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이란?
반야심경이 설해진 장소는 마가다국 왕사성 영축산이다. 법문 들은 사람들은 대비구인 큰 스님들과 보살들이었다. 소승에서 또는 성문 연각 중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지혜 제일 사리푸트라 존자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어 대승의 관세음보살에게 대승사상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관자재보살이 대승의 공사상에 대해 설했다. 소승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내용인가 하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이 경의 주인공은 관자재보살이다.
觀自在菩薩 行心般若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님께서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실 때 오온이 본래 실체가 없음을 여실이 깨닫고 모든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났느니라.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 첫 문장에 나와 있다. 관자재보살이 주인공이다. 무엇을 했나? 반야바라밀다를 행했다. 주인공인 대승보살이 어떤 수행법을 닦았나? 바라밀 수행법을 닦았다. 바라밀 수행법 중에서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했다.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해서 어떻게 됐나?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달았다. 이 것이 조견오온개공이다. 오온이 모두 공 하다는 것을 비춰 보았다. 오온이 모두 공 함을 깨달으니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모든 번뇌 속박이 끊어져 버렸다. 이를 불교용어로 열반 또는 해탈이라 한다.
누가 수행했나? 대승보살 그 중에도 관자재보살이 바라밀 수행법을 닦았다. 바라밀 수행법이 몇 가지가 있나? 10바라밀 6바라밀 그 가운데 반야바라밀 수행법을 닦았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어떤 깨달음을 얻었나? 제법이 공한 이치를 깨달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일체 번뇌가 끊어졌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열반을 얻고 완전한 행복과 자유를 얻었다. 마침내 붓다의 경지에 들어섰다. 이 한 문장 가지고 몇 번 강의를 해야 한다.
보살이 뭐냐? 보살의 원어는 Bodhi Sattva이다. 보리살타의 줄임말. 상구보리 하화중생 실천적 수행자. 진흙 속의 연꽃. 한 송이 연꽃을 피우는 진흙.
보리살타=보디<깨달음 부처>+사트바<무명 중생>
정반대의 단어가 합친 것이다. 하나는 밝음을 상징하고 하나는 깜깜한 어둠을 상징하는 말이다. 부처와 중생은 별개로 생각했는데 부처와 중생이 알고 보니 둘이 아니고 하나다. 중생은 중생인데 보통 중생이 아니고 깨달은 중생이다. 그러니 중생이 깨달으면 부처다. 이렇게 말하면 보살은 부처다. 중생으로부터 부처까지 동안에 있는 사람을 보살이라 할 수 있다. 중생으로부터 깨달음의 길에 처음 발을 내디딘 사람을 초발심 보살이라 한다. 정진을 해서 거의 부처의 경지까지 왔다. 그래도 아직 보살이다. 말은 보살이지만 거의 부처와 다름이 없다.
화엄경은 중간 단계인 보살을 52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중생이 부처로 나가는 첫 번째 단계는 나도 부처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지금 비록 괴롭게 살고 있지만 어리석음을 깨뜨리면 나도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고 자유로운 부처님 같은 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중도에 자꾸 포기하게 된다. 비록 가정의 불화로 헤어지고 사업이 망하고 온갖 고통에 빠져있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 수행 정진하면 자유롭고 행복한 부처님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열반과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이런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나요? 이런 믿음이 있어야 보살의 수행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도 깨달음을 얻겠다. 어떤 마음을 내나? 깨닫겠다는 마음을 내야 한다. 발보리심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최상의 깨달음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는 자를 보살이라 한다. 금강경은 선남자 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하면 보살이라 한다 말한다. 발심한 자 즉 보살이다. 나도 부처 될 수 있다 하는 믿음 그래서 나도 깨달음을 얻겠다 하고 마음을 확 내는 사람이 보살이다. 반면 늘 자기 신세를 한탄하면 영원히 고통 속에 육도를 윤회할 뿐이다.
