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살의 10단계 믿음
바로 앞 10지품에서 화엄경의 경명 해설 등과 수행의 단계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책 첫 게송의 설명에서, 불교를 믿는 목적은 성불成佛(부처가 됨)이어야 한다고 밝혀 놓았습니다. 제가 다시 상기시켜 드리는 까닭은, 이 '수행'과 '성불' 이외의 모든 행위는 엄격히 말하면 불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이나 불교라는 종교의 '원칙'에 비추어 보아도 결코 심한 표현이 아닙니다.
아주 원론적이며 중요한 사안이라 재차 확인하면, 불교라는 종교를 추구함에 있어 '장차 나는 부처를 이루겠다'라는 생각과 '그 방법으로는 10바라밀을 행해야 한다'라는 인식이 없으면 사도邪道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승가에서 이를 잊으면 승가가 아니고, 불자가 이를 잊으면 불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믿음을 이끄는 승가나 그 가르침을 따르는 재가에서 '현실' 운운한다면 이처럼 비불교적인 망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토에 태어나도 똑같은 소리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에도 부처님을 친견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말에 공감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승가나 재가 모두 이제는 더 이상 '현실'에 대한 타협으로 불교를 서로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승가는 공덕을 강조하고, 그 공덕이란 보시 즉 돈과 연관 짓고, 재가는 자신의 매번 바뀌는 욕망들을 성취시키기 위한 '투자'를 계속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수행의 과정에서 자연히 얻어지는 '과보'이어야 하지 그것을 '목적'으로 삼을 때 승가와 재가 모두 그 순간부터 불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집니다. 아니 부처님을 이용하고 부처님을 욕되게 하여 결국에는 불법을 파괴하는 악업을 짓는 것입니다.
당연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제가 말을 이 정도에서 그치면 그 의미를 곡해하거나 또 다른 속내가 있다고 단정하시는 분이 꼭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말하는 '보시바라밀'이 어느 수준인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음은 이세간품의 열 가지 보시에 대한 언급입니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청정한 보시가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평등한 보시니, 중생을 가리지 않는 연고라. 뜻을 따르는 보시니, 그들의 소원을 채우는 연고라. 난잡하지 않은 보시니, 이익을 얻게 하는 연고라. 마땅함을 따르는 보시니, 상·중·하를 아는 연고라. 무주상無住相 보시니, 과보를 구하지 않는 연고라. 터놓은 보시니, 마음에 연연하지 않는 연고라. 온통 하는 보시니, 끝까지 청정한 연고라. 보리에 회향하는 보시니, 함이 있고 함이 없음을 멀리 떠난 연고라. 중생을 교화하는 보시니, 도량에 이르도록 버리지 않는 연고라. 세 바퀴(三輪)가 청정한 보시니, 주는 이와 받는 이와 물건을 바른 생각으로 관찰하여 허공과 같은 연고라. 이것이 열이니, 만일 보살들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여래의 위 없는 청정하고 광대한 보시를 얻느니라.
보시를 권하는 승가나 보시를 하는 재가가 이 말씀에 합당하다면 제가 '현실'을 잘못 파악하고 비방을 한 죄가 커서 무간지옥고를 면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저로서는 그 쪽이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내친김에 자비에 대한 인식도 거론하겠습니다. 불교는 아무리 큰 잘못도 용서해 주는 자비문중이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비의 화신은 관세음보살입니다. 즉 관세음보살만큼 더 자비하신 분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 자비의 원천은 역시 중생구제의 원願입니다.
하지만, 이 관세음보살님이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내는 수 많은 모습 중에는 화를 내는 모습도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습니다. 실제 석굴암의 뒤쪽 벽면의 조각되어 있는 여러 상 중에는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이 있는데, 그 모습에는 '화내시는' 얼굴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생은 아무리 잘못해도 항상 웃고 다 용서해 주시는 존재로서만의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자비를 청하는 것이 중생들입니다.
그러나, 중생들이여! 왜 관세음보살이 당신들 앞에 화내는 모습으로 당신의 본래의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고는 생각하질 않습니까? 당신의 참회를 요구하고 회초리를 든 모습이 당신을 구제하기 위한 자비의 본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왜 유독 당신에게만 항상 당신이 일방적으로 한정지어 놓은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고집합니까?
