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해설
법화경 은
법화경 핵심
신앙인 본연의 자세
여래의 사도
1. 법화경은 현재 한국불교 근본경전의 하나로서 원래의 이름이 묘법연화경이며, 그 뜻은 "진흙에 물들지 않는 하얀 연꽃과 같은 가르침"이다.
화엄경과 함께 한국불교사상의 확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이 경은 예로부터 모든 경전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초기 대승경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경이다.
2. 법화경은 전체가 7권 28품으로 이루어 져 있으며 그 구성을 보면 1품부터 14품 까지를 적문(迹門), 그 이하를 본문으로 나눌 수 있다.
적문이란 현세의 모습을 나타낸 부처님(석가모니불)은 그 근원불(법신 비로자나불)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본지(本地)로 부터 흔적을 드리운다는 뜻이다.
본문은 진실한 부처님은 옜날에 이미 성불하였으며, 이 부처님의 본지와 근원과 본체를 밝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우주의 진리자체인 법신불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응신불인 석가모니불이 되어 이 세상에 출현하여 법을 설한 것을 구별하는 것으로 이는 석가모니불이 구원의 부처임을 나타낸 것이다.
3. 이 법화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은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이다. 삼승(三乘)이 결국은 일승(一乘) 으로 귀일한다는 이 사상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여 성문과 연각과 보살의 무리들에게 맞게끔 가지가지의 법을 설 했지만, 그것이 모두 부처의 지견을 열어보이고 깨달음으로 들어오게 하기위한 방편이었을 뿐, 시방불토에는 오직 일불승의 법만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이 회삼귀일사상은 화엄경의 원융무애(圓融無碍)사상 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꽃을 피워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통적귀일불교로 이끌었고, 한민족의 화(和)사상 에도 큰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일부 학자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 회삼귀일사상은 제2품 방편품, 제3품 비유품, 제4품 신해품, 제5품 약초유품, 제7품 화성유품 등에서 높은 문학성을 지닌 불타는 집의 비유, 방탕한 자식의 비유, 주정뱅이의 비유 등을 통하여 그러한 입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4.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종류의 한역본중 구마라즙스님이 번역한 묘법연화경 8권이 가장 널리 보급 유통되었다. 28품으로 된 이 경은 그 전체가 귀중한 교훈으로 되어 있어서 어느 한 품만을 특별히 다룰만큼 우열을 논하기 어렵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제 25품 관세음보살 보문품이 관음신앙의 근거가 되어 특별히 존숭을 받아 왔고, 따로 "관음경"으로 편찬되어 많이 독송되어 왔다.
또한, 제11품 견보탑품은 보살집단의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불탑(佛塔)숭배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다보탑과 석가탑의 조성에 모체가 되기도 하였다.
제15품 종지용출품에서는 대지하(大地下)의 허공속에 살고 있던 보살이 대지의 틈바구니로부터 솟아오르듯이 나타나 허공에 서는 장면들을 그리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 광경을 오랫동안 표면에 나타나지 못했던 보살집단이 강력한 세력으로 출현하게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허공에 선다는 표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입장에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전통적 교단에서 오직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불만을 숭배하는 피상적견해를 탈피하여, 무량한 생명의 상징인 부처를 보려는 보살들의 깊은 성찰의 결과를 선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제16품 여래수량품은 영원한 생명, 근원적인 생명으로서의 부처를 체증(體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보살들의 새롭고 깊은 불타관(佛陀觀)이 반영되어 있다. 부처는 언제나 이 사바세계에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성불하게 한다는 지극한 이상이 담겨져 있고, 이것이 우리나라 법화신앙의 근거로서 크게 작용하였다.
법화경의 핵심
1.법화경과 부처님
법화경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경일까? 이런 의문을 가질 때가 자주 있을 것이라 생 각된다. 경전을 읽어 보면 별로 어려운 교리도 아니다. 그렇지만 학자들이 설명하는 것이 여 러 가지 있어 그 해설을 읽고 있으면 어떤 것이 바른 것인가 헤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원래 보석상자에는 그 안에 훌륭한 것이 들어 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여의주 같은 훌륭 한 가르침이 들어 있어 열어 보면 그 고마움을 알게 된다. 그런데 법화경이라는 보석상자는 뚜껑을 열어 보아도 중심이 되는 명확한 말씀이 발견되지 않는데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 게 되는 것이다.
