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상락아정[常樂我淨] - 청화[淸華] 스님

白道 박만주 2019. 2. 17. 11:58

 

 

 

 


  상락아정[常樂我淨] - 청화 스님[無住淸華] 법 등 명

 


상락아정[常樂我淨] - 청화[淸華] 스님

───────────────────────────
  

 우리 마음은 하루 낮 하루 밤에 팔억사천만념八億四千萬[念]이라, 팔억사천 생각이 오락가락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마음 그러면 쉽게 간단하게 생각합니다만 마음이란 이것이 굉장宏壯히 심수오묘心邃奧妙한 것입니다.  邃깊을 수 奧깊을 오

 

 내 마음 하고 또 그대 마음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또는 부처님 마음하고 우리 마음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해지고 어려워집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이 하루 밤 하루 낮만 하더라도 팔억사천 생각이나 오락가락하니까 마음을 자기 멋대로 내버려두면 큰 탈입니다.

 

 따라서 그 방일放逸한 마음을 다잡아서 본래本來의 마음자리,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달은 분이 이른바 성자聖者 아니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범부凡夫요 중생衆生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좀 한다 해도 했다 말았다 하는 그러한 게으른 생활을 흔히 하게 됩니다.

 

이런 때는 우리들의 선배로 해서 정말로 신명身命을 내 걸고서 도道를 구求하고 공부하신 그런 분들을 귀감龜鑑으로 본보기로 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그런 분들 가운데서 그 중국에서 인도印度로 가서 법을 구하여 온 구법승求法僧들, 구법승들의 행적은 우리한테 정말로 비장한 각오와 뜨거운 감격을 일으키게 합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에 다만 몇 시간동안 가령 두 시간이나 한 시간 동안 참선參禪한다 하더라도 오로지 공부가 순일純一하게 한 결 같이 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밤에 안자고 철야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그 밤 동안에 오로지 온전히 망상妄想 없이 공부했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성자聖者 외外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한 3개월 동안이나 또는 한 3년 동안이나 공부한 사람도 그렇게 많지도 않지만 또 그 분들도 만족허니 내가 조금도 회한悔恨이 없다 후회가 없다 이렇게 만족하는 분들은 성자聖者 아닌 한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5세기부터서 6세기, 7세기 8세기 그 동안의 중국의 구법승求法僧들 인도로 가서 법을 구해온 분들, 그분들을 생각하면은 정말로 우리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 중국에서 고비사막[Gobi沙漠]을 건너야 되고, 고비사막을 건너는 것도 그냥 하루 이틀에 건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몇 달 걸린단 말입니다.

 

 그 풀 한 포기도 없고 하늘에는 나는 짐승도 없는 그런 벌판을 몇 달을 걸려서 간단 말입니다. 또는 사막沙漠에 바람이 불면은 있던 언덕도 무너져버리고 없던 언덕이 다시 생기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저는 큰 사막은 못보고 작은 사막만 봤습니다만 정말로 그 몇 달이고 그런 큰 사막을 우리가 건너간다고 생각할 때는 고생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런데 도道를 구해서 중국에서 인도로 가신 분들 그런 분들은 보통은 자기들이 하나의 팀을 짜겠지요. 한 30명이나 10명이나 그렇게 적당히 팀을 짜겠지요. 그러면은 정작 출발할 때는 보통 한 30명 짜도 그 3분의 1도 남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저래 사정 때문에 또는 결심이 안서서 중도中途에 그만 둔단 말입니다.

 

그래서 정작 중국에서 인도까지 건너가서 법을 구해 오는 분들은 정말로 십진구퇴十進九退라 열사람 가운데 한사람 정도라는 것입니다. 고비사막을 건너고 또 파미르고원[Pamir高原], 파미르고원을 가리켜서 옛날에는 총령叢嶺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떨기 총叢자, 뫼뿌리 령嶺자, 총령이라, 총령은 파미르고원이기 때문에 평균 고도高度 한 5천 미터나 되는 그런 고원지대입니다.

