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불교와 참선② - 청화 스님[無住淸華]
가장 행복幸福한 공부 - 청화 스님[淸華]
우리 근본실상根本實相, 우리 생명生命의 근본실상은 무엇인가?
우리 모든 중생의 생명의 근본실상은 바로 불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금 불성佛性을 체험體驗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체험한 것이 아닌 지식은 다 건혜지乾慧地입니다. 바싹 마른 지혜입니다.
건혜미능乾慧未能 면생사免生死라.
*알음알이 지식으론 생사를 면치 못하나니*
바싹 마른 이론적인 개념 지식만으로 해서는 우리가 참다운 감로 맛을 못 봅니다.
참다운 해탈 맛을 못 보는 것입니다. 참선 공덕功德 가운데 이런 이름이 있습니다.
현법락주現法樂住라, 법락法樂을 우리가 맛본단 말입니다.
생각을 잘못한 분들은 참선공부해도 고통스럽고 다리도 아프고 별 맛이 없지 않는가.
이상스러운 맛이 있으면 안 되겠지요. 그러나 법락法樂이라는 맛은 분명히 있습니다.
법락이라는 맛은 우리 공부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더 환희용약歡喜踊躍으로
우리한테 온단 말입니다.
우리는 불경佛經을 볼 때에 환희용약이라.
이러한 소중한 술어를 많이 보지 않습니까.
어떠한 때에 환희용약이 오는 것인가. 그런 때는 자기의 몸뚱이와 자기의 관념에 대해서
별 부담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정말로 개운하고 뛰놀듯이 행복스러운 것이 환희용약
입니다. 이러한 것이 참선參禪공부나 염불念佛공부나 분명히 다 있습니다.
오늘 제 말씀이 제한된 시간이고 무던히 이렇게 덥고, 또 구변口辯이 없는 사람이 너무
지리하게 하면 큰 고역이 되십니다. 그래서 될수록 간단히 줄이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참선공부는 우리 생명을 모조리 바쳐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생명의 길입니다.
이러한 길이므로 지금까지 훌륭한 선지식善知識스님들한테 잘 말씀을 들으셔서 아시겠지
만 저 같은 사람도 45년 동안이나 참선參禪한다고 다소나마 애는 썼으니까 체험담을 드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정말로 참선공부는 가장 행복스러운 공부입니다.
어째서 행복스러운가 하면은 우리의 병病 지금 한국병韓國病이니 무슨 병病이니 하는
그런 병소리가 많이 나옵니다마는 우리 중생들은 사실은 누구나가 다 무명병無明病에
걸려 있습니다. 한국병이나 미국병이나 모두가 다 근본根本 병病은 무명병 입니다.
무명병無明病은 무슨 병인가?
무명병은 '있다 없다'하는 병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또는 참말로 있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공空인 물질物質은 있다고 하고 참말로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생병衆生病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므로 한국병이 생기고 무슨 병이 생깁니다.
또는 우리 몸뚱이에 있는 이런 저런 병病 암癌이나 에이즈<AIDS>나 이러한 것도 역시 모두가 다 우리 마음병 무명병無明病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명병을 치유治癒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행복을 위爲해서는 가장 급선무急先務입니다. 그러면 우선 무명병 가운데 없는 것을 있다고 한 병이 무엇인가?
이것은 유루병有漏病이라, 있다는 병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내 몸뚱이도 분명히 부처님의 시각, 聖者의 견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백백明明白白이 빈 것인데, 우리가 있다고 본단 말입니다.
다른 것도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이 무명無明으로 해서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일체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거기에서 모든 중생들의 병이 파생派生됩니다.
감투의 병病이나 남을 미워하는 병이나, 좋아하는 병이나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랫물을 맑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류上流부터 다스려야 하듯이 무명병無明病만 다스리면 그때는 모든 병이 自動으로 다스려지고 모두가 정화가 되고 다 풀립니다.
