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견(佛知見)
『묘법연화경·방편품』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舍利弗 云何名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諸佛世尊 欲令衆生 開佛知見 使得凊淨故 出現於世
欲示衆生 佛之知見故 出現於世
欲令衆生 悟佛知見故 出現於世
欲令衆生 入佛知見道故 出現於世
舍利弗 是爲諸佛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佛知見이란 바로 부처님의 지혜를 말한다. 부처님의 지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의 實相을 통찰해보고 계신다.
이것을 크게 나누어보면 모든 사물의 안에 實在하는 平等性과, 왜 그것이 不平等한 현상이 되어 나타나느냐 하는 법칙을 확실하게 꿰뚫어 보시고, 그리고 그 2가지를 종합한 지혜, 이것이 부처님의 지혜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신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그 지혜를 얻게 하고 싶은 단 한 가지 願이기 때문이다.
그 지혜를 얻기만 하면 누구라도 그 자리에서 당장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지혜를 모든 사람이 얻게 되면 이 세상은 그대로 평화의 寂光土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本懷이다.
입장을 바꾸어 우리들 측에서 생각하면 그러한 지혜를 얻는 것이 인간으로서 최고의 이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 된다고 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 것인가, 하는 진실을 가르치고, 그 道에 인도하기 위하여 諸佛은 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이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최고의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순서라고 하는 것이 있다.
당장 껑충 건너뛰어서 갈 수가 없다. 그 순서가 ‘開·示·悟·入’의 四佛知見이다.
먼저 첫 번째 순서로서는 사람들의 눈을 열게 할 필요가 있다. 눈을 감고 있어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그런데 무엇에 눈을 뜨게 하냐 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평등하게 佛性이 있다”고 하는 진실에 대해서이다.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발견인가.
자신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하는 자각, 얼마나 아름다운 자각인가. 구제는 그곳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즉 그러한 자각이 생기면 마음은 저절로 청정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 사람은 이미 부처님의 지혜의 일부, 즉 인간의 평등성을 알 수 있었으니까 먼저 눈이 열린 것이다. 이것이 <開>의 단계이다.
<示>로 聲聞으로
다음으로 부처님은 부처님의 지혜의 실제의 전개모양을 보이신 것이다.
즉 근본의 평등에서 여러 가지 불평등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는 原理와 그 작용을 하는 因·緣·果·報의 법칙을 통찰하는 것도 부처님의 지혜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말을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의 지혜로 보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성립된 것이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것이 <示>의 단계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세상의 현상은 전부 緣起의 법칙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성문의 단계에 달하는 것이다.
<悟>로 연각으로
그러나 단지 눈을 연 것만으로, 배운 것만으로는 진짜 깨달음에 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배운 것을 몸소 체험해 보고서야 비로소 “그래, 맞아.”라고 진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開> <示>의 다음에 몸소 깨닫는 <悟>라고 하는 단계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이를테면 獨覺(緣覺·辟支佛)의 경지이다.
<入>으로 보살로
다음으로 부처님의 지혜는 “그래 맞아, 과연~” 이라고 하듯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가, 라고 깨달은 사람은 그 지혜를 성취하고 싶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
부처님은 그 성취의 길[道]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하는 길[道]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가르침을 듣거나, 깨닫거나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 있다.
사물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살아서 움직일 때에 비로소 발휘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고정되어 있다면 아무리 존귀한 깨달음이라고 하더라도 死物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부처님의 지혜는 본디부터 모든 인간을 구제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실행 속에서만 완성된다.
그곳에서 최후의 단계로서 <入>, 즉 실행의 道에 들어가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곧 보살의 단계이다.
우리들의 인간관계에 적용시켜 보면 처음에 상대의 이야기를 전부다 긍정하고 이해하는 입장에 서서 듣는 것[無我], 그것이 <開>의 단계이다. 그러면 상대는 자신의 불성을 열어준다. 그렇지만 머리로는 그것을 알면서도 잘 안 된다. 그래서 다음 단계인 <示>의 단계, 곧 이 세상은 인연의 소치로 전부 성립되어 있으니, 그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을 해 준다. 곧 인연과보이다.
자신이 뿌리지 않은 씨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그리고 다음으로는 그것을 상대가 깨닫게 하고 <悟>
드디어 불교의 꽃인 실천에 옮기게 유도한다... <入>
상대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상대의 입장이 되게 하는 것. 곧 팔정도와 육바라밀의 실천을 하도록... 한번 잘 생각해 볼 일입니다....()()() 聞思修 三慧...
이것을 알면 다음으로 석존이 말씀하신 <諸佛如來는 단 보살만을 교화하신다>고 하는 말의 진의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글쓴이: 智月 http://cafe.daum.net/yumhwasil/6mOV/58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http://blog.daum.net/mjpark39/164047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