이는 승가의 경우도 다를 바 없습니다. 승가가 무엇이 아쉬워 재가자들에게 보험 상품 팔듯이 불교를 이해시켜야 합니까? 승가가 무엇이 아쉬워 재가자들이 욕망을 채우려다 실패하면 그 뒤치다꺼리나 해야 합니까? 승가가 무엇이 아쉬워 재가자들의 업을 그대로 인식시켜 주지 않고 '위로'만 해 줍니까?
뭐, 이쯤에서 멈추겠습니다. 계속하면 제 자신이 추해지는 모습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아니, 저는 추해져도 전혀 상관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아까도 언급했듯이 공연히 '다른 의도'가 있다고 오해 받기는 정말 싫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격적인 게송의 해설로 들어가겠습니다. 경전은 교리나 사상을 만들거나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화 사상이다, 화엄 사상이다, 공 사상이다 하는 것은 말로써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경전의 내용은 수행을 이해시키고, 권유하고, 또 경지에 이르게 독려하고 확인시키는, 최종적으로는 불교의 수행을 말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사상은 사상가나 학자들이 이름을 붙인 것일 뿐, 불법을 닦는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그 길을 따라 가면 되는 것이지 사상을 깊이 있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행이 깊어지면 그 사상들도 저절로 체득되는데, 대부분의 경우는 제대로 수행은 하지 아니하고 용어나 사상의 이해에 집착하니, 이것이 큰 병통입니다.
저는 아직 제주도를 가 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한라산이 그곳에 있는지 확인해 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 제주도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직접 보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다라고 한다면, 제가 현명한 생각을 가진 사람일까요? 경전의 사상도 그와 같습니다. 믿고 행하면 간단한 일들을 머릿속에서 헤아리려고만 하니, 그 헤아림은 아마 다음 생에도 계속될지도 모릅니다.
화엄경은 수행의 단계를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등 52위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분류는 보살영락본업경과 인왕경보살교화품 등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십지품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화엄경의 마지막품인 입법계품의 선재동자의 53선지식을 향한 구도 행각은 이 52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53위는 불佛입니다.) 이제 우리도 이 52계위에 대해 차례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게송에서는 그 첫 열 가지 단계인 십신十信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믿음에 대한 참된 의미는 책 중간에 자세히 설명 드린 적이 있으니 바로 열 가지 믿음의 경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화엄경에는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의 단계가 차례로 각 품으로 설정이 되어있는데 80화엄에서는 유일하게 십신품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래서 게송도 십주품에서 가려내었습니다.
이렇게 십신품이 없는 이유는, 저 개인의 견해이긴 하지만, 십주품의 내용에 이르기 전에 다른 품에서 이미 충분히 믿음(信)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체가 '침묵'의 설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에 뽑은 게송은 십주품의 법혜보살이 '발심'의 이유를 밝힌 게송입니다. 발심은 불법을 따르는 마음을 내는 '연유'를 말하는 것이니, 곧 '믿음'을 일으키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1. 신심: 부처님의 말씀에 의심 없는 큰 믿음을 내는 것입니다. 2. 념심: 부처님의 공덕을 항상 생각함,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생각함, 부처님과 그 제자를 항상 생각함, 부처님이 설하신 계를 항상 생각함, 무엇이든 베풀려고 항상 생각함, 천상의 세계를 항상 생각함 등의 육념을 닦는 단계입니다. 3. 정진심: 악한 짓을 하지 않고 선업을 지음에 게으르지 않는 것입니다. 4. 정심: 마음이 대상에 흔들리지 않아 고요함을 말합니다. 5. 혜심: 모든 법을 관찰하여 그 성품이 공空함을 아는 단계입니다. 6. 계심: 삼학三學 중 하나인 계가 청정하여 허물을 범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7. 회향심: 닦은 바 공덕을 중생들에 돌려 같이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8. 호법심: 불법을 옹호하여 정법을 수호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9. 사심: 욕심에 탐착하는 마음이 없어 모든 것을 더불어 나누어 가지는 마음입니다. 10. 원심: 일으킨 신심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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