비록 내가 지금 이 고통에 빠져있지만 벗어나겠다 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온갖 속박 받고 고통에 빠져있는 어리석은 중생이 있다. 중생의 특징은 어리석음이다. 무지로 인해 나타난 결과는 고통이다. 그 반대 편에 아주 밝고 자유롭고 행복한 세계가 있다. 이 것이 바로 부처의 길이다. 부처의 특징은 밝음이다. 깨달음 그로 인해 나타난 결과는 괴로움이 없는 행복 속박이 없는 자유다. 바로 이 중생이 부처의 길로 나간다. 이렇게 나가는 길에 있는 자를 보살이라 한다. 출발점에서 종착점에 이르는 이 과정에 있는 사람을 화엄경은 52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출발했지만 아직 갈 길이 머니 게으르면 안 된다. 보살이 어떻게 하면 부처 될 수 있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나요?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수행 정진을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나요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내 문제도 하나 제대로 해결 못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려 했는데 오히려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겠다는 마음을 내라니 죽겠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다. 돈이 없어 부처님께 하소연 했더니 부처님께서 다른 이 도와줘라 사랑하라 이해하라 일체 중생을 구제하라 하신다. 그러나 내 문제 외면하고 딴 문제를 말하신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 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번뇌를 항복 받을 수 있나요? 이렇게 물었더니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하신다. 그리고 일체 중생을 다 구제했다 해도 실은 한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다 말씀하셨다. 중생을 구제했다 하는 이 생각까지도 버리라는 것이다. 중생 구제를 마쳤다 해도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는 그 생각마저도 없어야 한다. 그러면 해탈할 수 있다. 이 것이 상구보리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하와중생 아래로는 중생을 구하라는 말이다. 위에 따로 아래 따로 뭐가 있다는 상하 좌우의 개념이 아니다.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 낼 때 곧 상구보리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지장보살은 중생구제가 본업인가 깨달음이 본업인가? 깨달음이다. 모든 보살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 본업이다.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나? 하니 이 세상에 괴로워하는 자가 한 명도 없을 때까지 다 구제한다. 구제 마치면 누가 깨달음을 얻나? 내가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이 세상 가운데 가장 열악한 곳에 있는 중생이 지옥에 있는 중생이다. 지옥에 있는 중생을 한 명도 남김 없이 다 구제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는다. 지옥에 한 명이라도 남으면 성불하지 않으리라 말한다. 성불하기 싫다는 말인가? 아니다. 보살의 본업은 성불인데 중생 구제의 원이 성불 앞에 가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말이다.
성불하겠다는 원은 포기하거나 바꿀 수 있는 원이 아니다. 수행자의 절대 절명의 원 앞에 있을 만큼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이 크다는 말이다. 중생을 구제해야만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그런 논리다. 지장보살은 중생구제 안 하고도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데 중생이 하도 불쌍해 중생구제 다 하고 불도를 이루겠다는 뜻이다. 한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 있다면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런 중생 외면하고는 부처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지장보살은 중생 위해 사나요 수행 위해 사나요? 수행 위해 산다. 이 말 들으면 약간 헷갈린다. 그러면 지장보살도 이기심 아닌가? 예. 이기심이라도 좋아요.
이기심이란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자기 이익을 구하는 것이다. 지장보살이 성불하겠다는 마음은 남을 해치는 것인가요 이익을 주는 것인가요? 이익을 주는 것이지요. 그러면 중생 위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말과 내 수행 위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말의 차이는 뭘까? 중생을 위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말이 더 고상하게 보이고 내 수행 위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말은 좀 이기심으로 보이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게 큰 잘못이다. 그런데 그 중생이 내 잘못으로 지옥에 떨어졌나요? 자기 잘못으로 떨어졌나요? 모두 자기 잘못 때문이지요.
각자 자기 잘못 자기 업보로 지옥에 떨어졌다. 그런데 하도 불쌍해 구해주면 정신 차리고 다시는 지옥에 안 가야 되는데 정신 못 차리고 또 지옥에 떨어진다. 3번이나 구해줬는데 또 떨어지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그냥 둬. 그렇게 되기 쉽다. 효과가 없으면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원망한다. 그러니 원이 중간에 멈추게 된다. 하지만 100번 구해줘도 100번 떨어져도 그 중생을 구해야 내가 성불할 수 있다면 내 일을 위한 것이다. 내 일이니 짜증난다 내 일을 방해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중생심이고 내 일이다 하는 마음 속에는 중생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
업을 짓고 지옥에 떨어진 것은 누구 일이고 그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누구 일인가? 바로 나의 일이다. 나는 다만 구제할 뿐이다. 어떤 바람을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보살의 원은 끝이 없다. 이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다시 이 단어를 가지고 설명해 보면 여기 깜깜한 중생이 하나 있고 이 쪽에 아주 밝은 부처가 있다. 그런데 이 중생과 부처 사이에 보살이 있어 한 쪽은 밝고 한 쪽은 어두운데 이 밝은 쪽은 빛의 광명에 비춰 밝은 것이고 중생의 어두움이 비춰 어두운 것이다. 그러면 이 중생이 부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점점 부처 쪽으로 가면 된다. 그러면 어둠은 점점 작아지고 밝음은 점점 커진다. 그러면 처음 출발 시 밝음 1% 어둠이 99% 라면 중간쯤 오면 50대 50 부처 가까이 가면 밝음이 99%가 된다. 조금 더 가까이 가면 99.99%가 된다. 그래도 아직 부처 안 됐다. 아무리 가도 100이 안 된다. 왜 안 될까? 중생의 어둠이 있는 한 100이 될 수 없다. 반대로 보디사트바가 아무리 중생 쪽으로 와도 부처의 광명이 있는 한 0은 될 수 없다. 그러니 부처가 있는 한 보살은 중생이 될 수 없고 중생이 있는 한 부처가 될 수 없다. 부처가 있는 한 여러분은 구제 못할 중생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의 씨앗이 있다 불성이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면 보디사트바가 어떻게 해야 부처 될 수 있나?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부처 쪽으로 갈 것이 아니라 중생 세계로 가서 중생의 도움을 하나도 없이 다 소멸해 버리면 보살은 부처가 된다. 이런 관점을 갖고 수행 정진하는 자를 일러 보디사트바라 한다. 대승보살은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구제를 해탈의 방편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수행처를 숲 속이나 깊은 산 속으로 정하지 않고 고통 받는 중생이 있는 곳을 수행처로 삼는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지옥을 수행도량으로 관세음보살은 사바세계를 수행도량으로 삼는다.
