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수행의 방법에 관한 토론과 체험
글 권선아 happybul@yahoo.com
고통이 소멸되고 번뇌가 끊어지는 경지를 열망하며 많은 이들이 수행을 한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라는 질문. 간화선과 위빠사나, 염불선을 놓고 토론을 벌인 그 뜨거운 현장을 찾아가 본다.
지난 7월 13, 14일. 충남 예산 덕숭총림 수덕사에서는 불교학연구회 주관으로 여름 워크샵이 열렸다. 주제는 「명상과 불교 수행」. 간화선과 위빠사나, 염불선의 이론과 실천을 두루 살펴보는 자리로, 2백여 명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수행자에게는 수행 방법이 그 자체로 매우 첨예하고 절실한 것임을 반증했다.
워크샵 첫날에는 불교 수행 전통을 고찰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간화선과 위빠사나, 그리고 염불선 각각에 대한 주제 발표와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첫 순서는 동국대 김호귀 교수의 간화선에 대한 발표였다.
간화선, 화두를 묻고 풀다 결국 하나되는
선종宣宗이란 참선參禪을 주요 수행 방법으로 삼아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 불교의 종파다. 참선 중에서도 좌선坐禪을 으뜸으로 삼아 일종의 공안公案, 즉 화두를 참구하는 것을 간화선이라 한다.
간화선은 산란하고 혼란한 마음을 제거하고 수행에 몰두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초심자가 좌선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망상으로 인한 산란한 마음(散亂心)과 혼침을 쉽게 다스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화두를 들고 있는 동안에는 화두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망상을 제거할 수 있고 동시에 혼침에도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간화看話란 말 그대로 화두를 본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화두를 들어 통째로 간파, 추호의 의심 없이 그 전체를 체험하여 자신이 곧 화두 자체가 되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간화선 수행에서는 대신근大信根, 대의문大疑問, 대분지大憤志가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졌는데, 대신근은 화두 자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화두를 제시해 준 스승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다. 이는 곧 화두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힘이 자기 안에 분명히 있다는 것을 철저히 믿는 것과 같다.
반면 대의문은 대신근의 바탕 위에서 화두 자체에 대해 강렬한 의문을 지니는 것이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절대절명의 과업으로 화두를 들고는, 「내 머리를 내줄 것인가 아니면 화두를 해결할 것인가」라는 자세를 견지하는 치열한 행위이다. 여기에서 의문은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의문으로, 그 누가 대신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오로지 자신의 철저한 체험을 통해 명징하게 아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의문이 더 이상 의문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해답을 확신하게 되는 순간까지 수행자는 오매불망 화두에 매달리게 되며, 이를 통해 화두가 자신에게 매달리는 경험을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화두가 하나되는 「화두일념話頭一念」의 상태가 되는데,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친다는 말은 바로 여기서 증명된다.
한편 대분지大憤志는 화두를 줄기차게 진행시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의문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는 오래 계속할 수 없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맹세 내지 오기가 필요하다. 달마의 법을 이어 중국 선조의 제2조가 된 太祖慧可는 자신의 팔을 잘라 달마 앞에 내놓으면서 제자 되기를 간청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마침내 달마는 칼날 위에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대자비로 감로의 법문을 열어 그의 입문을 허락했다. 이는 선수행에서 절대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결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발문) 화두를 들고 좌선함으로써 깨달음에 다가가는 간화선. 오매불망 화두에 매달리다 보면 어느새 화두가 자신에게 매달리는 경험을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화두가 일치하는 「화두일념」의 상태가 된다.
마음챙김으로 궁극의 지혜를 얻는 위빠사나
간화선 발제가 끝나자 고려대장경연구소 김재성 법사가 염처경念處經을 위시로 한 초기경전과 청정도론淸淨道論, 그리고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법을 중심으로 위빠사나의 이론과 수행방법 등을 개략적으로 소개했다.
