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부처님의 행佛行(1)

白道 박만주 2019. 10. 29. 09:25




   



  부처님의 행佛行(1)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은 법달法達이라 하였다. 항상 《법화경》을 외운 지 7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정법의 당처當處를 알지 못하더니, 와서 물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큰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니 의심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깊이 통달하였으나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나. 경 자체에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너의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정법을 구하는구나.

나의 마음 바른 정定이 곧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다. 나는 한평생 문자를 모른다.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으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다.”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은 법달法達이라 하였다.

덕이본에 보면, 법달 스님이 일곱 살에 출가해서 육조 스님한테 가서 절할 때 이마가 바닥에 안 닿게 하자 육조 스님이 아만을 부린다고 굉장히 꾸짖는 대목에 나오는데 바로 그분입니다.


항상 《법화경》을 외운 지 7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정법의 당처當處를 알지 못하더니, 와서 물었다.

7년 동안이나 《법화경》을 외웠는데 부처님이 이 경에서 전하신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큰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니 의심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스님께서는 지혜가 굉장히 넓고 큰 분이니, 경을 보다가 생긴 의심을 해결해주십시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깊이 통달하였으나

법이란 것은 그 자체가 깊이 통달해 있는 겁니다.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나. 경 자체에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경전에 무슨 의심이 있겠어요. 우리 존재원리는 있는 그대로 본래 부처로 되어 있으니 거기에 의심하고 말고 할 게 없어요. 양변을 여읜 그 자리에 의심할 게 있습니까? 법달法達이라 할 때 그 법도 본래 스스로 다 통달해 있는데, 다만 마음이 통달해 있지 못한 것이다. 경에 의심이 있다는 것도,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지 경에는 의심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일화가 하나 생각이 나네요. 전에 박학다식한 것으로 유명하신 어느 스님께서 《화엄경》을 번역할 때 오자가 있다고 교정한다고 하니까, 어느 수좌 스님이 “‘《화엄경》에 오자가 있다’는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스님께서 교정한다는 것은 종이에 인쇄된 《화엄경》을 얘기한 것이죠. 그런데 질문한 수좌는 《화엄경》은 본래 성불한 그 자리를 표현한 경이니 거기에 오자가 있다 없다 하면 틀리다는 말이었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물었는데 스님께서 어떻게 답하셨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흰 종이에 인쇄된 《화엄경》을 《화엄경》이라 생각해서 대답했다면 틀렸을 것이고, 우리 마음을 경전으로 보셨다면 바른 답을 했겠지요.


너의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정법을 구하는구나.

네 마음의 경을 보면 ‘정법이다-사법이다’를 초월하는데, 그걸 못 보고 흰 종이에 활자화된 경을 보면서 의심이 있다, 없다 하는구나. 마음의 경에는 의심이라는 것이 없는데, 거기에 있다고 보는 네가 잘못되었다. 스스로 삿되면서 정법을 구하는구나!

 

나의 마음 바른 정定이 곧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다. 나는 한평생 문자를 모른다.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으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다.”

육조 스님은 글자를 모르니까, 그 경을 가지고 와서 읽으면 듣고 법을 알 것이니, 읽어 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행佛行(2)   

  

법달이 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와 마주하여 한 편을 읽었다. 육조 스님께서 듣고 곧 부처님의 뜻을 아셨고, 바로 법달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명하셨다.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이니라.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三乘을 말한 것은 다만 세상의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다. 경 가운데에 분명히 ‘다른 승乘이 있지 않고 오로지 일불승一佛乘뿐이다’라고 하셨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을 듣고 이불승을 구하여 너의 자성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 경 중에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 너에게 말하리라.


경에 말씀하기를 ‘모든 부처님·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하셨다.〔이상의 열여섯 자는 바른 법이다.〕 이 법은 어떻게 알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너는 나의 말을 들으라.


사람의 마음이 생각하지 않으면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하여 사견邪見을 떠난다. 이것이 곧 일대사인연이다.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을 떠난다. 밖으로 미혹하면 상相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空에 집착한다. 상相에서 상을 여의고 공空에서 공을 여의는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覺〕인데, 네 문〔四門〕으로 나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開〕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示〕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치는 것〔悟〕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入〕이다.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감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바로 세상에 나오는 것〔出世〕이다.