 

 그런 고원高原지대도 몇 일 동안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몇 달 동안 건넌단 말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인도까지 갈라면 적어도 그 당시 한 30여 나라의 국경을 거친단 말입니다. 오늘날 같이 편리한 때도 그 비자가 있고 뭣이 있고 하는데 하물며 천년이상 되는 그때 있어서 한 국경을 넘고 길도 없는 길을 헤쳐 나가는 그런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편도, 중국에서 인도까지 가는, 가는 기간이 보통 3년 동안 걸린다고 합니다. 3년 세월을 사막에서 고원에서 보낸단 말입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시일을 보내고서 무사하면 모르겠지만 가다가 쓰러진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막을 지나갈 때나 고원을 건널 때나 그 구법승求法僧들 도道를 구해서 인도로 가신 분들의 해골이 여기 저기 널려 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본다고 할 때에 얼마나 적막하고 또는 구슬프고 그러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중국으로 건너온 불경佛經을 우리가 지금 우리 한국말로 번역해서 또 이렇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기만 해서 3년 세월 걸리고 또 가서는 말이 안 통하니까 말을 배워야 되겠지요. 말 배워서 그 쪽 공부 그 쪽에서 공부하는 것이 또 한 6, 7년 걸려버린단 말입니다.

 

외국어 공부라는 것이 어려운 공부 아닙니까. 그 심오한 뜻을 알려고 생각할 때는 그냥 한 해 두 해 해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한 7, 8년 걸려버리면 또 올 때는 살아올지 죽어올지 모르는 길을 또 출발한다는 말입니다. 그냥 배낭하나 짊어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급적이면 많은 불경佛經을 낙타에다 지우고 일꾼에게 지우고 자기도 지고 온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파미르고원高原을 넘어야 되고 고비사막 건너야 돼서 또 3년 넘게 걸립니다. 그래서 갔다 왔다 하다보면 한 20년 세월이 걸려버린단 말입니다.

 

 다행이도 우리나라의 그 혜초[慧超704-787]스님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혜초스님도 그 가운데 한 분입니다. 구법승이 한 둘이 될리오만은 그래도 유명한 구법승들은 중국의 5세기 때 법연대사, 법연대사가 맨 처음에 구법승으로 해서 인도에 갔다 오신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그 분은 갔다 와서 불국기佛國記라 하는 아주 훌륭한 하나의 여행기를 자기가 견문한 것을 부처님 법에 비추어서 여행기를 지었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아는 현장법사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현장법사玄奘法師. 현장법사도 중국에서 인도로 가서 법을 구해 왔습니다. 그분은 아까 그 법연대사는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보다 더 견문을 넓히고 많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렇겠지요.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육지를 갈 때는 아까 말씀마따나 사막을 건너고 파미르고원을 넘고 바다로 올 때는 저쪽 스리랑카 옛날에는 거기가 사자도獅子島인데 그쪽으로 뱅뱅 돌아온단 말입니다. 그때도 몇 번이나 풍파를 만나고 죽을 고비를 그때그때 다 맞이한단 말입니다.

 

 그래가지고서 법연스님은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오고 아까 현장법사는 육지로 갔다가 바로 육지로 왔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의정법사, 의정 법사라고 이분은 또 바다로 갔다가 바다로 왔단 말입니다. 그렇게 그 한 길로 갔다가 아는 길로 갔다가 다시 그 길로 오면 훨썩 쉬울 것인데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하기 위해서 그런 길을 자꾸만 바꾸니까 훨썩 고생도 더 많아지겠지요.

 

 우리 혜초慧超스님은 바다로 갔다가 육지로 왔습니다. 그래서 혜초스님께서 전해준 것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란 훌륭한 또 견문기를 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불경이 그렇게 많은 그런 구법승들 또는 제대로 법을 구하지도 못하고 순교한 순교승殉敎僧들 그분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불경을 앉아서 배우고 편안히 수행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갔다 왔다 하기만 해도 한 6년 세월 걸려버리고 거기 가서 공부한 세월까지 합치면 적어도 한 20년 동안의 세월이 거의 걸려버립니다. 그런 동안에 그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그런 일을 참고해 볼 적에 우리가 얼마만치 우리 생명生命을 아껴서 공부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느껴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내 마음 뭐 내가 충분히 알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 마음을 잘 모릅니다. 우리의 그런 번뇌망상煩惱妄想으로 분별하는 그 마음가지고서는 우리마음의 본바탕을 모릅니다.