본론에 앞서 김재성 법사는 명상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즉 영어의 meditation과 불교의 선seon은 엄밀하게 다른 것인 만큼 번역의 문제가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소승불교」라는 명칭 사용의 오류도 아울러 지적했다. 그것은 불교 역사적인 지식의 결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소승小乘이라는 것은 대승大乘불교 스스로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름일 뿐이므로 정확하게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로 수정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위빠사나는 한마디로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관점에서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법구경法句經(Dhammapada)에서도 설하고 있듯이,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은 영원하지 않고(무상),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은 괴로움(고)이며, 따라서 영원한 자아는 없다(무아)는 지혜로써 관찰하면 바로 청정(열반)에 이를 수 있음을, 위빠사나는 가르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의 기반인 동시에 위빠사나 수행 그 자체를 의미하는 「바른 마음챙김(正念)」이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현상(복부의 움직임, 가려움, 통증, 저림, 뻣뻣함 등)을 있는 그대로, 단순한 주의 집중(bare attention)을 통해 분명하게 파악하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말하자면 깨어 있는 마음으로 심신의 모든 현상을, 좋거나 나쁘다는 가치 판단 없이, 경험되는 그대로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마음챙김은 파악된 현상에 대한 분명한 앎(正知)과 항상 짝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마음챙김과 분명한 앎이 예리해지고 정확해지면 마음집중(三昧) 이루어지고, 마음집중 상태에서 다시 현상들에 대한 올바른 앎(지혜)이 생겨난다. 정리하면, 마음챙김(念, 싸띠sati)은 마음집중(禪定, 싸마타samatha)과 지혜(觀, 위빠사나vipassana)의 공통된 기반이고, 마음집중은 번뇌를 일시적으로 억누르는 데 반해 지혜는 번뇌를 잘라 내버린다.
따라서 마음집중과 지혜의 힘이 강해질수록 마음에서는 번뇌, 갈등, 불안, 우울 등의 부정적인 요소들이 제거되기 시작하고 수행에 더욱 정진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며, 수행 자체에서 행복과 마음의 평온을 얻게 된다. 이 때 바로 「깨달음의 7가지 요인(七覺支)」을 경험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행복한 순간을 체험하게 되더라도 그러한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최종 목표, 즉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인 열반을 성취할 때까지 마음챙김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위빠사나 수행에서 반드시 병행해야 하는 것이 자관慈觀인데, 이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慈란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기원의 마음으로, 초기 불교에서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염처수행念處修行을, 남을 지키는 방법으로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발문) 깨어 있는 마음으로 심신의 모든 현상을 가치 판단 없이, 경험되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모든 현상에 대한 분명한 앎이 생기고, 앎이 정확해지면 마음집중이 이루어지며, 그 상태에서 다시 올바른 지혜가 생겨난다.
염불선, 바라밀에 나를 바치다
이어서 김제 귀신사 용타 스님의 염불선念佛禪에 대한 발표가 계속되었다. 사실 염불선은 불교 경전에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문화적으로 정착된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염불을 선禪(마음공부)의 내용으로 삼는 경험은 이미 확고한 것이기 때문에 염불이 거의 모든 불교인의 의식을 관통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면 염불선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1933년경, 해탈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방법론의 하나로 금타 화상에 의해 『보리방편문』이 나왔고, 이어서 그의 법제자 청화 선사가 『보리방편문』 행하는 법을 염불선이라 명명하면서 그 가르침이 점차 널리 펴졌다고 한다.
염불선은 참선을 염불로 하는 수행법으로, 염念이란 어떤 대상을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이며 불佛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부처임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염불이란 자기 스스로 택한 부처의 개념을 마음에 새겨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청화대선사에 따르면 넓은 범주에서는 심일경성心一境性(마음집중)을 일구어 낼 수 있는 염불이면 무엇이든 염불선에 포함되지만, 좁은 범주에서는 실상實相(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는 청정심淸淨心)을 여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진정한 의미의 염불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어찌됐건 실상의 체험을 가로막는 핵심은 바로 자아관념自我觀念이므로, 염불선, 즉 진정한 실상염불實相念佛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무아無我를 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자아관념에 의해 남이라는 분별이 생기고 무수히 많은 고뇌와 다툼이 일어나며, 따라서 자비와 해탈, 세상의 평화는 자아의 관념을 극복하고 무아의 이치를 깨달을 때 가능함을 아는 것과 통한다. 결국 염불선이란 「나」라는 관념을 지우면서 현존하는 공空(텅빔)을 관조하고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염불선을 알려면 먼저 보리방편문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리방편문에 따르면, 청정법신비로자나불, 원만보신로사나불,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 이 세 부처님을 통합한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삼신을 일불一佛, 혹은 일심법계一心法界로 통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주를 공空 성性 상相 일여一如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우주는 공空이자 성性이자 또한 상相이되 그 세 가지가 따로 떨어진 실체가 아닌 하나라는 패러다임을 통해서만이 탐진치 삼독을 소멸시키고 해탈과 동체대비 인격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보리방편문』이며, 그 구체적인 수행법이 바로 염불선이라는 얘기다. 또한 염불선의 실천적인 핵심은 주요 바라밀, 즉 핵심 바라밀을 확고히 정해놓고 거기에 자신을 「온통 다 바치는」 것으로, 자신의 주 바라밀을 부지런히 행하지 않으면 몇 겁을 통해 두터워진 탐진치가 결코 녹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발문) 염불선이란 「나」라는 관념을 지우면서 현존하는 공空을 관조하고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이다. 따라서 염불선이 실상염불實相念佛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무아無我를 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어디로 가기 위한 수행법인가
각 수행 방법에 대한 이론을 살펴보는 1부가 끝나고, 직접 수행을 해보는 2부가 시작되었다.