그런데 있다는 병, 내가 있다는 병, 對象的으로 실존적實存으로 무엇이 있다는 병, 우리불자님들은 평생 동안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있다는 병을 쳐부수는 일입니다.
있다는 병을 우리가 못 쳐부수면 우리는 참다운 불자佛子가 못됩니다.
따라서 참다운 참선參禪을 할 수도 없습니다. 서로 피차 갈등葛藤을 하고 가정적으로 불화不和스럽고 여러 가지 불평등不平等이라든가 모든 문제는 있다는 병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한테 우리가 가르쳐주는 그러한 법문法門 가운데도 가장 소중한 것은 있다는 병을 쳐 부셔서 본래 없다는 자리로 마음을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있다는 병 때문에 칭칭 묶이어서 마음이 지금 폐쇄閉鎖 되어있습니다. 있다는 병<有漏>이 있으면 교만심驕慢心등 별스러운 것이 다 나옵니다.
그러나 본래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있지 않은 도리<無漏>, 이것이 금강경金剛經 도리고,반야심경般若心經 도리道理이고 부처님의 참다운 반야般若 공空 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의 정법正法을 이야기 하려면 어느 누구든지 간에 꼭 반야<panna/prajna>의 공空 도리, 모든 존재가 본래는 공이라는 도리 < 諸法空相 > 이러한 도리를 분명히 말씀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뚱이도 본래로 없다고 생각 할 때에 자기 몸뚱이도 자기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자기 소유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절 자기 물건 어느 것도 자기 소유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이라 하는 짧은 나그네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나그네 길 에서 우리 짐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집도 기왕이면 좋은 집, 옷도 가장 좋은 옷, 음식도 가장 좋은 음식, 자기 배우자配偶者도 가장 좋은 사람, 이러한 짐들을 다 짊어지고 어떻게 모두가 다 텅텅 비어버린 空의 고향故鄕에 갈 수가 있습니까.
참다운 우리고향은 불심佛心의 고향입니다.
불심佛心의 고향에 가기 위해서는 일낙서산日落西山에 월출동月出東이라. 해가 떨어져야 달이 솟아오르듯이 우리가 앞서 말씀과 같이 유루병有漏病을 떨쳐버리지 못하면은 제 아무리 요설변재饒舌辯才로 해서 이렇게 저렇게 법문法門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참다운 불성佛性자리에는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런 자리에 들어갈 것인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바른 理解, 바른 가치관價値觀, 부처님 가르침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먼저 믿고 해석하고 또는 행하고 증명하고 이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께서는 자주 들으셔서 그런 도리道理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먼저 어떻게 믿을 것인가? 우리가 아직은 증명도 못하고 공부도 못한지라 우선 부처님 말씀만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空이라고 하면 공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믿은 다음에는 어째서 空인가?
이러한 도리는 앞서 말씀과 같이 물리학적으로나 또는 다른 구사론俱舍論이나 부처님의 논장論藏을 인용해서 우리가 이론적으로 자기 체계體系를 세웁니다.
모든 물질이 본래本來로 에너지energy뿐이다. 모든 물질物質은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는
에너지뿐인데 에너지가 진동振動해서 상相을 나투어 모양이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 있지가 않다. 이러한 정도는 지금 물리학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 부처님 제자가 이러한 도리를 모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이제 이해理解한 다음에는 거기에 따라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방면으로 보나, 가사 우리가 주문呪文을 외운다 하더라도 그러한 도리를 알고 주문을 외워야 그래야 훨씬 더 가피加被도 많이 입고 우리 마음도 빨리 정화淨化됩니다. 주문이라 하는 것도 그냥 그렁저렁한 말이 아니라
다 빈자리에 있는 우주宇宙의 음音, 우주의 멜로디melody, 실實은 다 비어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생명의 실상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 자리는 자비慈悲 지혜智慧 행복幸福, 또는 음音도 가장 청정한 범음청량梵音淸凉이라, 가장 청정한 영원한 우주음宇宙音이 있단 말입니다.