 

 우리 마음은 분명히 체[體]와 용[用]이 있습니다. 체體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마음의 그 본래면목[本來面目]마음의 본래 성품자리란 말입니다. 용用이라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성품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이루어지는 모든 그런 현상적인 이런 명상名相 이름과 하나의 허망한 그런 상相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쉽게 인연법因緣法, 인연법을 들먹이고 예기합니다만 사실 인연법이란 것이 어느 것도 우리 눈에 보이는 어떠한 것도 인연因緣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중론中論이라는 용수보살[龍樹菩薩], 제2의 석가[釋迦]라는 용수보살이 중론에서 말씀하시기를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바로 그대로 빈 공空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佛子님들 인연따라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선 우리 몸이 그렇고 우리 마음도 그렇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다 인연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단 말입니다. 인연따라서 모양을 나투고서 그대로 고정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모르겠지만 인연因緣따라서 모양을 나툰 것은 이것은 어떠한 것이든 간에 조금도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그때그때 변화무상變化無常하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고통이 어째서 오는가 하면은 인연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고유固有한 걸로 집착執着한단 말입니다. 우선 그런 집착 가운데 우리 망상 가운데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른바 아견[我見]이라, 나 아我자, 볼 견見자.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그 마음이 제일 무섭습니다.

 

 왜 무서운고 하면은 나라는 존재에 집착하는 그 마음 때문에 모든 죄악罪惡이 생긴단 말입니다. 우리가 많이 듣고 많이 알아서 알지만은 불교는 무아[無我]의 길이라,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내가 없는 그런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불교는 무아의 도리만 알면 다른 것은 쭉쭉 풀려갑니다. 내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쉽게 보통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 불교인들로 해서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마음닦으면 부처가 되겠지 이렇게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마음이 어째서 부처인가? 이렇게 우리가 또 파고 들어가면 그때는 좀 멍해진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내 마음 네 마음 그러지만은 모양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복잡한 말로 하면 그때는 시간성時間性도 공간성空間性도 없는 것이 우리 마음 아닙니까. 모양이 없으면서 내가 지금 살아 있으니까 분명히 마음은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부처님은 모양이 있는가 없는가? 우리가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을 얘기할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해서 역사적으로 나오셨다가 이미 가셔 버렸기 때문에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숭상하는 부처님은 무엇인가? 우리가 마음을 닦아서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부처님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런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천지우주에 언제 어디에나 항상 계시는 이른바 법신[法身]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추구追求하는 것은 법신[法身]부처님입니다. 원효元曉스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언제 어느 때나 계시는 참다운 부처님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우주 모든 생명의 근본자리, 근본자리는 바로 법신[法身]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불교[佛敎]를 믿는다고 하면서 법신法身부처님과 화신化身부처님의 한계를 모르면 참 답답한 일입니다. 역사적인 부처님은 화신 부처님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인 역사적인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우주에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우주의 생명으로 해서 부처님, 우주 생명의 부처님은 항시恒時 계시단 말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에너지라 하는 기氣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 기氣 위에서 그 기氣가 어떻게 모아지는가, 어떻게 합해지는가, 상호작용相互作用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된단 말입니다. 금金이요 은銀이요 다이아몬드요 하지만은 그런 것도 내내야 우주 에너지가 이렇게 저렇게 모인 상태를 잠시간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가상假相 가명假名이란 말입니다. 허망한 모습인 것이고 가짜로 임시동안 붙인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몸뚱이도 그렇습니다. 우리 몸뚱이도 우리가 아무리 귀엽게 생각하지만은 이것도 역시 가상가명[假相假名]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4대, 산소 수소 탄소 질소 그런 것이 잠시간 인연따라서 이 몸뚱이를 구성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또 무엇인가? 마음이 원래 부처라 하건만은 보통 우리가 쓰는 마음은 본래로 부처인 망정 지금 우리 범부심凡夫心이란 것은 내내야 감수感受하고 상상想像하고 의욕意慾하고 분별시비分別是非하고 그런 부스러기가 모아서 우리 범부의 마음이 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뚱이나 우리 마음을 분석해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런 것은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이런 것은 다 허망하단 말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따지고 보면 공[空]입니다.

