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일승한데 명법달이라 상송법화경칠년이나 심미부지정법지처하여 래문왈하되 경상유의하 又有一僧 名法達 常誦法華經七年 心迷不知正法之處 來問曰 經上有疑
니 대사는 지혜광대하니 원위결처하소서 大師 智慧廣大 願爲決處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이 법달이었다. 항상 법화경을 외워 칠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바른 법의 당처를 알지 못하더니 와서 물었다. “경에 있어서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대사께서는 지혜가 넓고 크시니 당처의 의심을 풀어주십시오.”
대사언하되 법달아 법즉심달이나 여심부달이로다 경상무의나 여시자의로다 여심자사나 이구 大師言 法達 法卽甚達 汝心不達 經上無疑 汝時自疑 汝心自邪 而求
정법하나 오심정정으로 즉시지경이니라 오일생이래로 불식문자니 여장법화경래하야 대오독 正法 吾心正定 卽是持經 吾一生已來 不識文字 汝將法華經來 對吾讀
일편하라 오문즉지하리라. 一遍 吾聞卽知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제법 통달했지만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했구나. 경에는 의심이 없으나 너가 스스로 의심을 하고 너의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정법을 구하는 구나 . 나의 마음의 바른 정(定)이 경을 지니고 있는 것이니라. 나는 일생동안 문자를 알지 못하니 네가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내게 한 편을 읽어 보아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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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에서 말하는 중요한 요지는 스스로의 생각이 그 사람이라는 말이다. 즉, 내가 악한 생각을 가지면 악한 사람이 되고, 선한 생각을 가지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할 때에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면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힘들지만 해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모양으로 변하고 싶으면 생각을 바꾸기 보다는 방법을 찾는다. 방법이 있다면 가장 정확하며 유일한 방법이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도를 이야기하면, 처음에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대게, ‘아이고, 그런 것은 도인이나 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이 어떻게...?’ 라고 물러서 버린다. 그는 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절대 될 수가 없다.
물론 ‘해야 한다.’ ‘하고 싶다.’ ‘꼭 할 것이다.’ 하며 애를 쓰면서도 잘 안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부분에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거부함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어떻게 하면 되지?’ (모르는 경우) ‘과연 그렇게 해서 될까?’(믿음이 부족한 경우) ‘아직은 아니야.’(아직은 뭔가 놓고 싶지 않는 욕심이 남아 있는 경우) 등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뉜다. 이러한 경우는 아직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험 속에서 만들어 놓은 가치나 잣대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진리의 세계에는 개인적이거나 단체적이거나 분별하여 만들어 놓은 가치나 잣대가 티끌만큼이라도 있다면 한 발자국도 들여 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엄정한 것이 바로 진리의 세계다. 그러니 법달이 경에서 알지 못하는 것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경이라는 것은 바로 마음을 말하는 것인데 마음에 티끌이 있는데 어찌 마음에 통달할 수가 있겠는가? 스스로의 마음을 한번 들여다보라.
언하대오(言下大悟 : 말 끝에 크게 깨닫다.)는 위에서 말하는 경우와 같은 마음의 찌꺼기가 이미 다 소진하여 목이 탈대로 타는 상태이다. 그렇지 않으면서 목이 탄다고 아우성거리는 것은 그냥 무늬만 그렇지 사실은 위의 세 가지 경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대사께서 말씀하신다.
“법달아 너는 법에는 제법 통달했으나 마음에는 아직 통달하지 못했구나.”
바로 이말이다. 마음에 찌꺼기가 아직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다음 말인 “경에는 의심이 없는데 네가 스스로 의심을 하고 네 마음이 삿되면서 정법을 구하는구나.” 라고 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의 바른 정(定)이 이 경을 지니고 있느니라.” 하는 말은 바로 위에서 말하는 의심이나 욕심이나 무지가 다 사라졌다는 말이다. 즉, 텅 비었다는 말이다. 어떤 기댈 곳이나 잣대도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정이다. 마음에 통달하였다는 말이다.
경이 바로 마음이니 마음에 통달하였다는 것은 바로 경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문자를 알지 못하지만, 마음에 통달했으니 누가 읽어주기만 해도 바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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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달이 취경도하여 대대사독일편하였다. 대사문이하고 즉식불의로 여법달설법화경하였다 法達 取經到 對大師讀一遍 六祖聞已 卽識佛意 便與法達說法華經
법달이 경을 가지고와서 대사를 향해 한편을 읽었다. 대사께서는 듣기를 마치자 곧 불법의 뜻을 아셨고 이내 법달에게 법화경을 설명하시었다.
