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격은 상월원각대조사님
아들로 인해 맺어진 대조사님과의 인연 - 한웅학 / 전 종회의원
아들을 얻다 횡성에서 30여년 공직 생활을 하고 물러나 서울로 이사를 왔다. 이때 나의 나이 50이 다되었는데 슬하에는 딸만 4명을 두고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슬하에 아들을 두고 싶은 마음은 많았지만 이것이 생각처럼 되지를 않았다. 이 때문에 아들 하나를 두는 것이 당시 내게 있어서는 가장 큰 소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30여년전 우리나라 대부분이 부모는 후사를 잇기 위해 아들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남아선호사상이 매우 극성하던 시기였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알게 된 질부가 내게 와서 "구인사에 생불이 계시는데 삼촌이 가서 한번 여쭤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질부의 말은 내게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다. 불교 뿐만이 아니라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부처님께 빌어 자식을 얻는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호통을 쳐서 돌려보냈다. 하지만 소원이 간절하다 보니 질부와 아내의 간청에 못이기는 척 끌려서 구인사를 찾게 되었다. 이것이 1970년 음 4월 3일의 일이었다.
구인사를 방문하여 처음 조실에서 조사스님을 뵈니 첫인상이 용준용안으로 매우 범상해 보이지 않으셨다. 체구도 보통사람드롭다 크고 목소리도 상대를 압도하는 듯 하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 위엄과 자비로움을 함께 겸비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과연 활불조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사님을 뵙고 고개숙여 인사한 채 가만히 있으니 옆에서 삼배를 올리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까지 불교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절에서의 예절은 물론이고 큰스님게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씩 절한다는 것에 대해 께름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원래 그렇게 절을 하는 것이 법도인 모양이라는 생각으로 조산님께 삼배를 올렸다.
그러자 조사님께서 "무슨 소원이 있소."라고 물으셨다. 이에 나는 '제가 아들이 없습니다."아들을 두어 후사를 잇는 것이 소원인데 아들을 둘 수 있을까요."라고 말씀드렸다. 조사님께서는 나의 말을 들으시자마자 바로 "둘은 둘 수 있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조사님의 말씀에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근거로 나의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시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게 조사님을 친견하고 물러나와 3일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바로 아내에게 태기가 있어 10달 후 그렇게도 바라고 바라던 아들을 순산했다. 나는 너무도 기뻐서 조사님에게 달려가 아들을 낳았다고 보고를 드렸고 조사님은 그 아들에게 구름운(雲) 용용(龍) 운룡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리고 대조사님께서 71년 봄에 서울에 오셨는데 제가 모시게 되었다. 숙소를 저의 처가집으로 정하고 그곳에서 주무시게 되었는데 그때 처음 저의 아들을 보시게 되었다. 아들을 보신 큰스님께서는 덥석 안아주시며 "내가 네 삼신할미다"라고 말씀하시는 자애로움을 보여주셨다. 나는 참으로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을 점지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를 보며 나는 큰스님께서 주신 이 아들은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그런데 대조사님께서 아들 둘을 둘 수 있다고 하셨는데 나는 아들 하나를 얻은 뒤에 단산을 하였다. 그리고 보면 나는 대조사님의 명을 어긴셈이 되는 것이지만 늦으막하게 얻은 아들로 인해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 같았다.
이렇게 대조사님과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나는 열심히 기도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조사님을 뵈면 언제나 나를 한선생이라 부르며 세속의 일을 물어보시기도 하셨다. 나뿐 만이 아니라 누구와 만나서도상대를 낮추어 보지 않으시고 겸손함으로 맞아주시니 신도로서는 몸둘바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대조사님께서 말슴하신 것 가운데 하나 기억나는 것은 지금의 설법보전 자리에 그 당시에는 낙엽송이 심어져있어 낙엽송 공원이라고 부르던 곳에서 들은 것인데 "여러분이 지금은 사찰에 와서 소원을 성취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관세음보살을 부를 것이다.
그러나 관세음보살 부르는 것이 어려우면 관세음보살이라 하지 않고 달리 불러도 상관없다. 관세음보살대신 짚신짝 짚신짝...이렇게 해도 마음만 다해서 부르면 되는 것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마음공부를 할 때 여러분의 소원은 이루어지고 도도 이루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조사님은 항상 생활복으로 한복 회색바지와 흰 저고리, 회색 조끼를 입고 계셨으며, 제자들을 가르치시는데 그 가르침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으셨다. 또하나 생각나는 것은 당시 내가 정감록에 조금 관심이 있었는데 조사님께서 이를 어떻게 아셨는지 매우 의미있는 말씀을 해 주셨다.