 

 공空이기 때문에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개공이라 하는 것도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이라 한 것은 우리 마음과 우리 몸을 합한 이 존재가 오온 아닙니까. 우리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오온인데 오온도 역시 이것도 결국은 다 빈 것이란 말입니다. 다 공空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오온五蘊 이것이 다만 인연因緣따라서 잠시간 모습을 나툰 하나의 가상에 불과하고 김 아무개 박 아무개는 하나의 가명에 불과하고 이것이 고유하게 존재한다 이것이 내 것이다 그런 것 때문에 우리의 여러 가지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생기고 고통苦痛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佛子님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인생고人生苦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견[我見]이라 나 아我자, 볼 견見자 나라는 존재를 고집하는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공부하려고 애써도 나라는 것이 원래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이론적인 체계가 서야 그래야 우리 공부가 진척이 빠르단 말입니다.

 

 금강경에도 나라는 상[我相], 너라는 상[人相] 또는 중생이라는 상[衆生相] 또는 시간이 짧다 길다하는 그런 수자상[壽者相] 이런 상을 다 없애면 그때는 바로 성인이고 부처고 이런 상相이 있으면 그때는 범부고 중생이란 말입니다. 그 금강경 도리道理 어렵다고 여러분들이 생각하시지요. 그러나따지고 보면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경이기 때문에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외면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안보고 우리 중생이 번뇌망상煩惱妄想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 사실대로 사실대로만 우리가 볼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그것을 염두念頭에 두고서 사실에 입각하면 그때는 쉽단 말입니다. 그 반야심경도 짤막한 그런 경이지만 그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우리 중생이 보는 모든 존재는 이것은 본래 다 비어있다.

 

색色도 비어있고, 색은 내내야 인제 눈에 보이는 물질物質이 색 아닙니까? 색도 비어 있고 우리의 생각도 비어있고 다 비어있다,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모두가 다, 제법은 이것은 모두를 말합니다. 모두가 다 공空이란 말입니다.

 

 제법이 다 비어 있는 그 공의 바탕, 그 공의 근본자리, 그 자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도道요 진리眞理요 법성法性이고 또는 불성佛性 이란 말입니다. 법성, 불성 그렇게 말을 해서 우리가 일단은 이론적으로 봐서 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이렇게는 납득이 된다 하더라도 법성 불성 그것이 뭣허는 것인가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허망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헌데 법성 불성은 이름만으로 있는 그런 허망한 것이 아니라 법성 불성 이것은 하나의 생명生命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깊이 생각하십시오. 법성[法性], 불성[佛性] 이것은 생명이고 그 생명 속에는 만덕[萬德]이 갖추고 있어요.

 

 우리 불자님들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고 말씀은 들으셨습니까? 열반사덕이라. 열반이라는 것은 영생永生의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열반은 어째서 영생의 진리인가 그러면은 모든 헤아릴 수 없는 그런 덕德이나 그런 진리를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도 많고 끝도 갓도 없이 많은 공덕인지라 일일이 헤아릴 수는 없고 다만 간단히 간추리면 그때는 4가지라 말입니다. 4가지는 우리가 외어두면은 좋습니다. 간단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야 내 마음의 본성에는 이런 공덕이 있구나, 내 마음에는 이런 부사의不思議한 힘이 있구나. 이렇게 느낄 수 있고 우리가 깨달을려고 또 보다 더 용맹정진勇猛精進하고 그러겠지요.

 

 그런데 4가지 덕德은 어떤 것인고 하면은 그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상常자, 어째서 항상 상常 자를 써서 상이라고 했는고 하면은 우리 생명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그때그때 있다가 없어지고 또 인연이 생기면 없다가도 생기고.