법화경은 부처님의 생애에 대하여 말씀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아무래도 부처님의 전기를 머리에 두고 읽어 가지 아니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 하신 것이 30세(35세 설도 있다), 그후 약50년간 교화하시고 80세에 열반에 드셨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대하여 그들의 능력에 알맞는 법을 설하셨다.
제자들은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고 실천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제자들이 암기 하고 있던 가르침을 경전 또는 계율이라는 형식으로 묶어 그것을 의지처로 하였다. 뒷날 그 것을 문자로 적어서 경전으로 성립됐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경전 첫머리에는 반드시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말을 두게 되었다.
2.법화경의 구성
법화경을 읽으신 분은 다 아시는 것처럼 전체의 구성에는 두 요점이 있다. 서품(序品)에서 시작하여 제14분인 안락행퓸(安樂行品)까지가 그 하나이고, 다음에 제15분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부터 그 이후가 또 하나의 중점이다.
앞 부분을 적문(迹門)이라 하고 뒷 부분을 본문이라고 구분한 것은 천태대사인데, 천태대 사는 법화경에 대한 주석과 사상적인 것을 탐구하여 법화문구. 법화현의. 마하지관이라는 책을 남겼다.
법화경의 전반의 중심 주제를 적문이라 하여 부처님께 자취를 보이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 신 것을 말씀한 부분과 뒷 부분의 중심 주제를 분문이라 하여 원래의 부처님에 관하여 말씀 하신 부분과를 명확하게 나눈 것은 오랜 전통이 되는데 이것은 천태대사 이전부터 일러온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 새로운 불교학의 입장에서 볼 때 분명히 두 부분으로 되어 있지만, 그 14분과 15분에서 구분하느니 보다 제9분 수학무학인기품과 제10분 법사품 사이에 선을 그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제9분까지는 성문을 성불시키기 위하여 말씀한 것이고 제10 사품부터 제22촉루품까지는 보살의 활동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22품 이하는 여러 보살들의 자비행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으므로 작품별로 독립된 장이 되어 있으므로 아마도 이 부분은 본래의 법화경과 좀 성질이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촉루품이란 부처님께서 설하신 교법을 제자들에게 이것을 널리 많은 사람에게 전하기 바란다고 홍법을 위탁하는 부분이므로 최후에 두어야 할 부분인데 이것이 법화경에는 가운데에 나온다.
이런 점으로 보아 법화경은 촉루품까지가 옛 모습이고 최후의 약왕보살본사품이하는 뛰어 난 덕을 지닌 보살들이 부처님 대신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을 말한 부분이 되어 있 으므로 본래의 일반된 입장에서는 좀 다른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3.법화경의 배경
법화경은 반야경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라고 일러 온다. 그러나 방대한 반야경 사상을 전 하는 말은 사뭇 적으므로 과연 반야경이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부처님 재세시에는 제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부처님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언젠 가는 열반경지에 도달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정진했었는데, 부처님이 열반하 신 뒤에 시간이 흘러가면서 차차 부처님의 위대하심과 자기 능력의 부족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서 부처님과 제자 사이에 넘기 어려운 절대적 차이가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수행하는 석문 제자들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번뇌가 다한 아라한 의 지위까지는 이를 수 있지만 그 위에 대자대비의 큰 활동을 발휘할 부처님이 될 수 없다 는 생각이 소승불교라는 불교도 사이에 믿어져 왔다.
이런 전통적 계통인 소승학 파에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는 큰 교단이 있었다. 이 교단 의 교학을 정돈한 것이 대비바사론인데 여기에는 교학적으로 석문수행에 든 자는 부처님이 되는 코스에로 전향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모든 사람을 구제하는 대승불교에 의해서 불교 를 이해하는 우리들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반야경에서는 이러한 석문의 생각들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유마경에서도 역시 그 렇다. 유마경에서는 기성교단의 전문 비구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고루한 생각으 로는 부처님께서 가르친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소승불교 승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보살은 대승의 주역자가 되는데 소승의 경우에는 보살은 부처님이 될 특별한 후보자로서 존재가 인정되어 있었다. 보살이란 원래는 부처님이 출가하여 오도하실 때까지를 이른 말인 데, 이 보살에서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은 깨달음의 지혜와 일체중생을 건지시는 자비가 혼 연일체가 되어 위대한 인격자가 되시고 제자들을 인도하셨다.