육조언법달하되 법화경은 무다어라 칠권이 진시비유인연이니라 여래광설삼승은 지위세인근 六祖言法達 法華經 無多語 七卷 盡是譬喩因緣 如來廣說三乘 只爲世人根
둔이니 경문분명히 무유여승이니 유일승법이라 하니라 鈍 經文分明 無有餘乘 唯一佛乘
육조께서 법달에게 말하기를 “법화경은 많은 말이 없다. 일곱권은 모두 비유와 인연이니라. 여래께서 삼승을 널리 설하신 것은 다만 세상 사람들의 둔한 근기를 위한 것이니 경에는 분명히 ‘ 다른 승이 없으니 오직 일불승뿐이니라.’고 하니라.
대사언하되 법달아 여청일불승하고 막구이불승하여 미각여성하라 경중에 하처시일불승을 여 大師言 法達 汝聽一佛乘 莫求二佛乘 迷却汝性 經中 何處是一佛乘 與
여설하리라 경운하되 제불세존이 유이일대사인연고로 출현어세라하니라 汝說 經云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을 듣고, 이불승을 구하여 너의 본성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 경에 일불승이 어느 곳에 있는지 너에게 설명하리라. 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과 세존께서 오직 일대사 인연으로 세상에 나오셨다.’고 하니라.
차법을 여하해오 차법을 여하수리오 여청오설하라 인심이 불사하면 본원이 공적하여 이각 此法 如何解 此法 如何修 汝聽吾說 人心 不思 本源 空寂 離却
사견이 즉일대사인연이니라 邪見 卽一大事因緣
이 법을 어떻게 이해하며 이 법을 어떻게 닦겠는가? 너는 내 말을 들어라 사람의 마음이 생각을 하지 않으면 본원이 공적하여 삿된 견해가 곧 떠나리니 이것을 일대사인연이라 하니라.
내외불미하면 즉이양변이니 외미착상하고 내미착공이니 어상이상하고 어공이공하면 즉시불 內外不迷 卽離兩邊 外迷著相 內迷著空 於相離相 於空離空 卽是不
미니 오차법하야 일념에 심개하면 출현어세니라 迷 悟此法 一念 心開 出現於世
안팎으로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을 떠나니 바깥으로 미혹하면 상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에 집착하나니 상에서 상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나면 곧 미혹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을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느니라.
심개하물고 개불지견이니 불은 유여각야라 분위사문하니 개각지견과 시각지견과 오각지견과 心開何物 開佛知見 佛 猶如覺也 分爲四門 開覺知見 示覺知見 悟覺知見
입각지견이라 개시오입은 종일처입이니 즉각지견으로 견자본성이 즉득출세니라 入覺知見 開示悟入 從一處入 卽覺知見 見自本性 卽得出世
마음에 무슨 물건을 여는 것인가?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니 부처는 곧 깨달음이니라. 네 문으로 나누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침과 깨달음의 지견으로 들어가는 것이니라. 열고, 보고, 깨치고, 들어가는 것은 한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스스로의 본성을 보는 것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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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은 일곱 권 전체가 바로 비유와 인연을 설한 것이다.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은 부처님께서 설할 진리가 팔만 사천 가지가 있어서 설하신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들의 번뇌가 셀 수 없이 많으니, 그의 근기에 맞추어 비유와 인연법으로 설하다보니 그렇게 많아졌을 뿐, 진리는 오직 한가지 밖에 없다. 바로 일불승(一佛乘)인 것이다. 무엇이 일불승인가? 마음에 삿됨을 없애고 공적해 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대단한 지식을 가르치시려고 우리에게 오신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오직 한 가지! 무심(無心)을 말할 뿐이다. 왜인가? 진리의 세계는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텅 비어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원래부터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마음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없다는 말이 아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인연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진다. 인연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고, 또 인연이 있어서 일어난다 하더라도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면 텅 빈 마음을 채워 그 생각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생각 =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인연에 의해 늘 바뀌지만, 마음은 늘 텅 비어 있어서 여여 하다. 그래서 마음은 생각이 어떤 모양을 내고 찾아오더라도 단 한 번도 자신의 잣대나 기준을 내세우지 않고 생각을 온통 실어준다. 즉 마음에 분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무심이 아니라, 어떤 생각을 하든 분별하지 않는 것이 바로 무심이다. 분별하지 않는다고 하면 또 따라가라는 말인가? 할 것이다. 따라가는 것은 분별이 아닌가? 따라간다는 것은 좋아하니까 따라가니 좋아한다는 것을 분별이다. 내어치지도 말라. 내어친다는 것은 싫어함이니 역시 분별이다.
