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문사 상월원각대조사님 존상
상월원각대조사님과 천태종 천태종(天台宗)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으로 중국(中國)의 지자대사에 의하여 처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三國時代) 백제의 현광(玄光)법사에 의하여 전래되었는데, 고려 숙종 2년에 의천(義天) 대각국사(大覺國師)에 의하여 국청사(國淸寺)에서 정식으로 천태종의 종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천태종의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5백년 동안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에 의하여 불교는 산중으로 쫓겨나, 고려의 그 찬란했던 불교 문화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5백년 동안 불교가 억압받은 상태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차츰 불교의 실천적인 교법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못 해석되고 하였다. 일반 대중들도 불교의 참된 이치를 배우고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복을 얻고자 신앙하였다.
그 후 식민지 상태에서도 일본의 간섭을 받고 있던 여러 종파(宗派)들은 스스로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잃어버린 채 어두운 길을 헤매고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국불교의 올바른 개혁이 필요할 때, 상월 대조사님은 천태종의 종파를 다시 만들고, 그 가르침을 펴기 위해 구인사를 지으셨다.
종단이 성립된 지 불과 20여 년 만에 신도수가 100만이 넘는 큰 종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대조사님이 그러한 가르침을 펴기까지의 구법수행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하겠다.
조사님은 1911년 11월 28일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상마읍리에서 아버지 영진씨와 어머니 삼척김씨 사이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나셨다. 태어나실 때 아름다운 구름이 감돌고 고운 향기가 펴지는 좋은 징조가 있다고 한다.
조사님의 원래 성은 밀양 박씨이고, 본 이름은 준동(準東)이며, 법명은 상월 원각이시다. 조사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유학을 잘 하였으며, 한말의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산 속 깊이 들어가 가난하게 살아 오면서도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어, 그 지방 사람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조사님은 어렸을 때부터 생각이 깊고 침착하였으며, 의지가 강하여 한 번 하고자 하는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1915년 5세 때 동리 서당에 입학하여 유학을 공부하였는데, 한 가지를 알려주면 열 가지를 알 정도로 총명하였다.
9살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삶에 회의를 느꼈으며, 13세 때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익혔고, 14세 때에는 삼척의 한 공자에 취직하였다. 거기에서 세상 사람들과 사귀며, 인간은 똑같이 평등한데 어떻게 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양반과 상민의 차이가 있는 지에 대해 더욱 회의에 잠겼다. 그리하여 조사님은 그러한 회의를 풀기 위해 세속의 욕망에 뜻을 두지 않고 출가하여 공부하기로 결심하였다.
15세 때 수행을 위하여 좁쌀 7되, 고추장, 된장, 부엌칼, 바가지 등을 걸망에 넣고 삼태산(三台山)에 들어가 100일 동안 기도하였다. 그 결과 차력술, 축지법, 둔갑술 등을 몸소 익히니, 몸과 마음이 환하게 트이고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 처럼 되었다.
이 때에 기도를 하며 외운 다라니는 천수다라니였으며, 기도 중에는 약간의 죽과 냉수만을 마시며 열심히 수행하였다. 16세 때에 잠시 집에 들렀다가 어머니와 다시 작별하고 5년 동안 큰 사찰 등을 돌아다니면서 불교의 가르침인 경, 율, 론을 공부하였다.
조사께서 수행하시던 때는 일제의 식민지 시대였으므로, 나라 없는 민족에게는 신앙의 자유도 없음을 가슴아프게 느끼며, 태백산에 들어가 수십 일씩 음식을 들지 않고,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목 밑에 칼을 받쳐놓고 수행하였다.
이같은 어렵고 힘든 수도로 모든 법의 본 모습은 나고 죽음이 없음을 체험하였다. 1930년 20세 때에 중국의 오대산 도량, 보타낙가산의 관음영장, 아미산의 보현도량, 청량산 화엄성지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행력을 높였다. 그 때에 절강성 남방에 있는 천태산 화정봉에 올라, 지자대사의 탑을 친히 둘러보았다.
이 천태산은 옛부터 유명하게 전해 내려오는 천태종의 성지(聖地)로서, 이 산에는 뜻 깊은 전통과 많은 유적들이 있어 성지 중의 성지라고 한다. 이어 조사님은 티베트와 몽고 등지도 돌아보시며 수행자로서의 행을 닦았다.
상월원각 대조사님은 1936년 26세 때에 조국에 돌아와, 그 동안 쌓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중생 구제에 온 마음을 쏟으셨다. 그리고 침질과 뜸질 및 약 등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기도 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소백산을 중심으로 도량을 삼고 9년동안 수행 만을 하였다. 대조사님께서는 제자를 기르고자, 민원홍, 민경덕 두 사람을 제자로 삼고, 충북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소백산 구봉팔문 산하에 무무혔다.
1945년 음력 1월 16일에 현 구인사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 백자리 여의생 홍승원의 집 한칸 을 빌어 수행하시면서, 민씨 등 셋이서 밤을 세워 천수다라니경을 외곤 하였다. 이렇게 수행하시면서 현 구인사의 법당 터에 여러 스님들과 힘을 모아 소법당 외에 거실 8칸, 주방 2칸을 짓고 조사님은 이곳에서 수행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 때 세운 서원을 보면
① 큰 법을 깨달아 이 곳에서 장엄한 불사(佛事)를 전개하겠다. ② 깨달음을 얻지 않고는 중생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③ 성취한 공덕은 중생에게 회향하여 함께 깨달음을 얻게 하겠다. 그러한 세 가지 커다란 서원을 세우고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계속하였다. 1950년 40세 때에 6.25사변이 일어났으며, 이 때 조사님은 주로 마곡사와 공주지방엣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따뜻한 자비의 손길을 폈고, 흩어져 우왕좌왕하는 군중들을 교화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였다. 또 질병으로 신음하는 대중 속에 들어가 몸소 병자들을 돌보셨다. 41세 때인 음력 12월 28일 밤중에 관세음보살을 외며 정진하던 중 조사님의 몸에 맑고 아름다운 기운이 감돌았는데, 사람들은 앞으로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미리 짐작하였다. 자정이 되자 천수경(千手經)을 치는 소리가 달라지고 눈빛이 샛별처럼 빛났으며 행동이 평소 때와 아주 달아 대중들은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새벽 3시에 이르러 크고 우렁찬 소리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외치니 산속엔 메아리가 울려퍼지고 대중은 허공에 붕 뜬 듯 하였다. 그 때, "나를 보라!" 하고는 입을 크게 벌려 다음과 같이 외쳤다. "동쪽 하늘에 큰 별이 나타나 입 속으로 들어가매, 뱃속이 환하게 밝고 해와 달이 머리 위에 있으니 천지가 크게 밝다." 그리고 또 다시 말하였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내가 개달음을 얻었다." 이 소리에 산 속에는 무성한 메아리가 울려 펴지고, 사람들은 눈 앞이 캄캄해지며 정신이 어질어질하였다.
아침 6시에 전 대중을 모이라 하고 3일 밤 3일 낮을 한 때도 쉬지 않고 설법을 하였다. 이로써 조사님은 크고 원만하신 깨달음을 이루어, 그 동안 흩어졌던 천태종의 종파를 다시 세워 밝고 큰 부처님의 법을 세상 사람들에게 베푸신 것이다.
금강불교 청소년 교화 연구원 엮음 연꽃 어린이법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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