 

그러나 우리 생명의 본체인 그 불성佛性자리는 불성 그 자리는 그때는 있다 없다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의 실상實相입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그때는 생명의 실존實存이란 말입니다. 상락아정 이것은 영생불멸[永生不滅]하니까 상자를 항상 상[常]자를 써서 상 그러는 것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그때그때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고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어지고 하지만은 그 우리 진여불성眞如佛性 우리 생명의 본바탕에 있는 그러한 공덕은 그렇지가 않고서 항시 존재한단 말입니다. 영원히 생명도 마찬가지고 우리 생명은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부활復活한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은 본래로 누구나가 다 부활합니다. 인연 따라서 있어진 것만 그때그때 변화가 되는 것이지 그 근본바탕 진여불성자리는 변화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보고 항상 상자 상[常]라고 하는 것이고, 락은 안락할 락樂자 말입니다. 우리 생명이 있는 존재는 어느 것이나 안락安樂을 다 구합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더구나 우리 사람은 또 의식이 있어놔서 더욱 더 우리가 의식적으로 안락을 구한단 말입니다. 행복幸福을 구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적으로 행복을 구하는 존재입니다. 행복도 그냥 행복이 아니라 완벽한 행복을 구求한단 말입니다. 우리 사람들을 가리켜서 인간이란 것이 인간 존재가 너무나 욕심이 많지 않은가?

 

 

허나 욕심이 많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본래 성품性品이 본래가 부처[Buddha]기 때문에 부처가 될라는 그런 마음이 본래로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 존재가 부처가 못되면 항시 마음으로 불안스럽습니다. 본래 부천데 부처가 되어버려야 그래야 마음이 흐뭇하고 행복스러울 것인데 본래 부처님인데 부처[]가 못되어 놓으니까 그때는 마음이 부족을 느끼고 불안스럽지 않습니까.

 

그렇게 뭐 지금의 시대를 가르켜서 위기의 시대라 또는 불안의 시대라 그런 말들을 많이 하지요.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사람들이 지금 옳게 살지를 않고 있단 말입니다.

 

허망虛妄한 것을 있다고 생각하고 감투나 또는 재산財産이나 그런 것도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다 변동變動하는 것인데 거기다가 마음을 붙여서는 항시 불안스럽고 염려가 됩니다. 그 감투도 높은 감투나 쓰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것이 괴롭습니까?

 

 참 정말로 중상모략中傷謀略하고 별별 짓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당黨을 괜히 또 만들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걸 보면 굉장히 미련하단 말입니다. 참 미련해요, 그렇지 않고 생긴대로 살면 참 좋은 것인데....부처님 법法은 아까 말씀마따나 여법如法히 모두를 다 우주의 진리대로 한단 말입니다. 허나 당장에는 그것이 안 되겠지요.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사람들이 너무 업業을 많이 지었단 말입니다. 허망한 것 때문에 업業을 너무 많이 잔뜩 지어놔서 그러 업을 소멸 시키려면 그냥 몇 년 동안에 소멸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끝긑내 가서는 앞으로 몇 백년 몇 천년 가서는 다 그렇게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왜 안 될 수가 없는가 하면 우리가 본래로 부처님 같은 마음 그 부처[Buddha]의 마음이 우리 마음의 본 마음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고생도 하고 또는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 가지가지 그런 고초를 겪은 다음에는 우리가 부처 쪽으로 부처가 되기 위해서 온 힘을 그리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리다 말았습니다만 그 우리 행복은, 근원적으로 행복을, 우리 불자들은 행복을 구하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낙[樂]이라 안락 락樂자, 그 다음에 나 아我자. 그 나는[我] 4 가지 덕德에 있는 나 아我자字 나는 이것은 그냥 허망무상한 아가 아니라 허망무상한 아가 다 비었다는 소식을 사무치게 알고서 하는 말입니다.