무량수경에 보면 법장 비구라는 한 수행자가 그 당시 부처님에게 중생들이 너무 고통스럽게 사는 것이 가슴이 아파 중생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달라 간청했다. 그러자 그런 세계는 네가 만들어 보라 하셨다. 아이쿠 제가 어떻게 그 걸 하겠습니까? 하지만 신심이 있는 자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질문한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방법을 물어야 한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십만 억 세계를 보여주셨다. 그 세계를 보니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이 사는 세계도 있고 아주 행복하고 자유롭게 사는 세계도 있었다. 그 걸 다 보고 부처님 됐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한 48가지 원을 세운다.
이러 이러한 고통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 이러 이러한 것은 있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 그래서 여성이라 차별이 없고 전쟁이 없는 세상 이렇게 온갖 조건을 만든다. 그 것이 48서원이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 없는 수행 정진을 한다. 그래서 마침내 그 세계를 이룬다. 그런데 그 세계를 이루자 곧 부처가 됐다. 보살의 원리와 똑 같다. 중생을 구제해야 성불할 수 있다 했다. 그런 정토세계를 이루니 부처가 됐다. 수 많은 정토 중에도 극락정토를 이루니 부처가 됐다. 그래서 극락세계 아미타불을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 곳에 날 수 있나요?
가는 방식이 좀 쉬워야 한다. 너무 어려우면 못 간다.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10번 만이라도 그 곳에 나겠다는 마음을 내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그러면 그 곳에 갈 수 있다. 그 것 참 쉽네요? 그러나 결코 쉽지 않다. 평생을 지극 정성으로 아미타불을 불러도 돌부리 채여 넘어지면 아이구 엄마야 가 먼저 나온다. 돌부리에 넘어질 때가 급해요 숨 넘어갈 때가 급해요? 숨 넘어갈 때가 더 급한데 아미타불이 나오나요? 안 나와요. 그 10번을 부르는 일은 정말로 간절해야 한다. 넘어지거나 재산이 다 날라가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입에서 나무아미타불이 나와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야 좋다 하지 않고 아미타불이 나와야 한다. 암이라고 판명이 나도 아미타불이 나와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도 숨 넘어갈 때 아미타불이 안 나올 수 있어요.
우리 하는 염불 그 게 염불이요? 노래지. 기분 좋으면 부르고 답답하면 좀 부르고 그 건 수행이 아니죠. 여가 생활이지. 이런 법장 비구의 48대원 극락세계 아미타불에도 대승 수행의 원리에 의해서 전해진다. 금강경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의 원리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을 항복 받을 수 있나요?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내라 했지요. 일체 중생 구제를 다 마쳤다 해도 한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다는 마음을 내라. 나 목욕했는데 뭐 줄래 그러나요? 안 하지요. 가끔 어린이는 엄마에게 그렇게 해요. 어리기 때문이죠. 어리다는 어리석다는 뜻이죠. 여긴 그런 사람 없지요. 왜? 그 건 내 일이니까. 남의 일이면 대가를 바라지요. 내 일은 대가가 없어요.
보살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구제가 자기 일이기 때문에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매일 매일 세수하고 숨 쉬지만 나 오늘 뭐 했다 그런 얘기 안 하듯 보살은 일체 중생을 구제해도 구제했다는 생각 조차도 안 한다. 이렇게 정진을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보살이라는 수행법이 바로 이런 수행법이다. 이런 관점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대승보살의 바라밀 수행법이다.
이상 법륜스님의 보살이란3 강론 중에서
낙서장 2008/04/14 19:29
http://blog.naver.com/spidchoi/130030328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