수덕사 선원 무애 스님의 지도로 이루어진 간화선 실수는 선 수행이 지닌 살아 꿈틀거리는 힘, 언어를 뛰어넘는 절대 자유의 한 경지를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죽비 소리와 함께 시작된 참선, 미처 화두를 챙겨 들기도 전에 입승은 외마디 고함으로 좌중을 한바탕 놀라게 한다. 그뿐인가. 「끌어내리라!」는 청천벽력 같은 호령이 연거푸 이어진다. 대체 무엇을 끌어내리라는 말인가…, 곱씹어 묻고 또 묻는데 어느덧 방선放禪이었다.
이어서 이 땅에 남방 상좌불교의 전통을 쉼 없이 묵묵히 전해온 서울 보리수 선원 붓다락기카 스님의 지도로 위빠사나 수행이 이어졌다. 좌선을 할 때 호흡은 자연스럽게 한다. 단전호흡 등의 특별한 호흡법은 위빠사나 수행과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의도적인 호흡은 오히려 수행에 방해가 된다. 또한 좌선을 할 때는 자연스러운 들숨과 날숨에 동반되는 복부(배)의 움직임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들숨에 따라 복부가 불러오면 「일어남」 하고 마음속으로 알아차리고, 날숨에 따라 복부가 꺼지면 「사라짐」 하고 마음속으로 알아차린다.
나아가 그 과정에서 생기는 복부의 감각들을 주의 깊게 살피는 한편, 어떤 생각이나 몸의 느낌들이 생겨나면 그 순간에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다. 좌선을 할 때 배의 움직임보다 행선行禪을 할 때 발의 움직임이 더욱 분명하고 강하고 두드러지기 때문에, 행선은 관찰의 좋은 대상이 된다. 행선을 할 때는 걸으려 하는 의도에서 시작해, 모든 주요 동작에 마음을 챙긴다. 「왼발」 「오른발」 하며 각 걸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물론, 일단 다리의 근육이 풀리면 속도를 늦추면서 다리 동작의 각 단계에 따라 「들음」 「나아감」 「놓음」의 3단계 동작으로 나누어 알아차린다. 이 때도 역시 걷는 동작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제반 감각들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어느 순간에 어떤 감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가를 알아차려야 한다.
산문을 나서며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을 두드리는 문이다. 그러니 수행의 목표가 단지 깨달음의 완성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아의 감옥에 갇혀 눈을 뜨고도 가는 길을 모르는 우리가 만약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문제를 지금 여기, 나와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멈추어 성찰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잣거리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수행이 아닐까.
산문을 나서며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수행자여, 오늘 길을 물었는가? 스스로 가야할 그 길을 아는가? 수행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이미 수행자라는 생각을 한다. 그 자체로 무르익은 명상이며 선이고 기쁨이라고.
★ 박스기사 ★
진정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각 수행법에 관한 핵심 질문과 대답
화두 가운데 활구活句와 사구死句란 어떻게 다른가?
(김호귀): 수행과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다 활구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법 자체의 문제가 아닌 수행 당사자가 어떻게 운용하는가의 문제라고 본다.