 

참다운 나, 죽지 않는 나, 인연 따라서 생기고 인연 따라서 없어지는 그러 나가 아니라 인因을 초월한 참나가 이것이 이른바 열반涅槃의 네 가지 덕德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나는 이것은 그냥 우리 같이 보통 그런 현상적인 허망무상한 그런 것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모든 그런 신통지혜神通智慧를 다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불경에 보면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라. 팔대자재아 그것은 그 아我라는, 깨달아버린 그런 대도인大道人에 갖추어진 아我라는 것은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도 나툴 수가 있단 말입니다. 비행자재[飛行自在]라 공중으로 비행도 마음대로 할 수가 있고 자기 몸을 우주에 가득 차게 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우리 佛子님들 이런 말씀을 들으실 때 그냥 건성으로 생각을 말으십시오. 참말로 우리한테는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롯 금생今生에 복福을 못 짓고 전생에 우리가 업장業障을 많이 지어서 제대로 부처님한테 갖추고 있는, 부처님은 바로 우리의 본 성품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 갖추고 있는 그런 공덕功德을 본래로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래로 다 할 수가 있도록 우리가 지금 태어난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 그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주 신묘해서 잘못 쓰면 참 옹졸하고 정말로 바늘귀 하나도 안 들어갈 만치 좁지만 마음의 본바탕은 끝도 갓도[邊]없이 우주를 다 감싸고 있단 말입니다.

 

김가金哥 마음이나 박가朴哥마음이나 지금 사형수 마음이나 또는 도둑놈 마음이나 그 마음의 본바탕은 다 우주를 감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마음에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락아[常樂我]라 항상 영생永生, 그 사람 마음도 똑같이 영생하고 또 그 사람 마음도 똑같이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을 구하고 있단 말입니다.

 

또 구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런가 하면 신통묘지神痛妙智를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그런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안 봤으며 아.. 뭐..그렁저렁 어떻게 살아도 되겠구나. 그렇게 마음먹었을 것인데 그런 것을 분명히 다 인제 봐노니까 밀입니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도 닦으면 부처[Buddha]가 되겠구나! 부처가 되면 만 공덕을 충분히 할 수가 있구나! 그런 가능성이 나한테 있는데 그것을 무시無視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나이 적고 많고 또는 세간적世間的인 지식知識이 많이 있고 없고 하는 그런 것에 구애될 필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얼굴이 못난 것도 그런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자리는 다 똑같습니다.

 

마음이란 것이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자리는 김가 마음 박가 마음 또는 석가모니 마음 예수 마음 똑 같습니다. 그분들 성인聖人들은 보다 더 마음을 잘 쓴 분들이고 우리는 마음을 잘 못 써서 지금 범부중생凡夫衆生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맑을 정[淨]자, 맑을 정, 청정淸淨이란 정淨자 말입니다. 그 정은 무엇인고 하면은 이것은 번뇌 망상이 조금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본래 번뇌 망상이 조금도 없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것인데 우리가 괜시리 자꾸 분별을 내어 가지고서 망상을 한단 말입니다. 본래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망상할 건덕지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 내 몸뚱이도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런 것이 잠시간 모여서 시시각각으로 변화가 돼 있고 내가 쓴다는 지금 마음도 마찬가지고 마음도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모다 군더더기가 잔뜩 많이 들어서 좋다 굳다 밉다 사랑한다 모두 그러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허망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 중생의 마음은 청정할 정[淨]자 청정하지가 못합니다.

 

그러나 불성[佛性]을 깨달아서 불성자리에서 우리가 들어가면 그때는 그러한 번뇌망상이 조금도 없단 말입니다. 거꾸로 뒤바꿔 보고 그런 전도몽상[顚倒夢想]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때는 마음이 훤히 트여버리리 때문에 우주를 다 내다본단 말입니다.

 

과거도 끊임없이 보고[宿命通]미래도 끊임없이 본단 말입니다.[天眼通] 일념보관무량겁[一念普觀無量劫]하니 한 생각에 무량겁을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우리가 통通해서 보니,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라,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것을 아까 말씀 마따나 우리 중생들이 잘못 생각하고 잘못 봐 서 자꾸만 막히고 꺼끄럽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상常자, 그 영생불멸한 것이 우리 불성[佛性]자리 불성을 깨달은 끄 자리의 마음인 것이고, 

 

또 락樂이라 안락 락[樂]자 말입니다. 즐거울 락樂자 모든 행복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 때문에 우리 나쁜 생각 때문에 우리가 안락하지 못하고 스스로 고통을 사서 하는 것이지 우리가 바로 보고 바로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고통스럽게 느낄 필요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와 똑 같이 우리가 병들어서 아프다 하더라도 아, 이 병든 병病 이것이 어디가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인가? 마음으로 아프다 하는 것도 이것이 마음이 괜히 그러는 것이지 마음이란 것은 원래 모양도 없고 자취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플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아프다 하는 것이지 말입니다.