법달이 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와 마주하여 한 편을 읽었다. 육조 스님께서 듣고 곧 부처님의 뜻을 아셨고, 바로 법달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명하셨다.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한 인연이니라.


《법화경》 일곱 권은 분량이 굉장히 많거든요. 육조 스님께서 듣기에는 많은 말이 모두 하나다. 전부 우리 존재원리를 비유해서 얘기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三乘을 말한 것은 다만 세상의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다.


이 《법화경》에서 말씀하시는 삼승三乘, 즉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은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한 방편이지 본래 법 자체는 그런 게 아닙다.



경 가운데에 분명히 ‘다른 승乘이 있지 않고 오로지 일불승一佛乘뿐이다’고 하셨다.”


손가락으로 볼 때는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을 나눌지라도, 달의 입장에서 보면 오직 일승밖에 없습니다. 다만, 둔한 사람을 위하여 삼승을 설해서 점진적으로 끌어올려 깨닫게 하려는 것이지 실제 내용은 일승밖에 없어요.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을 듣고 이불승을 구하여 너의 자성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 경 중에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 너에게 말하리라.


성문, 연각 등 삼승을 구하여 너의 성품을 오히려 미혹하게 하지는 말아라. 경 가운데에 일불승 그 자리를 너를 위해서 설해주겠다.



경에 말씀하기를 ‘모든 부처님·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하셨다.〔이상의 열여섯 자는 바른 법이다.〕


이 일대사인연이 뭐냐? 뒤에 나오지요. 일대사인연 때문에 나오신 것이지, 다른 것 때문에 이 세상에 나오신 것도 아니고 다른 것 때문에 법문을 설하신 것도 아니다. 일대사인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


이 법은 어떻게 알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너는 나의 말을 들으라.

이 법은 바로 일대사인연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생각하지 않으면

여기에는 ‘생각하지 않으면’ 했는데 ‘양변을 여의면’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양변으로 보기 때문에 사량분별을 하는 겁니다. 양변을 여의면 사량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지요.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하여 사견邪見을 떠난다. 이것이 곧 일대사인연이다.

이 사견邪見은 ‘있다-없다’로 보는 것을 말하지요. ‘너다-나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를 초월하면 사견을 떠나는데, 이 삿된 견해를 여읜 것이 바로 일대사인연이라 한다.


이 ‘일대사인연’은 이름만 다르지 ‘양변을 여의라’는 소리예요. 자성, 법성, 불성이라는 것도 다 똑같아요. 그래서 육조 스님께서 《법화경》 일곱 권이 분량은 많지만, 많은 말이 없다,  양변을 여의라 말뿐이다 하신 겁니다.


이 일대사인연은 여기에서는 자성자리에서 양변을 여의어 무심無心된 그 상태로 설명했는데, 또 다르게는 평상심平常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무심, 양변을 여읜 자리, 불성, 법성 하는 말은 일대사인연과 같은 말입니다.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을 떠난다.

안으로는 양변을 여읜 것이고, 밖으로는 어떤 물건이라도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보는 것이 내외가 미혹하지 않는 겁니다. 내외가 미혹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는데 간단한 거예요. 또 그렇게 보는 게 내외가 청정한 것이죠. 앞에서 생각생각이 반야로 관조한다는 말과 같아요.


밖으로 미혹하면 상相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空에 집착한다. 상相에서 상을 여의고 공空에서 공을 여의는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보세요. 상을 없애 상을 여의는 게 아니고 상에서 그냥 상을 여의어요. 또 공에서 공을 없애어 공을 여의는 게 아니고 공에서 그냥 공을 여의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양변을 안팎으로 공하고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 한 생각에 마음이 열려요. 운개일출雲開日出하지요. 양변을 여의면 구름이 걷히는 것과 같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저절로 나오잖아요. 해 나오는 게 마음이 열리는 겁니다.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그것이 세상에 출현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부처님이 태어나야 세상에 출현한 것인데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그것이 바로 마음에 부처님이 출현한 거예요. 그러면 개개인이 분별심, 즉 양변을 여의어 이 생각 저 생각 작용을 일으키는 순간순간에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꼭 석가모니 부처님만 2,600여 년 전에 출현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출현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양변을 여의든 안 여의든 부처님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죠.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여는 것이다.