제자들은 부처님에 대한 무한의 신뢰를 바쳐서 수행에 힘썼던 것이다. 불교교단의 역사를 보면 당초의 출가자들은 한 곳에 정주하지 아니하고 여러 곳을 유행하면서 수행하고 전도하 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승원이 생기고 한곳에 정주하게 되니 거기서 전문적 학문 과 수행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이 고정해가니 저절로 민중과 떠난 전문가의 불교가 되어 갔다.
이런 가운데서 전통적 입장을 지키려는 그룹과 발전적 주장을 하는 그룹과의 사이에 대립 이 표면화하여 마침내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고 그것이 다시 20부파로 분열되었다.
이것이 부처님이 열반 후에 인도 불교의 상태였다. 이런 부파 교단은 본래의 부처님의 생 각과는 먼 곳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비판적 사상이 표면화한 것이다.
4. 법화경과 일승사상
부처님의 본래 정신은 일반 민중을 구제하는 것이고 그 정신을 민중 가운데 살려가는 것 이 이상이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에 대한 절대적 찬양이 생기게 되고 신앙이 두터워 갔던 것 이다.
이러한 사상에서 전문가에 의한 출가 불교를 소승이라고 비판하고 일반 민중을 지도하는 새로운 불교를 대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소승인 성문과 연각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이처럼 소승인을 제외해 버리는 것도 또한 본래의 부처님의 뜻과는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일어난다. 이런 생각을 대표한 것이 법화경이다. 성문 연각을 포함한 모두가 성불한다고 하는 것이 본래 불교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두가 성 불한다는 일승사상(一乘思想)이 나타나 2승, 3승이라는 구별을 넘어서 통일된 입장에서 깨달 음을 구해가자는 것이다.
법화경 서품에서 제9분 수학무학인기품까지는 성문이 등장하여 지금까지의 가르침은 과정 의 가르침이고 참된 가르침은 누구나 성불하는 일불승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성문제자들을 차례로 불러 이제까지의 성문수행에서 보살 수행을 함으로써 부처 가 된다고 보증을 하였다.
수기(授記)란 부처님이 미리 성불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부처님과 제자 사이에 절대적 신 뢰가 없으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은 성불의 근본이라고 생각되어온 지혜를 얻는 일 이 신앙의 확립이라는 형태로 바뀐 것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문 성불이라는 것이 법화경의 중심사상의 하나라고 말하게 되고 부처님 이 모든 사람을 성불시킨다는 자비심과 그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제자와의 마음의 교통 이 그 바탕에 있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다음에 부처님의 대자비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이 성불하는 가르침을 어떻게 사바 세계에 넓혀가느냐 하는 것이 하나의 안목으로 되어 있어 부처님의 사자로서 사바 세계에 그 가르침을 넓혀 가는 보살의 활약상을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다.
다시 나아가 견보탑품(見寶塔品)에는 부처님께서 성문이 성불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자 별안간 땅에서 거대한 탑이 솟아 오른 것을 말하고 있다. 그 탑 가운데 다보여래가 계셔서 석가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이라고 큰 목소리로 증거하신다.
다보여래는 과거 먼 옛날부터 좌선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영원한 부처님 법신의 표현이라 고 생각된다. 이 다보여래의 권을 따라 석가 부처님이 그 곁에 앉으시니 이것을 이불병좌 (二佛 坐)라 한다. 이것은 영원한 부처님과 현세에 인격적으로 완성하여 성불한 사람이 하 나가 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해석되고 있다.
즉 영원한 이법(理法)을 의미하는 법신과 우리들과 함께 살며 자기 완성을 한 석가모니불 이 된 사람이 일체가 됐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또한 석가불이 진리의 모습으로서 이 세계에 오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가르침은「견보탑품」에서 「종지용지품」,「여래수량품」 에로 이어져 설명되고 있다.