간화선에서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김호귀): 깨달음, 즉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성을 봐서 부처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깨달음의 내용일 수 있지 않을까? 선종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자내증自內證의 경지로 간주하여 감히 언급하는 것을 회피해 온 것이 사실이다. 곧 깨달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언설불급言說不及의 특징을 중시했고, 또 깨달음을 논하려면 그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깨달음 자체에 대한 논증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위빠사나가 올바른 길에 이르기 위한, 혹은 열반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은 그것만이 깨달음의 방법이라는 뜻인가?
(김재성): 지혜(분명한 앎)의 힘에 의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면, 역으로 사띠빠타나(마음챙김) 없이는 깨달음을 얻는 게 가능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북방불교의 방법으로 사띠, 즉 마음챙김이 가능하다면 그것 역시 깨달음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계戒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김재성): 5계와 8계가 있는데 실제 위빠사나를 수행할 때 계가 없다면 수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좋은 행위를 하기 위한 계를 지키려면 신심과 정진이 필요하고, 나쁜 행위를 막기 위한 계를 지키려면 신심과 마음챙김이 필요하다. 계는 수행의 토대이면서 수행과 함께 더불어 가는 것이다.
선禪 수행에서는 계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김호귀): 선 수행에서 계를 무시한다는 견해는 그야말로 단견이다. 몸과 마음의 수행을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선 수행이다. 선 수행에서는 입격入格과 출격出格이 용의주도하게 이루어진다. 참선을 제대로 하는 것은 곧 계를 제대로 지키는 것과 통한다.
염불선에서 계는 어떻게 해석되는가?
(용타스님): 염불선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수행의 방법들에 대해서 두루 수용하고 존중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주종의 관계, 즉 주 바라밀(핵심 바라밀)과 조 바라밀이라는 실천적 방법론이 등장하는 것뿐이다. 주 바라밀이 율律이라면 율을 잘 지키는 수행을 통해서도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염불수행인가, 아니면 염불선인가? 일본 선사 스즈끼에 의해 최초로 명명된 선은 불교의 독자적인 사상과 수행의 방법이 통합되어 있는 개념이므로 염불수행을 선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은가? 만약 염불선이 타당한 개념이라면 무슨 수행을 주로 하느냐에 따라 참회선, 주력선, 절선이라는 명명이 다 가능하지 않겠는가?
(용타스님): 일심一心, 일불법계一佛法界를 진공묘유眞空妙有, 혹은 공성상일여空性相一如로 관조하면서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진공묘유의 이름을 아미타불로 정했다면)이 바로 염불선이다. 그냥 염불수행이라고 하면 걸림이 없을 것이지만, 청화 큰스님께서는 보리방편문의 행법을 실상염불의 구체적인 대안이라 규정하시고 염불의 내용이 실상實相일 때는 여타 방편염불과는 구별되며 즉심즉불卽心卽佛 곧 선불교의 사상과 질적으로 일치하므로 염불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셨다. 모든 불보살은 중생의 귀의처가 될 수 있는 만큼 그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稱名念佛도 마음이 몰입되는 경지에 이르면 선이라고 본다.
영성과 영성의 계발에 대한 관심은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성이 더 이상 심리학의 수준에서 논의되어서는 안 되며 보다 적극적으로 영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테면 영성과 수행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나라 미얀마의 국민들은 독재 정권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러한 당대의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김재성): 개인의 수신과 사회의 행복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문제인 것 같다. 사실 근본불교에서는 수신을 더 강조하고 있다. 팔정도에서도 사회화, 혹은 그 과정을 뒷받침할 만한 덕목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다만 이런 말을 할 수는 있겠다. 석가족이 전쟁으로 멸망할 때 붓다는 전쟁을 막으려고 세 번 깊은 선정에 들었으나 결국은 업을 막을 수는 없음을 깨달았다. 미얀마는 분명 독재 국가지만 불교가 있기 때문에 그 땅에서 사람들이 숨을 쉬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느낌이었다.
또한 영성이 가난과 부유의 차원을 떠난 문제인 것처럼, 역시 끝내 남는 문제에 천착하는 것이 바로 불교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한 민족이나 국가의 문제라기보다는 훨씬 총체적인 인류 삶의 문제고 그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용타스님): 수도의 힘, 영성의 힘은 퍼져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불교는 그 나름대로 사회화와 내면화의 조화라는 과제를 잘 해 나갔다고 본다. 지금은 수도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회향되어야 하는지를 새롭게 고민할 시기라고 생각한다.