 

따라서 그 가장 원만한 그런 행복은 또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나 아我자, 아我라.. 이것도 역시 잘못 생각하기가 싶습니다만 모든 신통자재[神通自在]를 갖추어 있는 그런 이른바 대아大我 큰 나 또는 참 진眞자  나 아我자 진아[眞我]라 이런 단계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한테 우리 이것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인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이것은 본래면목이 아니라 과거 전생에 업을 지어서 금생에 받은데다가 금생 나와서도 아, 부모한테 이렇게 저렇게 배우고 학교 가서도 그 세속적世俗的인 지혜를 이것저것 배우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잡탕되어서 느끼는 이런 것은 사실은 허망虛妄한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알고자 할 수가 있고 그러한 것이 참다운 내 본래면목이고 또 번뇌도 조금도 없고 훤히 트여서 천지우주 어디에도 다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참 신묘[神妙]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분 좋을 때나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마음이 그 쾌적할 때 도인道人의 마음은 미처 못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마음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툭 트여서 과거에 막힘이 없고[宿命通]미래에 막힘이 없고[天眼通] 현재에 막힘이 없고 산이나 벽이나 아무 것도 걸림 없이 훤히 내다 볼 수 있는 그런 지혜[漏盡通] 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지혜가 본래로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자聖者가 미처 못된다 하더라도 우리 범부의 지금 신분이라 하더라도 정말 순간 사무치면 순간사무치는 그런 신심信心으로 해서 모든 그런 신장[神將]이 돕고 부처님 께서 호념護念한단 말입니다. 보호할 호護자 생각할 념念자 부처님께서 호념하신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불경[佛經]을 외우면 불경을 외우는 그것이  그냥 뭐 조금 기분 좋고 그런 정도가 아니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우는 그 즉시 바로 모든 신장神將들이 다 듣고 계십니다. 감동 안 받을 것입니까.  
   
우리는 눈에 불을 쓰고서 공부工夫를 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어떠한 비참悲慘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업에 실패한다든가 슬픈 이별을 했다든가 그런 것도 다 이것은 허망虛妄한 일입니다. 만나면 어쨌든 헤어져야 되겠지요. 또 난 사람은 어차피 죽어야 되겠지요.

 

우리가 그 소중한 우리의 생명의 본바탕, 영원한 고향故鄕으로 가는 그런 길로 가기 위해서 중국에서 인도로 가서 그 20년 동안이나, 가는데 3년 오는데 3년 거기 머물러서 10년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 집에서도 배가 고프다 뭣이 맛이 없다 다 그런 불평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허나 20년 세월동안 그도 나이가 먹어서가 아니라 한창 젊은 동안, 한창 꽃다운 젊을 동안 20년을 몽땅 바친단 말입니다. 그러고도 아무런 후회도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다 도道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어떻게 해서 도道를 구합니까?

 

우리 그 불성佛性, 불성에 대해서 정말로 보다 더 깊이 느끼셔야 합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 이것은 나의 마음인 동시에 모든 인간 존재, 존재의 본래 이것은 생명[生命]입니다. 또는 만유萬有의 근본根本 생명입니다.

 

어느 것도 부처 佛자 성품 性자 불성[佛性]으로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불성을 꺠달으면 바로 성인이요 부처요, 불성을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요 범부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갈 길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다 우리가 부처[Buddha]가 되는 길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님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부처가 안 되고 그대로 마는 것이 아닙니다. 금생에 못되면 내생에 되고 몇 만생 지내가도 본래가 부처[佛]인지라 부처가 꼭 되고 만단 말입니다. 부처가 못 되면 어떠는 것인가? 그떄는 윤회輪廻합니다. 뱅뱅 돕니다.