5. 법화경 바탕을 흐르는 것
법화경 가운데서 어느 점이 핵심이라고 할 것인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나, 신앙 적 입장에서 본다면 역시 여래수량품이 중심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은 먼 옛날에 이미 성불 하셨지만 중생을 위하여 거짓 이 세상에 몸을 나투시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주체적 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떠나 학문적 입장에서 보면 방편품을 중심으로 하는 성문 성불쪽이 법화경의 중심 이라고 보는 편이 유력하다. 그 방편품에는, 부처님이 이 세간에 나타나신 것은 사람들에게 불지혜를 알리고 불지혜로 인도하여 깨닫게 하고자 하는 일 때문이라고 역설하신 것처럼 법 화경 전체를 통하여 부처님의 자비가 흘러 내려오고 사람들에게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기 위 하여 80세에 입멸하신 뒤에도 부처님 보기를 원하며 일심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간절히 신 행한다면, 부처님은 항상 그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구원의 손을 펴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내가 멸도에 든 것을 보고 널리 사리를 공양하여 모두가 연모의 뜻을 품고 갈앙심을 내며 중생이 그와 같이 신복하여 질직하고 유연한 마음이 되어 일심으로 부처님을 보고자 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으면 그때에 내가 대중과 함께 영취산에 나타나리라.」말씀하 고 있는데, 여기에서 법화경은 부처님의 대자비 위에 성립된 신앙경전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싸늘한 우주의 진리가 아니라 위대한 부처님의 생명의 흐름이 영원한 과거 에서부터 현재로, 다시 미래로 흐르고 있고 그 가운데 우리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법화경의 많은 부분에 어떠한 고난이라도 무릅쓰고 부처님 진리에 이르도록 정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법화경을 널리 펴기 위하여는 모두를 희생하고 자기 몸마저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반복 설하고 있다.
이 점에서 혹자는 법화경이 광신을 설하는 기묘한 경전이라 하든가 또는 거기서 어떤 저 항감을 품는 사람도 있으나 당시의 인도에서 보면 만인의 성불과 평등을 말하는 법화경은 대단한 이단 사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큰 반발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은 법화경 뿐만 아니라 반야경에도 처음에는 마설 이라고 생각된 때도 있었고 또한 반야바라밀을 구하는 보살들이 신명을 버려 노력하는 것도 역설되어 있다. 신명을 아끼지 않고 진리를 구하며 가르침을 널리 펴는 것은 대승 경전 전 반에 통하는 보살의 이상인 것이다.
법화경의 근본은 부처님의 절대적인 자비심과 그것을 신뢰하고 신앙하는 사람들 사이의 너그러운 마음의 교통을 설하고 잇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한다.
신앙인 본연의 자세
자비와 인욕과 평등
법화경에 다음과 같은 법문이 있다.「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여래 멸후에 법화경을 설하고 자 할진데는 마땅히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법을 설 할지니라.」
〈묘법연화경 법사품〉
이 법문은 우리 대승 보살들의 불법을 펴 나아갈 때에 그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를 가르쳐 주신 귀한 법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는 신앙이 곧 전법인 것이므로 이 법문은 우리들에게 신앙인의 본연의 자세를 밝혀 주신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에 의지해 보면「여래의 방과 옷과 자리」는 각각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모든 중생을 대자비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여래의 방」에 들어가는 것이며, 인 욕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여래의 옷」을 입는 것이며, 평등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여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자비와 인욕과 평등」으로 우리 신앙의 굳건한 바탕을 이 루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 된다.
자비의 마음(慈悲心)
먼저 우리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자비란「발고여락」이라고 하였으니 곧 남의 괴로움을 없애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 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사는 것은 그 자체가 곧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보탬이 되도록 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상 생활은 그 모두가 남들과의 다툼 아닌 것이 없다. 생존경쟁의 현장이 곧 우리 인생인 것이다. 이러한 다툼의 세계를 살고 있으면서 남들의 행복에 보탬이 되도록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생존경쟁이란 말은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나의 적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 적들의 행복을 내가 도와 줄 수 있겠는가?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가 희생되어야 하고, 그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희생되어야 하는 냉엄한 원리가 적용될 뿐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어찌해서 부처 님께서는 우리 불자들에게 하라고 하셨을까?