六字大明王眞言[옴.마니.반메.훔ॐ मणि पद्मे हूँ]이나 광명진언光明眞言[옴 아모카 바이로
차나 마하 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 타야 훔]의 음音이나 또는 신묘장구대다라 니神妙章句大陀羅尼나 모두 다 그런 음은 우주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냥 그러한 주문만 외인다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약간의 공부는 되어
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하나의 주문呪文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참선은 못됩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주문을 외이면서 참선을 하고 싶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하면서도 참선을 하고 싶고, 그러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참선공부는 제일 높은 공부이고, 다른 공부는 저 밑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들 말을 합니다. 나는 지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몇 십년동안 해왔는데, 관세음보살을 안 외이면 그 내 마음이 허전하다. 그런데 참선도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시는 것이 우리 불자님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근본자리 근본 성품性品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 하시면 됩니다.
성품性品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마음을 둘 것인가?
이것도 부처님 말씀에 우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 비어 있고,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 만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은 충만해 있다. 이렇게 먼저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고서 우리 마음이 相에 안 걸리고, 아시는 바와 같이 이 가운데는 금강경
金剛經도 몇 천 독 하신분도 계실 것입니다. 금강경 도리의 핵심核心이 무엇입니까.
나라는 상相 너라는 상相,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러한
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 마음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상相에 걸리지 않고 상相이 없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는 좋은 것이 있고 이러한 상을 두면 금강경 도리를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상相은 본래로 비어있다. 이렇게 아시고서 [옴마니반메흠]을 외우시면서 옴마니반메훔 주문을 하시면 바로 참선參禪 하시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이 저 어디 밖에가 계신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저 십만 억 국토 저 밖에가 계신다. 이러한 식으로 念佛하면 그런 것은 그저 칭명염불稱名念佛인 것이지 참선參禪은 못됩니다.
그러면은 그렇게 법성法性이고 불성佛性이고 진여불성眞如佛性이고 다 없애버리고서 그냥 무자無字 화두나 '이뭐꼬' 화두나 화두話頭만 들고 있으면 참선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두話頭라는 것이 어째서 나왔는가?
우리 불자님들은 화두나 염불이나 그러한 것들의 상관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이 투명透明해야 번뇌가 안생기고 확신確信이 섭니다.
참선은 어떠한 것이고 염불은 무엇인가? 이러한 것에 관關해서 뿔뿔이 생각하면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둘이 아닌 법문에 어긋납니다. 필요 없는 논쟁들을 많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라. 그러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논쟁論爭할 거리가 없습니다.
보조국사普照國師 가신지 적어도 팔백년 세월동안, 그 뒤 나옹懶翁 지공指空 태고太古
서산西山 진묵震默 제대 도인諸大道人들이 다 옳다고 긍정을 했으므로 새삼스럽게 논할
필요도 없는 것인데 자꾸만 부질없이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이 말씀은 누구를 비방하는 말씀이 아니라. 부처님 법문은 모두가 다 진실한 법문 또는
깨달은 분들은 깨달은 분상에서는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깨달은 분상에서는 돈오
돈수頓悟頓修라고 말하나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말하나 아무런 흠이 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그릇 따라서 도인들은 그때그때 성품을 안 여의고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무자無字 화두話頭나 '이뭐꼬' 화두나 모두가 다 근본 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내내야 근본 성품을 깨닫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까.
'여하시 불 如何是佛잇꼬' 부처란 무엇인가?
화두라는 것은 대체로 서쪽에서 달마스님이 이쪽으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또는 부처가 무엇인가?
또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또는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무엇인가?
이러한 것에 따라서 화두가 나왔습니다.
다시 한 마디로 하면 근본성품根本性品이 무엇인가?
근본성품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 해답으로 해서 그때그때 도인道人들이 상相이 없이 내 뱉어버리는 말이 무無가 되고 ‘이뭐꼬’가 되고 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한 화두를 참구할 때도 우리 마음이 상相을 떠나버린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에 딱 입각立脚해 있어야 화두 참구參究가 됩니다.