"구인사가 있는 이 지역이 소백이고, 지명이 백자리이다. 정감록에 인종구어양백(人種求於兩白)이라 하였는데 이에 입각한다면 여기가 10승지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느냐."하는 것이었다. 이 말씀을 통해 내가 구인사와 인연어야 할 근본을 말슴하시는 듯 하였다. 또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대조사님 진영에 대한 기억이다. 당시 우리 집안에서 사진관을 하였는데 조사님이 서울에 오셨을 때 싫으시다는 것을 억지로 권하여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이 사진은 대조사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오늘날 말사에서 봉안하고 있는 진영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대조사님 진영을 볼 때마다 나는 대조사님에 대한 새로운 감회를 느끼곤 한다.
열반을 예견하신 조사님 조사님의 가피를 입은 이후 나는 열성적으로 기도를 드리며 종단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71년에는 부산의 이춘상씨와 대구의 장익홍씨, 그리고 서울은 내가 대표격으로 전국의 행사에 참여하였다. 이즈음 조사님과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세상돌아가는 물정을 묻고 답하며 세세한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조사님은 열반을 이미 예견하시고 될수록 많은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셨던 듯하였다.
조사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열심히 구인사에 오라. 앞으로 나를 많이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당시 우리는 이 말을 전혀 알아 듣지 못했다. 열반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나는 석달후에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자 아난은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를 알지 못했다.
후에 아난은 그 당시 부처님의 말을 듣고 열반하시고자 하심인지를 묻지 못한 것에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도 똑같은 마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대조사님은 정말 내생을 확실히 아는 깨달으신 부처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조사님의 이러한 모습은 회갑 잔치때도 비치셨다. 당시 총무원장이셨던 대산 스님이 회갑잔치 여흥시간에 나를 불러 사회를 보도록 하셨다. 이 자리에서 조사님은 정말 흔쾌한 모습으로 즐거워하시고 호탕하게 웃으시며 신도들을 기쁘게 해주셨다.
그런 가운데도 간간이 상념에 잠기시며 어두운 얼굴을 보이셨는데 나는 왜 그런지를 몰랐다. 나중에야 이것이 제자들과 헤어짐을 안타까워 하심이었고, 이 땅에 오셨다가 떠나는 것에 대해 만감이 서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사님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면서도 그 내면을 살피지 못한 것에 대해 나는 죄스럼움을 느꼈다.
서울지부의 창립 서울지부는 처음에 나의 처가집에서 시작되었다. 조사님이 다녀가신 후 처음으로 신도회가 결성되어 법회를 보아오다 장소가 협소하여 이전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답십리에 있는 상가 2층에 마련한 법당이었다. 이곳에서의 첫 법회에는 대조사님을 비롯하여 박형철 참의원장이 참석해 축사를 하시고, 홍창섭 강원지사, 전형산 경찰국장 등 많은 내빈들이 참석하였다.
당시는 조사님도 승용차가 없어씨 때문에 서울에 오시면 많이 불편하셨는데 이를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다. 평소 서울에 오셨을 때도 서울역 부근의 산해 여관에 자주 머무시곤 하였는데 그 불편함을 내비치지 않으셨다. 서울역 부근의 산해여관은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불편함 때문에 한번은 조사님이 서울에 오셨을 때 택시를 대절하여 구인사까지 모셨던 적도 있었다. 이렇게 서울지부 활동에 여념이 없을 때 한번은 조사님께서 갑자기 부르셨다. 이때는 돌아가시기 얼마저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를 불러 "고등학교 인가를 내려고 하는데 한번 알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횡성에서 공직생활을 하고 있을 때 갑천농고 인가를 한번 내준적이 있었는데 조사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시고 내게 인가에 대해 물으신 것이다.
나는 "우선 기성회를 조직하고 도와 접촉하여 허락을 받은 후 문교부 교육국에 문의하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조사님께서 "학교 이사는 대학을 안나오면 못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냐."고 물으시기에 "대학을 안나와도 덕망을 갖추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이 일로 인해 대조사님께서 술과 망고, 그리고 금일봉을 내려주셨는데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그때 대조사님께서 내려주신 금일봉은 차마 쓰지 못하고 정말 오랬동안 고이고이 간직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후에 대조사님께서 열반에 드셨을 때 나는 손수 집에서 만장을 하나 써서 보냄으로써 대조사님에 대한 은혜를 조금이나마 표현하고자 하였고, 매년 돌아오는 추도재에서는 한동안 추도사를 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후 서울지부는 신촌의 용궁사를 매입하고 이전하면서 분리되어 지금의 성룡사와 삼룡사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나는 집이 삼룡사에 인접해 있어 지금까지 삼룡사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얼마전까지 종단의 종회의원으로 종단의 발전에 일조를 해왔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몸이 전같지 않지반 지금도 매일 한시간 씩 기도하는 것을 생활의 신조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하루 한시간 기도를 못하면 다음날 더 많은 시간을 정진하고 있으니 매년 365시간은 정진하고 있는 셈이다.
