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육 바라밀 설명

白道 박만주 2020. 5. 19. 08:43

 

 

 

 

 

                                                   

             

 

      

 육 바라밀 설명        
 
 삼보정사 관리자 
 


여섯 가지 보살의 길 - 육바라밀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부처님과 같은 청정본연의 마음을 회복하여 성불의 길을 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여섯가지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바로 여섯 바라밀다 즉 육바라밀입니다.


육바라밀은 번뇌 망상의 늪을 헤치고 탐진치 삼독의 바다를 무사히 건너 마침내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는 뗏목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피안으로 가는 그 첫번째 방법은 보시바라밀(dàna-pàramità)입니다.바라밀은 범어 파라미타(pàramità)를 음역한 것으로 바라밀다라고도 하고 한문으로는 도피안(到彼岸) 도무극(到無極) 도(道)라고도 번역합니다. 괴로운 이 언덕, 이 세상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저 언덕에 이른다"고 하는 뜻입니다.


보시(布施)는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 바라밀은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이므로 <보시를 함으로써 우리의 목적인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는 바로 우리의 이상향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과 똑 같은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 마음이 탐진치 세 가지의 독한 마음으로 뒤덮여 있어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원인인 탐심을 걷어내지 않고는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남에게 베풀어주는 행위는 단지 남을 돕는다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깨끗한 청정심을 되찾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밥을 빌어서 생활하신 까닭은 중생들로 하여금 복을 짓도록 함으로써 선한 공덕을 짓게 할 뿐 아니라 중생들의 탐심을 걷어 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불보살의 대자대비를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데 불보살은 중생과 자신을 동일체라고 관찰하므로 대자비심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보시를 할 때는 이와 같은 동체대비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 몸 같이, 내 친자식처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사회의 그늘지고 구석진 곳의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행동이 진정한 보시바라밀입니다.


물질만이 보시는 아닙니다. 바른 삶의 길로 인도하는 것도 보시요, 두려움에 떠는 사람에게 그 공포로부터 헤어나게 하는 것도 보시바라밀 입니다. 

 

다음은 '지계바라밀'입니다.
지계란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는,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육조 혜능대사는 심지무비자성계(心知無非自性戒)라 하셨습니다.


마음에 본래 그릇된 생각이 없는 줄 알면 그것이 자기 성품 가운데의 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품은 본래는 아무런 그릇됨이 없는 청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근본마음으로 돌아가 오직 깨끗한 마음만을 낸다면 바로 이것이 진정한 지계바라밀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단지 자기 자신의 청정함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다른 이의 파계도 적극적으로 방지하겠다는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음은 인욕바라밀(ksànti-pàramità)입니다.


인욕이란 참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참고 노력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욕바라밀은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는 수행입니다. 남에게 분한 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참고 견디고 상대를 용서해주는 마음입니다. 인욕은 성내는 마음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독이 되는 진심을 억누르는 것이 인욕바라밀입니다.


인욕바라밀은 「나」라는 것에 집착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눈으로 보면 '나'라는 것은 일시적인 인연소산일 뿐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나'를 집착해서 자존심을 내세우고 남이 나를 무시한다거나 알아주지 않을 때 성을 내게 되는데, 성을 내는 것은 아상(我相)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래는 나라는 것도, 나의 것이라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가리왕이 내 몸을 마디 마디 잘랐을 때에, 내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더라면 응당 분한 마음이 일어났으리라. 그러나 내게 그런 마음이 없었느니라." 

 

다음은「정진바라밀」입니다.  

정진이란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자신을 갖고 게으름 없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정진바라밀입니다. 


옛말에 '성심소도(誠心所到)에 금석가투(金石可透)'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지극한 마음으로 하는 일은 쇠나 돌도 뚫어 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보시나 지계나 인욕도 정진이 뒤따르지 않고 한 두 번으로 그친다면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데도 매사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또한 정진바라밀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게으른 사람을 교화하여 정진하도록 하는 마음도 가져야 합니다. 

 

다음, 다섯째는 '선정바라밀(dhyàna-pàramità)'입니다.  

선정은 마음이 안정되어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도 부처와 똑 같은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에 있어서는 부처님과 중생의 차별이 없습니다. 단지 번뇌 망상으로 자신에게 내재된 불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온갖 경계에 끄달려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선정바라밀은 이처럼 주변경계에 미혹되는 마음을 근본으로 되돌리는 수행입니다. 선정바라밀은 앞서 보시·지계·인욕·정진의 수행으로 마음의 때를 씻어내고 깨끗해진 마음을 잔잔한 호수처럼 안정되게 유지하는 수행입니다. 

 

끝으로 '지혜바라밀'입니다. 범어로는 '반야바라밀(음역)'입니다.  

