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묘유(眞空妙有)와 성성적적(惺惺寂寂)
진공묘유(眞空妙有)란?
진실로 비어있다(眞空)는 것은,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妙有)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空은 우리들의 눈으로 볼 수 없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
니다.
따라서 진공묘유는 있음(有)에서 없음(無)을 보고, 없음(無)에서 있음(有)을 보는 것이며,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입니다.
진공묘유란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리가 바로 불성(佛性)자리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자성(自性)입니다.
성성적적(惺惺寂寂)이란?
망심(妄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선(禪)입니다. 그 자리에서 본성을 보는 것이 정(定)입니다. 이것이 선정(禪定)입니다. 돈오(頓悟)는 단박에 깨치는 것입니
다. 찰나에 무명을 다 끊어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돈오는 무념을 종(宗)으로, 청정을 체(體)로, 지혜를 용(用) 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무념, 무심은 어떤 때, 어떤 장소에서도 일체 동요하지 않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것을 무념, 무심, 보리, 열반, 해탈, 견성, 돈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사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중도, 돈오라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
시색(空卽是色) 또한 중도를 일컫습니다.
특히 선가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합니다. 일체 것을 다 부정합니다.
텅 비어 비어있다는 그 자체마저 없습니다. 그래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그래서 〈열반경〉 ‘금강신품’에 ‘이 마음자리는 밝고 밝아서 아는 것도 없고 알지 못할 것도 없다’고 합니다.
참선수행을 할때, 고요하고 고요한 가운데(寂寂)에서 멍함(昏沈.혼침)에 빠지지 말고(편안함에 머무르지 않음), 항상 또렷하게 깨어 있어 산란함
(掉擧;도거)에도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지(止;定,사마타수행)와 관(觀;慧,위빠사나수행)을 함께 닦으라는 것이므로, 惺惺은 慧(觀照;관조;사방으로 비추어 보는 것)에 해당되며, 寂寂은 止(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함)에 해당 됩니다.
진공은 적적이며, 묘유는 성성입니다.
진공은 묘하게 존재하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이듯이, 성성적적한 마음이란? 마음이 일어 나지 않은 마음이 아니라, 번뇌, 망상(妄念:
無明)이 일어나지 않음이 적적이고, 적적한 상태에서 청정(淸淨)한 마음이 일어남을 말하므로, 아무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적적하게 만드는 것도 우리의 의식의 작용이며, 성성하게 하는 것도 의식이 하는 것입니다.
다만 청정심(本性;본래의 마음)도 일어난 마음 이기는 하나 어디에도 물들지 않으며, 걸림이 없으므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은 `부처는 중생과 똑같이 행하여도 행함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삼매(三昧;禪定) 속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성성적적한 삼매의 마음이 생활화 되어 끊어지지 않은 상태(삼매관성)
인,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因)에서 어떠한 바깥 경계(대상;緣)에 부딪힐때에 문득 깨치게 됩니다(果). 그래서 돈오(頓悟)라 합니다.
번뇌, 망상의 중생심이나, 청정한 불심(佛心)이나 모두가 한마음(一心) 입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중생심인 심생멸문(心
生滅門;不覺)과 불심인 심진여문(心眞如門;覺)은 각기 다른 마음이 아니라 한마음 이라는 것입니다.
성성적적한 마음은 의식(제6식), 자아의식(제7말나식)인 망념(무명)에 가리워져 작용되지 못하고 있는 아뢰야식(제8식)에 있는 불성의 씨앗
(여래장.如來藏)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우리의 모든 것을 저장(감추고 있는) 하고 있는 제8식(識;마음)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우주의 모든 역
사를 다 갖추고 있기에 우리의 몸을 소우주 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