이게 어렵지요. 양변을 여읜 자리에서 나오는 작용이 전부 부처님 지견이에요. 부처님 지견이라고 특별히 다른 게 아닙니다. 양변만 여의면 생각생각 일어나는 그 자체가 모두 부처님 지견이 열려서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꼭 부처님만이 오셔서 지견을 여는 것이 아니죠.


부처님은 깨달음〔覺〕인데, 네 문〔四門〕으로 나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開〕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示〕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치는 것〔悟〕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入〕이다.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감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개시오입開示悟入이죠. 여기에서는 한 사람이 하는 걸로 되어 있어요. 다른 곳에는 깨달은 사람이 열어 보이면〔開示〕 못 깨달은 사람이 깨달아 들어간다〔悟入〕고 풀이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돈황본》에서는 한 사람이 개시오입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양변을 여읜 데서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이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이고, 또 그것이 보이는 것이고, 또 그것이 깨달은 것이고, 또 그것이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 들어간다는 그 한 곳이 바로 양변을 여읜 그 자리입니다.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바로 세상에 나오는 것〔出世〕이다.

깨달음의 지견으로 본성, 즉 양변을 여읜 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出世〕’가 좀 이상해요. 나는 출가出家로 바꾸면 좋겠어요.

 

부처님의 행佛行(3)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언제나 마음자리에 부처님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내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고, 세상 사람의 마음이 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 지견을 여니,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속에서 나오는 것〔出世〕이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승법이다. 아래를 향해 삼승을 나눔은 미혹한 사람을 위한 것이니, 너는 오직 일불승만을 의지하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는 것이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려지게 된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힘써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이것이 바로 경을 굴리는 것이다.”

법달은 한번 듣고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아〔言下大悟〕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실로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고, 7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려서 생각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다.”

그때 듣는 사람이 깨치지 못한 이가 없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언제나 마음자리에 부처님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내지 않기를 바란다.


육조 스님께서 바라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항상 부처님의 지견을 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양변을 여의면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고, 양변에서 사고하면 중생의 지견을 여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양변을 여의라’고 했습니다만, 이것이 굉장히 어렵지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양변을 여의기 위해서 참선하고 봉사하고 간경하고 염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염불, 봉사, 간경, 참선한다고 다 양변을 여의는 것이 아니지요. 어떻게 하면 양변을 여의는 데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빠르게 들어갈 수 있느냐? 정견正見을 세워야 합니다. 내가 무아無我라는 정견을 세우지 않고, ‘내가 있다〔有我〕’는 생각으로 봉사, 간경, 염불, 참선을 하면 절대 양변을 여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수행을 하면 어떤 폐단이 생기느냐? ‘내가 있다’고 보면 자꾸 비교하게 되면서 수행보다 내 밖의 조건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 조건이 물질, 명예 같은 것이죠. 그래서 자꾸 그쪽으로 신경이 갑니다. 수행을 하다가 장애를 만나면 쉽게 물러섭니다. 또 열심히 하더라도 하심하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아만이 더 두터워집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수행을 하니까, 나는 남보다 더 잘한다, 열심히 한다는 교만심이 붙게 됩니다.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은 수행을 아무리 열심히 지속적으로 하더라도 아상이 강하고 화를 잘 내며, 명예욕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연기로 존재하니 실체가 없다, 무아다, 이런 정견이 확고히 선 사람이라야 내면의 양변을 여의는 그 가치를 알고 열심히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양변을 여읜 그 자리의 가치를 알고 참선, 염불, 간경, 봉사를 하면 더 열심히 하게 되어 양변을 여의는 데 더 빠르게 갈 수 있어요. 내가 무아라는 것을 알고 거기에 믿음을 내어 그것을 깨닫고자 발심하여 열심히 하면 할수록 내 밖의 가치보다도 안에 양변을 여읜 자리의 가치가 정말로 굉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자리의 가치는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많은 금·은 보화와도 비교가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해야 합니다. 이런 가치관을 철저히 세우고 참선, 간경, 염불, 봉사할 때에 그것이 양변을 여의어 가는 바르고 빠른 방법입니다.