반야바라밀은 지혜로운 삶, 해탈의 삶, 곧 성불을 뜻합니다.


반야는 부처님과 똑같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지혜로, 부처님은 이 지혜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셨고 중생들은 이 반야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뒤바뀐 생각으로 세상을 보고, 생사윤회를 하게되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반야바라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른 바 전도망상입니다. 그러나 지혜로 보면 일체 법은 모두가 실체가 없이 공한 것이므로 그 무엇에도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이와같은 제법공상(諸法空相)을 깨달아 집착을 여의면 모든 근심걱정으로부터 해탈하여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피안에 이른다."한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
육바라밀은 나만의 성불이 아닌 모두가 어울려 살아가는 너와 나의 세계, 우리의 세계 속에서 청정본연의 자성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밝힌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이 육바라밀은 자리이타를 실천하는 보살이 닦아야 하는 수행덕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은 우리 불자들이 실천을 통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염원을 달성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이는 자리와 이타를 겸한 수행이며 관념적인 이론이 아닌 행동철학입니다. 

다같이 육바라밀을 실천하여 바라밀다를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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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밀은 범어 파라미타의 음사로 최고의 경지 즉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대승불교 보살 수행의 실천적 원리로서 우리는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바라밀다 등 ‘육바라다’를 들 수 있다.  

  

또한 보살이 육바라밀다의 행(行)을 성취키 위해 수행하는 6가지 방법으로서 우리는 6사성취(六事成就)라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보시에 대한 공양(供養)’을, ‘지계에 대한 계율의 배움[戒]’을, ‘인욕에 대한 자비의 닦음[修悲]’을, ‘정진에 대한 선(善)에 힘씀[善]’을, ‘선정에 대한 번거로움을 멀리함[離瑄)’을, ‘지혜에 대한 법의 즐김[樂法]’을 이야기하고 있어, 이 각각에 대한 실천을 통해 우리는 육바라밀다 수행에 그 깊이를 더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우리는 이렇듯 6가지 바라밀다의 덕목에 대한 완성을 통하여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성취할 수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보시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나뉘어 갖는 것을 의미한다. 


보시바라밀은 아함의 교설에서도 일찍이 '차제설법(次弟說法)'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시론(施論)으로써 언급되고 있다. 보시는 크게 '재물의 시여'(財施)와 '진리의 시여'(法施) 그리고 '평안의 시여'(無畏施)의 세가지로 나뉜다.


보시는 공덕이 크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보시는 적어도 보시바라밀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결과를 바라보고 행하는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금강경'에서도 "보살은 마땅히 법에 주(住)함이 없이 보시할지니, 소위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주저함 없이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처럼 아무런 곳-보시를 행하는 자, 받는 자, 보시되는 물건-에도 집착하지 않는 보시가 진정 보시바라밀인 것이다.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잘 지켜서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이미, 오계, 팔관재계에 대해서도 언급했지만 대승의 계율은 자리적(自利的) 지계가 아니라 이타적(利他的) 지계인 점에 특성이 있다. 또한 계율에 대한 심리적인 해석도 내려지고 있는데, 예컨데 육조 혜능스님은 "마음에 스스로 허물이 없으면 이를 계라고 한다."고 하여 계율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따라서 억지로 지키는 계율이 아니라 스스로 자율(自律)하는 것이 참된 지계바라밀인 것이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괴로움과 뜻에 거슬림을 참는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나의 마음이 외부의 객관적인 경계(境界)를 만났을 때 움직이지 아니하고 무심(無心)하는 것이다. 이를 인욕바라밀이라고 한다. 금강경에서 과거에 부처님이 인욕바라밀을 닦고 있었던 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가리(歌利)왕이라고 하는 왕이 인욕의 정도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부처님의 팔을 잘라버린다. 그러나 보살은 전연 분노하지 않는다. 곧이어서 하늘의 신(天神)이 보살의 잘려진 팔이 붙도록 해준다. "그러나 이번에도 보살은 전연 마음의 동요가 없다. 역경과 순경을 당하여 모두 부동(不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기신론'에서는 인욕을 안인(安忍)이라고 하였다.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부지런히 노력하여 게으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선법(善法)을 증장(增長)시키는 데에 있어서도 정진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인데, 아함의 교설에 있어서도 정진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五根과 工力에 모두 정진이 들어 있음)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직전의 마지막 부촉(付囑)도 실은 이 정진바라밀에 대한 것이다. 

 

있게 되어, "대품반야경"에 의하면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보살의 어머니이니 능히 모든 법을 생겨나게 하는 것”으로, “세존 즉 반야바라밀다요 반야바라밀다 즉 세존이다”라는 표현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http://blog.daum.net/mjpark39/16404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