생활의 지표 상월원각 대조사님을 만난 후 나의 삶은 완저히 바뀌었다. 불교가 무어서인지도 몰랐던 내게 수행의 공덕을 말씀해 주시고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인생인지를 가르쳐 주신 은혜는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다.
지금도 조사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의 현묘한 덕을 탐구하고 있으며, 그 공덕으로 현상이 덧없는 생멸법임을 깨달았고, 이 생멸법이 멸해야 참된 즐거움이 온다는 것을 어느정도 짐작하게 되었다. 인생의 무상함과 공허함을 깊이 사무쳐 알 게 되었고, 남은 한평생을 부처님의 법을 따라 행함으로써 대조사님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다짐하고 있다.
대조사님은 참으로 큰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이셨다. 지금도 애송하고 있지만 대조사님의 열반송은 역사에 명멸했던 어떤 조사님의 열반송 보다도 그 깨달음이 높고 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제불이 불출세(諸佛不出世)하니, 역무유 열반(亦無有涅槃)이라. 사생이 본공적(死生本空寂)하니, 영허 일월륜(盈虛一月輪)이라.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지 않았고, 또한 열반에 든 것도 없다. 나고 죽음이 본디 텅 비었으니, 찾다가 비우는 것이 한달 바퀴로다. 그 뜻은 불생불멸하는 법신의 진리를 깨닫고 보면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였다는 것은 그 화신의 거짓 모습이고 참된 법신은 아니다. 그러므로 법신의 진리에서 보면 부처님이 세상에 나온 것도 없고 또 열반에 드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고 죽음이 공적한 것이니 세상에 나고 죽음을 보이는 것은 마치 저 하늘의 달이 보름에는 둥글 게 찼다가 그믐에 기울어서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달의 본 바탕은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고 죽음이 없고 가고 오는 것이 없는 법신 열반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이 진리를 체득하면 곧 생사의 열반이 둘이 아닌 대자유 대자재의 도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또 이게는 생사일여, 불생불멸의 진리체득을 표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대조사님의 열반게를 통해 보면 대조사님께서는 비록 허망한 육신은 인연따라 멸할지라도 대조사님의 법신의 진리는 상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대조사님의 열반게를 염소하면서 가는 곳 마다 이러한 게송들을 찾아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도인들이 자신들이 깨달은 경지를 그대로 보여줄 수 밖에 없는 압축된 게송속에서 그 법을 헤아려 보는 재미에 빠져들기도 한다.
중국에 가서는 소강절의 게송을 살펴본 적이 있고, 동해에 갔을 때는 일부러 상원사에 들러 방한암스님의 오도송을 찾아보기도 했다. 탄허스님의 글이나 건봉사 설산선사의 게송에서도 이러한 삶의 본질을 찾아보기도 하였다. 지금도 기억되는 것은 탄허 스님의 글 가운데 삼라만상은 자신이 어떻게 쓰일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향은 자신의 몸에 사향이 많아졌을 때 그 사향이 인간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스스로 명을 다하게 된다. 이것은 누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누에가 명주실을 만드는데 명주실을 너무 많이 자아내게 되면 스스로 그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이것도 명주실이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그 명도 달라진다는 것이며, 그 공덕은 매우 크다고 하였다. 참으로 의미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오늘의 자기 모습을 보면 전생을 알고, 지금 냉정히 자신을 되돌아보고 평가해 보면 앞으로 어떻게 태어날 지를 스스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대조사님을 만나 수없이 많은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 보다는 이미지로 형상화 되어 항상 마음에 그려진다. 자비로운 관세음보살님과 같이 온화하면서도 한번 소리를 지르면 구인사 골짜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엄함을 겸하고 계셨다. 그리고 목소리는 우아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으니 남자의 테너와 여자의 소프라노를 합쳐놓은 중간음 정도의 소리를 가지고 계셨는데 보통사람은 그런 소리를 내지 못한다. 이러한 조사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죽는 그날까지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몸이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으니 예전처럼 구인사를 가지 못하고 구인사 대조사님께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 죄스러울 뿐이다.
글쓴이: <marquee>호랑이발바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