혜능 스님께서도 항상 모든 인류가 중생의 지견을 열어서 매일 갈등하고 대립하고 투쟁하고 전쟁하는 그런 세상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중생 지견을 연 사람들이 주도하는 것 같아요. 그 대장이 미국의 부시 대통령입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한 근본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공부 많이 한 지식인들이 세상 문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전부 지엽적인 것을 보고 근본을 보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는 공부를 바르게 하여 근본 문제를 말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말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요.


세상 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고, 세상 사람의 마음이 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 지견을 여니, 


마음이 삿된 것은 ‘있다-없다’ 양변에 집착하는 것이고, 마음이 바른 것은 양변을 여읜 거죠. 우리가 ‘있다-없다’ 따지니까 남과 대립·갈등하고 심지어 도둑질도 합니다. 마음이 ‘너다-나다’에 집착하여 어리석고 악을 지으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어요. 양변을 여의고 지혜를 일으켜 비춰 보면 스스로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입니다.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속에서 나오는 것〔出世〕이다.”


여기에 출세出世를 ‘세상에 나오는 것’이라 번역한 분도 있고, ‘세속에서 나오는 것’으로 한 분도 있는데, ‘출가’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양변을 여의어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 출가고, 중생의 지견에 머물러 시시비비나 하고 사는 것은 출가가 아닙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승법이다.


《법화경》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래를 향해 삼승을 나눔은 미혹한 사람을 위한 것이니,


미혹한 사람을 위해 성문·연각·보살의 세 가지 길을 나누었는데, 이것은 방편으로 한 것이죠.


너는 오직 일불승만을 의지하라.”


일불승一佛乘이나 일승법一乘法이 같습니다. 일불승이 뭡니까? 양변을 여의는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는 것이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려지게 되니,


내가 일불승이 되어 양변을 여읜 그 마음으로 행하면 오히려 《법화경》을 굴려요. 《법화경》한테 굴려지는 것은 자기가 경전에 갇히는 것이죠. 구속되는 것이고.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는 것이다.


이 바른 것이 양변을 여읜 것이고, 삿된 것이 ‘나다-너다’에 집착한 것이죠. 《법화경》 굴리는 통 속에 들어가 굴러가는 대로 가면 거꾸로도 가고 옆으로도 가고 굉장히 괴롭겠지요.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된다.”


앞에 ‘일불승으로 마음을 행한다’는 말이나 또 ‘바르게 한다’는 것이나 ‘불지견을 연다’는 말이 다 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부처님 법을 내가 굴려야지 부처님 법에 내가 굴리면 안 되지요. 왜냐? 내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양변을 여의면 부처가 되어 주인으로 모든 것을 구르는 겁니다. 그러면 부처와 미륵보살도 부릴 수 있습니다.


《선요》에 그 말이 나와요. “석가와 미륵이 그를 위해서 병과 발우를 들어주더라도 분에 넘치지 않는다.”5) 요즘은 이런 법문하는 분도 없어요. ‘부처님보다도 무심도인無心道人에게 공양하는 것이 복이 더 많다. 예를 들어 성문·연각한테 공양하는 것보다 보살한테 공양하는 복이 더 많고, 보살한테 공양하는 것보다 불조한테 공양하는 복이 더 많고, 또 불조한테 공양하는 것보다는 무심도인한테 공양하는 복이 더 많다’6) 하는 말이 바로 이 뜻이에요.


우리는 어떤 것이든 부처님이 아니라 부처님보다 더한 분이 오시더라도 거기에 굴림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굴려야 주인이 되는 거예요.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힘써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이것이 바로 경을 굴리는 것이다.”


여기에 보면, ‘법을 의지하라’ ‘수행’하는 말이 있지요. 그러면 이것은 닦는 것이 아닙니까 하는데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깨친 도인이 부처님한테 향 꽂고 마당에 빗자루 쓰는 걸 말하는 거예요.


법달은 한번 듣고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아〔言下大悟〕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실로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고, 7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려서 생각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


여기 깨닫고 난 뒤에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修行佛行〕’고 하니, 이게 돈오점수頓悟漸修 아닌가? 이렇게 볼 수 있는데 그 말이 아닙니다. 이것도 부처님한테 향 꽂고 마당 청소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고단하면 잠자는 도인의 평상심平常心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다.”

그때 듣는 사람이 깨치지 못한 이가 없었다.

양변 여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하니, 어떻게 하면 이 양변을 여읠 수 있느냐?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http://blog.daum.net/mjpark39/16404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