우리는 여기에서 부처님의 높으신 뜻을 헤아려야 한다.
생존경쟁의 부정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을 생존경쟁의 싸움터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고 계 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인생을 생존경쟁이라고 보고 있는 것은 큰 잘못인 것이다. 생존경쟁 속에 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 수 없고 적에 의해 포위되어 있으니 두려움 말고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은 마음 편히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 편 한 세상이란 다툼없는 세계, 원수 없는 세계에서밖에 찾아질 수 없는 것이다. 불법은 우리에 게 마음의 평안을 보장해 준다.
불법 문중에서 우리는 공포심으로 부터의 해방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해방은 생 존경쟁의 부정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인 것이다. 인생을 생존경쟁이라고 믿고 지낼 때에 주 변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적으로 보였던 것은 실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말미암은 것 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제 생존경쟁을 부정하고 밝은 눈으로 인생과 우주를 보게 될 때 거기에는 피비린내나는 싸움터는 본래부터 그 자취 조차 없었던 것이고 모든 중생들은 한 생명을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형제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자비의 마음」이 안나오겠는가? 나와 남을 대립시켜서 보게 되니 남에게 이로운 일 하는 것이 곧 자기에게 해로운 일이라 믿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자기에게 해로운 일을 하고 싶지 않 은 것 역시 당연한 결론일 것이다.
이제 알고 보니 모든 사람이 나의 적이 아니라 나와 한 생명을 살고 있는 형제들이라 하 니 남을 위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하는 일임을 알게 되어 남들과 다투는 대신 모두에게 이익 을 주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불자의 신앙 생활은 자비의 마음을 가짐으로부터 시작되어지는 것이다.
인욕
남들과 대립하고 사는 삶은 동시에 남들과의 비교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우리 마 음 속에는「나 잘났다」하는 생각이 뿌리깊게 도사리게 되는 것이다. 나 잘났다 하는 생각 은 대접 받고 싶은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어지지를 않는다. 그리고 생각 한대로 대접받고 존경 받을 때 우리에게서는 중생심이 더욱 크게 자라는 것이다. 나 잘났다 는 마음, 중생심은 부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불자들은 어느 때나 부처 님을 모시고 부처님을 공경하고 부처님을 시봉하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하여서는 중생심을 버려야 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남들이 나에게 모욕을 주는 것은 그것이 나에 원망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 기회에 중생심 을 꺾어 버리게 되는 은혜로운 일인 것이다.
혹 어떤 기회에 보시를 하였다고 하자. 재물로 보시하기도 하고 법으로 보시하기도 할 터 이지만 그 보시는 내가 불자로서 부처님을 시봉하는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중생인 내가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중생이 중생을 대할 때에 는 생존경쟁의 적대 관계밖에 있을 수 없다. 적대 관계 속에서 적에게 베풀어 주었다 하면 그것은 한갖 낚시밥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주는 행위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 되기 위하영서는 그 행위를 하고 있 는 사람의 마음에서「중생심」이 없어야 한다. 그 중생심을 꺾어 없애기 위하여 나타난 것 이「모욕된 행위」이다.
대접을 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욕을 하며 나온다. 그래서 소위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이런 한 일은 불자로서는 아주 고마운 일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했을 때 은혜를 베풀고도 오히려 배신을 당하고 배은망덕의 갚음을 받았을 때 그것을 고마운 마음으 로 받아들여 중생심을 조복 받아야 한다.
평등한 마음(平等心)
이 세상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여래의 생명을 함께 나누어 살고 있는 까닭에 모두 부처 이룰 소질을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 어느 경우에도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나와 친하 게 지내는 사람이던, 원수로 지내는 사람이던, 차별없이「미래불」로 대해야 한다. 어느 누 구도 성불하지 못할 중생이 없는 것이며 현재의 친.불친은 다만 그러한 인연에 따라 그렇게 느껴지고 있는데 불과하다.