그러는 것이지 진여불성은 생각지 않고서 그냥 의심만 한다고 생각하면 상기上氣가 되고 공부工夫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마땅히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른 철학 바른 가치관, 바른 가치관은 무엇인가?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일체 존재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인 것이지 불심뿐인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눈으로 명백明白히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고 한다 하더라도 이러 한 것은 모두가 다 참말로 바로 본다면 있지 않는 것입니다. 있지 않는 것을 있지 않다고 분명分明히 느끼는 것이 우리 수행자修行者가 됩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는 그냥 앉아서 이것하고 저것하고 모양만 의젓이 취하고 이래서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 털어 버려서 내 걸망까지도 내 몸뚱이까지도 이것저것 몽땅 다 비었다. 이렇게 생각하고참선을 하면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龍이 물을 얻어서 하늘로 올라가고 또는 호랑이가 언덕을 얻어서 천리만리 달려가듯이 그와 똑 같은 도리입니다.
참다운 생명의 창조創造는 앞서 말씀과 같이 제법공諸法空 도리에서 반야지혜般若智에서 출발해야 참다운 생명의 창조가 됩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윤회輪廻의 법입니다.
'있다 없다' 느끼는 그 마음보고 일승법一乘法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훔칠 도盜자 도심盜心이라. '나'라는 것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면 그 마음도 도둑마음이고, 또 이 집은 영구히 내 집이다. 그 마음도 부처님 사상에서 보면 도둑마음입니다.
모두가 다 본래로 비었습니다. 어느 것도 자기 몸뚱이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금생今生의 이 몸뚱이는 어데서 왔는가?
과거 전생에 이와 같은 몸이 있었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미래 내생에 이와 같은 몸이 있을 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몇 십년동안 사는 이 몸뚱이는 분명히 있지 않는가?
이 몸뚱이도 찰나, 찰나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어느 순간도 같은 시공간에 같은 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부처님 가르침을 보다 더 정확正確히 생각들 하십시오.
어느 순간도 이와 같은 몸이 같은 몸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순간순간 찰나찰나, 찰나刹那는 일초의 75분의 1초 그런 동안도 같은 몸이 없습니다.
신진대사를 해서 먼저 번 세포細胞가 죽고 나중에 세포가 생겨나고 그때그때 주름살이 더 깊어지고 하는 것을 우리 중생衆生들은 몇 십 년 지나고서야 늙었다고 아는 것이지 지금 그냥 내 몸 그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뚱이는 순간 찰나刹那도 같은 몸이 있지가 않습니다. 순간瞬間찰나도 같은 것이 있지 않거늘 이렇게 있다는 내 몸도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법공諸法空인 것 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제법공 도리諸法空道理를 알아야 그래야 참다운 대승大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저 유교有敎라. 소승교라는 것은 있다 없다 그런 차원의 가르침이 소승 아닙니 까. 대승이 되려면 적어도 제법 공空 자리부터서 반야지혜般若智慧부터서 출발해야 그래야 대승이 됩니다.
반야지혜부터서 반야Prajna의 보배가 있어야 그래야 참다운 염불이 되고, 반야지혜가 있고서 모든 것이 진여불성 뿐이다. 다른 것은 다 헛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念佛하면 이것은 바로 염불인 동시에 念佛禪인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참구할 때도 그 자리를 놓치지 말고 참구參究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들이 '이뭐꼬' 선禪에서 여실히 다 발표가 되어 있습니다.
여실如實히 밝혀 있습니다.
< 有一物 明如日 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者 是甚麽 >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한 물건은 무엇인가?
이것은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오직 생명의 본래면목 자리단 말입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나한테 본래면목 자리가 있으되 검기는 칠漆보다 더 검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으니 천지 우주를 두루 비치는 광명의 생명이고 또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이고 있으니 천지우주天地宇宙에 가득 차 있고 그러한 것이 나와 더불어 있는데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가' 이지, '오직 하나의 도리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무엇인가' 이지,
그냥 아무렇게나 '이뭐꼬'가 아닌 것입니다.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께서 분명히 밝혀 놓으신 가르침입니다.
