적 증득 방법으로서 전통적 참선법의 핵심을 계승한 반정법(返情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5. 맺는 말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한국불교의 이념적 전개에서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주목된다. 흔히 호국불교(護國佛敎)로 일컬어지는 '국가 불교적 전개'가 그 하나이고, 차원 높은 보편성에 입각한 '통합 이념적 전개'가 다른 하나이며, 강한 '대중 불교적 전개'가 그 마지막 유형이다.

    국가 불교적 전개는 삼국 불교에 공통적으로 목격된다. 삼국의 불교는 고대국가의 형성과 발달 시기에 국가 이익에 적극 기여하는 형태로 뿌리내리는 경향을 보여준다. 특히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있는 신라불교의 경우, 초기에는 국가 불교적 이념으로서의 역할이 돋보이고, 불교를 충분히 소화한 이후로는 시대의 강렬한 요청이기도 하였던 '보편성에 입각한 통합'을 추구하는 면모가 부각된다. 그리고 이 두 이념 지형과 교섭 혹은 분리된 채 강한 서민적 대중성을 목표로 실천적 궤적을 남기고 있는 대중불교 진영이 또 하나의 축으로 자리잡는다.

    국가 불교적 전개는 '종교의 세속화와 권력화'라는 후유증을 잉태한다. 또한 후기 대승불교의 고급 이론과 사상은 어쩔 수 없이 소수 종교 엘리트주의의 그늘을 한편에 드리우게 된다. 문자 언어의 권력성을 감안해 보아도, 난해한 한문을 구사하는 소수 엘리트 승려들의 권력화는 피하기 어려운 함정이었을 것이다. 정신적, 지적(知的) 수준과 능력에 있어 탁월한 면모를 지닌 승려들은 국가 이익에 기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권력 친화적이 되었고, 사회에서도 소수 특권층으로서의 지위를 향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불교계 내에 뿌리내리는 이와 같은 권력주의, 귀족주의, 소수 엘리트주의는 불교의 강한 구세주의적(救世主義的) 보살도(菩薩道) 이념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배경으로 서민 지향의 강한 대중 불교적 실천에 몰두한 일군(一群)의 불교인들이 또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며 등장한다. 백제의 검단(黔丹), 신라의 원효·대안(大安)·혜공(惠空)·혜숙(惠宿)·사복(蛇福), 삼국 통일 이후 활동했던 옛 백제 출신의 진표(眞表) 등이 기록상 돋보이는 대중 불교적 실천의 대표적 주역들이다.


    이들은 불교계의 권력화와 소수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고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륵신앙이나 정토신앙을 적극 활용하였으며, 삶의 환경과 방식 또한 철저히 서민 대중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원효를 제외한 대부분의 대중 불교 운동가들은 그들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저술을 남기지 않아 그 실천의 이념적 토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국가 불교적 이념과 그 실천은 또한 불교 고유의 보편적 지평과 충돌될 수 있는 위험성을 본질적으로 안고 있다. 불교는 인간이 고안하여 쌓아올린 모든 형태의 '배타적 편가르기 벽'들을 근저에서 허물어 버리는 무규정(無規定)의 강한 해체적 보편성을 지닌다. 국가나 민족, 인종, 신념의 벽을 해체시킨 후, 차원 높은 보편적 개방성에 입각한 평화와 안녕의 질서를 새롭게 수립하고자 한다.


    불교의 이 차원 높은 보편적 기획 앞에서 국가나 민족 등의 울타리나 편애는 그 본질에 있어 장애로 작용하기 쉽다. 국가 불교적 실천은 그런 점에서 '국가주의'의 벽에 갇힐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하겠다. 비록 국가 불교적 실천에 몰두했던 모든 불교인들이 배타적 국가 이기주의나 집단 이기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국가를 매개로 불교와 세속과의 소통을 확보하려고 하는 국가 불교적 실천은, 그 강한 현실적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불교 보편주의의 제한'이라는 한계에 노출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원효나 의상이 대변하는 통합 이념적 전개는 고대 불교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고 있다. 그들이 추구했던 '보편적 통합'의 의지와 사상은 국가 불교적 전개의 한계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상의 차이들을 배타적 분열과 다툼이 아닌 평화적 공존으로 가꾸어 가려는 원효와 의상의 통합 사상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원칙을 전제로 구성되고 있다. 하나는 모든 존재와 현상들을 실체적으로 분리시키지 않는 '둘 아님(不二)'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완성의 통로인 그 원리가 타자 존중과 적극적 배려를 그 당위로서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효와 의상은 각각 일심과 화엄일승의 경지에서 '둘 아님'의 통합 원천을 확보한다.


    또한 원효는 각(覺) 사상을 통해, 의상은 성기(性起) 사상과 무분별지(無分別智)를 통해 '둘 아닌' 통합의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특히 원효의 경우 화쟁의 의지 역시 본각의 이익에 의거하여 구현하고 있다. 원효는 일심과 각 사상에서 통합의 원천과 통로를 확보하여 존재의 해방적 통합과 다툼의 화해를 추구하고 있고, 의상은 화엄일승의 도리에서 '공존공생의 포용 및 상호 존중'과 '하나됨'이 결합하는 통합·통섭의 원천과 원리를 마련하는 동시에 성기사상과 무분별지를 화엄일승으로 나아가는 통로로 삼아 존재의 화엄적 통합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상호 배타적 존재 분열과 그 다툼이 해소되려면 실체적 분리를 극복할 수 있는 존재론적 원리가 확보되어야 하며, 그 원리에 의해 타자들에 대한 존중과 우호적 배려를 필연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원효와 의상이 제시하는 존재 통합의 조건이다.


    인간과 인간이 본질적으로 평등한 존재로 만나면서 현상의 차이를 공존과 화해, 포용으로 안을 수 있는 존재 이해, 그리고 그 어떤 인위적 가치 판단에도 갇혀버리지 않는 무집착의 정신으로 세계 내에서 진실과 사랑을 향해 자신을 무한히 개방시켜 갈 수 있는 사상과 수행의 통로가 확보되어야 세상의 평화가 가능하다는 그들의 통합 사상은, 그 차원 높은 보편성으로 인하여 현재에도 충분히 유효할 수 있다.


    내용출처 :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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