평등한 마음은 다만 사람들에게만 가질 것이 아니며 모든 동물들에게까지라도 차별의 마 음을 갖지 말도록 부처님께서는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모든 환경과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여래 법신 생명의 나투심이라 보면서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여 여 래의 무한공덕이 구김없이 드러나도록 정진해 가야 할 것이다.
김경만 원각회 회장
여래의 사도(使徒)
불교만큼 오묘한 법은 없다. 그래서인지「모르겠다」는 말과「어렵다」는 말이 계속 들려 온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정진을 게을리하는 탓이다. 특히 법을 이해하려는 믿음의 정진이 부족하다.
매일 정근을 하고 매주 법회에 나가 법문을 듣고 예불하는 신행인도 인구 증가에 비례하 여 차차 많아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읽을만한 책도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월간 주간 단행 본이 계속 출간된다. 유형적인 전법수단이 갖춰져가고 있다. 그러나 전법이라고 하지만, 구 체적으로 나의 모습을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어찌 포교 전법을 할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 고 있는 불자가 적이 많은 편이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부처님도 오랜 수행 기간을 지나 보살행을 거친 후에 깨달음을 이룩하셨기 때문에 그와 똑같이 우리도 깨달음을 얻은 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은연 중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자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사람이면 생각을 다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자비란 가난한 사람에게 없는 사람에게 얼마간, 혹은 금전지원을 하는 일이라고 생각 하기도 한다. 누구나 많든 적든 물질적 자비를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할 수 있다. 인간이 본 래 갖춰진 깊은 심연에서 나오는 본연의 마음이 행하도록 하고 있다. 끝없이 잠재한 우리 인간의 연민의 정, 그 마음이 이어져 왔고 또 이어져 갈 것이다.
이젠 옛말이 되었지만, 우리가 성장할 적에는 식사 때 반드시 집대문 앞에는 한두 사람 걸인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럴 때 베풀었던 것은 우리 모두 인간 사회가 과거에 가졌 던 경험이다. 그러나 그 베품이 반드시 부유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난하지만 나누어 주 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 이 시대에 와서는 상대적인 빈곤 때문에 문제가 파생한다. 스스로 우리가 만족함을 알지 않는 한 끝없이 계속될 문제이다. 대학가에서 이 문제가 학생들 사이에 제기될 때면 늘 생각하는 것은 마음의 빈곤이다. 마음의 빈곤은 물질적 빈곤보다 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것은 법에 대한 빈곤과도 통하기 때문이다. 법에 대한 빈곤은 사회를 모두 앓게 만든다. 이 앓고 있는 사회를 구제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자비이고 보살행이다. 이 보살행을 강조하 는 경전 중에「법화경」이 있다. 「법화경 법사품」에는 모든 중생을 가엷게 여겨 인간으로 태어난 보살을 이야기하고 있다.
「경에 있는 말씀과 설법을 남김없이 마음에 새겨가지고, 읽고, 외우고, 이해하고, 남을 위 해 설명해 주고, 쓰고 하면 이것이 여래의 보살행」
이런 사람을 또한 여래의 사도(如來使)라고 한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새 삼스럽지는 않지만 불교에 처음 입문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인으로 생활하는 사람 들은 앞서도 말한 바 대로 나의 완성을 앞세워 이웃에 법을 펴는 일에 열중하는 숫자는 많 지 않은 것 같다. 웬일인지 10여 년 동안 학생 활동을 한 신자도 주변에 법을 펴면서 신앙 생활을 하기보다, 계속 설법을 듣는데 치중하고 있다. 물론 청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포교사 제도가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제도적인 자격증을 준다는 것은 현대 사회의 산 물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다. 그러나 사찰 단위의 신도들은 비록 자격증이 없더라 도 스스로 포교. 전법, 즉 남을 위해 법을 말해주는 사명감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용기가 없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법화경에서는 스스로 사명감에 차 있는 전법자를 여래의 사도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세상 에 생을 받고 태어난 목적을 암시해 준다. 우리는 모름지기 삶의 의미, 목적을 공동의 업으 로 가진 이웃과 가족을 위해 실현해 가야하리 라고 믿는다. 끝없는 불법 대해로 그들을 함 께 이끌어야 하는 여래의 사도임을 자각해 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법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가지는 자비와 유화 인욕과 공성을 말한다.
리영자 동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