 

 우리 업식業識 따라서. 하루 밤 하루 낮에 팔억사천만념[八億四千萬念]이나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그런 생각 그런 생각을 망상妄想으로 지새워 버리면 우리는 천년만년 또 개가 되고 소가 되고 사람되고 무엇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금생에 부처님 법 만났을 적에 우리는 기왕이면은 본래 내 생명[生命]의 실존자리 본래 내 생명의 본체자리 그 자리로 가는 것이 우리 생명을 가장 효과적이고 우리 생명을 가장 최고도로 살리는 길입니다. 부처님 되는 그 길 외에 다른 부처님 되는 길 그 반대 길은 이것은 우리 생명을 낭비浪費하는 것입니다.

 

자기한테도 해害롭고 집안사람한테도 해롭고 이 사회에도 그때는 해害를 끼칩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어느 누구한테나 가장 훌륭한 이른바 보살菩薩의 길이고 보시布施의 길입니다. 아까 말씀 드린 상락아정[常樂我淨]분명히 잘 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 불성[佛性] 가운데는 정말로 불성은 죽지 않는 것이고 허망한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헤어졌다가 또 만나고 만났다가 헤어지고 이런 단계에서는 즉 다시 말하면 현상적인 그런 것은 변하고 없어지고 죽고 만나고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 불성[佛性]은 영생한단 말입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생명자체[生命自體]입니다. 또는 모든 행복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영원히 멸滅치 않는 참다운 행복이 불성 가운데는 갖추고 있습니다. 또는 우리 불성, 우리 본래 생명자리인 불성은 일체의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다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70세 먹으나 80세 먹으나 또는 어린이나 우리 마음이 순수하고 부처님 가르침 따르면 다 신통묘지를 다 할 수가 있습니다. 7살에 아라한[Arhan]도道를 성취하고 16살에 아라한阿羅漢도道를 성취한 분들도 다 있지 않습니까. 본래가 우리 불성은 청정미묘[淸淨微妙]해놔서 우리가 불성을 따르면 정말로 번뇌煩惱나 그러한 뒤바뀐 생각은 일어 날라야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성에 들어있는 무한공덕無限功德 자리인 상락아정[常樂我淨], 상락아정 이것이 열반사덕[涅槃四德]그럽니다. 열반 이것은 영생 행복한 생활이 열반인데 열반에 갖추고 있는 그런 공덕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지만 간추리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덕四德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말입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정말로 한시도 잊지 마시고 조금 조금 괴로우시더라도 아, 나한테는 만능萬能이 원래 갖추고 있는데 만능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그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참선[參禪]하고 염불[念佛]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는 화두[話頭]하는 사람은 화두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부처님, 부처님을 믿을 때는 역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이 가장 이것이 가장 쉽습니다. 본래 부처인데 본래 부처인 부처님의 대명사가 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니까 부처님 외우는 것이 제일 속 빠릅니다.

 

 내가 나를 부르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내가 나를 부르고 또는 우주의 이름도 내내야 아미타불입니다, 우주의 이름도. 우주가 모두가 다 불성으로 되어 있거니 불성의 대명사가 아미타불인 것이니까 불성佛性한테는 우주 역시 아미타불입니다.

 

 또 극락세계[極樂世界]는 무엇인가? 극락세계도 내내야 불성[佛性]으로 되있거니 극락세계의 교주도 역시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여기나 저기나 내 몸이나 내 마음이나 본래는 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인 것이고 우주도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천지 우주의 바로 생명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것은 또 어렵게 한다 하더라도 가장 쉽고 누구나 하기 쉽고 또 공[功]도 제일 많은 그런 것이 염불念佛공부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셔서 꼭 금생에 열반사덕[涅槃四德]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 출처: 금강륜[金剛輪] 제53호 성륜사 정기법회 [2000.3.5]

♧ 음악: 나무아미타불 http://cafe.daum.net/amtb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  

 

실상관[實相觀]: '나' 라는 이 몸뚱이나 너라는 몸뚱이나 천지 우주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비어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자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자리에 무량공덕

                             無量功德을 갖춘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충만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붙들어 매는 것이 실상관[實相觀]입니다. ○○○

 


  상락아정[常樂我淨] - 청화 스님[無住淸華] 법 등 명


                                                                          2008/02/09 22:17

복사 http://blog.naver.com/mcrane/110027540329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http://blog.daum.net/mjpark39/16404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