달마조사의 무심론에 이런 말이 있다. ‘만약에 하루 종일 본다고 하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보지 않는 것이 되니 보는 것은 곧 마음이 없는 것이오....’ 이렇게 안이비설신의를 말하고 또, ‘견문각지가 바로 무심이다.’ 라고 한다.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보지 않는 것이 되니 보는 것이 곧 마음이 없는 것이오? 이 말이 무엇인가? 보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의 마음이 있다면 보는 것으로 물들어서 한번 봐버리면 그것이 찍혀서 다시는 다른 것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다른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마음은 보는 것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텅 비어 있는 하늘은 어떤 모양의 구름이 일어났다 사라져도 흔적이 남지 않을 뿐더러 또 어떤 모양의 구름이 일어나도 그것을 막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의 마음은 늘 텅 비어 있어서 어떤 것을 보더라도 물들지 않는다 그래서 보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 순간 다른 것을 볼 수가 있으니, 보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즉, 보는 그 마음이 늘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즉 견문각지가 바로 무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삿된 마음은 어떠한가? 한번 본 것을 잊지 않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을 기준이나 잣대로 삼아 다음에 보는 것을 규정하고 분별하고 있지 않는가?
마음에 삿됨을 없애고 공적해지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그 기준이나 잣대로 분별하는 것을 하지 않음이다. 부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법화경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모든 경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그 말씀이요, 그것이 바로 일불승이요, 일대사 인연인 것이다.
일대사인연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밝히신 법칙은 바로 연기의 법칙이다. 삼라만상은 인연으로 인해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주의 어느 것 하나라도 티끌 하나라도 인연이 없으면 생겨날 수가 없다. 그 인연의 법칙이 바로 작용이요, 진여의 성품이다. 그리고 작용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바로 생멸의 성품인 것이다.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그것이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 질량불변의 법칙이다.
그 법칙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 텅 비어서 일어나는 생각이 어떤 모양이더라도 다 실어주듯이, 인연이 되기만 하면 일어나고 유지하고 사라지도록 작용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작용이 바로 성품인 것이다. 그 성품은 조금도 분별이 없고, 모양도 없다. 성품에 의해서 모든 모양 있고 없는 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성품 그 자체는 늘 그대로여서 허망함이 없고 진실하다. 그것이 바로 진여의 성품인 것이다. 분별없이 거울처럼 비추어서 보여주는 것, 그러면서 늘 여여한 것. 그렇게 분별없이 인연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바로 일대사 인연인 것이다.
사심도 없고, 분별도 없고, 욕심도 없고, 잣대도 업고 기준도 없으며,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고, 착함도 없고 악함도 없고, 사랑도 없고, 가족도 없고, 권위도 없고, 병도 없고, 길고 짧은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이 그냥 인연 따라 물 흐르듯이 바람이 불듯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일대사 인연이요. 바로 금강경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음이 바로 이 경에서 나왔다는 말인 것이다.
그래서 무위(無爲)라는 말도 나오고, 무사인(無事人)이란 말도 나오고, 무심도인(無心道人)이란 말도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안팎으로 미혹하지 않아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분별하지 않고) 공에서 공을 떠나(허망하지 않음) 한 마음이 열리면 바로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견이라고 하니 또 오랫동안의 습관처럼 무슨 대단한 지식을 얻어서 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위에서 말한 무심이 바로 부처님의 지견이다. 이러한 지견이 열릴 때에 비로소 이 세상에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신의 분별된 바늘 하나 꽂을 틈이 없는 좁은 마음속에 틀어 앉아 온갖 생사번뇌에서 한시도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의 지견으로 여는 것에는 개시오입, 즉 깨달음의 지견을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가는 네 가지 문이 있지만, 그것은 바로 한 가지 문 즉, 부처님의 지견으로 자신의 성품을 보고 처음에 말했듯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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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언하되 법달아 오상원일체세인의 심지가 상자개불지견하여 막개중생지견이라 세인이 심 大師言 法達 吾常願一切世人 心地 常自開佛知見 莫開衆生知見 世人 心
사하면 우미조악하여 자개중생지견이요 세인심정하야 기지혜관조하면 자개불지견이니 막개 邪 愚迷造惡 自開衆生知見 世人心正 起智惠觀照 自開佛知見 莫開
중생지견하고 개불지견하면 즉출세니라 衆生知見 開佛知見 卽出世
대사께서 말씀하시되 “법달아 나는 항상 원하기를 모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의 땅에 늘 스스로 부처님지견을 열기를 바라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않기를 바랐느니라.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게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바르면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여 스스로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니 중생지견을 열지 않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대사언하되 법달아 차시법화경일승법이니라 향하분삼은 위미인고로 여단의일불승하라 大師言 法達 此是法華經一乘法 向下分三 爲迷人故 汝但依一佛乘
대사께서 말씀하시되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불승이니라. 아래로 내려가면서 세 갈래로 나뉜 것은 미혹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므로 너는 마땅히 일불승에만 의지하여라.