어떠한 화두나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가 무엇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이쪽으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다 그런데서 천 칠백공안千七百公案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화두를 참구하던지 간에 근본성품 자리를 놓치지 않아야 참다운 조사선입니다.
어디에 의지해서 상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상相에 의지해서 공부하면 참선參禪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상을 의지하지 않고서 자취가 없고 모양도 없고 이름도 붙일 수가 없는 그 자리, 우리 본래 성품자리에 우리 마음이 입각해 있어야 참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다고 보면 참선은 선방禪房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집안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운전運轉을 하던지 간에 언제나 우리 마음이 상相에 걸리지 않고 우리 마음이 일체존재 나나 너나 모든 존재의 실상實相자리 이른바 생명의 실상자리 이러한 자리에 입각하면서 공부하면 어느 공부나 다 참선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기독교를 믿어 와서 '오, 주여! 하느님이시여!'
이렇게 말하기가 더 좋은 사람들은 말은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떨어버리고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에 마음을 두고서 '오, 주여!' 해도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그러한 증거로 화두 가운데 '똥마른 막대기<乾屎獗>'라는 화두가 있지 않습니까.
운문雲門스님한테 가서 '如何是 佛잇꼬'하니 '똥마른 막대기라!' 상相을 떠나버린 자리에서는 똥마른 막대기가 되었든 또는 쇠막대기가 되었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금생에 잔뜩 무명병無明病, 무명병 중에 有漏病 <있다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또 진여불성도 어느 분들은 텅텅 비어있는 것이지, 진여불성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진여불성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사람은 무병無病, 없다는 공병空病에 들어있습니다. 무無병이란 말입니다.
단견상견斷見常見이라, 우리는 항시恒時 있다는 유루병도 끊어야하고 또는 무엇이 허무해서 아무것도 없다는 그러한 공병空病도 끊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는, 相이 있는 눈에서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相이 없는 충정沖靜한 우리 마음에서는 분명히 진여불성은 우리 생명 자체로 해서 영원히 우주에 충만한 것입니다.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 불자佛子님들은 그냥 가장 소중所重한 내가 없고 가장 소중한 저 사람도 공이라 하니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거기까지만 생각하면 굉장히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하나의 실상實相은 일체 행복 지혜 자비慈悲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공부가 진전이 되면 進一步 한만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허두虛頭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감로수 같은 그러한 맛이 우리한테 옵니다.
오늘도 꽤 덥습니다마는 동산양개洞山良价화상한테 더운 때는 어떻게 해야 하고 추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이제 동산洞山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대는 어째서 춥고 더움이 없는 그 자리를 구하지 못하는가?'
춥고 더움이 본래 없는 그 자리를 구求하지 못하는가?
우리 중생衆生들은 미우면 미운체로 좋으면 좋은 체로, 더우면 더운 체로 고생苦生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위도 추위도 미움도 좋아함도 다 떠나서 오직 청정한 해탈의 자리에 가 버리면 다 조복調伏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저 부터가 그런 자리에 온전히 못 갔으므로 분명히 저도 지금 덥습니다. 더위도 추위도 없는 자리가 바로 眞如佛性자리입니다.
다 초월超越해 있습니다. 참선을 많이 해보신분들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뜨거운 선방에 앉아서도 공부가 잘될 때는 그냥 시원한 기운 때문에 자기 눈에서도 분명히 시원스러운 바람이 푹푹 일어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한없는 지혜智慧 한없는 자비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有漏病 무無병 때문에 ‘있다는 병’ ‘없다는 병’ 때문에 우리의 그러한 무한無限한 공덕功德을 딱 틀어막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불교와 참선② - 청화 스님[無住淸華]
법 등 명 2010/06/1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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