대사언하되 법달아 심행하면 전법화요 불행이면 법화전이며 심정이면 전법화요 심사면 법화 大師言 法達 心行 轉法華 不行 法華轉 心正 轉法華 心邪 法華
전하며 개불지견하면 전법화요 개중생지견이면 피법화전하니라 轉 開佛知見 轉法華 開衆生知見 被法華轉
대사께서 말씀하시되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법화경에 굴리는 것이며,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릴 것이요,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릴 것이며,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릴 것이요,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림을 당할 것이니라.
대사언하되 노력의법수행하면 즉시전경이니라 법달이 일문에 언하대오하여 체루비읍하며 자 大師言 努力依法修行 卽是轉經 法達 一聞 言下大悟 涕淚悲泣 自 언하기를 화상아 실미증전법화하야 칠년을 피법화전하였나이다 이후에는 전법화하야 념념수 言 和尙 實未曾轉法華 七年 被法華轉 已後 轉法華 念念修 행불행하리이다 대사언하되 즉불행이 즉불이니라 기시청인이 무불오자니라 行佛行 大師言 卽佛行 是佛 其時聽人 無不悟者
대사께서 말씀하시되 “법에 의지하여 노력하여 수행하면 곧 경을 굴릴 것이니라.” 법달이 한번 듣고 말끝에 크게 깨달아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화상이시여 실로 일찍이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여 칠년을 법화경에 굴림을 당하여 왔나이다. 이후에는 법화경을 굴리어서 생각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닦으리이다.” 대사께서 말씀하시되 “부처님의 행이 바로 부처님이니라.” 그때에 듣는 사람으로서 깨닫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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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지견과 중생의 지견이 무엇인가? 처음에 말했듯이 생각은 바로 그 사람이다. 중생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중생이요, 부처님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왜냐? 우리의 말과 행동은 생각을 떠나 할 수가 없다. 물론 말을 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자성의 성품, 즉 작용이 하고 있지만, 그 방향성과 일관성은 바로 생각이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생각이라는 것 역시 자성의 성품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말이다. 지금 이글을 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인연인 것이다. 이글을 읽고 단번에 마음을 내어 생각을 바꾼다면 바로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고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편의 마지막에 말한다. “부처님의 행이 바로 부처이니라.”
‘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고 세상사람의 마음이 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의 지견을 여나니...’
이말도 바로 그 뜻이다. 생각에 따라 부처가 되고 중생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또 생각한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을 바꿀 것인가? 이러면 끝이 없다. 그냥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물론 오랜 세월 묻어온 습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옮겨올 때에 비로소 생각은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부처님의 지견은 말이 지견이지 지견이 없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무심하여 어떤 잣대도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생의 지견은 말 그대로 지견이다. 그래서 늘 의지할 지식이나 기준이다 잣대를 구하고 방법을 찾는다. 이렇게 의지할 것을 찾는 자는 중생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바르지 못한 마음이요, 삿된 마음인 것이다.
경이라는 것은 바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어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마음이 텅 비게 되면 그것이 바로 마음이 바른 것이다.
그러면 내 마음이 바로 경이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법화경을 굴리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늘 지식을 구하고 방법을 구하고 있으면 마음이 바르지 못한 것이니 마음으로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경에 굴리게 될 것이다. 대사께서는 그것을 법달에게 말하고 법달은 말끝에 비로소 크게 깨닫는다.
마지막에 대사께서 말한다.
“부처님의 행이 곧 부처님이니라.”
생각이 행이요, 행이 바로 부처님이니, 생각을 바꾸어야 부처가 되지, 그것 이외에 어떤 것을 해도 부처가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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